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관] 도플갱어
유캐빌감~
에녹은 거울을 노려봤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이 떨어졌다. 거울 속에 있는 그를 닮은 사람은, 똑같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그건 그냥 그를 흉내내는 것 뿐이다. 공허한 눈동자를 보라. 야광주처럼 그냥 하나의 돌멩이 같았다. 그런 인형같은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에녹은 소리를 질렀으나, 거울 속 남자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나를 배신한다. 에녹은 거울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가슴에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른 손으로, 오른 손으로, 다시 오른 손으로, 오른 손이 거울에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질 때 까지, 그는 거울에 주먹질을 해댔다. 바작바작 유릿조각이 떨어졌다. 오른 손이 핏자국을 남겼다.
별 것 아니야.
그가 중얼거렸다. 고스트는 말 없이 다가와 그의 손을 치료했다.
그 자식이, 그 자식이 날 쫓아오잖아, 그래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르는 변명을 중얼거리다 그는 고개를 들어 깨진 거울을 보았다. 거울엔 금이 너무 많이 가서 그의 모습을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에녹이 그것을 쳐다볼 수 없는 것 처럼, 그것도 에녹을 쳐다볼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다.
흥분했잖아요. 누워서 잠시 쉬어요.
고스트가 말했다. 에녹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스트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는 횡설수설 말을 했다. 너도 봤잖아, 그 자식의 면상을....... 나는 그걸 견딜 수 없었어, 왜냐면. 왜냐면? 에녹은 천장을 쳐다보며 그 질문을 곰곰히 생각했다. 왜?
그냥 그건 닮은 사람일 뿐이었다. 에녹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 가다가 그냥 만나는 자신을 닮은 사람. 어쩌면 머리 색을 똑같은 색으로 염색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머리 스타일이 같을 수도 있다. 진짜로 얼굴이 비슷할 수 있지만, 그건 황금기 이전의 공포소설에 나오는 "도플갱어" 가 아니다. 인류의 유전자 풀은 생각보다 넓지 않아, 자신과 비슷한 얼굴이 나올 수 있다.
맞아. 네 말이 맞아!
까마귀가 에녹의 말을 멈췄다.
근데 이건 "나" 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야.
그게 어쨌다는 소리죠?
나는 울드렌 대공이었잖아?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리프에서 내 유전자로 뭘 했을지 어떻게 알아?
에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마귀는 답답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리프는 비밀이 많은 동네고, 그래서 음험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유전자로 복제인간을 만든다거나,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을까? 그런 엉뚱한 프로젝트가 있다면, 차라리 마라 소프 여왕을 복제해서 유사시에 대비했을 것이다.
좋아요. 그 남자를 찾아보죠.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빠를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보여주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면, 까마귀의 이상한 망상도 끝날 것이다. 까마귀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씩 웃어보였다. 묘하게 울드렌 소프를 닮은 모습이었다.
그럼 얘기를 들려주지. 또 프레가였어.
까마귀는 프레가를 만났다. 누가 가르쳤는지 몰라도, 정말 성가시게 가르쳐놔서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미리 피한다거나 할 수 없었다.
서로 쌓인거 없지?
프레가가 능청맞게 말했다.
네가 할 말인가? 넌 날-
그래. 근데 멀쩡하잖아?
프레가는 까마귀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까마귀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 프레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프레가는 움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울드렌 소프의 까마귀 답게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밥이나 한 끼 하자고.
밥? 진심인가?
못 먹을 것은 뭐야. 난 지구에 온지 얼마 안 됐고, 여기에 아는 식당도-.......
프레가의 고개가 돌아갔다. 까마귀는 프레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곳에는 두 사람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까만 머리의 각성자와, 녹색 머리의 여성. 옆태가 까마귀와 프레가를 빼닮았다. 두 사람은 얼마 간 얘기하더니, 즐겁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갈라지자, 프레가는 홀린듯이 녹색 머리를 쫓아갔다.
잠깐, 프레가.
하지만 말 뿐이었다. 까마귀의 눈길은 저쪽으로 사라지는 각성자 남자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프레가는 없어진 뒤였다. 그 여자를 따라간 것이 분명했다.
프레가도, 말입니까.
에녹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하나라면 뭔가 이상할테지만, 둘이라면 이건 사건이지 않을까?
까마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목소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에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시 그 장소에 가보지요. 에녹은 까마귀를 앞장세웠고, 까마귀는 기꺼이 걸음을 옮겼다. 그 "닮은 꼴" 을 만난 장소에는, 당연히 닮은 꼴의 남자는 없었다. 프레가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부리또를 한 입 먹으려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했다.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결국 프레가가 바락 소리질렀다.
뭘 구경 해? 나도 먹고 살아야지!
에녹은 성큼성큼 프레가에게 갔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았다.
까마귀하고 밥을 먹자고 했었죠? 저도 합석합시다.
프레가는 까마귀를 째려보았다. 까마귀는 어깨를 으쓱하고 느긋하게 걸어서 대충 의자에 걸터앉았다. 프레가는 턱짓으로 카운터 쪽을 가르켰다. 먼저 주문을 하라는 것 같았다.
아아, 네, 가서 시켜야죠. 근데 프레가, 이 근방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혹시 아는 것 있나요?
사건?
프레가가 부리또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뭔 사건?
녹색 머리 여자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양메이?
양메이?
애칭이라 못 알아듣나? 루 양양, 애칭은 양메이.
아는 사람이었나?
까마귀가 끼어들었다. 프레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까마귀와 에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녹은 안 보이게 까마귀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체, 프레가가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양메이한테 아무 일 없으면 오늘 무덤 두 개 파이는 줄 알아라.
에녹은 까마귀를 째릿 노려보았다. 그 때였다. 에녹은 시선이 느껴져 뒤돌아 가게 쪽을 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지나가고 있었다. 가게 차양이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에녹의 귓가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그냥 나와 닮은 사람일 뿐이다.
쫄리냐?
프레가가 빽빽거렸다. 에녹은 시선의 끈을 끊어내려는 듯 날카롭게 뒤돌아섰다.
뭐야, 그런 표정을 하곤.
프레가는 에녹의 어깨를 넘겨보았다. 까마귀도 걱정어린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에녹은 답하지 않았다. 떨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어서 앞장 서라는 듯이 프레가를 노려보았다. 우연히 같은 옷을 입은 것이겠지. 장비가 겹치는 것은 수호자들 사이에선 당연한 일이다. 에녹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사람은, 그냥 나와 닮은 사람일 뿐이다.
프레가가 저편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자, 주전부리를 팔던 녹색 머리의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환영했다.
프레가!
양메이.
프레가는 잰걸음으로 양메이에게 다가갔다.
아.
까마귀가 숨을 들이켰다.
각성자 조차 아니네.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귀가 주춤거리고 있을 때, 에녹은 성큼성큼 걸어 프레가와 양메이에게 갔다.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요?
양메이가 키득거렸다. 프레가는 가게의 진열장에 한쪽 팔을 올리고 비아냥거렸다.
그러게. 네가 죽었는 줄 알고.
프레가, 루 양양 씨.
에녹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한 것은 죄송합니다. 그런데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애초에 그렇게 나왔으면 좋잖아.
프레가. 당신과 우리 간에 신뢰도를 생각해보면, 솔직하게 질문한다 해도 답변이 제대로 나왔을 지 모르겠습니다.
와, 프레가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요?
양메이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녹이 프레가를 힐끗 쳐다보았다. 거 보라는 듯 프레가는 양메이를 고갯짓해보이곤 에녹의 말을 기다렸다.
루 양양 씨, 혹시 저쪽에 있는 남자를 닮은 각성자 남성과 친하십니까?
양메이는 가게 진열장 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까마귀를 보았다. 양메이의 눈이 커졌다. 와, 진짜 닮았네. 프레가가 뭔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양메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안으로 들이자, 에녹은 프레가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청했다. 프레가는 양메이를 보고는 얌전히 까마귀 옆으로 갔다. 양메이가 에녹에게 물었다.
맞아요. 제 친구에 저 사람이랑 똑 닮은 사람이 있어요.
그 분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혹시 만나뵐 수 있을지-
에녹의 시선이 양메이의 뒤로 갔다. 양메이는 흔쾌히 그러마 했지만, 에녹이 멍하게 어딘가를 보고 있어 양메이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녹이 빠르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에녹은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테이블이 하나 뿐인 가게였다.
저, 그 곳은 벽인데.......
양메이가 한쪽 손을 뻗었다. 다행이 부딛히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 에녹은 벽을 보고 멍하게 돌아섰다. 분명 세 번째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백열전구같이 빛나는 눈을 보고 그는 확신했다. 무언가가 나를 따라오고 있어. 그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잘못 보았네요.
아아, 양메이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양메이의 눈은 불신으로 빛났다.
그래서 그 친구 말인데요,
양메이가 에녹이 나오기 쉽게 가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뭐 때문에 만나는지 알아야 될 것 같아요.
이 이상한 놀이를 그만두고 싶다. 에녹은 속 편하게 농담이나 따먹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누가 본다면 친한 친구인 것 처럼 보일 것이다. 에녹은 머리를 굴렸다.
프레가한테도 저한테 무슨 일이 있으니까, 저에게 데려다달라고 한거 아니에요? 제 친구한테도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 저도 난감해요.
예, 예에, 그렇죠.
토할 것 같았다. 에녹은 힐끗거리며 두 사람을 보았다. 마치 저 두 사람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튀어나와 "자, 모두 그만두고 우리 헤어지도록 합시다." 라고 말할 것 처럼.
그런데 양양 씨, 당신도 프레가랑 많이 닮으셨는데요.
......맞아요.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우린 항상 종족을 뛰어넘은 쌍둥이라고 장난치곤 하죠.
양양 씨. 프레가가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신원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네?
양메이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이를테면 그런겁니다.
저 여자가 당신을 죽이고 당신 이름으로 당신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에요.
당신 프레가가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프레가의 고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저 사람이 죽인 자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죽인 외계 종족들은?
당신은 못 죽일 것 같나요?
아마 당신을 죽이고 난 뒤에 죄책감 없이 시체를 치우며 샌드위치를 먹을걸?
에녹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눈꺼풀을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소설을 쓰는데요. 도플갱어에 대한 소설입니다. 어제 글이 막혀서 밤을 새는 바람에.
양메이는 걱정스럽게 에녹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방긋 웃어보였다.
외람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 취미가 소설 읽기인데.
그래서 도시에서 유명한 소설가 이름을 둘러대었다. 미야베, 였나. 그 얘기를 듣자 양메이는 환호하며 좋아했다. 정말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내가 잘못 둘러댄거겠지. 그렇게 에녹은 각성자 남자의 전화번호를 얻어냈다.
까마귀는 자신이 직접 그 남자를 만나겠다고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에녹은 프레가와 남겨졌다.
큰 실례를 범했으니, 네가 뭐라도 사라.
프레가가 뻔뻔하게 말했다. 프레가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에녹은 지칠대로 지쳤다. 잠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일전의 부리또 가게로 갔다.
나중에 양메이네 가게 가서 뭐라도 사먹고. 야, 듣고 있나?
에녹은 답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프레가는 혀를 한번 차더니 다소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참 뒤 에녹이 말했다.
당신은 왜 수호자를 싫어합니까?
왜냐니. 여행자의 말파리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근데 그 말파리가 기이한 힘을 지녔잖아, 그럼 어쩌겠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아니, 앞뒤를 대조할 질문을 하지 않았잖아?
까마귀. 까마귀는 왜 싫어합니까?
프레가는 말문이 막혀 에녹을 쳐다보았다. 에녹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프레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왜 도플갱어를 두려워하는거지?
도플갱어가 왜 두렵습니까? 거울을 보고도 겁에 질리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있어.
두 사람은 맥아리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난 그래서 수호자가 싫어.
프레가가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프레이야 올슨으로 죽을 것이며, 프레이야 올슨 외에 다른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얼굴을 하고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문제이다. 나 자신이란 존재가 그렇게 허무하게 문드러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 네 소설 다 들렸어. 나는 나 자신으로 죽을거다. 남의 신원을 도용하거나 하지 않아.
저와 까마귀의 차이점은 뭡니까?
없지.
난 죽이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나에게 감흥이 없으니까.
때마침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중지됐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말이 없었다. 다 먹은 뒤에도, 말이 없었다. 에녹이 먼저 일어났고, 프레가는 그 자리에 남았다. 에녹은 집으로 돌아왔고, 까마귀가 "그 사람은 그냥 닮은 사람이었다" 는 메시지를 보낸 것을 확인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 이제 씻고 자면 됐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그 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에녹이.
안녕.
에녹이 말했다. 에녹은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는 프레이야 올슨으로 죽을 것이며, 내 얼굴을 하고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은. 에녹은 성큼성큼 에녹에게 다가갔다.
왜 날 따라다녔지?
반대일거라곤 생각 안 했나요?
세상에는 어딘가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딘가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 에녹은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노려보았다. 나의 이름을 하고 나의 얼굴을 하고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존재가. 너무도 가까이.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