어떤 여름
제로님께 드리는 청게 재관솔음 단문
※ 지대한 캐붕 주의
정수리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불시에 휙 들어올리면, 앞에 앉은 '그'는 어김 없이 필기노트를 내려다 보고 있다. 참 빠르기도 하지. 30분이 넘도록 어떤 글씨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페이지는 눈감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살짝 붉어진 채 무섭도록 굳은 얼굴은 영 무시하기가 힘들다. 나는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음을 가만히 듣다가 불쑥 입을 뗐다.
“선배.”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홍조를 띤 채다. 지금 자기 얼굴이 어떤지 선배는 알까. 큼큼거리며 목을 다듬는 걸 보니 곧 왜 불렀냐고 용건을 물어올 차례다. 입술이 열리기 전, 나는 그가 차마 꺼내지 못 하고 망설이는 중인 본심을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
“키스할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배의 손에서 샤프가 툭 떨어졌다. 아까보다 얼굴빛이 배는 더 달아올라 입만 뻐끔뻐끔 움직인다.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식비식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먼저 할까ㅇ,”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웃느라 잠시 고개를 숙인 사이, 선배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내 옆에 서있었다. 와, 선도부 짬빠 보소. 쓰잘데기 없는 감탄은 양뺨을 감싸오는 커다란 손에 의해 멈추었다. 낯빛은 진정됐으나 이번엔 단단한 손 너머로 얕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침내 선배가 목소리를 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그 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낮게 가라앉아있어서…
“…실례.”
오싹함을 느낌과 동시에 입술에 따뜻하고 말랑한 감각이 느껴졌다. 꾹 누르고만 있던 선배의 입술은 잠시 떼졌다가 그 사이에 숨어있던 곧은 이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왔다. 깃털처럼 느껴지는 감각에 호응하듯 입술을 벌려주었다. 뜨거운 혀가 조심스레 혀 끝에 닿고, 이내 슬슬 문질러지기 시작한다. 나는 팔을 한껏 뻗어 선배의 목 뒤로 둘렀다. 키 차이 때문에 불편할 텐데도 곧바로 알맞은 위치까지 허리를 굽혀주는 배려가 기껍다. 서로의 혀가 얽히며 나는 질척한 소리가 교실 안을 맴돌았다. 열이 오르는데도 하나도 덥지 않았다.
생에 처음으로 맞는 짜릿함에 더위도 잊어버린, 여름이었다.
*
처음부터 선배, 류재관과 이런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약 세 달 전 선도부장의 괴담 동아리 급습 사건(암막 커튼을 모두 닫은 채 과학실 냉동고에서 꺼내온 드라이 아이스와 붉을 밝힌 신주 촛대로 음산한 배경을 만든 뒤 한 명씩 괴담을 주고 받는 중이던 동아리실에 그가 들이닥쳤고, 괴담 동아리 선배 두 명은 갑자기 들이닥친 빛에 짜증을 내기 바빴지만 나는 갑자기 훅 꺼진 촛불로 인해 속으로 비명을 질러댔으며, 동아리실의 형광등을 단번에 킨 채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밀폐된 공간의 위험성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던 그 선도부 선배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원래도 날카로운 표정이던 선도부장의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진 탓에 입에서 불을 뿜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지금 애꿎은 후배 하나를 억지로 끌어들인 거냐’며 괴담부 선배들을 향해 화를 내고는 나를 끌고나와 주었던) 이후 서서히 교류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런 관계가 된 것 뿐이지.
사실 손목을 붙잡혀 쨍한 햇빛이 내려쬐는 복도로 이끌려나왔을 때 좀 두근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음… 정정한다. 사실 엄청 두근거렸다. 하지만 먼저 반한 사람은 내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손은 내가 먼저 잡았지만 학교 뒤편에서 사자후로 고백을 한 것도, 입술에 다급하게 유치원생 같은 뽀뽀를 날린 것도 선배 쪽이니까. 선배가 부끄러워하는 티를 너무 내서 직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곧 100일이니까 그 기념으로 언제 반했냐고 물어봐야지. 벌써부터 토마토가 사촌하자고 할 낯빛으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자포자기한 듯 사실을 토로할 선배가 안 봐도 보인다.
왜 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 중이냐 하면, 현재 선배가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채 내 얼굴을 힐끔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귀게 된지 그렇게나 시일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한결 같은 선배가 참,
“여기 밖인 거 아시죠?”
귀엽기 그지 없다. 190이 넘는 거구의 남성에게 쓰기에 적합한 단어는 아니지만, 고작 내 발언 하나에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귀엽다고 하지 않을…까?
“…내,가 뭘.”
먹다 만 하드를 손에 든 채 뻣뻣하게 변명하는 모습까지 깜찍해보이면 답이 없는 거겠지만. 나는 이번에도 선배가 꺼내지 못 하고 망설이는 중인 본심을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
“입술에는 안 돼요.”
옆에서 선배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참을 것인지, 본능을 따를 것인지 갈등하고 있는 거겠지. 고뇌는 길지 않았다. 팔뚝을 붙잡고 마주보게 돌려세우는 선배의 움직임에 기꺼이 따라준다. 선배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이마에 그보다 한결 차가운 입술이 닿았을 때, 나는 참지 않고 씩 웃어주었다. 인터넷의 바다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읽었던 이미지 짤이 떠올랐다. 15센치는 이마에 입맞추기 좋은 키 차이라고 했던가…? 한결 편해보이는 선배의 모습을 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배경은 방과 후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굣길, 우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엔 아무도 없다. 후끈한 기운이 느껴지는 선배의 넓은 등판을 꼭 끌어안으며 다시금 생각했다.
사랑스러운 감각에 더위도 잊어버린, 여름이라고.
ㅡ
뱀발: 류재관과 김솔음이 괴현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계관에서 재관국도 백주사 소속도 아닌 채로 뇌가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에 만나 사랑에 빠졌다면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 하에 탄생한 썰입니다. 네? 그래도 존아 캐붕이라고요?? 참나.. 견디세요(견뎌주세요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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