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상호병찬
병찬은 벌벌 떨리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린다. 귀가 먹먹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에서 빛이 번진다. 병찬은 이 순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다.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스친다던데 병찬은 당장 이 순간의 모든 감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정신을 꺼트리면 그대로 끝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머리를 잠식한다. 죽고 싶지 않은데,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은데.
먹먹한 귀에 기이할 정도로 선명한 소리가 들린다. 밑창이 어느 정도 닳은 구두의 둔탁한 소리. 그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온 세상이 뿌연 와중에도 다가오는 이의 구두와 바지는 선명했다.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시선을 위로 올린다. 평소에는 편한 옷만 입고 다니더니 제 앞에 선 이는 이질적일 만큼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 그 위에 입은 트렌치코트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론 어울리는 것 같았다.
"병찬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하다. '그것'이 제 앞에 쭈그려 앉는다. 대답할 힘이 없어 입술 하나 뻐끔거리지 못했으나 병찬은 어떻게든 눈을 맞추려 들었다. '그것' 역시 계속해서 눈을 맞춘다. 검게 가라앉은 갈색 눈. 주변의 빛을 모두 잡아먹어 버리는, 살아있는 것으로 볼 수 없는 죽은 눈. 그것이 병찬을 들여다볼 듯 마주한다.
"제게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뱀파이어로 만드는지 물어보셨죠."
그래, 기억이 난다. 피를 먹고 싶다 말했고, 뱀파이어가 될까 싶어 흔히 들어오는 이야기를 말했더니 부정했던 네가 기억 났다. 그러면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수를 불리는 거냐고. 그 말에 너는 그냥 웃으며 모른다고 넘겼던 것이 생각난다.
박병찬은 어째서 기상호가 이런 상황에 제 앞에 나타났는지를 깨닫는다. 기상호가 손을 뻗는다. 아직은 온기가 남은 볼에 차디찬 손이 닿았다.
"햄, 살고 싶으세요? 다시는 태양 아래에 설 수 없고 좋아했던 음식들을 즐기기는커녕 나와 같은 존재였던 것들의 생을 갈취하고 싶으세요? 그 무엇 하나 쉬이 사랑하지 못하면서 주어진 불멸을 저주하고 싶으세요? 하루에 수십번을, 그렇게 몇백년을 후회하고 싶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고 싶으세요? 아니면, 끝까지 인간으로 죽고 싶으세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하기에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여상한 말투였다. 마치 오늘은 뭘 먹고 싶은지 묻는 것처럼, 피를 먹고 나서 생긴 상처에 어떤 반창고를 붙여줄지 묻는 것처럼.
박병찬은 제 앞의 괴물을 마주 보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는다. 살고 싶었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기상호와 같은 존재가 되는 순간부터 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에서 도망가고자 괴물이 되는 것은 주객전도다. 박병찬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소리 하나 내지 못했으나 기상호는 박병찬의 답이 무엇인지 짐작한 것처럼 몸을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박병찬의 몸을 잡아 일으킨다. 차에 치이고 바닥을 구른 몸은 그걸로도 비명을 질렀다. 박병찬이 이를 악물어도 일으키는 손길이 부드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입이 벌려진다. 고개가 들린다. 입 안으로 따뜻한 것이 밀려들어 온다. 비릿한 맛이 혀 끝에 느껴진다. 목구멍으로 타액이 아닐 것이 분명한 액체가 흘러들어온다. 박병찬은 흐린 눈을 뜨고 기상호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생기 없는 눈은 박병찬을 마주 보고 있었다. 입이 떨어진다. 기상호는 다시 박병찬을 눕혀주더니 웃음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햄은 제가 봐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사람다워요. 그러니까, 우리 또 봐요."
뭘 어떻게 또 보는데? 박병찬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정신을 잃기 전 그것에 답한다.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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