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
카일리스
눈이 어마어마하게 내렸다.
숨을 쉴 때마다 폐를 찌르는 통증이 밀려왔다. 공기 대신 살얼음이 난도질을 하며 목줄을 할퀸다. 두 손은 이미 통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검붉은 색으로 변한 피부는 덕지덕지 얼어붙은 핏물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크리스, 카일은 끊임없이 시린 눈 속을 개처럼 파헤쳤다. 이까짓 고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이 또 쌓이기 전에 더 깊이 파 내려갈 뿐이었다.
벌써 몇번째 구멍인지 몰랐다. 전방 10미터 정도를 헤엄치듯 전진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은색의 작은 쇠붙이가 눈에 보였다. REECE JAMES S. 이번엔 환상이 아니다. 카일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막힌 숨을 터뜨리고 목소리를 내려 할수록 얼굴 근육은 제멋대로 어긋하듯 경련했다. 젠장, 보스! 굳은 입에선 연신 딱, 딱 거리는 기이한 소리만 새어나갔다. 결국 이를 악문 그가 눈과 함께 얽혀있던 군번줄을 부서져라 잡아당겼다. 제임스, 제발!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악력에 내리 눈 속에 파묻혀있던 남자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스, 눈 좀….”
간신히 꺼내어진 낯빛은 얼핏 보아도 창백한 색으로 식어있었다. 카일은 온 힘을 다해 꺼낸 남자를 곧바로 어깨에 둘러멨다. 한곳에 줄곧 머물러 있다가는 분명 또 다른 눈사태에 휘말리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전진해야 했다. 그는 재빨리 설산 너머를 넓게 살폈다. 이대로 눈 속에 파묻혀 죽긴 싫었다. 혼자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그래선 안 됐다.
자꾸만 옆으로 미끄러지려는 몸을 겨우 일으키던 찰나였다. 저멀리 희뿌연 눈보라 사이로 언뜻 건물의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았다. 헛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여유는 없었다. 카일은 무작정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걸어갔다. 걷는다기 보다는 거의 늪이나 땅굴을 파내는 것과 다름 없는 행위였다. 무릎 위까지 빠진 무게의 흔적은 그가 지나온 만큼 긴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눈 위로 새겨진 한줄기의 길은 그렇게 뒤덮여 사라져갔다.
꽁꽁 얼어있던 문이 억센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반대쪽 벽을 강하게 찍고 돌아온 문짝을 억지로 잡아 닫는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카일은 부서진 문고리를 대충 바닥에 던져놓고 가장 먼저 침대부터 찾았다. 겨우 시선에 들어온 건 낡은 매트리스 하나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곳에 리스를 조심스레 눕힌 그는 꽁꽁 얼어버린 제 연인의 상태를 살폈다. 창백하게 굳은 볼은 아무리 쓰다듬어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나 차가운지 그 온기를 느낄 수가 없어 불안감만 커졌다.
“조금, 만, 제발, 버텨주세요.”
카일은 재빨리 웃옷을 벗어 그의 몸 위를 덮었다. 그리고는 벽난로 앞쪽으로 매트리스 채 그를 끌어 옮겨왔다. 당연하게도 벽난로 속은 시꺼멓게 타버린 재만이 남아있었다.
그래, 쉬운 길은 없겠지. 이런 걸로 실망할 시간에 장작이나 찾아, 크리스 카일.
카일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안엔 장작이 없었다. 그럼 만들면 돼. 테이블 옆에 놓인 목재 의자 다리를 마구잡이로 쪼개어 벽난로 속에 집어넣었다. 마침 그 서랍 안에서 새 성냥갑도 찾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여러 번 성냥을 긁었다. 감각이 없으니 자꾸만 헛손질이 나갔다. 발밑은 이미 쓸모없이 반 토막이 난 성냥개비 조각들 투성이였다. 결국 여덟번째 성냥을 부러뜨리고 나서야 그의 손안에서 자그마한 불이 타올랐다.
“보스….”
고작 불 지핀 것 따위로 안도하기는 아직 일렀다. 카일은 여전히 대답 없는 리스의 팔다리를 계속해서 주물러댔다. 스스로 깨어나길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감정이 통제되질 않았다. 인내는 더 이상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빛을 머금고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리스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맞대어진 이마의 온기는 싸늘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체온이 높아서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리스는 카일보다 온도가 낮은 남자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성정을 닮은 카일과는 애초에 끓는 점부터가 달랐다. 카일은 그의 미지근한 온도를 좋아했다. 남들은 스쳐 지나기만 해도 화상을 입는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의 말대로 제임스 리스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한 산불이라면 크리스 카일은 오래 전부터 들끓고 있던 땅이었다. 그가 불시에 폭발한다고 해서 구멍이 나고 무너지는 법이란 없는, 본디 까맣게 그을린 땅. 그게 바로 카일이었다.
당신이라면 이 상황을 해결하고도 남았을 텐데.
카일은 자신과 벽난로 사이에 리스를 두고 누웠다. 그러면서 조금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곳이 없도록 빈틈 없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마구잡이로 넣어둔 장작의 열기가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조금씩 체온이 오르자 혈관들은 급격하게 순환했다. 피가 빠르게 도니 온 피부가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카일은 눈을 부릅뜬 채 그의 머리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부디 이번만은 리스가 자신보다 뜨거워지길 바랐다.
‘크리스.’
모처럼 온갖 옷가지들을 바닥에 늘어놓은 카일은 꽤 오랜 고민에 빠져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옷 하나를 집어 든 얼굴엔 왠지 모를 복잡함이 담겨있기도 했다. 오로지 한 곳에만 열중한 나머지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나.’
카일은 익숙한 갈색 스웨터에 코를 갖다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번에도 결국 [버릴 것] 상자의 속은 텅 빈 채다. 매번 옷 정리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에게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취미란 없었다.
보다 못한 리스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거 이제 못 입는 옷이래도. 밑 쪽 실도 다 풀렸고 목 부분도 해졌잖아.’
‘예? 제 눈엔 새 것 같기만 한데요.’
‘흐음. 그래도 난 너처럼 과감한 옷은 못 입어. 내가 생각보다 보수적이거든.’
물끄러미 마주 보는 시선에 카일은 괜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넝마보다 더 넝마 같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었던 창피한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멍이 많이 뚫려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시무룩하게 눈썹을 늘어뜨리자 리스는 기어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데이트 하기 전에 알게 돼서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보스까지 망신 줄 뻔했다고요.’
‘글쎄. 그대로 왔어도 눈치 못 챘을걸? 아무도 네 옷차림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보통 얼굴 보느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하지. 어느새 웃음기를 지운 리스가 덤덤히 덧붙였다. 크흠. 쑥스러워진 카일이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별것 아닌 칭찬도 그의 입술을 거쳐 나오면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곤 했다. 마치 맨 몸으로 강아지풀밭 한 가운데에 던져진 것만 같은, 그런 간지러운 기분에 휩싸이는 것과 비슷했다.
카일은 유독 그 감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건 존경과 사랑이 하나가 된 날부터 그래왔다. 이상하게도, 제임스 리스에 관한 면역력은 나날이 떨어져만 갔다. 심지어 사귀기 전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리스는 항상 거대한 덩치로 부끄러워하는 카일을 귀여워했다. 카일은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자신의 어딜 봐서 귀엽다는 건지. 그런 말은 평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 아니고서야 누가 이러겠어.’
삐죽삐죽 뻗친 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좋았다. 카일은 눈을 감은 채 얌전히 그의 손을 탔다. 개도 아닌데 쓰다듬을 받는 게 이토록 편안하고 익숙해져 있었다.
한껏 나른하게 풀린 카일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제가 입을까요. 집에서는 괜찮잖습니까.’
‘내 걸 네가 입는다고?’
‘네. 나름 추억이 있는 옷들이니까요. 막상 꺼내 보니 버리는 게 미안해져서….’
‘추억의 옷들이 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부분에 대해선 미안하지 않고?’
웃음기가 담긴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지레 찔린 카일은 입을 꾹 다문 채 먼 곳을 응시했다. 전에 실수로 옷을 바꿔입었다가 옆구리와 단추를 죄다 터뜨렸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사실은 수십번일지도 모른다. 카일이 조금이라도 꿰어 입기만 하면 다음날 옷이 꼭 이상한 형태로 늘어나 있었다. 겉으로 보면 비슷한 체구였지만 부피 차이가 꽤 있는 탓이었다. 그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여대며 말했다.
‘지금은 체중이 좀 빠졌으니, 잘 들어갈 겁니다.’
‘그래? 그럼 오늘부터 세배로 먹여야겠군.’
‘보스는 제가 뚱뚱한 편이 좋습니까?’
리스는 뚱한 얼굴이 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좋고 싫고가 어디 있겠어. 뭐든 잘 먹는 얼굴이 좋은 거지.’
그리곤 살짝 풀린 카일의 얼굴을 확인하며 덧붙인다.
‘굳이 대답하자면, 무거운 쪽이 좋긴 해. 여러모로.’
카일을 달래는 방식엔 이미 도가 텄다. 황소고집을 물렁물렁하게 만들기 위해선 은근히 유치한 주제가 잘 통했다. 이런걸 보면 확실히 리스보다 어린 티가 났다. 그는 누구보다 강한 군인이었지만 종종 소년다운 면이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리스는 늘 그런 부분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물론 잠자리에선 제외하고 말이다.
카일은 광대를 끌어올린 채 헤실대고 있었다. 내심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치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는 단호하게 흐름을 끊었다.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얼른 정리하고 저녁 먹을 준비해야지.’
‘벌써 그런 시간입니까?’
동그란 눈을 끔뻑거리던 카일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상자 밖은 아직도 제자리를 잡지 못한 옷들로 즐비했다. 그는 손에 든 리스의 스웨터와 [버릴 것]을 슬쩍 번갈아 보았다. 이건 첫 데이트 때 입은 옷인데….
‘저녁 먹고 나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크리스.’
나직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엄중했다. 카일은 대번에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가 고집이 있는 만큼, 리스도 쉬이 물러나지 않는다.
‘물건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습관은 좋지만, 뭐든 보내야 할 때가 법이야.’
설령 그게 추억의 일부분이라고 할지라도.
리스는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카일은 주방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서운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굳은 살 박힌 손이 스웨터를 고이 접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과 행동이 어긋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당신도 아마….
…리스. 크리스.
“제임스?”
설핏 잠이 든 모양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잠결에 들린 작은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카일이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줄곧 어깨를 잡아 쥐고 있던 손에 피가 안 통할 정도의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터무니 없는 악력에 짓눌리다시피 깔린 남자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크리스. 이러다 숨 막혀 죽겠어.”
“보스!”
리스가 깨어났다. 그토록 기다려온 녹색의 눈동자가 드디어 카일을 담은 채 오롯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안도와 환희를 동시에 느끼던 카일은 돌연 심각한 얼굴이 되어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색이 나아졌다고 무조건 긍정적인 건 아니다. 게다가 제임스 리스는 워낙 엄살을 부릴 줄 모르는 군인이었다. 한번 캐묻는 걸로는 절대 솔직하게 아픔을 터놓지 않을 것이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 아니 아픈 곳은 없습니까? 지금 체온이, 피부가 너무 차갑습니다.”
“누구 덕분에 몸이 반으로 분리되는 느낌만 빼면 멀쩡해.”
리스는 터질듯한 팔뚝 사이에 끼어있던 등허리를 부여잡고 앉았다. 줄곧 같은 자세로 달라붙어 있어 그런지 몸 전체가 아릿하고 뻐근한 것 같았다. 이 정도 근육통쯤이야 별것 아니겠지만 가끔 카일의 기준에선 아주 큰 병이 되곤 했다. 전에 몇 번 다친 것을 숨겼다고-딱히 숨긴 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을 뿐-과보호가 심해진 탓이다. 어떻게 보면 작디 작은 생채기에 불과할 뿐인데도, 마치 처음 넘어진 어린 아이 대하듯 걱정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리스는 어린 연인 앞에서 내색하지 않는 법을 더욱 단련해야 했다. 말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이런 상황에서조차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정말 싫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농담이야. 침대에서도 이 정도 쯤은 잘 버텨왔으니까 괜찮아.”
“…….”
“직접 확인해봐도 돼. 겸사겸사 네 상태도 보고 좋지.”
양 손바닥을 내보인 리스가 눈썹을 으쓱대며 말했다. 네 맘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카일은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슬쩍 눈매를 좁혀 보았다. 그러나 긴 정적을 참지 못한 리스가 제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는 완전한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춥습니다. 카일은 도로 그의 옷을 여며주며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리스의 상태는 좋아 보였다. 불과 몇분 전까진 저체온증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 식었던 몸엔 다행히도 적당한 온기가 감돌았다. 자질구레한 생채기를 제외하고는 심한 외상도 없었다. 그는 오히려 깨어난 뒤부터 카일을 우선으로 걱정하기에 바빴다.
카일은 현재의 몸 상태를 심문당하면서도, 맨손으론 테이블 다리를 부수고 장작을 만들어냈다. 거센 눈발과 칼바람에 창문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밖은 어두웠고 한순간도 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양의 장작이 필요했다.
“여기서 얼마나 있었지?”
“해가 완전히 진 거로 봐선, 대략 4시간 이상은 된 것 같습니다.”
“전기는 글렀고 통신기도 전부 먹통이야.”
“그래도 장작은 여유롭습니다. 사방이 목재라 뜯어 쓰기도 좋고요.”
상황보고는 기본이다. 두 사람은 습관처럼 정보를 주고받으며 각자 조촐한 내부를 살펴보았다. 정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인, 아주 좁고 낡은 산장이었다. 있는 거라곤 간이 주방의 가구-이마저도 카일에 의해 박살이 났다-와 매트리스가 빠진 침대틀, 그리고 벽난로 하나가 끝이었다. 사용감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았지만 1년 이상은 방치되어있는 곳 같았다.
리스는 텅 빈 개수대 근처에 있던 통조림통을 짤짤 흔들어 보였다.
“좋아. 잘 조절하면 2주일은 버틸 수 있겠어.”
“2주일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거린 카일이 아까 정리해둔 식량들을 재차 확인했다. 리스는 눈이 휘몰아치는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때까지 있을 리는 없겠지. 눈보라는 오래 안 가 그칠 테니까.”
산은 변덕이 심하니 당장 몇시간 뒤에 눈이 그친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방금까지도 직접 당했던 일이다. 카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주방을 뒤적이는 것에 집중했다.
구석 찬장의 안은 낚시 용품들이 듬성듬성 정리되어 있었다. 낚시하기 좋은 계절마다 들르는 건가. 흠, 얼음낚시라…. 미끼통을 들여다보며 잠깐 상념에 빠진 카일의 옆으로, 별안간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왔다. 보스? 카일은 의아한 표정을 띄우면서도 손으로는 순순히 그에게 낚싯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리스는 그걸 받아들자마자 빠르게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진짜 필요한 건 낚싯줄과 바늘 부분이었다.
“손 이리 줘.”
“예? 아….”
꽤나 맹한 소리가 새어나간다. 반사적으로 내민 카일의 손바닥 한가운데는 이미 굳은 피가 시꺼멓게 고여있었다. 여태껏 몰랐는데 상처가 제법 깊다. 그는 과거를 조금 되짚어보았다. 아마도 눈사태가 일어난 직후 무작정 리스의 군번줄을 잡아끌었을 때, 그때 남은 흔적 같았다. 그렇게 힘을 주어 당겼는데도 끊어지지 않고 버티다니. 만약 조금만 더 깊게 파묻혀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별것 아닙니다. 피도 멈췄고, 이 정도론 아프지도 않, 윽!”
“안 아프다며?”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강한 아귀힘에 붙잡힌 손바닥에서는 다시금 검붉은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피는 순식간에 팔꿈치로 기어 내려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카일은 순간 악물었던 턱에 힘을 풀었다.
“그야 그렇게 누르면 누구든, …그렇죠.”
“고집부릴 거야?”
“고집이 아니라 진짜 버틸 만 해서 그러는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리스는 미덥지 않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혹시 내 실력을 못 믿는 거라면….”
“그런 게 아니…!”
“그럼 됐네. 예쁘게 해줄게.”
어차피 이렇게 될 걸 뭣 하러 버틴다고 그랬나. 결국 카일은 어깨에 힘을 풀고 얌전히 그의 앞에 앉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곧이어 장작불에 낚싯바늘을 지지고 여러 번 소독을 한 리스가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로 다가섰다. 그가 손바닥 위로 깨끗한 생수를 들이붓자 조금씩 핏물이 씻겨나간다. 환부의 범위가 금방 뚜렷해졌다. 리스는 그의 손등을 조심스레 잡아 받쳤다. 최소 10바늘은 되겠군.
“조금만 더 깊었으면 손등을 뚫고 나왔을지도 몰라.”
그 때의 카일은 그런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오직 그를 구하기 위해 한곳에 집중하던 게 고작이었다. 그게 그깟 상처나 제 몸보다 중요했으니까.
"누가 그랬었지. 아픈 건 서로 숨기지 말자고.”
원체 그런 쪽으로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숨기는 것만큼 눈치도 늘어났다. 남자란 그렇고 군인은 더 그랬다. 하지만 연인은 그러면 안 되지. 언제부턴가 두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엄살쟁이로 만드는 게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리스의 뇌종양 수술이 끝난 뒤에도 계속 이어질 약속이었다.
리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예외야. 이번엔 좀 참아.”
대답은 나가지 못했다. 바늘 끝이 가차 없이 생살을 뚫어냈기 때문이었다. 실이 좌우를 번갈아 움직일 때마다 열 오른 손바닥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카일이라도 이 고통이 쉽진 않을 것이다. 리스는 신음조차 꾹 참아내는 연인의 굳은살 벤 손을 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잘 참으면 상 줄게.”
그 말이 최면이라도 된 듯, 마취 없는 생살 바느질은 자못 빠르고 수월하게 끝이 났다. 한참을 경직되어있던 팔뚝을 툭툭 두드린 리스가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일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바늘의 감촉이 기분 나빠서 그렇지 사실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아마도 다친 리스를 보며 치료하는 쪽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그는 안 그래도 처진 눈매를 삐죽 내린 채 숨겨둔 본심을 꺼내었다.
“사실은 네가 좀 울기를 바랐는데.”
말 끝이 은근히 시무룩했다. 제가 나이가 몇 개인데 이런 거로,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울어야 하나? 잠시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한 카일이 정성스레 꿰매졌을 제 손바닥을 보며 느리게 눈꺼풀을 끔뻑이던 때였다. 응…? 그는 더 가까이, 다시 한번 코 앞으로 제 상처를 끌어왔다. 어어….
“예쁘게 해주신다고 분명….”
“내가 그랬었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낚싯줄이 두툼한 손바닥 위를 삐뚤삐뚤, 아주 엉망인 모양새로 헤엄치고 있었다. 약간 테이저건에 맞은 지렁이 같기도 하고…. 카일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자 리스는 대놓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는 카일이 다른 반응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자. 약속대로 잘 참았으니 상을 줘야지. 네 조끼 왼쪽 안주머니를 확인해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상처만 잘 꿰매지면 됐지. 카일은 금세 괴상한 모양의 흉터 따위는 잊고 그의 말대로 주머니 안쪽을 더듬었다. 거기에서 손가락 두마디만 한 길쭉한 원통이 만져졌다. 그는 비교적 멀쩡한 쪽의 손을 써 그 작은 통을 꺼내들었다. 크기와 모양이 썩 익숙하다 했더니, 며칠 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을 때 리스가 사 왔던 딸기 맛 캔디 통이었다.
“이건…. 언제 넣어두신 겁니까?”
“언제일 것 같아?”
리스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카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 먹어둬. 기분이 훨씬 나아질 테니까.”
꼭 하루에 하나씩만 먹어야 해. 꼬마를 타이르는 듯한 어투가 이어졌다. 순간 카일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손톱보다 앙증맞은 크기의 흰 사탕을 꺼내먹는 얼굴은 꼭 불만 있는 시골 개처럼 뾰로통했다. 늘 그렇듯 인식하고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리스의 앞에만 있으면 초등생용 감정 인형처럼 이런 유치한 얼굴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게 본인을 귀여워하는 요소 중 하나라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카일은 그저 묘한 맛이 느껴지는 사탕을 입안에 몇 번 굴리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딸기 맛이 전혀 안 나는데, 이거 상한 것 아닙니까.”
“언제는 단 게 싫다더니 그새 입맛이 변한 거야?”
괜시리 부리는 뚱한 투정에 리스의 입가가 움찔 떨렸다. 카일은 억울했다. 입맛이 변한 게 아니라 맛이…. 그러나 생각은 목구멍 언저리에서 멈추고 만다. 그는 곧 포기한 듯 리스를 따라 허탈한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보스 닮아서 그렇습니다. 매번 커피에도 꿀을 엄청 타시잖아요. 가끔은 혀가 마비될 정도로 한가득 말입니다.”
“그래서. 불만인가, 중사?”
딱딱한 어조만큼 눈길이 매섭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카일이 자세를 굳히고 섰다. 군인으로서 몸에 밴 습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급히 말을 덧붙여 말했다.
“아니오. 불만 없습니다. 꿀 커피, 저도 완전 좋아합니다.”
잠시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카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완벽한 ‘기다려’ 상태를 유지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먼저 정적을 깬 리스가 일순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부들부들 떨리는 등을 보고 있자니 온 힘이 탁 풀렸다. 난 네가 꿀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는진 몰랐는데.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카일이 민망한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장난이라는걸 어렴풋이 알았음에도, 군인 계급 아래에선 별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됐으니까 저녁이나 먹죠….”
카일이 멋쩍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리스는 제 어린 부하를 더 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사람은 나무 바닥에 마주 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메뉴는 옥수수 통조림 두통과 단백질 바, 그게 다였다. 두 명이 먹기에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 있다. 카일은 허기가 적당히 찰 만큼의 소량만 위장에 넣고 즉시 먹는 걸 멈추었다. 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아무리 희망적이어도 반드시 플랜B 정도는 필요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적정선을 지키며 내일에 대비할 줄 알아야 했다.
“이쪽 방향으로 누우세요. 아직 바람이 샙니다.”
벽난로는 바람을 막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바닥에 깔려있던 카펫을 끌어와 대강 둘러 덮었다. 사이즈가 얼추 성인 한 명이 덮을 정도는 되었다. 발은 좀 튀어 나갈지 몰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다. 두사람은 거의 한 몸처럼 밀착해 때 탄 매트리스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밥도 먹었고, 불도 있는 데다가 이렇게 엉겨 붙어있기까지 하니 졸음이 솔솔 몰려왔다. 여느 때보다 피로가 극심했다. 자꾸만 닫히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던 카일은 품속의 나지막한 음성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역겨운 냄새가 나.”
“어쩔 수 없죠. 이불이나 모포가 없으니까요.”
“2주 동안 못 씻은 부하 녀석들 텐트보다 낫긴 해.”
그정도입니까? 조용히 눈을 내리감은 카일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는다.
“하긴, 3일 차부터 지독해지긴 하죠.”
“3일 차라고? 확실해?”
“솔직히 말하면, 몇시간만 지나도 구려집니다.”
“내 말이.”
동시에 웃음이 터지자 매트리스가 진동하듯 흔들렸다. 한번 옛이야기를 시작하니 소재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거 기억나십니까? 그건요? 그때랑 비슷한데요. 이 냄새나는 카펫만 빼면.... 하지만 처음엔 줄줄이 꼬리를 물던 대화도 어느새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젠 무얼 말하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도저히 수마를 견뎌낼 방도가 없었다. 카일은 흐릿한 정신으로도 품 안의 리스를 깊이 끌어안으려 노력했다. 저 멀고도 깊은 어디인가로, 리스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전부 멈출 테니 걱정하지 마.”
나무 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뒤섞이듯 스쳐 갔다. 그의 말대로 구조팀은 벽난로 굴뚝의 연기를 보고 이곳의 위치를 진즉 파악했을 것이다. 폭설과 바람만 멈춘다면 이곳에서 나가는 건 금방이다. 그럴 줄 알고 장작도 미리 많이 패뒀고, 정 안되면 찬장까지 부수면 될 일이었다. 걱정은 없었다. 이런 건 그냥, 그들에게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말 나온 김에 규칙을 정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모닝 커피를 타다 말고 갑자기 꺼낸 이야기였다.
‘절대 아픈 건 숨기지 않는다.’
‘응?’
리스는 꿀 넣기용 티스푼을 준비하던 손을 멈추고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로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아픈 곳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하자는 뜻입니다.’
테이블 맞은 편에서, 단단히 팔짱을 낀 카일이 자못 무게를 잡으며 서 있었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인가 싶었지만 리스는 곧 이 대화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저께 누군가를 돕다가 생긴 멍 탓인 듯했다. 사실 범위만 컸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카일이 말한 요지는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리스 또한 그를 걱정했을 테니까.
’좋아. 그러자.’
‘약속하신 겁니다.’
‘응, 알겠어. 약속해.’
‘네, 저도 약속하겠습니다.’
예상보다 매끄럽고 수월한 흐름이었다. 카일은 그제야 터질 듯이 부푼 팔짱을 편안하게 풀고서 그에게 방금 막 끓인 커피를 건네주었다. 리스는 평소대로 받아 든 커피에 꿀을 왕창 넣은 뒤 스푼을 휘저었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카일을 마주 보고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크리스. 혹시 그 말, 섹스할 때도 포함인가?’
‘예? 섹….’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출몰에 카일이 렉걸린 로봇처럼 버벅댔다.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는 잠시 골똘히 고민했다. 어느 쪽이 더 좋을지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답은 빠르게 내려졌다.
‘일단 섹스는 예외로 하죠. 세이프 워드도 사용한 적 없으시니까.’
‘버틸 만 해서 그런 거야.’
‘매번 기절하시지 않습니까.’
‘다음날 바로 일어나잖아? 그럼 된 거지. 그 정도가 딱 좋아 난.’
하여간 고집은. 섹스라는 게 원래 조금씩 고통을 깔고 가는 거라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 약속이 어딘가 싶었다. 카일은 저 혼자만의 소소한 납득을 하며 그의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곰돌이 모양의 꿀 병과 눈이 마주치자 왠지 픽, 하고 웃음이 샜다. 방금까지 섹스 이야기 중이었는데 곰돌이 꿀 병은 좀 안 어울리지.
‘크리스.’
‘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보다 조금 큰 손바닥 안엔 제가 타준 커피잔이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잔 위로 리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우리가 약속한 건, 감정이 아픈 것도 포함된 거야.’
커피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일은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리스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근본적으로 관통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참에 카일은 그걸 끄집어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본인도 모를 때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감정이 아픈 건지 어떤지를.’
‘그러게. 왜 모르는 것 같아?’
‘그건….’
갑자기 물으니 말문이 막히고 만다. 카일은 또다시 상념에 빠져 고민했다. 그러게요. 왜 모르지? 내 감정인데. 그냥 내 감정에 지기 싫어서? 아니면….
그는 고심 끝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정하기 싫은가 봅니다.’
‘눈물 많은 엄살쟁이라는 게?’
‘제가 언제 눈물을…. 엄살도 부린 적 없습니다, 전. 솔직하니까요.’
카일이 당당히 반박하며 리스를 바라보았다. 커피잔에선 여전히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리스의 뒤로 문득 창밖의 풍경이 보였다. 바깥은 어느덧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첫눈이던가. 예쁘게 흩날리는 눈에 시선을 빼앗긴 카일이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보세요. 첫눈 입니다.’
창가에 쌓인 눈덩이가 툭 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무척 가까웠다. 산장 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카일이 퀭한 눈가를 매만지며 깨어났다. 다행히 춥진 않았다. 장작은 아직 미세한 불을 품으며 온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보충해두지 않으면 곧 꺼질 것 같았다. 카일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제 만들어둔 장작더미를 찾았다. 하지만 밤새 전부 태워버린 건지 남아있는 장작이 하나도 없었다.
“제임스, 장작이 없….”
돌아본 매트리스의 위는 텅 비어있었다. 볼일 보러 간 건가? 아니면 눈이 그쳤으니 바깥 상황을 살피러 나간 걸지도 몰랐다. 카일은 우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장작을 패놓고 얼른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볼 생각이었다.
벽난로 안을 들여다보니 재가 검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불을 더 지피려면 재를 좀 치워야 할 것이다. 카일은 꼬챙이로 쓸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고요하던 집 밖에서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순식간에 바닥이 진동했다. 이건 분명, 헬기 소리다. 드디어 두사람을 위한 구조팀이 도착한 것이다.
카일이 상황을 인식했을 땐 이미 산장의 문이 박살 나며 열린 후였다. 곧이어 산장 안으로 익숙한 차림의 동료들이 몰려 들어왔다. 정신없는 움직임들과 소음이 태반이었지만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그 중 의료팀 하나가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중사님! 괜찮으십니까? 일단 물부터 좀 드신 뒤에 부상 여부 확인하겠습니다.”
“난 괜찮아. 손을 조금 다치긴 했는데 이미 치료했으니까. 나보단 제임스 리스 소령님 쪽을 먼저 체크해야 될 거야.”
오다가 마주쳤겠는데. 아마 이 주변에 계실 거라. 덧붙인 그의 말에 이곳저곳을 체크를 해주던 군인들이 일순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단 몇초 만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해갔다. 왜? 영문을 모르고 되묻는 카일의 반응에 의료팀이 자신의 손을 내밀어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제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십니까.”
“뭐야,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수분이나 영양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 곧바로 이송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이송 가능하답니다. 바로 이동 준비해두겠습니다.”
일은 빠르게 돌아갔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가 분주히 대화를 이어간다. 카일은 현재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올라오는 화기를 겨우 누르며 재차 말했다.
“난 괜찮다고 말했어. 거기 너! 밖에 계신 제임스 소령님부터 모시고 와. 어제 잠깐이었지만 저체온증이 있었으니까 그것부터 확인을….”
“중사님, 조난된 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고 계십니까.”
“지금 장난해? 어제,”
“17일째입니다.”
“…뭐?”
“위치는 이틀 만에 파악했었지만 17일 동안 기상악화 여파로 접근이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아까부터 모르는 사람들과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대화의 추가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말이 안 됐다. 카일은 다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분명히 어제였다. 눈사태는 바로 어제 벌어졌고, 리스와 함께 하룻밤을 이곳에서 버텨냈었다. 그래, 제임스와 둘이서 함께….
카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에 리스가 온다면 전부 설명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카일은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군인들을 거칠게 밀치고 산장 밖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아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인내심이 폭발한 그가 사포처럼 뒤집어진 목소리를 내었을 때, 어렵게 하사 하나가 끼어들어 말했다.
“제임스 리스 소령님은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뇌종양 악화로 수술 전날에….”
그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어졌다. 하지만 카일에겐 그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발밑과 심장이 동시에 추락하는 기분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아니면, 진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웅웅대는 귓가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뭣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 다시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걸어 들어갔는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생각과 감각을 오직 한 사람의 흔적을 찾는 데에만 몰두해야 했다. 곧장 뒤따라 들어온 이들은 침묵 속에서 홀로 기억을 쫓아가는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산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겨우 한사람이 누울 수 있을 사이즈의 매트리스, 절반가량만 남아있는 옥수수 통조림과 물병, 그리고 벽난로 속의 산처럼 남은 재. 카일은 천천히 손을 들어 꿰맨 흉터를 응시했다. 텅 빈 눈빛이 끔찍할 만큼 엉망으로 새겨진 상처의 길을 담았다. 왼손을 사용해 스스로 치료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어지러이 떠오른다. 그는 멈추지 않고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그 속에서 꺼내어진 것은 반 이상이 차 있는 투명한 약통이었다.
‘환각이나 환청, 불안이 심한 경우 하루에 한 알씩 꾸준히 복용을….’
의사의 말이 안개처럼 희뿌옇게 사라져간다. 새하얀 알약들 속에 뒤섞여있는 작은 딸기 맛 사탕 한 개가 카일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구급상자 안에 항상 담겨있던 제임스의 사탕. 그리고….
목에 걸린 두 개의 군번줄을 잡아 쥔 손이 아픔도 잊은 채 정처 없이 떨려온다. 크리스 카일은 제 피로 얼룩진 더러운 군번줄 하나를 시리도록 푸른 눈 속에 새기길 반복했다.
‘REECE JAMES S.’
그의 이름 위로 가쁜 숨결이 스쳐 닿는다. 닳도록 봐왔던 사랑하는 이의 표식은 아무리 손가락으로 문질러도 다시 선명해지지 않는다. 물기 어린 각인 위로 묻은 검은 흔적은 지독히도 더럽게 엉겨 붙어있다. 그를 끊임없이 젖게 만드는 건 눈이 아닌 바로 자신이란걸, 카일은 비로소 깨닫고 만다. 눈 속에서 당신을 구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사실은 당신이 날, 지금까지도.
카일은 눈물을 닦는 법도 잊고 그의 군번줄을 품에 안았다. 목구멍으로 삼킨 숨이 연신 심장을 움켜쥔 채 놓아주질 않는다. 멈춘 게 아니라 그저 잡고 있었을 뿐이라는 듯이 그렇게.
하지만 제임스, 가끔은 생각과 행동이 어긋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당신도 아마….
꿈속의 어느 카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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