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번 그리워했던

돌이킬 수 있는 / 여준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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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언니는 여준 삼촌이 좋아요?”

김나정이 그런 말을 꺼낸 것은 폭포가 만들어지던 도중이었다. 이모나 삼촌 대신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김나정의 말을 순순히 들어준 윤서리는 비원의 건물에서 그때 경선산성의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비원과 경선산성이 극적으로 ‘화해’한 뒤 경선산성의 사람들은 드디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불신했고 불안해했으나, 정여준과 이 찬을 필두로 한 설득에 점차 마음을 풀어가던 차였다. 백 년 넘도록 경선산성 안에서 지내왔던 윤서리 또한 사람들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껏 수백 번도 다녀온 심부름을 통해 그들이 어떤 물건을 선호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는 눈 감고도 암기할 수 있었다. 윤서리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이 되레 그들의 불안을 자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윤서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이란 본래 그런 법이었다. ‘처음’. 시간을 돌릴 필요도 처음으로 되돌아갈 필요도 지긋지긋한 상황을 맞닥뜨릴 필요도 없는 상황.

“아니에요?”

그러므로 이런 질문도 처음 맞닥뜨리는 것이다. 고등학생다운 순수한 기대감에 찬 얼굴로 김나정이 눈을 반짝였다. 경선산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러했듯 김나정은 윤서리에게 경계심을 빨리 푼 편에 속했다. 윤서리가 김나정을 아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기도 했다. 당장도 윤서리가 폭포를 만드는 작업을 확인하는 작업실 옆 소파에 앉아 당당하게 코코아나 타먹고 있지 않는가.

윤서리는 당황하는 대신 김나정의 질문을 곱씹었다. 정여준?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뜻이죠. 여준 삼촌을 좋아해요?”

“좋아하지.”

투박한 대답을 꺼내면서 윤서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정여준에게 가지는 감정을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천 번도 넘게 보아 왔다. 소년처럼 웃는 표정을 수백 번도 넘게 보았다. 눈 한 번 깜빡인 순간, 그 품 안에 짓눌려 아니길 계속 부정하며 고개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정여준은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웃었다. 그럴 때면 윤서리는 몸서리를 치면서 시간을 돌렸다. 그것보다 예전, 그것보다 더 예전, 그것보다 더. 혹은 조금 앞. 조금만 더 앞. 아예 처음으로, 혹은 두 번째로, 눈물을 흘리던 어느 순간으로. 시간을 돌리다 보면 감각은 무뎌지고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사라진다. 그런 와중에 감정을 정의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정여준을 좋아한다. 일반적인 ‘좋아함’이냐고 묻는다면 확언할 순 없으나, 적어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살리고자 백 년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웃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지막 순간 매번 그랬던 것처럼 미련없이 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서리를 위해 그만 목숨을 바치고.

“그게 뭐예요. 재미없어.”

김나정이 툴툴대며 코코아가 든 머그 잔을 들어 올렸다. 윤서리가 지도를 내려놓으며 턱을 괴었다.

“재미없긴 뭐가?”

“좋아한다고 말할 거면 조금 더 풋풋하고, 긴장되고, 설레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대뜸 어, 그래, 하는 반응을 바란 건 아니라고요.”

“왜 내가 정여준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야…….”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가던 김나정이 멈칫했다. 눈을 굴린 소녀가 힐금 문 밖을 바라보더니 소리 죽여 대답했다.

“언니는 여준 삼촌한테 엄청 약해지는 것 같거든요.”

“내가?”

“으음, 느낌이 그래요. 눈빛이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 잠깐 들를 때마다 언니는 여준 삼촌만 엄청 오래 보고 있기도 하고.”

그랬던가. 윤서리는 수천 번이고 마주했던 얼굴은 문득 떠올렸다가 시선을 깔았다. 그랬던가. 다시 한번 중얼거리듯이 말을 했다. 정여준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 전, 혹은 얼마 되지 않은 날 보았던 정여준의 얼굴을 생각했다. 밝게 웃는 얼굴, 빗물 젖어가듯 선명하게 새겨지던 미소. 종종 찬란하게까지 느껴졌던 낯선, 그러나 익숙하기 짝이 없던 어떤 얼굴을.

정여준은 윤서리를 위해 수백 번을 죽었다. 그게 온전히 윤서리만을 위한 죽음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윤서리를 위해서 그랬다. 윤서리는 정여준을 위해 백 년이 넘도록 그 시간을 반복했다. 그게 온전히 정여준만을 위한 반복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여준의 생존이 모든 반복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윤서리는 그 모든 걸 기억한다.

정여준이 살아야만 경선산성의 모두를 살릴 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정여준만을 살리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다. 정여준의 목숨은 경선산성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윤서리만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랬던가?”

세 번째 대답을 하자 김나정이 다시 툴툴대기 시작했다. 윤서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냐고 김나정이 억울함을 토로하던 순간이었다. 똑똑,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김나정도 윤서리도 문 너머의 사람을 알았다.

“……들어와.”

헙, 하고 입을 막는 김나정의 곁에서 윤서리가 흘긋 시선을 들고 말했다. 덜컥 문이 열렸다.

안쪽으로 그 무엇보다 익숙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여기 있을 줄 알았다는 듯 웃었는데, 그 얼굴은 경선산성 속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웃음보다도 밝고 다정했다. 윤서리는 무심코 그 낯설고도 익숙한 미소를 새길 것처럼 들여다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마 김나정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꽤 나중에서야 알아챘을 것이다.

“무슨 일 있어?”

윤서리가 물었다.

“아뇨, 찬이가 나정이를 찾는데 여기 있을 것 같아서 부르러 왔어요.”

“찬이 삼촌이 저를요? 왜요?”

“오늘 뭘 사러 가자고 약속했다던데. 찬이가 착각했나?”

“헉, 깜빡했다!”

김나정이 벌떡 일어섰다. 미지근해진 코코아를 단숨에 들이킨 김나정이 윤서리에게 대강 손을 휘젓더니 소파 옆에 둔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소파가 텅 비고 두 사람만 자리에 남았다.

바람이 어린아이를 데려간 것만 같았다. 코코아 고맙다고 외치던 목소리만 방 안에 은은하게 떠돌았다. 눈을 깜박이던 정여준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정이가 여길 자주 오나요?”

“자주 오는 걸 알아서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니었어? 참고로 방해 안 되니까 쫓아낼 생각 하지 마.”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저 애가 저렇게 신나 하는 건 오랜만에 봐서. 오히려 조금만 봐 달라고 부탁드려야 할 지경인데요.”

“낙엽 굴러다니는 것만 봐도 웃을 나이잖아. 지금껏 못한 만큼 더 웃어야지.”

“그렇게 봐준다면 고맙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여준은 윤서리 쪽으로 다가왔다. 지도를 확인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허리를 약간 숙였다.

“언제쯤 완성될까요?”

“나보다 네가 더 많이 현장에 가지 않았어? 알면서 뭘 굳이.”

“그래도, 윤서리 씨 의견이 궁금해요.”

윤서리는 잠깐 숨을 삼켰다가 지도를 끌어당겼다.

아직까지도 어제처럼 생생한 경선산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늘. 바스락거리며 발 아래에 닿던 흙. 나무뿌리. 웃음소리. 처음인 것들과 처음이지 않은 것들이 뒤섞이고 뒤섞이다가 모조리 익숙해지던 과정들.

“아마 곧.”

정여준은 짧게 웃었다.

“곧?”

“오래 안 기다리게 할 거야.”

윤서리의 말은 머뭇거림 하나 없이 확고했다. 정여준은 윤서리가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밝은 얼굴로, 약간의 피로가 묻어나오긴 하나 그럼에도 희망과 기대가 더 크게 자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여준이 몸을 세웠다. 열린 문 너머로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윤서리는 문득 김나정의 질문을 곱씹었다. 여준 삼촌이 좋아요? 글쎄. 그런 식으로 고민하고 되새기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돌아 왔다. 윤서리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정여준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정여준을 살릴 수 있느냐였으므로.

하지만 그 치열하고 끝없을 것만 같던 고민들 속에, 정여준이 윤서리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고 있다.

시간을 돌릴 때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대체로 연주하듯 빨라지던 얼굴, 혹은 웃음, 조금은 다정하고 조금은 부드럽게 건네지던 목소리 따위를 기억한다. 헤매지 않고 온전히 찾아낸 마음을 바닥에 깔았던 그런 얼굴을.

그리고 그건 이제 윤서리를 절망시키지 않는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소년 같은 기대감이 반짝이는 얼굴로 정여준은 말한다. 윤서리는 숨을 뱉어냈다.

마지막의 처음.

열 번을 헤맸던 남자가 확신하는 낯으로 웃었다. 그 위로 선명하게 햇살이 고였다. 산산이 부서지는 게 아니라 뺨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 윤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 번 그리워했던 만큼,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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