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 지금, 여기 - 프롤로그
오브 5주년 앤솔로지 <다섯 번째 테이프> 수록
“지각인데……!”
덜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잠이 깨서 비몽사몽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가 이제 막 8에서 9로 넘어가는 숫자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제 분명 알람을 맞춰두고 잤는데 울리지 않은 건지 혹은 못 들은 건지 불티나게 몰려드는 온갖 생각을 되는 대로 곱씹으며 다급하게 일어나려다가, 시간과 함께 화면에 표시된 날짜를 떠올려 보곤 그대로 다시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아니구나.”
적어도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조금만 더’를 외쳐도 되는 날. 의도치 않게 휴가를 받고만, 그런 날.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점심을 먹고 사령실에 올라와서 커피 한 잔으로 여유롭게 입가심을 하려는데 요코를 선두로 유카와 하루키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웬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대장님, 이거 받아주세요.”
“응? 어어, 그래… 이게 뭔데?”
하얀 봉투를 앞뒤로 뒤집어 살펴봤지만, 겉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있지 않았고 내용물은 보고서에 쓰는 일반 종이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온천 여행 티켓이요!”
“온천 여행?”
“네. 엊그제 하루키랑 같이 장 보러 갔다가 1등에 당첨됐거든요.”
평소 꼭 보고 싶어 했던 괴수가 나타나서―유카의 관심을 못 받는 괴수란 이 세상에 없겠지만― 부리나케 현장에 나가기까지 했지만m 파편이라고는 개미 발자국만큼도 못 찾아서 풀이 죽었던 유카였는데. 하루키랑 바깥에 다녀오더니 팔팔하게 생기가 돌아온 이유가 이거였군.
“확률로 봐도 이거 안 될 게 뻔한데 사람 마음이 또 그게 아니더라구요. 상품을 보니까 또 됐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생겨 가지구. 그래서 ‘될 대로 돼라!’ 하고 돌렸더니 황금 구슬이 나오더라니까요.”
당당하게 황금 구슬을 거머쥐고 그 손을 들어올리기까지 걸린 여정을 낱낱이 들려주며 보란 듯이 자랑한 유카는 이야기의 마무리로 안경을 척 올리며 뿌듯해했다.
“아, 하루키도 당첨됐어요.”
“오, 몇 등 했는데?”
“5등이요, 5등! 그래서 참가상으로 라무네 한 병 받았어요.”
“으악, 유카 씨! 그건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냉장고에 푸딩 넣어놓지 말랬지!”
장난기로 덧그린 눈썹을 꿈틀거린 유카는 하루키가 곤란해하든 말든 요코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놀리기 바빴다. 아무래도 대련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 유카 나름대로 생각해 낸 작은 복수였나 보다.
“그런데 왜 나한테 주는 거야?”
“대장님 휴가 좀 쓰시라고요.”
두 사람이 빙글빙글 돌며 분주하게 작은 술래잡기를 벌이는 틈에 대화의 흐름을 이어받은 요코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난주에 쉬었는데?”
“항상 누가 일 생길 때마다 대신 근무 서주셔서 휴가 쌓이셨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저 쉰다고 해 봤자 이 별에서는 특별한 일정도 없이 집에서 느긋하게 늘어져 있기 일쑤라 자진했을 뿐. 여전히 출근은 귀찮았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꾸준히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좀 푹 쉬고 오시라구요. 괴수가 나타나도 최대한 저희끼리 해결해 볼게요.”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걱정 붙들어 매고 다녀오세요.”
“뭐… 그럼 그렇게 할까. 티켓 잘 쓸게. 고마워.”
바코 씨도 계시긴 하지만 믿고 다녀오라는 눈빛을 열심히 쏘는 셋만 놔두고 가자니 살짝 불안하긴 했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머리를 맞대서 신경 써 준 마음을 거절하자니 마땅한 이유도 없어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온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한 장이 남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양치질을 하며 뒤늦게야 표를 확인해 보는데 봉투 안에는 두 장이 들어있었다.
원래 상품이 두 장인 건지 아니면 셋이서 일부러 따로 챙겨준 건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아침부터 다짜고짜 불러내서 데려갈 이도 없는데 남는 몫은 두고 가는 편이 낫지 않나. 그런데 휴가 끝나고 돌아가면 분명 호기심으로 빛나는 여섯 개의 눈이 누구랑 다녀왔냐고 질문 공세를 퍼부을 텐데…….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출구도 없는 미로에서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는 잡념 속에서 갓 끄집어낸 티켓 꼭지를 잡고 이러다 닳겠다 싶을 정도로 만지작거렸다.
두고 가느냐. 혹은 갖고 가느냐.
간단하게 짐을 꾸리면서도 시소처럼 이리저리 기우는 천칭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갸우뚱갸우뚱 되풀이하다가 결국 두 장 다 챙겨서 가방에 넣고 지퍼를 잠갔다. 짤막한 여행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 몫을 전부 쓰지 못하고 길을 가다 만난 낯선 이에게 주고 마는 결말에 이르더라도 여분이 없는 것보단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번잡하게 돌던 머릿속도 홀가분하게 털어냈고 무엇보다 티켓에 적힌 버스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서둘러 신발을 신으려다가 현관에서 다시 멈춰 섰다. 내가 저런 걸 가져왔었나? 또다시 훅 치고 들어온 물음표는 초록 불을 끄고 빨간 불을 켜서 제멋대로 신호를 바꿔버렸다.
그것은 한 뼘 정도 되는 크기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신발장 위에 놓였는데 손때가 묻어 빛이 바랜 붉은색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플레이어를 집어 안을 살펴보니 카세트테이프가 하나 들었는데 겉에는 ‘지금이니까’라는 짤막한 한 마디가 빛의 나라 언어로 적혀있었다.
근래에 테이프를 재생할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인가 뭔가에 관심이 생긴 것도 아니어서 내 손으로 직접 산 건 아닐 텐데. 이런 걸 받은 적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받은 거라곤 딸기와 디저트… 그러니까 죄다 먹을 것들뿐이었다. 일이 바빠서 과음한 날도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누구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어폰까지 꽂혀있는 모양새가 마치 저를 꼭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리 애처로이 쳐다본다 한들 온천에 가는 내게 카세트 플레이어는 불필요한 물건에 가까웠다. 그래서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하며 또다시 고민의 수렁에 발을 담갔다가 아침부터 사소한 일에 기력 낭비하는 데 이골이 난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드디어 해냈다며 방긋 미소를 지은 플레이어는 가방에 쏙 들어갔고 나는 그제야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다.
아침 근무 조는 진즉 출근하고 남았을 시간이라 관사는 한적했다. 울긋불긋한 가을로 장식을 다 마치기도 전에 대뜸 겨울이 벌컥 문부터 박차고 들어오며 바람이 몹시 차가워졌지만, 맑은 하늘에 너울거리는 햇살은 따스해서 일부러 기지개라도 켜고 싶었다. 깨끗하게 빨아서 턴 하얀 이불을 잡고 그대로 두둥실 떠올라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좀 더 가까이 닿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는데.
“앗, 이제 없어. 아까 준 게 마지막이야.”
윗선에서 빨리 해결하라고 독촉하느라 연신 울려대는 전화에서도, 처리하는 것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서류에서도 잠시나마 해방되어 쾌청한 날씨를 한껏 독차지해 보려 했건만 그럼 그렇지. 내 옆자리는 비워두지 않기로 나 몰래 서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순풍을 잔뜩 받은 돛을 펼쳐 은하의 조류에 몸을 맡긴 네가 작정하고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
“왜 여기 있는 건데?”
언제 온 건지 모를 너는 관사 출입구에 쪼그려 앉아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고 있었는지 그들에게 포위된 채였다. 조청에 푹 찍은 가래떡을 닮은 고양이, 콩고물과 깨고물에 골고루 묻혀낸 고양이, 아궁이 근처에서 장난치다가 검댕으로 범벅이 된 고양이 등 다양한 형상으로 빚어진 고양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오물거리며 서서히 포위망을 조이는데 마치 뜬금없이 배고프다고 눈을 빛내며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던 너와 꼭 닮았다. 다 제 업보인 셈이지.
“하루키가 휴일이라고 알려주던데.”
영물인 고양이들에게 제아무리 빈 가방을 보여주며 열심히 사정을 설명해봤자 말을 들을 리가 있나. 이젠 남은 것까지 다 삼켰다는 뜻으로 입맛을 다시는 소리만 하나둘 울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기 직전에 너는 벌떡 일어서서 고양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그들을 훌쩍 뛰어넘어 내 앞에 살며시 착지했다.
“하루키 녀석, 쓸데없는 짓을.”
“뭐해? 안 가?”
날아갈까 봐 한 손으로 꾹 눌러 잡았던 모자를 고쳐 쓴 너는, 목적지는 또 어떻게 아는 건지 내가 제자리에서 혀를 차든 말든 저만치 앞서가며 능청스럽게 나를 불렀다.
“간다, 가.”
모처럼의 휴일에 떠나는 여행길이 외로울까 봐 구태여 신경 써준 마음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저런 성가신 선물을 넙죽 받아들일 아량은 딱히 베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제멋대로 굴러들어 와 박힌 저 푸른 돌은 힘으로 밀어내봤자 빠질 턱이 없으니 물이라도 줘서 싹이라도 트나 지켜보는 수밖에.
혹인지 복인지 모를 너를 단 채 향하는 온천은, 직속 버스가 손님을 마중 나오는 방식을 취한지라 정해준 정류장에 가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관사 근처에도 십여 분 정도 거리에 정류장이 하나 있었는데 온천 전용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인도 위에 위풍당당하게 선 표지판에는 ‘도사인 온천’이라 적혔다.
도사인이라…… 비슷한 이름을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어디 사는 누군가가 이 이름만 나오면 반짝이는 눈으로 비디오와 관련 상품을 한 아름 들고 저 멀리서 뛰어오지 않았나?
차분하게 기억의 창고를 뒤적여 볼 새도 없이 버스는 티켓에 적힌 시간에 딱 맞춰 정류장에 도착했다. 위에는 검은색, 아래는 흰색을 걸친 버스가 동그란 전조등을 노란 불빛으로 깜빡이며 우리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보통 시내에서 돌아다니는 버스보다 아담하고 귀여운 크기의 차량이었다. 어림잡아 아홉 정도는 탈 수 있으려나.
“어서 오세요. 도사인 온천으로 가시는 거죠?”
온천 버스가 완전히 정차하자 운전석 바로 옆에 있는 출입문이 열렸다. 너를 먼저 태우고 뒤이어 올라타려는데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기사를 보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쿠, 너 데빌 스프린터를 찾으러 간다 하지 않았나? 여기서 일은 언제 구한 거야?”
알은체하는 내게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는 지난번 잠시 스트레이지에 들렀던 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본인을 데려다 본을 떠서 짠 틀로 찍어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음… 어…… 아마 다른 사람일 거예요. 저는 4년 전부터 쭉 온천 버스를 운전해 왔거든요.”
당황하면 작아진 목소리가 허둥지둥하는 것도 꽤 비슷한데 청재킷과 청바지 대신 입은 연둣빛 정복 상의에 ‘쿠라사와 루키’라고 수놓아진 이름만큼은 달랐다. 하긴 나보다 일찍 그와 마주친 너도 별말이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 맞는 듯했다. 시공간조차 그러한 개념을 갖게 된 의의를 상실할 만큼 무한한 이 우주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쯤 더 존재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고.
“저어 혹시… 이제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줄곧 입구에 요지부동으로 서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나 보다. 가벼운 목례로 사과를 전한 후 운전석 뒤편으로 향하며 어디에 착석하면 좋을지 스윽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눈을 내리감은 채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는 너에게 시선이 향했는데, 네가 그대로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감각이 불쑥 전율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진득한 어둠을 퍼부어도, 빠져나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네가 찬란하게 빛나는 일은 항상 당연했는데 지금은 이대로 하얗게 타올라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날도 이리 화창한 데다가 너는 내가 손을 뻗기만 해도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불현듯 석연찮은 위화감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평범한 일상을 지금의 네가 누려도 된다고, 그런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냐고 묻는 속삭임과 함께.
“너도 배고파?”
“내가 넌 줄 아냐?”
점심 먹을 때가 이제 곧 코앞이라고 네가 허기졌다는 걸 숨길 생각을 안 한 덕분에 이유 모를 서늘함은 툭툭 털어내고 늘 하던 시답잖은 대화로 돌아와 자연스레 너의 뒷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텅 비었던 좌석에 두 칸이 찬 걸 확인한 기사는 운전대를 고쳐 잡은 후에 버스를 출발시켰다. 이 시간대에 손님이라고는 너와 나, 둘뿐인 버스는 켜지 않았어도 샛노랗게 반짝이는 등을 신명나게 좌우로 흔들며 온천으로 직행했다. 그동안 나는 네 뒤편에 앉아 시선을 창밖에 두는 척하며 네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귓가에서 팔랑인 나비의 날갯짓은 모래로 수북이 쌓였던 평온을 걷어내고 불안을 드러내기에 충분했으니까.
“다 왔습니다! 온천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테니 마음껏 즐겨주세요.”
분주한 도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한 뭉텅이씩 우거진 숲을 거쳐 한 시간 반가량 달린 버스는 까만 기와를 얹은, 단아한 고가 앞에 도착했다. 기사는 버스에서 내리는 우리를 밝은 얼굴로 배웅해 준 뒤 다음 손님을 태우러 떠났다.
너나 나나 짐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가방을 하나씩 메고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한껏 치켜든 채 엎드린 돌사자 한 쌍이 지키는 초입을 지나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목도리처럼 두른 가옥 안으로 들어갔다. 잘 먹고 잘 잔 덕분에 후덕하게 살이 오른 고양이를 닮은 둥글둥글한 서체로 온천 이름을 커다랗게 적은 카운터에서는 직원이 혼자서 일을 보고 있었다. 평일인 데다가 비수기라 한적한 시간을 문서 정리하는 데 쏟던 그는 입구에서 난 인기척을 듣고 네모난 안경을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앗, 어서 오세요. 돈사인 온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주란 한없이 넓으면서도 그만큼 좁다지만 그렇다고 하루에 우연이 두 번이나 겹치는 건 미지로 이어지는 가능성의 크기를 얕잡아 보는 게 아닌가?
기사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고름을 맨 연둣빛 정복을 입은 그는 레이토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수로 촘촘히 박은 이름은 내가 받았던 명함과는 달랐다. 쿠리카이 에리토,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두 분이서 오신 건가요?”
“네. 여행 티켓에 당첨돼서요.”
“아하, 그럼 지참하신 티켓을 보여주시겠어요?”
다시 만난다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호의만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지만 운명이 장난이라도 치는 건지 뜬금없이 들이미는 초상화에 떨떠름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타나 어느 손을 들어줄지 온갖 각도로 살펴보는 게 운명의 신인지라 제 본분에 충실하기도 바쁠 텐데 한가하게 지금 이런 데서 장난이나 칠까 싶었다.
“티켓 확인했습니다. 여기 서류 작성 부탁드릴게요.”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하지 않을까 저절로 걱정될 만큼 사람 좋은 웃음을 만면에 가득 띄운 그가 내민 서류에 펜을 들고 필요한 정보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가 안쪽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를 벌써 맡고 입맛을 다시든 말든 이름, 주소 등 인적 사항으로 기입란을 채운 뒤 그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잘 작성해 주셨네요. 성함이… 헤비쿠라 쇼타이시군요.”
“특이한 이름이죠?”
“아뇨, 세상이 넓은 만큼 수많은 사람이 사는데 이모저모 있는 거죠. 방은 두 분이서 넉넉하게 쓰실 수 있는 솔방울 실로 배정해 드렸고요. 이쪽 통로를 따라 쭉 들어가시면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헤비쿠라 님.”
체크인을 마치고 다시 한번 살가운 미소로 매듭짓는 그와 눈인사를 하는데, 그가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떨어진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질 것 같아 하마터면 친근하게 파파의 이름을 뒤에 붙일 뻔했다. 간발의 차로 합― 다물었던 입으로 한숨을 돌리고 느슨해진 가방끈을 올려 맨 뒤 짐을 가져다 두려 그의 안내대로 따랐다.
뜨거운 가을볕을 아낌없이 빨아들여 송골송골 맺힌 밤송이처럼 짙은 갈색을 띠는 널판을 촘촘히 깐 복도는 본격적으로 온천에 구비한 각양각색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꼭 통과해야 하는 길이었다. 왼편에는 굽고 지지고 볶는 소리가 어우러져 목젖을 간질이는 먹거리와 성공을 줄까 말까 아슬아슬하게 밀고 당기는 놀거리를 파는 가게가 일렬로 행차했다. 맞은편에는 가게에서 산 음식을 바로 먹거나 쉬어갈 수 있도록 나무 탁자를 가져다 둔 마루가 넓게 펼쳐졌다.
“뭐 먹고 가자.”
그리고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고 너는 이 구역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네가 뒤에서 옷깃을 덥석 잡아 붙든 덕분에 앞으로 잘 가던 나만 갑작스럽게 제동이 걸리며 네 쪽으로 몇 걸음 되돌아갔다.
저마다 뚜렷한 콘셉트를 갖고 꾸며진 가게에서 풍겨오는 맛난 향기는 허기진 너에게 최대의 유혹이긴 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넘어갈 줄은 몰랐다. 아침을 대충 해결했으니 배가 고픈 건 나도 매한가지였지만 아직 온천은 코빼기도 보질 못했는데.
“짐 정도는 놓고 오게 해주지?”
“급한 거 아니니까 괜찮아.”
“야―!”
평소에도 내가 뭐라 하던 한 귀로 흘려보내고 제 판단대로 몸부터 나서는데 먹을 것 앞에서는 쇠고집이 곱절로 불어나서 그런 네게는 조난 신호가 들려오지 않는 이상 우주 제일가는 장사도 힘을 못 썼다. 거기에 예외란 없어서 나도 실랑이조차 벌여보지 못하고 너만의 애착 인형이 되어 네가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어서 오세요~!”
복도를 걷는 그 짧은 시간에 네가 눈여겨보고 점 찍어둔 가게는 붕어빵과 타코야끼를 파는 가게였다. 서로 눈빛만 봐도 뭘 하려는지 알 만큼 호흡이 딱딱 맞는 삼남매가 활기찬 인사로 우리를 맞이했다. 첫째는 물 흐르듯 손을 몇 번 움직여 바삭하게 구운 붕어빵을 틀에서 꺼냈고 셋째는 날랜 손놀림을 보여주며 노릇노릇하게 익은 타코야끼를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리고 둘째는 손님 응대를 맡아 주문받은 음식을 전달하고 틈틈이 호객을 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흐음…… 뭐로 하지? 타코야끼… 아니, 역시 붕어빵이 낫나?”
나를 서둘러서 끌고 가길래 무얼 먹을지 정도는 미리 정해둔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을 줄이야.
차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제각기 값을 치른 음식을 받아 자리를 떴고 가게 앞이 한산해지면서 조금 여유를 되찾은 삼남매는 담소를 나누며 장사에 필요한 것을 보충했다.
“하나미, 그쪽에 새 반죽 있지?”
“네, 하나 줄까요?”
“응. 아, 그리고 시라. 용기도 다 떨어졌어.”
“으응, 갈게. 이것만 하고.”
“시라, 너 또 말만 하고 미룰래?”
“금방 간다니까, 나츠 형―”
으레 그렇듯 첫째의 잔소리가 잔잔하게 깔린 대화가 오갔지만 의기투합하여 서로 돕고 챙겨주는 동안, 너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 되어 여전히 붕어빵과 타코야끼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쪽에 손을 뻗었다 다시 저쪽에 손을 뻗길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온천에 발도 못 담그고 저무는 해를 맞이해야 할 듯해서 번거롭지만 손을 좀 쓰기로 했다.
“빨리 안 정하면 내가 주문한다.”
“아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청천벽력처럼 떨어진 제한 시간에 다급해진 너는 내가 함부로 주문하지 못하게끔 팔부터 잡았다. 그래봤자 입만 뻥긋하면 그만인데 내가 이런 무식한 애원에 제가 바라는 대로 가만히 있어 줄 거라 생각했는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날 어디까지 얕볼 셈인 건지.
“붕어빵 열두 개만 주세요. 전부 팥으로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네 발 달린 물고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첫째가 기운차게 대답한 뒤 제 앞으로 들어온 주문량을 채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름을 골고루 바른 틀에 말간 반죽을 반쯤 붓고 팥앙금을 한 움큼씩 쏙쏙 넣더니 그 위에 다시 반죽을 끼얹었다. 뜨끈하게 달궈진 모양 틀이 속을 배부르게 채운 채 빙글빙글 돌고 나니 금세 황금빛 붕어빵들이 윤기를 자아내며 하나둘씩 봉지로 팔딱팔딱 뛰어올랐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
셋이서 양손으로, 도합 여섯 개의 손을 열심히 흔들어 주는 배웅을 받은 후, 두툼한 봉투를 끌어안은 채 갓 나온 붕어빵이 뜨겁지도 않은지 벌써 먹기 시작하느라 정신이 팔린 너를 데리고 마루를 가로질러 창가 근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분하게 요기라도 하고 가는 수밖에.
겨울 간식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붕어빵을 두고 누군가는 머리부터 먹는지, 꼬리부터 먹는지 옥신각신 토론을 한다지만 몹시 시장한 네 앞에서는 단박에 무의미해졌다. 먹는 순서가 어찌 됐든 붕어빵이란 존재 자체는 다른 음식으로 바꿔버리는 광선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으니 너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바삭한 겉껍질을 달걀처럼 톡 깨서 가르면 다음에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속살이, 그리고 달콤하게 졸여진 팥앙금까지 차례로 혀에 감기며 밀려 들어오는 삼합만 있으면 네겐 충분했다.
“따듯하니까 더 맛있네.”
예전이라 부르기도 무색할 만큼 아주 오래전에 건장한 성인만 한 먹잇감을 사냥하면 둘이서 한 끼로 해치울 만큼 네 먹성이 대단하긴 했는데, 내가 하나 먹을 동안 두 개째 집고 있는 널 보아하니 새삼 여전하다 싶었다. 꼬리를 잡은 채 생선을 통째로 입에 넣었다가 빼면 살은 깔끔하게 발라지고 가시만 남는 텔레비전 속 애니메이션처럼 순식간에 네 뱃속으로 사라지는 붕어빵을 무념무상으로 구경하다 보니 문득 될 대로 되란 마음으로 가방에 실어 온 정체불명의 그것이 떠올랐다.
내 손을 한 번이라도 거친 기억이 전혀 없었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너도 다 먹으려면 멀었으니 이참에 자세히 보자 싶어 번들거리는 손끝부터 휴지로 닦고 그것을 꺼냈다.
“새로운 취미라도 생긴 거야?”
“아니거든.”
흡사 아는 사람들만 찾아간다는, 후미진 골목에 낡아빠진 돗자리를 깐 가게 한구석에 잠들었던 것 같은 카세트 플레이어는 앞뒤로 뒤집어 봐도 손을 탔다는 흔적 정도만 있었지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우측에 달린 열림 단추를 눌러 뚜껑을 열고 꺼낸 테이프도 까닭 모를 제목에 그들의 언어가 쓰였다는 것 이외에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테이프였다.
“지금이니까…….”
뭔가를 하라는 건가. 혹은 할 수 있다는 건가.
지금의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니면 할 수 있는 것.
눈으로 훑기만 하는 것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소리를 담아 따라 읽으면 이걸 적은 의도를 어림잡아서라도 헤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애초에 두루뭉술하게 끝난 말이라 뒤에 붙일 수 있는 가짓수가 지나치게 무궁무진했다. 아무래도 테이프를 직접 들어봐야 단서를 더 찾아서 범위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맡겨놨냐?”
붕어빵을 흡입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빵에서 삐져나와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팥 너머로 틈틈이 내가 무얼 하는지 흘금거린 모양이었다. 테이프를 다시 플레이어에 넣어 뚜껑을 닫고 원래 연결되어 있던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다 말고 어쩔 수 없이 네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먹던 건 떨어지지 않도록 입에 꼭 문 채 재빨리 내 옆에 와 얌전히 앉았다.
이어폰 한쪽은 내가 꽂고, 나머지 한쪽은 네게 꽂아준 뒤, 카세트 플레이어 측면에 뽈록 튀어나온 재생 단추를 눌렀다. 찰칵― 하고 맞물리는 금속음과 함께 톱니바퀴 한 쌍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며 누군가가 선율로 새겨둔 기록을 풀고 옮겨서 다시 감는 일련의 순환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짧은 공백으로 쓰인 서문을 지나고 드디어 본문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깜짝 선물을 가려뒀던 구름 장막을 한 움큼 쥐고 휙 걷어내는 감각에 나도 덩달아 잡아당겨지며 꿈에서 빠져나왔다.
잠에서 퍼뜩 깨어 고개를 들었을 때는 하교 시간이 다 끝나 가는지 학생들은 모두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텅 빈 교실부터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게 지워진 칠판 앞 교탁 위에는 지난번 리쿠네 학교에 수업하러 갔을 때 지참했던 반지르르한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있었다. 안에 든 테이프는 제게 주어진 악보 연주를 마쳤는지 탁― 하고 재생 단추를 박력 있게 쳐올리며 다음 차례를 위해 뒷면으로 뒤집어달라고 날 불렀다.
그 부름에 응하긴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비몽사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았다가 문득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 있는 힘껏 무지갯빛으로 하늘을 채우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비지땀을 닦으며 쉬는 시간을 갖는 카세트테이프는 잠시 놔둔 채 창가로 다가가니, 석양이 하루의 여운으로 남긴 노을을 끌며 지평선 너머로 물러가는 동안 초저녁달이 푸르스름한 어둠을 몰고 오면서 한 자리에 공존하게 된 낮밤이 여느 때보다 가장 다채로이 색을 펼쳐놓았다. 낙화처럼 짧게 스치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교실과 마찬가지로 느지막한 오후가 화사하게 고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운동장 끄트머리에는 엄지손톱만 하게 보이는 교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문밖에는 순수한 빛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어서 이리 와야 한다며 내게 손짓했고 저리로 가고 싶다는, 가야 한다는 본능적 욕망이 들끓듯 차오르게 만들었다.
저 문을 지나서 여길 빠져나가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은 기분. 그가 꾹꾹 눌러 참다못해 무미건조하게 떨어뜨린 빗방울에 하순이 젖어 들자 눅눅해진 너의 뺨을 닦아주던 기시감. 그가, 아니, 네가 끊임없이 날 부르며 폭풍우로 흐려져 가는 어둠 속에서도 꿋꿋하게 꺼뜨리지 않았던 불빛의 신호.
그런 감각이 한데 뒤섞여 손을 뻗었고 내 등을 살포시 밀었다. 몸도, 마음도 충분한 안식을 취했으니 이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고. 이곳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이곳에 나를 영원히 가둬버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때라고.
「지금이야, 쟈그라!」
“말 안 해도 알아.”
머릿속으로 직접 들려오는 네 목소리에 맞춰 학교 건물이 우르릉 흔들리기 시작했고 복도와 맞닿은 벽은 하얀빛이 번쩍이는 창살로 잠식당해 차츰 내가 있는 쪽으로 번져왔다. 더 고민해 볼 것도 없이 눈앞의 창문을 부수고 나가는 게 최선이었던 지라 늘 하던 대로 검을 불러냈고 손에 쥐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감겨드는 촉감은 축적된 세월로 무두질 된 가죽이 아니라 머리칼까지 쭈뼛 설 정도로 차갑지만 낯설지 않은 금속이었다. 설마 하며 살짝 일그러뜨린 눈썹으로 내려다보니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옅은 잿빛으로 바란 성검이 손에 들려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파악할 틈도 없이 양손목과 발목에는 성검에 깃들었던 사원소가 스르륵 빠져나와 빛의 고리로 치환되어 하나씩 채워졌다. 다양한 변수를 예상한 그가 날 붙잡아 두려고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지만, 만에 하나 그것들을 헤치고 빠져나가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최후의 보루로서 걸어둔 구속 장치였다. 쓸데없이 영롱하게 빛나는 고리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주렁주렁 달린 탓에 나는 내 뜻과 상관없이 신음 소리를 내며 무릎이 꿇려졌고 앞으로 공손히 모인 두 손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여튼 빛이란 것들은 죄다 제멋대로였다. 너의 간절한 바람에 마음이 동하여 날 도와주겠다고 선뜻 제 쪽에서 손을 내밀 때는 언제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가려 하니 티끌만 하더라도 어둠을 못 본 체 지나치질 못하는 고약한 성질머리를 다스리지 못해 이제는 사지를 묶어두려 들었다. 은하 곳곳에 빛을 전하는 사자보다 이리도 융통성이 없어서야, 쯧.
하지만 여태 상대해 온 고지식한 놈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지나치게 과묵한 탓에 오해를 빚어내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빛의 농락에 놀아난 게 어제오늘이 아니었고 온갖 속삭임으로 귓가에서 재잘거리며 틈만 나면 현혹하려 드는 어둠을 다룬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당신들의 싸움에 껴서 이리 당겨지고 저리 잡아당겨지며 심연의 저 밑까지 처참하게 나동그라졌다가 겨우 다시 기어 올라온 게 엊그제라 나는 진절머리가 났다. 자신들은 입만 뻐끔거리면서 검은 대신 들고 싸우라 임무를 내리기 급급한 그대들의 탁상공론에서 미련 없이 빠질 테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제는 소매를 길게 나부끼며 해맑게 달리는 바람이 편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들판처럼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나를 맡기리라.
막 잠에서 깨어난 터라 끌어다 쓸 수 있는 마인의 힘은 보잘것없었지만,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는 와중에도 빛의 창살은 멈출 줄 모르고 양쪽에서 옥죄어왔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위해 방해하려는지 그 투명한 속내는 어느 정도 간파했지만 내 알 바인가? 나는 내 길을 가야 하니 내 발로 딛고 일어서서 내 손에 쥐인 검을 휘둘러야 했다. 지금이니까 날 부르는 목소리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온전히 실을 수 있었다.
활활 타오르며 온몸에 흘러넘치는 푸른 의지를 버티지 못한 빛의 고리에는 차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틈새로 연기처럼 새어 나온 원소 가닥은 조금씩 원판에 새겨진 제자리로 돌아갔고 머지않아 성검이 본래의 빛깔을 되찾으면서 고리는 흔적도 없이 부서져 내렸다.
자유로워진 손발을 만끽할 여유도 잠시, 벌써 창살은 교실의 삼면을 먹어 치우고 창문들의 행진만 후식으로 남겨둔 상황이라 더 늦기 전에 탈출해야 했다. 네가 들어야 비로소 광휘를 뿜던 성검으로 사심류를 제대로는커녕 발휘나 할 수 있을지 가늠하려 드는 잡생각은 저리 집어치우고 일단 부딪혀 보자 싶어, 몸을 낮춘 채 검을 든 손 반대편으로 날을 깊숙이 말아 넣었다가 순식간에 빼내며 압축된 검기를 폭발시켰다. 쐐액― 하고 공중을 가르며 날아간 하얀 초승달에 벽은 둔탁한 파열음을 지르며 박살이 났다.
교실 밖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출구가 생긴 걸 축하하듯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잡아 탄 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홀가분해진 몸으로 가볍게 흙바닥에 착지한 후부터는 오로지 교문만을 바라보고 달음박질했다. 이러면 도망가지 못하리라 자만하며 차나 한잔 홀짝이던 그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푸른 유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허겁지겁 지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빛의 사슬로 엮은 파도를 일으켰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교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 부신 빛으로 가득 찬 건너편에서는 어렴풋했던 너의 존재감이 차츰 뚜렷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오롯이 손끝에 휘감기는 감각만을 믿고 느낀 사실이 진실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기를 해보기엔 충분했다. 그래서 파도가 흉포하게 벌린 입을 바로 내 등 뒤에까지 들이밀었을 때, 망설임 없이 문 너머로 발을 디뎠고 세상은 온통 하얗게 번지며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
―
강아지풀로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며 키득거리는 봄바람의 장난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숲속 어딘가 드넓게 펼쳐진 들판에 드러누워 있었다. 끔벅이는 눈에 가득 채워지는 말간 하늘에는 완전히 풀어진 구름만 한가하게 떠다녔다.
여기에는 방금 빠져나온 이공간만큼 큰 위협은 없는 것 같아 고개만 슬쩍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인간들에게 버려진 뒤 햇빛에 바라고 바람에 삭아 그루터기 정도만 남은 건물이 군데군데 있었다. 적당한 빛과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식물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알음알음 소식을 들은 이들은 줄줄이 폐허로 발걸음을 옮겨 구석구석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녹음으로 차오르는 그곳에서 생명의 향을 맡은 동물들도 하나둘 찾아와 기웃거렸고 폐허는 이내 새로운 터전으로 거듭났다.
일단 죽어라 쫓아온 위험을 거꾸러뜨리긴 했는데 이제는 뭘 하면 될는지 막상 감이 잡히지 않아 죽음과 삶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곳에 시선을 대충 던져놨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솜사탕을 한 바구니 떠다가 뭉친 듯한 강아지가 저기 멀리서부터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냅다 뛰어오더니 나를 아는 건지 얼굴을 마구 핥아댔다.
“아니, 잠깐, 잠깐만, 좀, 멈춰주지, 않을래?”
덩치도 산만 한데 힘은 또 얼마나 좋은지 침 범벅으로 세수를 끝내기 전에 그를 말리려고 몸을 일으켜 앉는데도 애를 먹었다. 나한테 맛있는 간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꼬리까지 붕붕 돌려가며 어찌나 반기는지 누가 보면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가족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지칠 줄 모르고 친한 척을 하는 그를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 간신히 진정시켜 옆에 얌전히 앉혀뒀다. 바깥세상으로 돌아와서 여태까지 한 것이라곤 강아지와 놀아주기 정도밖에 없는데 벌써 쏙 빠진 정신을 갈무리해서 도로 집어넣고 한숨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시야의 고도가 바뀐 만큼 주위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을 조금 여유롭게 골라 담으려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수백 번, 수천 번 해가 뜨고 지던 달이 뜨고 지던 저와는 관계없다는 듯 속 편하게 두 눈을 평온하게 내리감고 잔해에 기대어 깊은 잠에 든 네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날의 전투로 산산조각 난 내 검을 한데 모아 스트레이지 깃발로 조심스레 싸매어 빚은 꾸러미를 품에 끌어안은 채.
“……가이.”
네가 지금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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