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

다정 옛글

아침부터 내리던 눈이 점점 기세를 더하기 시작했다. 시린 창밖 풍경을 보며 다은은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허브향이 느껴지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분명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한지… 눈송이도 버티지 못할 차디찬 북풍이 다은의 마음속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은은 어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정록이는 잘생기고, 키도 크고, 성격도 좋고, 다정하고――민다은 한정이지만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 능력도 있으니 충분히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예쁜 여성과 같이 있는 권정록이라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다은은 작게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었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10년 전에 멋대로 찼으면서 이제 와서 질투하는 꼴이라니, 추해도 너무 추해. 자신의 한심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다은을 꺼내 준 건 카톡 알림음이었다.

이제 일이 끝났으니 다은의 집으로 향한다는 정록의 연락이었다. 어제 그렇게 마주치고 그들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정록이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연락했고 다은도 언제까지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니,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러자고 답했다. 그렇게 오늘 정록이 퇴근하고 다은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늘 듣던 카톡 알림음이, 상큼한 카톡 소리가 왜 오늘따라 사형선고처럼 들리는지. 다은은 정록과의 만남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듯 꾸물꾸물 느릿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스마트 워치를 보니 벌써 시간이 저녁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인터폰이 울리고 단정한 양복 위에 코트를 걸친 정록이 카메라를 통해 보였다.

“많이 기다렸지. 저녁은 먹었어?”

“별로 안 기다렸어. 일하느라 수고 많았어. 저녁은 배가 안 고파서 생략하려고.”

양손을 무겁게 온 정록이 짐을 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배가 안 고파?”

“오늘 크게 한 일도 없었고 중간중간 귤도 먹고 그래서 그런가……. 너야말로 뭘 이렇게 많이 챙겨 왔어. 너 냉장고에 너 먹을 건 있어?”

“다은이 네가 식사 잘 안 챙기는 거 다 아는데 내가 챙겨줘야지. 나야 또 요리하면 돼.”

정록이 가져온 반찬통만 8개였다. 다은과 연애했던 4년간의 습관이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네가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다은의 가슴 깊은 곳이 저릿했다. 사귀기 전 친구 사이였던 때와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정록은 깨끗이 다 잊은 걸까 난 아닌데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다은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가 있고 10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한 결과다. 오히려 원망하는 빛 하나 없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여전히 친구로 여겨주어 다행이었다. 다은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부엌으로 이동했다.

“따뜻한 차? 아니면 달달한 커피?”

“차로 부탁해.”

녹차를 타고 귤을 조금 챙겨 정록에게 건넸다. 드디어 마주 앉은 둘이었다. 잠시 긴장이 도는 침묵이 돌았고 정록이 침묵을 깼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일만 주야장천 했어. 넌?”

“나도. 귀국은 언제 한 거야?”

“그저께에 왔어.”

“이제 계속 한국에 있는 거야?”

“응, 그러려고.”

“…….”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정록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결국 속으로 삼켰다. 다은은 그대로 복잡한 심경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시간도 늦었고 이만 가볼게. 귀찮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내가 챙겨준 반찬이라도 먹어.”

“알겠어. 고마워. 이렇게 안 챙겨줘도 되는데……. 귤이라도 조금 가져갈래?”

정록에게 귤을 양손 가득 쥐어서 보냈다. 정록이 간 후 다은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어색함 가득한 대화였지만 여전히 자상한 그의 모습에 양심도 없는지 심장이 떨렸다. 꿈을 좇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며 이별 또한 결심한 그였지만 단 한순간도 그를 잊은 적이 없는 그였기에 뒤늦은 후회만 막심했다. 역시 돌아오지 말 걸 그랬어. 한숨 섞인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야심한 시각. 정록은 서재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한지만 벌써 2시간. 그의 머리는 엉켜진 실타래와 같이 복잡했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긴 짝사랑 끝에 겨우 사귄 첫사랑 민다은, 그와 헤어지고 10년. 여전히 아름다운 그는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유학을 결심한 그가 이별을 고했을 때 마음 같아서는 매달려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꿈을 좇는 그를 차마 막을 수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졌다. 그 이후로 그는 연락 한번 없었고 그는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일을 선택했다. 그렇게 로펌의 에이스가 되었고 여전히 지독한 짝사랑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그저 일만 하는 그였지만, 한 번도 그를 잊으려는 시도도, 마음의 상처를 돌보려는 시도도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할 줄 몰랐다.

사실 그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은이 그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어색한 표정과 딱히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대답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물러서야 했지만,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삶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차디찬 심해와 같음을 알기에 불나방처럼 그저 다은을 향해 직진하는 법밖에는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갈아입은 옷만 4벌째였다. 여자 친구도 있는――오해다――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꾸며서 뭘 어떡하려고 라는 생각에 침울해진 다은이지만 이내 권정록 때문이 아닌 회의에 적어도 사람 몰골로 참가하기 위해 꾸미는 거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5번째 옷을 골랐다.

그 후로도 35분가량의 시간이 더 흘렀고 옷장의 옷을 다 헤집어 놓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니 회의 45분 전에 울리도록 설정해둔 알림이 떠 있었다. 이제는 나가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기에 급하게 화장품이 든 클러치와 아이패드, 렌즈 통과 안경 통을 챙겨 가방에 욱여넣었다. 지하철 도착 시각에 맞게 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꿉꿉한 지하 특유의 냄새와 다른 방향 지하철이 지나갈 때 몰아치는 서늘한 바람이 그를 맞이했다. 평소라면 루즈한 편한 복장을 하고 따뜻한 롱패딩까지 단단히 입어 추위에 굴복하지 않았을 다은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슬림핏의 폴라티와 무릎 조금 위까지 오는 짧은 치마에 코트 차림. 그나마 추위를 막아주는 것이라고는 기모 스타킹과 목도리 정도였다. 이러다 정록이를 만나기도 전에 얼어 죽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저 지하철이 얼른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추운 날씨를 뚫고 회의에 참여한 다은은 정록이와의 약속까지 시간이 남은 김에 같은 건물에 있는 지인의 녹음실을 들리기로 했다. 회의실에서는 나가야 하고 밖은 춥고 주변에 카페도 없기에 따뜻한 녹음실에서 시간을 보내려는 속셈이었다. 그의 지인 정훈은 다은이 아직 프로듀싱 경험이 적어 미숙할 때 다은을 보조로 두고 여러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유학 선배로서 생활에 있어 여러 도움도 주었고 외로운 해외 생활에서 서로 의지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친해진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똑똑. 노크하고 잠시 있으니 문이 벌컥 열렸다. 둘은 생이별한 가족이 재회한 것 마냥 반가워하며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다은의 복장을 보고 놀란 정훈이 다은을 얼른 따뜻한 녹음실 안으로 들였고 담요를 건넸다. 그리고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주며 물었다.

“웬일이야. 이렇게 꾸민 모습 8년 동안 본 적이 없는데.”

“그냥. 오늘 기분이 꾸미고 싶은 기분이었어.”

“흠… 클렌징도 귀찮아하는 네가, 렌즈까지 끼고 화장도 했는데? 너 성실한 기분인 적 인생에 거의 없잖아.”

그렇다. 정록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렌즈가 아닌 안경에 그냥 편한, 따뜻한 옷을 입고 뭉그적거렸을 것이 틀림없다. 다은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삐죽였다. 그렇게 실없는 대화와 장난, 안부 인사가 오고 가는 중에 정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다리던 전화에 다은은 후다닥 가방을 열어 스마트폰을 꺼내 받았다.

“다은아 나 지금 건물 밑에 도착했어.”

“그래. 금방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응, 천천히 와.”

정록을 만날 생각에 신이 나 다은의 볼이 조금 상기된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 보던 정훈이 다은이 전화를 끊기 전에 일부러 말을 걸었다.

“이제 가려고?”

“어, 오빠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또 올게!”

정훈에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고 서둘러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정훈이 목도리를 챙겨 코트를 입은 다은에게 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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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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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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