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리정초치 C+

2024. 03. 13. 발간 질잔느 if 단편집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수록

용의 마녀가 구국의 성녀를 쓰러트렸다.

사룡은 성자와 용살자의 손에 쓰러져 마땅하건만,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아니다. 미래를 구하러 온 자는 합당한 증오 앞에 무릎 꿇었다. 마녀의 분노가 닿는 곳마다 끝없는 개선이 이어졌다. 피에 젖을 새도 없이 불길이 휩쓴 땅, 그 위를 맴도는 붉은 먼지, 유린당한 시대. 프랑스의 모두가 결코 회개하지 못할 원죄에 대한 값을 치른 결과,

서력 1431년 이후의 프랑스가 사라졌다.

 

-

마침내 세상에 승리했다. 캐스터 질 드 레는 이것이 마녀가 바라던 세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세상이 그를 환영한다고, 성배가 만들어낸 잔 다르크야말로 마땅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감격에 찬 언어를 중얼거렸다.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뛸 듯이 기뻐하는 마녀를 상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 세계와 가장 어울릴 자가 보이지 않았다.

질 드 레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눈을 굴리고 고개를 돌려 보아도, 그의 시야는 지옥 같은 풍경만을 담았다.

성녀를 되살릴 수 없다는 분노에 눈이 먼 남자는 결국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잔 다르크를 잊었다. 생살이 타는 분노로, 저를 배신한 이들에 대한 증오로 만들어진 이는 애초에 잔 다르크가 아니다. 만능의 그릇이 사람 하나 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그는 결국 신의 부름을 받은 자조차도 의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복수를 전제한다. 이 나라를 향해 자신만큼이나 분노할 자를 바란다. 루앙에서의 무력감을, 한 살인마가 여생 동안 품었던 슬픔을 욱여넣는다. 그가 만들어낸 성녀는 오로지 프랑스를 멸하기 위한 존재. 성배가 인식한 새로운 소원에는 잔 다르크라는 이름이 없었고, 질 드 레의 비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성배의 주인은 이 땅이 불탄 뒤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는데 이 이상 바랄 게 어디 있겠나? 소원이 이루어진 이상, 복수를 위해 만들어낸 도구들은 무의미하다. 용의 마녀 역시 군졸, 광기에 빠진 종복, 그리고 사룡과 같은 존재. 그들 모두는 성배의 주인이 바란 풍경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다.

용의 마녀는 그가 만들어낸 가장 큰 실패작이다. 캐스터 질 드 레가 모든 걸 바쳐 이루고자 한 소원 역시 덧없는 꿈에 불과했다. 마녀는 제가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 본디 이 세상에 없어야 마땅한 사람처럼.

사랑하는 성녀를 위한 지금까지의 간절함이 질 드 레의 가장 큰 패인이었다. 십수 구의 시체 사이에서 눈을 뜬 성녀를 끌어안은 순간부터, 질 드 레는 인과율의 덫에 걸려 있었다.

신이라는 작자는 관조한다. 용의 불꽃 아래 스러진 이들이 지키고자 한 억지력은 이제 무력하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막대한 마력만이 세상에 남았다.

서번트, 마원수 질 드 레는 선명한 육신을 느꼈다. 사방에서 밀려들어온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늘을 가린 두꺼운 연기.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화염. 누군가의 절규가 뒤늦은 이명처럼 찾아왔다. 그자는 제게 주어진 단 하나의 힘을 붙들고 차마 언어라 부를 수 없는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남자는 말이 되지 못한 소원을, 열망을 쏟아부었다. 그의 충실한 벗은 염원의 불완전함마저 반영한 결과물을 토해냈다. 단 하나, 그가 이 세계와 바꿔서라도 얻고 싶던 존재를 제외하고서!

땅 위에 나타난 형상들은 신관이고 집행인이며 적이자 아군이었고 동시에 단편적으로는 그가 찾던 성녀였으나, 무엇보다도 즐비한 시체였다. 어떤 소망은 죄가 되기에, 남자는 끝내 제가 사랑하던 마녀마저도 모독하고 말았다.

당신이야말로 나의 성녀. 감히 모조품이라 이르지 못할 진실한 존재. 그런 자를 십수 구의 위작 - 이를테면 가장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쓰러진 사체로 만들어버리고도, 사내는 가책조차 없이 다시금 소원을 빌었다. 화염이 닿지 않은 땅, 아직 젖은 땅에서 인영이 하나 솟는다. 해체와 재구축을 반복하던 창조물은 결국 여 다른 실패작들처럼 부정형의 살점이 되어 쌓이고 만다.

가능성을, 무한한 가능성을! 성배의 빛은, 다가올 어떠한 시대에 존재할 복수자를 내 앞에 데려올지니! 그는 부활도 재회도 바라지 않았다. 한 치의 가능성. 어떠한 위작이라도 좋으니, 오를레앙에서 보았던 기적을 다시금 눈에 담고자 했다.

불길이 지상을 스친다. 성배가 만들어낸 육신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몇 줌의 잿가루와 붉은 먼지만이 불안정한 대기 속에서 춤출 뿐이었다. 성배에서 넘친 이물들은 가까스로 인간의 태를 갖추고 있었다. 뼛속의 골수가 골질과 검게 탄 살점 밖으로 끓어 넘친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바싹 마른 풍경과 정반대의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머리 위를 적시던 어느 날의 기억 - 질 드 레는 오를레앙 탈환의 밤을 떠올렸다.

 

-

궂은 비가 내렸다. 잔의 말에 따르면 온 세상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성채에 붙은 불은 순식간에 꺼졌고,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운 용의 비늘 위로 억수 같은 소나기가 승전보를 올렸었다.

질 드 레는 눈물까지 흘려가며 시대의 주인을 맞이했다. 한때 이곳에서 역사가 쓰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그뿐이다. 마녀는 그을음 묻은 성채를 조용히 활보했다. 탄생의 순간부터 이글거리던 이유 없는 분노가 가장 먼저 향했고, 허무할 정도로 쉽게 사그라들어버린 곳. 용의 마녀에게 오를레앙 성은 그저 과녁이었다.

마녀는 비가 그칠 때까지 밤을 지새웠다. 짙게 깔린 구름은 여명 직전이 되어서야 걷혔다. 햇볕에 밀려 지워지기 직전의 별들을 보며, 잔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타오른 불도 저 하늘이 보기에는 한심한 수준이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기필코-”

“바깥세상에는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의 불덩이가 있잖습니까? 저 별들에 비하면, 이 복수극은 한없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오늘만 해도…… 내 분노는 사사로운 세상의 변덕에 꺼졌잖아요.”

“감히 부정하겠습니다. 당신의 용은 유린을, 당신의 창은 모독을 위한 것. 주의 뜻을 전하는 이를 태어난 곳으로 끌어 내리고 영영 눈뜨지 못하게 합시다. 제가 전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불초 질 드 레,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칠 테니 - 부디 염려 마십시오.”

마녀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잔별에 이어 북극성마저 물러난다. 질 드 레는 동틀 녘의 햇살이 들이치는 모습을, 어김없이 빛나는 하늘이 자신의 성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고요한 풍경 가운데, 잔 다르크가 입을 열었다.

“질, 복수하게 해 주세요.”

잘 벼린 한마디가 사명처럼 박혔다. 질 드 레는 모든 이유가 담긴 시위를 놓았다. 쏘아낸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는 무관하다. 마술사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짐은 단 하나였다. 이 하늘의 풍경이 바뀌기 전, 그에게 불타는 조국을, 완전한 복수를 선사하겠노라.

“몇 밤만 지나면, 당신 머리 위 모든 별이 흉성이라 불릴 겁니다.”

 

-

흉성은 여전히 하나뿐이다. 황혼의 태양이 불타는 땅에 질세라 붉은빛을 발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체 같은 피부 아래에도 여전히 피가 흐르나 보다.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한 적색이 감은 눈 위를 가득 채웠다.

이는 머리를 조아려 자신의 별을 받들던 시절을 연상시켰고, 그보다도 저주스러운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질 드 레가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붉은색은 화형대의 풍경이다.

1431년 5월 30일, 질 드 레는 루앙에 없었다. 얼마만큼의 불길이 그를 집어삼켰는지 모른다. 채 열아홉도 되지 못한 소녀가 얼마나 많은 재로 화했는지, 그 연기가 얼마나 두껍게 하늘을 덮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규칙이 그의 발을 묶었다. 프랑스 왕실에 비견할 부를 가졌음에도, 세 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자 전쟁영웅이면서도, 그의 벗이라 불렸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미치광이 레 남작에 대한 어떤 소문이 돌더라도, 그는 항상 세상이라는 굴레에 매여 있었다. 그의 원죄는 어린 아들의 대가로 건넨 은전 몇 닢으로, 어질러진 책상 위에서 피어오르는 수은 연기로, 악마 숭배에 대해 자백하라는 협박장으로 거듭 변했다. 그가 품은 두려움이 교수대에 걸린 밧줄의 형태를 취했을 때, 질 드 레는 마침내 해방될 수 있었다.

마스터 없이 맛본 해방은 생전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마녀는 용의 불꽃으로 땅을 사른다. 군졸들은 하찮은 병장기 따위로 이에 맞서다 일격에 쓰러진다. 불패의 진군, 일방적인 유린.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민가가 불탄다. 허공에 날리는 잿빛이 용의 문장을 덧그린다.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그는 사룡에 오른 주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로, 그의 아래서 조아리는 모습이야말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었다.

피에 젖을 새도 없이 불길이 휩쓴 땅, 그 위를 맴도는 붉은 먼지. 불티 날리는 허공 위로 어른거리는 영광스러운 풍경 - 투쟁은 끝났고 사랑마저 잃었으니 세상이 어찌 홀로 버틸 수 있겠나?

질 드 레는 마술서를 화염 속에 던졌다.

단순한 충동이었다. 이뤄야 할 소원이 없기에, 목숨처럼 지니던 마도구조차 쓸모없다고 여겼다. 새로이 살라 먹을 물건을 본 불길이 이리 떼처럼 덤벼들었다. 표지를 감싼 인피가 불타고, 구주의 형태로 못 박힌 소년의 부조 역시 붉은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종잇장 타는 소리가 비명 같다. 더는 데워질 공기도 없건만, 짙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마술사는 이계로부터 흘러넘친 막대한 마력이 이 땅에 도래했다고 믿었다. 성배조차 이루지 못할 기적이 일어났다고, 찢긴 틈새로 넘쳐흐른 마력이 진정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바란 기적은 조잡한 세상을 끝에 이르게 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는 인리소각과 무관하다. 질 드 레에게 성배를 쥐여준 이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번진 불길에 만족했다. 미쳐버린 마술사는 프랑스와 함께 소멸하게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게다가 그는 일생일대의 기쁨에 젖어 있지 않나!

제아무리 신을 의심하고 저주하여도, 그 역시 주의 굴레 안에 든 자다. 천국과 지옥도, 원죄와 신벌마저도 모독자의 세계 속에 건재하다. 질 드 레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나를 아직 지옥에 떨구지 않았으니, 지상을 지옥의 풍경으로 물들이면 그 역시 내 앞에 나타날 수 있으리라.

신은 인류 최후의 번제에 틀림없이 만족했다. 질 드 레는 어떤 불길보다도 찬란한 빛을 눈에 담았다. 멸하고 멸하다 밤낮조차 잊은 자에게 돌연 찾아온 이른 아침, 마침내 떠오른 길잡이별, 세계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기적. 서번트는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영혼보다 먼저 구원받은 두 눈을 뽑아내고자 했다. 바싹 마른 손끝이 질척하게 물들었음에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직접 내리는 신벌은 어떠한 결과도 만들지 못했다. 몸도 영혼도 목소리마저도 건재하다.

소각을 앞둔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음성은 환희에 찬 단말마였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