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2024. 03. 13. 발간 질잔느 if 단편집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수록

인적 드문 밤, 조명 하나만이 켜진 칼데아의 공용 주방. 포도주 한 잔을 위해 그곳에 발을 들인 세이버 질 드 레는 제 갈증만큼이나 난데없는 풍경과 마주했다.

잔느 얼터가 다 식은 스튜 냄비의 바닥을 긁고 있었다.

몇 번이고 쇳소리를 내며 내용물을 걷어낸다. 감자와 우유 냄새가 풍기는 스튜를 그릇에 담고, 제법 익숙한 손짓으로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기계음이 나는 1분 동안 주황색이 감도는 내부를 빤히 들여다본다. 경쾌한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연다. 따뜻해진 사기그릇을 양손으로 쥐고 뿌듯한 총총걸음으로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불청객의 존재를 눈치챈다. 잔느 얼터의 표정이 그대로 구겨졌다.

“구경났습니까? 왜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는 거야. 뭐, 당신의 낭비벽이 허락 못 할 행동이라도 되나?”

기사는 술잔을 둔 찬장 앞에 서 있었다. 식량과 전기 등을 아끼라는 말이 사방에 붙어 있어도, 잔느 얼터가 본 칼데아는 풍족한 곳이었다. 불시에 식당에 가도 요리를 하는 사람이 있거나, 적어도 먹을 게 남아 있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고립이니 지원물자니 하는 심각한 말과 포도주 몇 병은 어울리지 않았다.

세이버 질 드 레는 이러한 풍요가 익숙한 듯 행동했다. 현대의 식문화에 감탄하기도 하고, 오를레앙을 지켜낸 영령들과 동석해 조촐한 주연을 벌일 때도 있었다. 언제는 성녀를 모시고 술을 대접했다던가. 제가 준비한 물건도 아니면서! 성녀는 얼터 역시 함께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당연하게도 참석하지 않았다. 성녀와 어린 자신이 그가 굉장히 어른스러웠다며 추억담을 늘어놓는 동안, 자신은 부루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질 드 레가 찬장을 뒤지는 동안, 잔느 얼터는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으로 아직 뜨거운 국물을 떠 조심스레 입에 넣는다. 냄비 바닥에 크림과 함께 눌어붙은 채소와 고깃덩어리야말로 별미였다. 늦은 시간에 식당에 온 게 이걸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냄비 바닥을 뒤지고 따로 데우기까지 했던 자신을 위한 보상이라 생각하면 수지가 맞았다.

몇 번 숟가락질하던 와중, 의자 끌리는 소리에 손이 멈춘다.

술병을 하나 가져온 기사는 태연하게 제 맞은편에 앉아 목을 축이기 시작한다. 그가 많고 많은 테이블 중 제가 앉아 있는 곳에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잔느 얼터는 도통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포도주를 유리잔에 붓고 색을 살피고 천천히 목으로 넘기는 일련의 움직임마저 거슬리기 시작했다. 결국, 잔느 얼터가 숟가락질을 멈췄다.

“난 정말로 전장에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난데없는 질문을 들은 세이버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분명 우스운 꼴이 되리라 짐작한 잔느 얼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나, 그는 마시던 걸 그대로 뱉거나 기침을 해 대지 않았다. 대신, 입에 머금은 술을 용케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이다.

남자가 의아하다는 낯으로 물었다.

“네? 갑자기 무슨……”

“질이 그랬어. 나를 성녀라 믿은 이유 중에는 썩은 피 냄새가 풍기는 전장에서 태연히 음식을 입에 넣는 모습도 있었다고. 그게 날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마녀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질이 기억하고 있는 내 모습이라면, 당신도 아는 게 있겠지요.”

“이곳, 칼데아에서 잔은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생전의 내가 존경하던, 전란의 참상 속에서 말없이 식사하던 모습은 그저 자신이 시골 처녀였기 때문이었다고.”

“또 그거야? 그 여자는 자신의 출신을 숨기지도 않는군요. 그가 시골 처녀라는 사실은 순박함이나 신성함과는 별개의 개념일 텐데!”

“그렇습니다. 당신이 아는 그녀의 잔혹함은 신성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느새 전장의 참혹함에 익숙해졌으며, 그보다도 이전, 어렸을 적부터 돼지나 소를 잡는 일을 거들었기에 전란의 냄새에도 익숙했다고 말해 주었지요.”

“그만 말해. 입맛 떨어지니까.”

질 드 레는 멈출 기미가 없다. 이때다 싶어 시작된 남자의 이야기는 잔느 얼터가 끼어든들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굶주렸고, 전투에 지쳤으며, 그럼에도 선봉에 서야 함을 알고 있던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잔의 말을 듣고 안도할 수 있었지요. 전장에서 먹을 걸 입에 넣는 모습이, 그녀를 마녀로 낙인찍기 위해 심어둔 싹이 아니었다는 뜻이니까요.”

잔느 얼터가 기분 나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요점이 뭡니까? 그게 지금의 그녀, 그리고 나와 무슨 상관이지요?”

“잔느 얼터. 당신은 굶주린 적이 없잖습니까.”

마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소리 내어 불만을 표하려다 관둔 게 틀림없었다.

“당신에게 부여된 세상은 그녀의 것과 다릅니다. 동레미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고, 글을 모른다고 업신여겨진 적도 없지요. 며칠 동안 주린 배를 안고 행군하며 기도로 허기를 달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그녀의 삶을 입에 올릴 수 있습니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죠? 나는 위작이니 그의 삶에 논할 자격도 없다 이건가?”

한마디만 하고 경의 뜻대로 닥쳐 주지요. 마녀는 기사를 노려보며 으르렁댔고, 제가 할 수 있는 말 중 가장 매몰찬 주제를 꺼내었다.

“단 하나는 확실해. 적어도 나는 내 손으로 화형에 동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

확신이 담긴 잔느 얼터의 말에, 세이버는 침묵할 따름이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유리잔을 쥐고 술을 목으로 넘기는 모습이 썩 가증스러웠다. 나직이 한숨을 쉰 기사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한들, 나는 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없을 겁니다.”

다짐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어조였다. 세이버 질 드 레는 잔 다르크를 억지로 붙들고 글을 가르칠 수 없다. 옛 영광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었음에도 그랬다. 이 정도로 괜찮다며 그를 달랜다. 말에 올라 산책하거나, 다른 병사들과 함께 몸을 풀거나,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할 테다. 그리고, 책상 앞에서의 울상을 벗어던진 그의 표정을 다시금 사랑하게 될 것이다.

세상 앞에 패배해 인류사의 억지력을 원망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떤 금기를 범하더라도 지난 일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에 어렴풋한 무력감이 들었다.

남자의 감상과는 별개로, 돌아오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뻔한 소리를 왜 하는 거죠? 내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건 그쪽의 후회 때문이잖아. 아직도 옳은 편에 서 있는 양 젠체하는 껍데기가 잘도 떠들어대는군요.”

“지금 무슨 소리를……! 눈먼 분노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건가!”

“왜, 저쪽의 성녀는 안 되고 나는 가르쳐도 된다는 겁니까? 당신은 나를 붙들고 어떻게든 글을 익히게 했어. 내 이름을 적고, 무엇에 내 이름이 적히는지 분간할 수 있게 만들었지. 나는 무엇에 분노해야 할지, 누구에게 창날을 돌려야 할지 명확히 알았고-”

“그리하여 내보인 결과가 앞뒤 가리지 않고 프랑스를 불태운 행위라니. 그자의 생각은 결국 이 정도 수준이었나 봅니다.”

“당연하지! 당신이 이 복수에 적도 아군도 없다고 했으니까!”

성인군자의 자식으로 태어났더라도 이 그림자는 끝없는 복수만을 외쳤을 테다. 이게 마스터와 다른 높은 양반들이 말하는 인류사의 억지력이라면, 우습기 짝이 없는 촌극이다. 타인의 분노를 대변하기 위해 생겨난 영혼이 어디 있어. 허점을 파고들어 좌에 올랐음에도 이 갈망은 채울 수 없다.

“그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알면 놀라 쓰러지시겠어. 이 나라에 대한 복수가 끝나면 죽여달라더군요. 날 만들어낸 게 누군지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무책임한 작자 같으니!”

질은 죽음을 쉬이 입에 올리는 남자였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는 절규에는 분명 무게감이 있었지만, 그의 간청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입 밖으로 나오곤 했다. 잔느 얼터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들끓던 분노는 제 종복이 죽여 달라는 말을 할 때마다 기이하리만치 빠르게 가라앉았다. 대신,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불쾌한 잔열처럼 남았다. 마녀는 갈 곳 없는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남자의 뼈마디 드러난 손을 한 번 세게 밟았었다.

편법으로 좌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 몸으로는, 죽음 이전의 삶이 있던 자들을 시기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됐어. 이젠 다 끝났어. 그 여자는 이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또 다른 성배의 장난에 휘말릴 운명이고.”

잔느 얼터는 숟가락을 내동댕이치듯 내려놓았다.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다 식은 스튜와 헛소리나 해 대며 성질을 긁는 기사. 그 여자가 살던 시골 마을에도 이 정도 유희는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신랄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뜬다. 세계를 구한 결과가 스튜 한 그릇, 술 한 잔이라니. 역사가 눈길 한번 돌리지 않는 두 기의 허상에게까지 보여주고 싶던 세계가 이런 모습이었다면, 그 마스터가 한 짓은 퍽 우스운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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