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 1
섭리불멸서약 리바이어던
거센 비가 내렸다.
질 드 레는 침대맡에 몸을 기댄 채, 제 옆에 이불을 덮고 누운 인영을 쳐다보았다. 얇은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익숙한 얼굴. 쥐 파먹은 듯 짧게 잘린 머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폭풍우 치는 밤이 여인의 금발을 짙은 아마빛으로 물들인다. 기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잔 다르크의 머리카락 끝에 손을 대었다. 귀 뒤쪽, 희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피부 위에 딱지가 길게 앉았다. 적국의 요새에 갇혔을 때 머리가 잘리면서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세이버 질 드 레가 발견한 구국의 성녀는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범인류사의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탈출을 위해 해자에서 뛰어내렸다. 잔은 죽고 싶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했으며, 며칠 동안 앓으며 기도한 끝에 회복되었다던가. 질 드 레는 지금의 잔이 입은 부상도 분명 같은 시도 때문에 생겼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잔 다르크를 데리고 길을 떠난 첫날, 갑옷만 겨우 차려입은 행색의 기사가 민가의 노부부 앞에서 꺼낸 말은 지극히 상투적인 거짓말이었다.
“아내의 몸이 좋지 않소. 부디 하루만 잘 곳을 내어주지 않겠습니까?”
안내받은 헛간에 잔을 눕힌 질은 다리의 상태를 살폈고, 얼마 없는 찬물을 목으로 넘기게 도왔으며, 한참 동안 뒤척이던 잔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뒤, 헛간 구석에서 한참을 헛구역질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성녀의 의지가 한낱 변명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범인류사의 서번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역사의 방향을 용납하지 못했으며, 눈앞에 섬망처럼 번뜩이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질 드 레는 잔 다르크를 구해냈다는 한 줄기 변명만을 손에 쥐고 정신을 잃었다.
이른 새벽, 질이 눈을 떴을 때 잔은 곁에 없었다. 사내는 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핀다. 희미한 마력의 흐름에 맞춰 감각을 곤두세우던 찰나, 헛간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말을 맞춰 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을 졸일 무렵, 빗장 걸린 문을 등지고 선 잔이 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란이 이 마을을 피해가기를, 부인과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그이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사와 그의 부인은 급히 말에 올라 길을 떠난다. 그들에게 헛간을 내준 노부부는 그들이 식사까지 부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도망자들을 위해 짧은 기도를 올렸다.
질 드 레는 그때의 대화가 그저 임기응변일 뿐이었다고 믿었다. 잔이 전날 밤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표하지 않았기에, 질 역시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없이 서쪽으로 향했다. 사내의 우려와 달리, 은전 몇 닢을 찔러 주며 의심의 눈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프랑스군 원수 질 드 레와 그의 전우들은 진작에 죽은 사람이었다. 그가 소환된 프랑스는 싸움에 지쳐 도망치는 음울한 낯의 기사도, 그와 함께 말에 오른 얼굴 가린 여인도 특별하지 않은 나라였다. 모두가 현저한 열세에, 가혹한 징용과 세금에, 왕족들의 알력 싸움에 지쳐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브루타뉴 영지를 찾아 파리 남서쪽으로 닷새하고도 반. 누군가의 소유물이었을 말이 녹초가 되면 한창 싸움에 눈이 먼 자들의 것을 빼앗아 다시 몇 시간을 더 달렸다. 아내와 함께 도망치는 추례한 차림의 남자, 최전방의 떠돌이 기사, 희대의 말 도둑. 갖가지 오명을 짊어진 질 드 레가 잔 다르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어느 마을의 강변, 다 무너져가는 집 앞이었다.
땅거미가 드리운 건물은 겉모습부터 을씨년스러웠다. 이 마을도 약탈과 침략을 피하지 못했고, 가문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 별장은 마을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다. 몸을 사리기 바쁜 마을 사람들은 마을 외곽에서 몇 번 정도 불꽃이 치민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안으로 걸어 들어간 두 사람은 주방부터 살폈다. 한때 성대한 만찬을 끓여냈을 공간은 텅 비었으며, 얼마 없는 식재료조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었다. 쥐들마저 더 나은 거처를 찾아 떠난 지 오래다. 독한 냄새를 맡은 잔이 몇 번 콜록거렸다. 강행군 속에서 기적처럼 회복한 그였지만, 질은 여전히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잔, 마당 뒤편을 살펴 주시겠습니까? 산울타리가 무성하니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되도록 빨리 나오세요. 나의 친우가 병에 걸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잔이 별장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질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을 되짚어 찾아간 응접실의 분위기는 그가 알던 대로였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얼굴들이 진작 죽었다고 알려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그가 살던 시대로부터 몇백 년은 지나야 등장할 법한 정밀한 유화는 사내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은 얼굴들을 담아내었다. 그는 초상화가 품은 괴리에 놀라기에 앞서, 화폭 속 사람들의 몰골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월과 무관심 속에 누군가는 애꾸가 되었고 또 다른 자는 목 아래가 사라졌다. 그들을 한 번 노려본 질 드 레는 뒤이어 그림을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했다. 다 부스러지는 못을 뽑아내고 떨어진 그림들을 한구석으로 치운다. 요령 없는 손길에 횟가루가 날렸다.
젊은 후계가 이어서 손댄 물건은 초상화 옆에 일렬로 걸려 있던 휘장들이었다. 친교를 다진다는 명목 아래 걸린 천들은 먼지가 내리고 쥐가 쏠아 죄다 비슷해 보였다. 지금의 프랑스에서 살아남은 가문은 이 중에 몇이나 될지. 질은 몇 개의 휘장을 벽난로 안에 던져넣은 뒤 불을 지폈고, 남은 것들은 액자들과 함께 마당에 내놓았다.
다시 돌아와 응접실을 둘러본다. 썩고 갈라진 나무 바닥과 곰팡이 슨 외벽, 사방에 날리는 먼지. 일렬로 늘어진 못 자국들이 누군가의 움푹 파인 눈구멍 같다. 분수도 모르고 들어앉은 장식을 전부 치우자 더욱 그럴듯하다. 낯 위로 희미한 만족감을 드리운 레 영주는 바닥에 놓인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칠이 되어 있으니 액자에서 떨어져나온 조각일지도 모른다. 벽난로에서 천천히 타는 불꽃을 옮겨붙인 이상, 그 나무토막은 다시 장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집 밖으로 나온 그는 엉망으로 널브러진 캔버스와 좀먹은 헝겊들 위로 횃불을 던졌다. 습기에 젖고 곰팡이가 가득 피었어도, 이보다 더 오래 쌓여온 세월은 훌륭한 착화제가 되었다. 사내가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는 얼굴들은 타들어가는 와중에도 라발 가의 탕아를 향해 야유했다. 흙먼지만이 날리던 마당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질! 이 연기는 대체……”
이변을 알아챈 잔이 마당으로 나왔을 때, 질은 거대한 불길을 옆에 두고 있었다. 흔들리는 빛이 사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새겨,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다.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잔이 물었다.
“이건 당신 가문의 물건 아닙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이것들은 제게 더는 필요 없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잔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질 드 레는 엄숙하게 무릎을 꿇었다.
“잔 다르크. 이 질 드 레는…… 감히 당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자 합니다.”
서번트로 소환되었더라도 한계는 분명했다. 질 드 레는 단신으로 전황을 바꿀 역전의 용사가 아니다. 가문이 한때 자랑하던 부가 쇠했음은 익히 알 수 있었다. 결국, 욕된 세상 허물을 그에게 덮어씌우는 일. 사랑하던 성녀를 한낱 필부로 만드는 일. 세상의 구속을 통해 그를 구하는 일이 질 드 레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부부의 연이라니요. 그건 단지 추격을 피하려고 했던 말인 줄 알았습니다. 설마 진심이었다는 뜻인가요?”
사내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분명 미우실 테지요. 지금이라도 많이 탓해두십시오.”
앞에 선 자를 향해 손조차 뻗지 못한다. 무례하기 짝이 없고 당혹스러운 행위임은 진작 알고 있었기에, 이어지는 말은 탄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게는 이 방법뿐입니다.”
잔의 대답보다도, 질의 체념보다도, 떨어지는 빗방울이 더 빨랐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비였지만, 질 드 레는 이미 폭풍 속에 서 있었다. 타는 냄새가 머리를 뒤흔들고, 온통 달궈진 습한 공기가 무릎 꿇은 몸을 짓눌렀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위한 국가가 되리라 각오했지만 한 사람뿐인 나라는 존재할 수 없는 법. 잔 다르크의 눈에 비친 사내는 죽은 자의 땅에서 돌아온 표류자였다.
잔 다르크는 질 드 레의 손을 잡았다. 그를 천천히 일으키고, 당혹감을 지우지 못한 사내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질, 내일은 집을 좀 치워야겠어요.”
“그러도록 합시다.”
“먹을 것도 조금 사야겠지요.
“네.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 없었지만, 잔은 알 수 있었다. 이게 그 나름의 감격이었다. 하염없이 떨리는 손으로, 잔뜩 잠긴 목소리로 갈 곳 없는 긍정만을 늘어놓는 일. 잔 다르크는 이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았고, 서슴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한 방울씩 내리던 비는 어느새 선명한 선이 되었다. 빗물이 스미기 시작한 검은 머리카락이 사내의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두 사람 옆에서 타던 불길은 몇 점의 캔버스 틀과 공단 조각을 남긴 채 꺼졌다. 먹구름이 만든 짙은 그늘이 드리우며, 서로의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낀다.
잔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떼어놓을 때까지, 질은 줄곧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날씨가 더 나빠질 겁니다. 들어가서 우선 몸부터 말립니다. 땔감은…… 집안에 차고 넘칠 테니.”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읽을 수 없는 법전 몇 권을 벽난로에 넣어 불을 지핀다. 잿가루 날리는 불가에서 얼추 몸을 말린 잔 다르크는 삐걱대는 침대 위에서 금방 잠들었다.
질 드 레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오래 묵은 나무 곰팡내가 침실 안에 자욱했다. 요란히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났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물에 젖은 나무가 짙게 물들다 못해 검은색으로 보였다. 지붕을 고치기에는 시간이 없다. 폭풍은 순식간에 몰아닥쳤고, 썩은 지붕 틈새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을 온통 적시기 전에, 이 나간 들통을 받혀 두는 일이 전부였다.
번갯불이 한 번 번쩍이고, 천둥이 나직이 울린다. 마스터를 등진 이상, 이곳이 곧 그의 영맥이었다. 범인류사의 자신이 한때 머무른 장소라는 희미한 연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잠들지 못한다. 잠들 수 없다. 죽음에서 돌아온 기사만이 밤새 눈을 뜨고 있었다.
온 밤을 뒤흔들던 비는 동틀 녘, 종다리 울음이 들려올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
이튿날 오전, 두 사람은 누추한 옷을 입고 마을을 향해 걷고 있었다. 푹 젖은 들판으로부터 불어온 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선선한 늦봄 날씨와 구름 하나 없는 하늘. 빛바랜 사치가 곰팡이로 얼룩진 자루 안에서 불안하게 절그럭댔다. 여느 농민들과 다를 바 없는 옷차림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두어 시간 전, 느지막이 일어난 잔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아무도 없는 침실이었다. 층계를 내려오자 들어온 풍경은 온 집안 가득한 먼지가 햇살에 반짝이는 광경과 먼지구덩이 속에 앉아 이런저런 은식기들을 들여다보는 질이었다. 아침 내내 찬장을 뒤졌는지, 아래층은 침실보다 엉망이었다. 다 썩은 식탁 위에는 은촛대니 금목걸이니 하는 귀중품들이 시간의 풍파를 그대로 맞은 채 올라가 있었다. 잔은 이 물건들이 무슨 용도인지 쉬이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를 금전으로 바꾸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전당포 주인은 뻣뻣한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는데, 여느 대부업자들에게서 풍기는 인상과 다를 게 없었다. 처음 보는 자들의 얼굴을 슥 훑어본 그는 질이 탁상 위에 올려둔 은식기와 촛대, 브로치 몇 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호통쳤다.
“네 이놈, 장물은 받을 수 없다. 분명 상을 당한 차에 백작님의 저택을 턴 거겠지!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썩 꺼져!”
아직도 집주인을 기억하고 있나. 까맣게 타들어 가던 초상화 속 얼굴이 질 드 레의 뇌리를 스쳤다. 적법한 주인이 이를 처리하러 왔다는 교만과 그 치들의 흔적을 태워 없앴으니 이건 이제 나의 물건이 아니겠냐는 방종을 머릿속으로 저울질하던 찰나, 잔이 입을 열었다.
“장물이 아닙니다! 이 이는 여기 오기 전, 몽모랑시 라발 백작님께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건 그 때 받은 물건들이고요.”
전당포 주인은 미심쩍다는 듯 짧은 머리칼의 여인을 한 번 노려보았다.
“우리 마을도 잉글랜드에게 불탔어요. 이대로라면 십일조를 내기는커녕, 당장 배를 채울 수도 없지요. 선생님 역시 주님의 뜻으로 이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 그분을 믿는 이들을 내칠 정도로 박한 분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여보?”
잔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건 나의 욕망이 아니다. 질 드 레의 얼굴이 못마땅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구역질을 참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시선이 흔들린다. 이유 모를 동요를 숨기지 못한 남편과 달리, 그의 아내 되는 자는 여전히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상대는 혀를 한 번 차고 조용히 물건들을 살피더니, 은전 몇 닢과 그보다 작은 동전을 여러 개 내밀었다.
“못 본 척 해 줄 테니, 흥정할 생각 마쇼.”
눈대중으로 세어 보니 며칠간의 식료와 집을 고치기 위한 자재를 살 정도는 되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은 전당포를 나왔다.
“…… 이런 건 역시 어색하네요.”
상대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침묵이 이어진다. 말로만 하지 않았지, 동행하는 사내 역시 지금껏 본 것보다 더 뻣뻣한 자세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곁의 동료에게서 눈을 완전히 떼고 있던 그가 눈치챘을 리 만무했지만, 잔의 얼굴 역시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잔, 괜찮습니까? 역시 저 혼자 나오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뇨, 제가 다 나았다는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게다가, 오랜만에 같이 걸으니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어색하게 맞받아치려는 찰나, 돌연 목이 틀어막혔다. 이 짧은 길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질 드 레는 아주 잠시 안도했고, 뒤이어 더 큰 혼란에 사로잡혔다. 이 특이점은 어째서 나를 불렀는가? 그저 이런 풍경을 눈앞에 보여 주기 위해? 친우를 데리고 도망친 전란 속 장면들이 기사의 기억 언저리를 스쳐 지나갔고─ 잔의 말이 그를 현실로 당겨왔다.
“질, 저기 있는 가게는 포목점 아닌가요? 하마터면 놓칠 뻔했습니다!”
잔이 급히 가리킨 가게를 시작으로, 질 드 레는 잔이 살던 마을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잔은 처음 보는 풍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곳 역시 상점이 있고, 보리를 키우며, 나무를 패고 물고기를 잡는 이들의 마을이었고, 잔 다르크는 항상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읽지 못함은 가르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동레미에서 온 소년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서 고향을 알아보았다.
그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른 결과, 먼지만 쌓여가던 장식물이 빵 네 덩어리와 달걀 한 묶음, 소금에 절인 청어 여섯 마리, 물 탄 포도주 세 병, 그리고 기름 먹인 아마포 한 필로 돌아왔다.
“이제 돌아가요.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연스레 손을 잡으며 이쪽을 올려다본다. 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나저나, 절인 고기가 무척 싸네요. 근처에 바다라도 있는 걸까요?”
“근처까지는 아닙니다. 제 기억으로는…… 저 숲을 건너 반나절 조금 넘게 가면 해안선이 보일 겁니다.”
“무척 가깝잖아요! 오는 길에 바다 냄새는 전혀 못 맡았는데 말이죠. 질, 거짓말이라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동이 트면 당장 서쪽으로 향하지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질, 지금은 집 정리가 우선이라고 했을 텐데요.”
정곡을 찔린 표정이다.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질은 괜스레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다, 떨어트릴 뻔한 아마포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럴듯하게 구는 일에는 도가 튼 제 벗이 하루에 몇 번이나 망가지는 건지. 잔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나들이 이야기에 들뜬 것도 사실이었다. 기적 같은 일의 연속이 비현실적이었고, 잔은 오늘만큼은 그 의심을 접어 두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차오르기 시작한 희미한 달빛만이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말끔히 갠 하늘 한구석에 눈으로 좇지 못할 빛들이 쏟아진다. 아득한 땅을 향해 내리는 소나기는 어제의 폭우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그의 눈은 강철 천장에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라, 생전의 자신이 익히 보았을 풍경에도 감탄하고 만다.
이곳은 아직 신의 눈이 닿지 않은 세상이므로, 이 정도의 방만은 아직 허락되리라 믿었다.
-
“…… 마력 반응 증대를 확인! A.D 1430년, 위치는 프랑스 파리 주변입니다!”
좌표계의 붉은 점이 1430년의 프랑스를 겨눈다. 첫 특이점 수복의 날이 떠올라, 칼데아의 마스터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이를
마스터의 표정을 읽어낸 다 빈치가 짧은 통찰을 입밖으로 내었다.
“우리가 아는 프랑스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돼. 범인류사에 대한 지식이 지금은 완전히 쓸모없어졌으니까. 누굴 만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이젠 잘 알고 있지?”
뒤이어 고르돌프 소장이 빠르게 목을 가다듬었다.
“위치를 알았으니 공략에 들어가야겠지! 목표는 평소와 같다. 이탈한 서번트를 발견하면 데려오고, 마스터와 서번트 사이의 연결에 문제가 생긴 이유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특이점을 만든 자를 찾아 성배를 회수한다!”
다 빈치는 소장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마슈, 네 방패가 이번 임무에 중요하니 마스터와 함께 가겠지만…… 항상 조심해야 해. 그리고, 잔느 얼터. 여기에 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레이시프트 장치 앞에 선 어벤저의 표정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왜? 너희, 설마 프랑스를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성배를 딛고 태어난 몸. 땅의 인연에 기대기보다, 차라리 내게 성배 하나를 들려주는 게 어때?”
제가 생각해도 지독한 농담이다. 의심의 눈초리가 박혀올 줄 알았건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는 마스터와 그 데미 서번트뿐이었다.
“얼터 씨를 잔느 씨의 대역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이 상황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서번트, 마스터와의 약속을 놓지 않을 서번트가 당신이라서입니다!”
잔느 얼터가 이마를 짚고 신경질적으로 목을 울렸다. 저건 진심으로 질색하거나 웃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전조다. 자신이 마스터의 동료가 된 이유는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얼 만나더라도 칼데아의 편에 설 사람. 그 방향이 다를지라도, 인리 그 자체를 위해 맞서 싸울 반영웅. 범인류사가 아닌, 한 사람의 생각이 만들어낸 복수자.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지요. 물론 가짜 성녀 흉내는 안 낼 테니 그런 줄 알아. 마녀에게 구원받는 프랑스라니. 평생의 웃음거리로 삼아 주겠어!”
그 사람이 있어야 내가 복수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여기에 없다. 참으로 얄궂은 연쇄가 아닌가?
-
레이시프트를 마친 칼데아 일행은 다 빈치의 혜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생명체가 날뛰는 마수였고, 두 번째는 갑옷 차림의 영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장정 한 사람의 신장을 훌쩍 웃도는 짐승이 덤벼들었을 때는 모두 혼비백산했지만, 마수 토벌이 익숙한 세 사람은 금새 전열을 가다듬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스터를 더 큰 의문 속에 빠트린 자는 세 사람을 향해 연신 인사를 올리는 사령관이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허리를 숙이고 들어 올릴 때마다 가슴께에 박힌 사자 문장이 번쩍인다. 파리에 영국군 기지가 있다면,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경은 더 남쪽으로 밀려난 게 분명하다. 이 특이점에서 오를레앙 탈환은 아직 없는 일인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쏘아보던 잔느 얼터가 쏘아붙였다.
“저 짐승은 대체 뭐죠? 지금의 잉글랜드 땅에서 흔히 보이는 종류인가?”
“그럴 리가요! 숲에서 이리 떼가 내려오는 일은 왕왕 있지만 저런 괴물은 생전 처음입니다. 때마침 나리들이 오셔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저놈에게 명운을 달리했을 테죠.”
칼데아 일행이 도착한 땅은 왕명으로 구제되어야 할 해수(害獸)가 성배의 힘 아래 당당히 노니는 세상이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마슈가 물었다.
“그…… 저런 마수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났다고요?”
사령관은 무언가가 켕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한참 침묵한 끝에 얼마 없는 병사들을 연병장으로 내보냈고, 누가 들을세라 주변을 둘러본 끝에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여행자 나리들은 오를레앙의 처녀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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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2024. 03. 13. 발간 질잔느 if 단편집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수록
2부 1~5장 식사 테마 단편집 <전정식사>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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