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년
1주년 로그
나는 여름을 좋아했다.
무성히도 들리는 소리가 이유 중 한 가지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나, 장마철의 빗소리, 풀들이 바람에 스치거나, 매미들이 우는 따위의 소음이 어릴 적의 나를 즐겁게 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한 계절은 여름이었다.
겨울을 지나 죽어 다시 살아난 고목처럼,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시간은 이 계절뿐이었다.
생명이 끝없는 순환을 하듯, 나 또한 여름에 무성히 살았다 겨울에 죽어가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관통하는 시간은 매우 느렸기에, 나는 그저 익숙함이라는 지루함에 파묻혀 지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이것은 내가 사랑한 당신에게
바치는 첫 번째 회고록이다.
01. 내게로 날 것의 시선이 들이박혔다.
나를 향하는 시선 뒤로 싸늘한 시체처럼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끝없이 두들겨대는 빗방울들이 소음을 만들어냈다. 가로등 하나만 깜빡이며 점멸하는 빛이 들어오는 골목길에는 너와 내가 있었다. 적대감과 두려움이 섞여 있는 눈동자는 내가 네게서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거리의 들짐승처럼 적대감만 있던 것이 점차 두려움이 섞여 다른 이질감을 만들어내고, 이제는 제법 사람 손을 탄 것처럼 굴지 않았던가. 그런 너의 뺨을 비를 맞으며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축축하게 젖은 창백한 살갗이 얼음장같이 찼다. 방금 제가 내려친 마찰음에도 불구하고 온기 따위는 하나도 있지 않았다. 이 여름날 이리도 서늘한 것을 보니 오래 있었나 보지. 여전히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빗물로 얼룩진 네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네게 말을 건넸다.
“이만 가지. 날도 추운데.”
제 말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처량했다. 하기사, 그 천박한 것들에게 당하고 이리 구석진 곳에 버려졌다 하니. 너의 형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흝어보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걸음, 두걸음 사이의 거리가 벌어질수록 찰박이는 소리가 걸음을 걸을 때마다 뒤따라왔다. 고가를 호가하는 구두는 제 값어치를 무색하게도 길가의 물을 먹어 젖어들어갔다. 그래, 어릴 때는 이 소리가 참 즐거웠는데. 비가 고인 수면 위로 비친 네 모습을 보며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나는 지극히 타인에 관심 없는 사람이다. 국회에 있는 그것들이나, 지금껏 만났던 이들의 얼굴을 알지 못할 정도로.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제 가족이었다.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빗소리는 잇따랐다. 우산에서 벗어나 비를 맞으며 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는 왜 기억할까, 내가. 콘트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네 모습은 물에 젖은 피식자나 다름없었다. 금방이라도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듯한. 너와 시선을 마주했다. 순간 번득이는 금안을 보고서 웃음이 온 얼굴에 번져나갔다.
아, 네가 이래서.
내가 기억을 하는구나. 한참 동안 말간 웃음이 흐트려졌다가 잦아든다. 너는 수 초간 아무말 없다가 다른이에게 우산을 건네받고 내게 씌워주었다. 저는 그 뒤로도 잔웃음을 터트리다 숨을 고르고 골라, 다시 걸음을 옮겨 의회를 향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사라지고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비로 먹은 구두 밑창이 밟아 올라간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정면을 향하면, 저를 보고 애가 닳아 달려오는 이들이 벌써 수두룩했다. 제게 가장 가까운 것은 네가 있는데도, 제게 한 번이라도 눈에 들고 싶어서.
너는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 중 하나였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자신을 내려놓는 네가. 국회의 늙은 치들이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아까도 그렇지 않나, 또 무슨 일을 시키고 비 오는 날 골목길에 버려놨는지. 그러나 그것은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그들에게 제지를 가할 명분 따위는 없었다. 그저 너는 내가 잠깐 즐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너를 노린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치며 네가 내밀어주는 마른 수건을 익숙하게 받았다. 구두는 빠르게 준비되었고, 옷도 마찬가지였다. 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고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곳은 다른 사람이 있으니 가보라는 투였나.
“옷 갈아입고 오게.”
명령조도 아닌 그저 내뱉은 말에 경직되는 너의 모습이 보였다. 굳어가는 표정과 얼굴을 보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그저 대화를 마쳤다. 이때의 나는 모두에게 얄팍한 이해심과 무관심을 가졌다. 나는 언제나 이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허나 그것은 방관이었고, 동시에 너를 죽이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오만하게도, 과거의 나는 네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02. 여전히, 지금까지도.
기억이 선명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날의 너를 끌어안고, 미안하다고 속죄하고 싶다. 펜을 쥔 손이 세월이 지났음을 무상히 말해주는 것에도 불구함에도, 여전히.
그날도 마찬가지로 비가 왔었다. 내가 가장 잘못된 것을 저지른 날의 밤이었다. 새벽의 창백함이 서린 너의 얼굴이 기억난다. 비 오는 하늘의 잿빛보다 더한 너의 눈동자와 표정이. 마음이 죽었던 네 얼굴을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다. 지금 이 회고를 쓰는 순간, 그리고 죽어서도 네게 왜 그런 잔인한 말을 했는지 후회한다. 그것은 내가 너에게 뉘우쳐야 할 잘못이다. 그 순간에 네가 한 말과 감정이 낙인찍힌 듯 기억이 선명했다. 이 기억을 평생 가지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가, 혹은 네가, 그것도 아니라면. 신이 나의 죄를 벌하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네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주름진 손을 가지고 어설프게, 그리고 다정히 적으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기록하는 것은 네가 좋아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참 많지 않은가.
부끄럽게도, 지금에서야 말을 고한다. 나는 네가 끌어안고 있던 그 끔찍한 시간과 감정을 내가 다 가지고 가길 바란다. 내가 죽고, 당신이 죽어서 다시 만날 때까지.
그래, 주제넘게도.
그 생각을 하게 될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허나 지금도 마찬가지임은 다르지 않다. 다 늙어도 여전히 철없고, 장난기 많고, 네가 사랑해주길 바라는 나는 여전히 네게 주제가 없다.
이제야 생각해보면, 나는 네게 생각보다 일찍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과거에 절망에 빠져 울던 너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너무 많이 울어 발갛게 익은 눈가, 쉴 틈 없이 떨어지는 눈물과 텅 빈 눈. 그것을 보고 나는 그날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울던 네 모습이 짜증이 났던 것도 아니고, 예뻤던 것도 아니었다. 지쳐버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도 내 곁에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미 따위가 아니었다. 너를 이용해 어떤 결과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랐던 적은 없지 않은가. 하물며 제 가족에게도 이런 생각을 품은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아닐 거라며 부정했다.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렇게 부정을 하면서도, 항상 너를 방관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내 시선은 집에가는 내내 네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가 누군가를 부정하고, 내 감정을 부인하고, 그럼에도 그 순간 너만 보았던 것은 사랑이었을 것이었다. 비록, 내 스스로가 그것을 깨달은 시점이 너와 우리 아이를 가지고서라는 것이 슬펐지만. 그때의 네가 네게 조금 더 솔직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또 후회하고 기록한다. 글씨가 남아 잉크가 마르고, 네가 이것을 볼 때 즈음 네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 나는 많은 것을 후회하고 네게 또 미안해하며 가지만, 너를 이렇게 사랑했다고.
네게 처음 말하는 사실이니, 아마도 네가 이것을 보고 헛소리하지 말라며 한 소리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펜을 들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나의 유일한 당신에게 나는 회고한다.
나는 당신의 인생이 행복했음을 바라고, 또 소원한다.
그리고 그 행복에 내가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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