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카일리스
* 터미널리스트 8화 스포일러 주의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임스 리스의 커피 취향은 그간 크리스 카일이 만나 본 인간 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카일의 가까운 주변인들은 컵에 담겨 있는 시커멓고 뜨거운 액체라면 그 맛이 어떻든 모두 커피라고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러니 매일 아침 커피에 고상하게 크림과 꿀을 찾아 넣는 리스의 모습을 카일이 종종 신기한 것을 보듯이 곁눈질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내 커피 취향에 한소리를 하고 싶은 거면 지금 해.’라고 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 뒤에야 카일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이후 커피를 마시는 리스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리스가 쭉 사용했던 머그컵은 연한 푸른색이었다… 카일은 제집의 부엌 찬장에 그런 색깔의 컵이 있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던 그 푸른색 머그컵은 이제 깨끗하게 세 조각으로 쪼개진 지 오래였다. 단단하고 무거운 물건이 깨지는 둔탁한 소리에 놀라 한달음에 부엌으로 왔던 카일은, 바닥을 나뒹구는 컵의 깨진 조각들과 작게 퍼져 있는 커피 웅덩이를 다소 망연자실한 얼굴로 응시했다. 컵이 얇고 가벼운 재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파편이 사방으로 튀지 않았다는 점만이 지금 상황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카일은 컵의 잔해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식탁 의자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리스를 바라보았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카일이 아는 제임스 리스는, 부엌에 들어서는 그의 인기척을 느꼈을 때 진작에 ‘미안해, 내가 실수로 떨어뜨렸어. 혹시 아끼던 컵이었나?’ 같은 소리를 정중하게 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리스가 깨뜨려 버린 컵은 엄청나게 값비싸거나, 카일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대대로 소중하게 보관해 온 가보 같은 찻잔이 아니었으므로, 카일은 그의 사과에 괜찮다고 말해 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리스는 제 발치에 뭐가 나뒹구는지조차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하는 듯했다. 카일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리스의 큼직한 손 위로 슬그머니 제 손을 올려 감싸 쥐었다. 그제야 리스가 움찔 어깨를 떨면서 카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와중에도 카일은 리스의 손이 그나마 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작게 안심했다. 아직 그가 복용 중인 약의 효능이 유효한 모양이었다.
“카일.”
“제가 치우겠습니다.”
“미안해, 내가 잠깐…….”
“괜찮습니다. 별로 큰일도 아닌데요.”
모래 먼지와 총알들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십 년을 구르면서도 용케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았는데, 고작해야 깨진 머그컵 조각들 정도는 정말 별일도 아니었다. 일단 깨진 조각들만을 추슬러 가까운 쓰레기통에 내던진 뒤에 다시 리스의 곁으로 돌아온 카일은 그제야 어지러운 식탁 위를 훑어볼 여유를 되찾았다. 식기와 양념통 대신 온갖 서류들과 사진, 그리고 갈겨 쓴 쪽지들이 어지럽게 늘어선 식탁 위에, 유독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재질의 작은 종이가 비죽 끼어 있었다.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행운의 부적’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혹은 지극히 미신적인 것이든, 그도 아니면 매우 사적인 물건이든 간에. 그리고 피와 땀과 기름, 빗물과 같은 온갖 오염 물질에 노출되고도 용케 원형을 잃지 않은 그 도화지는 현재 리스가 십자가나 휴대용 성경, 행운의 동전 대신 자신의 가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리스가 없는 짬을 내가며, 종이의 모서리가 다 닳아버릴 때까지 수없이 들여다봤던 것은 아이의 사랑스러운 그림이 아니라 그 뒷면이다. 잿가루로 쓰고 피로 지워낸 수치스러운 이름들의 나열이다.
카일은 저격수의 눈으로 너덜거리는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마지막 이름을 똑똑히 확인했다. ‘BEN EDWARDS’.
요정왕의 이름을 따온 거창한 유령 회사 뒤에 숨은 자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카일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인간적인 호불호를 제외해 두었을 때도 벤의 행보에는 늘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고, 카일은 날 때부터 타고났으며 전쟁이 갈고 닦아낸 자신의 직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카일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곧 태연하게 리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마치 그저 식사를 하러 온 사람처럼.
“……차라리 잘 됐습니다. 찾는 수고를 덜었네요.”
다시금 넋을 반쯤 빼놓고 있던 리스의 눈에 순식간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리스는 아까보다 조금 붉게 물든 눈을 들어 카일을 바라봤다.
“보스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잖습니까.”
리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카일은 조금 더 대담하게 한 발짝 더 내디뎠다.
“아니면, 혹시 그가 아니기를 바라셨습니까?”
그 말을 꺼낸 직후 카일은 리스가 자신에게 화를 낼 것이라 예상했다. 겨우 중사 나부랭이가 소령의 사적인 친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건 썩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고, 심지어 그 ‘사적인 친분’이란 것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는 것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대해 감히 논하고 있다면 더 그랬다. 그러나 리스는 의외로 그 점에 대해선 그다지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리스는 카일을 향해 의식적으로 입꼬리의 근육을 잡아당겨 보이려다가 곧 완전히 관두었다. 습관적인 미소마저 지워낸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그래.”
리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잠긴 목소리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난 벤이 아니길 바랐어.”
카일은 그런 리스를 순진하다고 비웃지도, 나약하다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대신 카일은 잠시 해야 할 말을 고르기 위해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곧 자신의 코끝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불행히도 언변은 그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 기자가… 자기 일을 참 잘했더군요.” 카일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기사 덕분에, 이제 모두가 보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압니다. 그놈들이 보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복수를 하려면, 먼저 두 개의 무덤을 파 두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 건 대체 어디의 누구였던가? 카일은 문득 그 오래되고 유명한 격언을 떠올렸다. 제임스 리스가 복수를 위해 파 놓은 6피트짜리 깊이의 구덩이가 전부 몇 개인지를 일일이 헤아리느니 그것들을 통째로 묶어다 공동묘지를 하나 세우는 편이 더 빠를 것이다. 그리고 케이티 뷰라넥은 그 묘비조차 세워줄 가치가 없는 인간 말종들이 저지른 모든 불명예가 태양 아래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이제 그 묘지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묘혈 두 개만이 남아 공허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 그중 하나에 들어가야 할 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도 그녀에겐 그저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보스가 무슨 선택을 한다 해도 사람들은 보스를 지지해 줄 겁니다. 그 지지가 있으면, 놈을 산 채로 정당하게 법 앞에 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테고요.”
‘형제들을 팔아먹어 호의호식하려 했던 놈에게는 이제 와서 스스로 뒈질 용기조차 없을 테니, 뒤늦게 시체로 발견될 걱정은 없을 겁니다.’ 카일은 그 문장까지 입 밖으로 꺼내려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그만두었다. 그는 언제나 남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을 일부러 골라 하는 치들을 경멸해 왔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주의였지만, 가끔은 육성이 되지 않고 내면에서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나은 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스가 여기서 멈춘다 해도, 그가 죗값을 치르게 할 방법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보스의 결정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하는 말을 듣는 내내 리스의 녹색 눈동자는 가만히 카일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평소 카일을 향하는 리스의 시선에는 늘 온화한 신뢰가 담겨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가 하는 말들의 진위를 냉정하게 재고 따지는 눈이었다. 카일이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리스는 마침내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 말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중사?”
“그럴 리가요.”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 사납게 코웃음을 치며 침을 뱉듯이 대꾸했다.
“벤 그 자식도 지금 이 순간 여기 있었다면 다르게 말했을 테죠.”
크리스 카일은 벤 에드워즈가 어째서 제임스 리스를 배신했는지, 그랬던 주제에 어떻게 감히 그를 한결같이 ‘형제’로 칭하면서 그의 복수를 여태껏 물심양면으로 도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명예를 모르는 배신자의 속사정 따위는 그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아니었다.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이 복수에 기꺼이 함께하겠다며 뛰어든 그 순간부터, 카일의 관심사는 오로지 제임스 리스 단 하나뿐이었으므로.
만약 이것이 제임스 리스가 아닌 다른 타인의 사정이었다면 카일은 무관심했거나 혹은 손쉽게 동정했을 것이다. 아니면 본인을 대신해 성급하게 화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임스 리스가 곁에 두고자 하는 자는 제게 닥친 비극에 함께 슬퍼해 줄,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이해자가 아니다. 그가 진정 필요로 했던 것은 공범자에 더 가깝다. 기꺼이 함께 두 손을 더럽히고,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 서로의 총상에서 망설임 없이 총알의 파편들을 끄집어내고 찢어진 살을 꿰매 주며, 가끔 힘에 겨워 주저앉아 있는 상대방을 멱살을 붙들어서라도 일으키고 다그쳐 주는 존재.
물론 훈계란 리스에게 가장 불필요한 것이다. 그는 채찍질을 통해서 길들여야만 하는 굼뜬 소나 말이 아니고, 설사 누군가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할지라도 자기 결심을 굽히는 종류의 인간도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처럼 여겼던 이에게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이 순간 보이는 흔들림은 그의 성정 자체가 나약해서가 아니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던 리스는 아까보다도 더 차갑고 딱딱한 눈으로 카일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카일의 새파란 눈 안쪽에 자리한 뇌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다시는 날 시험하려 들지 마. 내가 뭘 해야 하는 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
“압니다. 항상 그러셨죠.”
결국 제임스 리스는 이 잔혹하고 불합리한 임무를 완수해 보일 것이다. 원수의 배를 산 채로 찢어발겨 창자를 끄집어내고, 부모의 눈앞에서 무고한 아이의 목숨을 협박의 패로 들먹거리는 한이 있어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주 잠깐이라도 자네의 그 제안에 내가 망설임을 느꼈다는 사실에 화가 나.”
“그러지 않으실 거란 거 알고 있습니다.”
카일은 리스의 눈꺼풀이 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덧붙였다.
“그럴 거면 당신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리스는 대답 대신 끝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물질이 불의 열기에 순식간에 녹아 버리듯, 리스의 두 눈에서 촛농 같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카일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리스에게 성큼 다가가, 그 액체가 리스의 얼굴을 모조리 녹이고 뭉그러뜨리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난 것처럼 서둘러 손을 뻗어 엄지로 닦아냈다. 부드러움 따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손가락의 지문들이 피가 몰린 얇고 축축한 피부를 문질렀다. 그 감촉이 고운 사포와 별반 다를 게 없었을 텐데도 리스는 그것이 다정한 애무라도 되는 양 조금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카일의 손을 다소 강한 힘으로 마주 부여잡았던 리스의 손은, 곧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미끄러져 그의 손목과 팔뚝을 타고 내려왔다. 이 순간 리스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빌어먹을 종양 탓이 아니었다. 그 행동에서 카일은 다리가 부러진 말을 보는 것과 같은 애처로움과 제 목구멍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카일은 대담하게 고개를 더욱 깊이 수그렸다. 반듯하게 뻗은 리스의 코끝과 축축하게 젖어 무겁게 늘어진 속눈썹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고, 카일의 얇은 입술로 끊임없이 스며드는 리스의 눈물에선 당연하게도 짜고 쓴 맛이 났다. 카일은 훈련병 시절엔 술보다도 더 자주 삼켜야만 했던, 해변의 모래 알갱이들이 섞인 바닷물을 떠올렸다.
“제임스.”
카일이 마침내 그의 귓가에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
눈물을 쏟아내는 행위란 체력과 정신 양쪽 모두를 크게 소모하는 일이다. 아무리 훈련받은 군인이라 할지라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뇌 안에 호두알만 한 종양을 키우고 있다면 더더욱. 카일이 리스를 아이처럼 어르며 그 큰 몸을 능숙하게 부축해 침실로 끌고 가다시피 하는 내내, 리스는 이를 악문 채로 흐느끼며 오열을 토해내고, 제 몸에 가까이 붙은 카일의 입가와 턱과 목에 입술을 짓눌러가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손톱을 바싹 깎은 손가락 끝으로 카일의 목덜미와 어깨와 팔뚝을 연신 긁어내리다가, 베개가 제 뒤통수에 닿고 나서야 완전히 탈진하여 고개를 떨구고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카일은 마지막으로 리스의 복부에 남아 있는 총상이 얼마나 아물었는지를 확인하고 난 뒤 침실을 빠져나왔다.
부엌 바닥에 흘린 커피 얼룩은 이제 완전히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조금 전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는 어지러운 식탁 위에는 여전히 리스가 목숨처럼 지니고 다니는 딸아이의 그림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일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가 보고자 한 것은 거기에 적힌 이름들이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그린 아이의 그림 속에서 세 명의 가족은 아무 근심 없이 푸른 초원 위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카일은 그 덧없는 천진난만함을 오랫동안 서글픔 속에서 내려다보다가, 다시 종이를 뒤집어 그림이 보이지 않도록 한 뒤에 제자리에 두었다. 굳게 닫힌 관뚜껑의 표면을 차가운 흙을 뿌려 감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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