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바린

갈매기에게

월간 에바린 4월호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3부와 4부 사이의 시점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2차 창작물입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하고, 실제 연극의 내용과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목은 ‘정우-숙희에게'에서 착안했습니다. 제목만 따왔다고 생각하는데, 노래를 다시 들으니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같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영향을 받았습니다. 노래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youtu.be/CmjC4ZuUDYM?si=oyJ9Kj3Of1gj8HrR

"괜찮아? 정신이 좀 들어?"

침대 위에서 막 눈을 뜬 금발의 여인을 향해 물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고개를 돌린 여인이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여인은 눈물을 흘렸다.

"여긴…."

"내 집이야."

"죄송, 죄송해요…."

제인은 대답 대신 손수건을 집어들고 여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여인은 한참을 말없이 훌쩍거리다가 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신께 드려야지, 니나. 마침 내가 그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어서 다행이니 망정이지, 그렇게 무턱대고 떨어지면 어떡해."

우연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니나가 뛰어내린 다리는 인적이 드문 교외에 위치한 곳이었으니까.

제인은 꽤 오래 전, 니나라는 여인이 이 낡은 빌라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순히 꿈을 위해 상경했다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녀의 집에 왠 늙은 소설가가 들락거리더니, 소설가와 니나를 찾는 의뢰가 동시에 들어왔다. 의뢰인들은 이 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의 부유한 미망인과 그 아들이었다.

제인은 정말이지, 가능하면 이 의뢰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미망인은 유명 연극 배우 출신으로 이따금 신문에도 오르내리던 자였고, 소설가 역시 미망인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편이었다. 언젠가 두 사람이 다정하게 거리를 걷는 모습이 찍힌 삼류 가십지를 본 기억도 있었다. 이런 치정극은 구질구질했고, 보수도 짠 편인지라(심지어 그 미망인의 의뢰금 역시 짠 편이었다), 엑스트라로도 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인은 의뢰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밀회를 지켜보았다. 굳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기적으로 보고는 해야했기 때문에 가끔 마주쳤을 때 근황을 물을 정도의 친밀감만 유지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보다는 오래 걸리긴 했지만, 소설가는 니나를 버린 채 미망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쯤, 미망인의 아들로부터 두 번째 편지가 왔다.

"저는…."

제인이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을 때쯤, 그리고 니나가 더듬거리며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할때쯤, 난로 위에 올려둔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 손잡이를 들고 미리 준비해둔 찻잔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쟁반에 찻잔을 담아 자리로 돌아와서는 니나에게 권했다.

"차라도 좀 마실래? 일어날 수 있어?"

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니나는 그제야 자신이 맨 몸에 원피스만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매가 긴 원피스는 니나의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왔다. 제인은 얼른 니나의 소매를 걷어주었다.

"미안. 옷이 다 젖어서 우선 내 옷을 입혀뒀거든. 옷은 말리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 그러셨어요."

"응?"

"내버려두지… 그러셨어요."

제인이 고개를 들어 니나를 바라보았다. 니나의 고개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찻잔, 소매, 그 어느 곳도 향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기도 했고, 무언가를 보고있는 것같기도 했다.

"소매가 불편하면 차를 마시기 힘들지 않겠니."

제인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니나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강에서 뛰어내릴 때 말이에요."

"언니가 보고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거야."

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하면서 가까스로 조금 전의 실수를 수습했다. 니나의 상태를 보면 애초에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 언니, 저는 갈매기에요."

니나가 뜬금없이 이야기했다.

"갈매기가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하늘에는 꿈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미래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총에 머리를 맞았어요. 언니, 사랑에 빠져본 적 있어요?"

"글쎄, 나는 사랑을 잘 몰라."

제인이 대답했다. 아마도 니나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같은 건 아닐테니까. 니나는 계속 이야기했다.

"그 사람을 처음 본 순간 머리에 총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게 사랑이었을까요? 동경이었을까요? 저는 갈매기에요. 그대로 그 사람의 품에 추락했어요. 그 곳이 새로운 터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 저는 꿈도 희망도 미래도 잃었어요. 저는…."

니나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인은 찻잔을 내려두고 다시 한 번 니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언니, 이런 얘기 들은 적 있어요? 한 남자가 마을 처녀에게 장난스럽게 다가가서는 그 여자를 재미로 파멸시켜요. 저는 모든 걸 잃었어요. 운명이란 참 가혹해요. 저에게 그 사람을 알게 하고, 사랑에 눈뜨게 하더니, 제 열정과 행복을 빼앗고는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을 안겨줬어요. 저는 갈매기에요…."

"… 니나."

제인이 입을 열었다. 니나는 여전히 훌쩍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녀를 좋게 타일러서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안되는 자신의 첫 원고료를 그대로 흥신소에 보낸 옛 약혼자의 품으로. 하지만.

"운명이라는 걸 믿지 마."

"언니."

"운명은 없어."

제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걷어 두 다리를 보여주었다. 긴 치마 아래 감춰져있던 쇳덩어리를.

"언니는, 언니 손으로 가족들을 죽였어. 적어도 언니는 그렇게 생각해. 10년 전 바로 이 도시에서 폭발이 있었어. 가족들과 함께 박람회에 왔다가 폭발에 휘말렸지. 마차로 꼬박 일주일은 걸리는 곳을 가자고 우긴 건 언니였고."

"…."

"네 표현대로면, 그래. 운명은 내 행복과 가족과 사지를 빼앗고 슬픔과 절망과 자괴감을 주었어. 하지만 그게 운명이었다면, 내가 박람회에 가지 않았어도 가족들은 죽었다는 이야기잖아? 그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안배해뒀다고?"

"…."

궤변이라는 걸 안다. 반박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테고, 긴 밤을 지새워가며 이야기해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17살의 '제인 볼첸홈'에게는, 살아가는 데 이만한 도피처가 따로 없었다.

"운명을 믿지 마, 니나."

니나의 젖은 양 뺨을 잡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며 말했다. 공허한 푸른 눈이 눈물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제인은 또박 또박 이야기했다.

"운명을 믿지 마. 너의 선택을 믿어. 너를 믿어."

"언니…."

"그러지 못하겠으면, 언니를 믿어."

"저는…."

니나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제인은 눈물을 닦아주려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그냥 니나를 안아주었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체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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