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

물줄기

줄곧 날씨가 어둑어둑하다 싶더니 기어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후텁지근한 게,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여한일은 교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 너머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를 피하는 애들을 눈으로 좇았다가, 흠뻑 젖은 세상의 냄새를 새삼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시간이 썩 잘 흘러가지는 않았다. 지루했다. 제법 빠르게 지면을 내달리는 물줄기를 응시하며, 시간도 원하는 대로 모아 두었다가 한번에 쏟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상념을 빗물 속에 흘려보냈다.

사실 그의 가방에는 언제나 작은 우산 하나가 빠진 적 없었다. 바로 이런 날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꺼내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산 안 가져왔으면 같이 쓸래? 친구들의 호의도 사람 좋은 낯으로 웃으며 거절했다. 아니,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서. 그리 말하는 데에도 응당 이유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물음이 들려왔다.

"우산 안 가져왔어?"

그렇지, 바로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목소리에 미소 지으며 그는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의 일등 친구 - 물론 이제 그런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사심이 커졌다 -와 눈이 마주치거든 여한일은 고민도 없이 거짓말을 했다.

"응, 비가 올 줄은 몰랐네."

"나도 그럴 뻔했는데, 현관문 나서기 직전에 엄마가 찔러 주지 뭐야. 같이 쓰고 갈래?"

그럴 수 있으면 영광이지. 예의 웃으며 건넨 대답에 수아는 조금 웃었다. 뭐야, 이 정도로 영광이라니! 여한일은 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닌데, 정말로 영광인데. 그리 생각만 하면서 가만 수아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얼굴에는 언제나와 같은 웃음을 걸쳐 두었다.

수아의 우산은 크기가 상당히 작았다. 접이식 우산의 한계였다. 그 비좁은 우산을 수아에게 맞추어 주느라 여한일은 사실상 머리만 우산을 쓴 꼴이 되었다. 수아는 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깨가 다 젖고 있는데, 내가 들까? 고개를 저으며 그는 자신의 모습이 좀 웃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아는 미안한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좀 웃어도 되는데. 잠시 생각하던 그는 간격을 조금 더 좁히고는 수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금세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모른 척하며 그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러면 좀 덜 젖는데, 어때? 너무 가까운가?"

"어? …… 음, 괜찮아. 덜 젖으면 좋지."

하여간 착한 친구를 두었다고 여한일은 생각했다. 그 마음에 기대어 욕심을 부리고 싶을 만큼. 그는 수아의 어깨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조그만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옅은 초여름의 온도였다.

있지, 아까 과학 선생님께서 늦게 들어오셨는데…… 수아는 자꾸만 시시콜콜한 내용의 대화를 걸어 왔다. 여한일은 간간이 대답을 하며 조용히 경청했다. 그러나 그런 대화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묘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감돌았다. 우산 위에서 빗물이 물줄기가 되어서는 자꾸만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함께하는 시간도 자꾸만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여한일은 이 시간을 모아 두고 싶었다, 어디에도 흘려보내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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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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