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라재현] 오늘의 크리스마스


미안. 야근 때문에 약속 취소해야 할 듯. 집에서 봐.
토독토독, 키패드를 치는 손가락이 이리 무거웠던 적이 있을까. 재현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엄지를 들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내려가는 무게에 비해 전송 버튼은 가볍고 신속하다. 알겠다는 답변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물고 있던 담배를 깊게 들이키고 내뿜는다. 성에 같은 담배 연기가 허공에 머물다 이내 완전히 흩어져 없어질때 쯤 재현은 피던 담배를 끄고 몸을 돌렸다.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이브다. 속에서 끓는 욕지기를 애써 삼켜냈다. 세달 전에야 예약을 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레스토랑에도 예약했고, 큰맘먹고 5성급 호텔도 예약했다. 맛있는 저녁에 와인을 곁들이고 카페도 가고, 영화도 보다가 마지막엔 멋진 호텔에서 하루를 마무리 할 완벽한 계획이 그놈의 ‘오류’ 때문에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시스템 오류라는 것은 어째서 이런 중요한 순간이 올 때마다 재앙처럼 밀려오는 걸까.
찬바람이라도 맞으면 괜찮아질까 싶어 옥상에 올라가 몇 통의 전화를 걸고 끊기를 반복해서야 모든 예약을 취소할 수 있었다. 지친다. 들어가서는 또 업무와 씨름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선배, 오셨어요?”
“어, 그래. 좀 알아낸 건 있고?”
그녀의 질문에 도리질 치는 신입의 표정이 좋지 않다. 입사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재현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신입의 어깨를 두드린 후 자리에 앉았다. 그후로 키보드 소리만 들린지 한참이었다. 검은 배경 위에 띄워진 하얀 글씨들. 눈 앞에 놓인 여러대의 모니터를 두고 눈이 침침해져 올 때면 의자를 돌려 모니터를 등지고 제 콧잔등을 지그시 눌렀다.
재현은 진한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토끼같은 남편을 생각했다. 부부로서 보내는 첫번째 크리스마스였기에 특별해질 수 있도록 신경썼고 또 기대했다. 그건 남편인 해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그를 생각한다. 속상한 얼굴로 집에 혼자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젠장. 내가 지금 여기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건실한 생활을 그만두고 예전으로 돌아갈까 싶으면서도 그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 접기를 반복했다.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로 인해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것보다는 좀 더 자기멋대로 굴었던 것 같은데. 성격 많이 죽었다, 구재현.
“수고하셨습니다!”
다소 지친 신입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 재현은 그제서야 기지개를 키며 시간을 확인했다. 12월 24일이 지나 크리스마스의 시작이다. 책상 위에 엎어둔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지금쯤 그는 자고 있을까? 원체 일찍 자는 사람이라 이미 푹 잠들었을지도 몰라. 보고싶은데. 지금 전화하면 잠을 방해하게 될까.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한참하다 목도리를 두르고 패딩을 챙겨 입는다. 괜히 전화해서 그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삑삑삑삑,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현관에서는 그녀의 출입을 환영하듯 현관등이 깜빡 내려앉았다. 노곤한 몸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것 조차 지치는 듯 한번 비틀 움직였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벗을 기운도 나지 않아 현관에 좀 앉아있다 움직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괜찮아요?”
이 시간에 깨어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재현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해라다. 그것도 멀쩡하게 깨어있는.
“뭐야. 너 안잤어?”
“누나가 안 들어왔는데 어떻게 자요.”
“피곤하잖아.”
“어차피 누나 없으면 못 자요.”
픽.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어리광이 늘었을까. 그만큼 너와 나의 관계가 변했다는 뜻이겠지. 또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걸지도.
재현은 신발을 벗고 매달리듯 그를 안았다. 찬바람을 맞은 패딩의 온도가 닿았을텐데도 해라는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 오늘 엄청 힘들었다? 그놈의 오류는 고치면 다른데서 문제가 생기고 고치면 또 다른데서 문제가 생기고….”
“그랬어요?”
“엉. 그래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 그냥 이대로 자버릴까봐.”
“그래도 씻어야죠.”
“벗겨줘. 씻겨줘.”
“…그거 엄청 위험한 발언인 거 알죠?”
“모르겠는데.”
“짖궂긴요.”
둘만의 공간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섞인다. 서로의 입을 맞추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나서야 재현은 그를 놓아주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다며 어리광을 부렸지만 그래선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남편은 깔끔한 성격이므로 어떻게든 저를 씻기기 위해 욕조에 들이밀 것이다.
무거운 패딩을 벗고 목도리를 푼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에 짧게 숨을 뱉았다. 아. 그러고보니.
“여보야.”
“네?”
재현은 웃었다. 태양 같은 눈이 그를 보며 한없이 빛난다.
“메리 크리스마스.”
“누나도요.”
“다시.”
“…메리 크리스마스.”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웃는 해라를 재현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한없이 예뻐 보여서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고 재현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분위기 좋고 화려한 호텔. 사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은 홈파티 할까? 메인 요리는 강해라의 황금계란볶음밥으로.”
“괜찮겠어요?”
“뭐 어때. 우리 둘만 즐거우면 됐지.”
그래, 중요한 건 우리 둘이지. 재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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