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가이] 봄 한 송이

2019.03.23 발행 / 2024.02.09 수정

“바쁜데 미안해.”

“아냐, 일 다 끝내서 괜찮아.”

“문 닫을 시간인데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서….”

안달복달한 얼굴을 조금 펴며 나를 데리고 들어선 점장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앞치마에 마른 손을 닦았다.

반듯했던 검은 천에는 어찌 수습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이 상황을 도와줄 이가 생겼다는 안도와 내게 수고를 끼쳐 편치만은 못한 마음이 동시에 묻으며 살짝 구겨졌다.

“괜찮다니까. 안에 있어?”

“응, 저기.”

선반에 차곡차곡 꽂힌 각양각색의 유리병과 맞은편에 길게 자리한 테이블. 곳곳에 켜둔 짙푸른 네온사인으로 아담한 가게가 심해에 잠겼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인영은 또렷하게 보였다. 점장이 가리킨 곳에는 나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홀로 유영했다. 바 스툴에 앉아 탁자에 엎드린 그림자는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완전히 술에 취했는지 익숙하지만 장조가 다른 노래를 가볍게 휘파람으로 부르며 허공에 띄운 발을 통통 굴렸다.

적어도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쟈그라―.”

낭랑하게 부리던 발재간은 뚝 멈췄고 대신 옷깃을 바짝 세웠다. 마치 내 앞에서는 반드시 일촉즉발의 위험을 즐기는 자신으로 둔갑해야 하는 것처럼. 포근했던 바다 빛깔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건 한순간이었다.

너는 맑은 정신은 아니었지만 입 안에 털어 넣은 알싸한 음료 사이로 본능만큼은 생생히 깨어있었다.

“안 취했어.”

알코올에 담뿍 적신 혀를 열심히 움직여 답했지만, 그럴수록 네가 미리 준비해 둔 대사는 빙빙 꼬였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럼에도 한 모금도 되지 못할 액체가 찰랑이는 잔에 손을 뻗으려 하길래 재빨리 멀리 치우며 네 옆에 앉았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독하게 쌓인 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건 드문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알아서 갈 테니까 꺼져.”

너는 심한 욕지거리를 웅얼거리며 나는 보지도 않고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활발하게 도는 취기로 인해 진작 손에는 힘이 다 풀렸고 네가 바라는 걸 이룰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냥 내 옆구리에 원 없이 실컷 꾹꾹이를 할 수 있도록 제자리에서 가만히 있어 주었다. 술김에 아무렇게나 내뱉는 빈말이고 무의미한 행동이었지만, 저 아래 모래밭에는 미처 마시지 못한 한 모금처럼 숨겨온 진심이 오랫동안 잔류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곳에는 내 잘못도 없잖아 있다는 것도.

그러니 이렇게 해서라도 속마음을 털어내고 네가 편해진다면야 나는 괜찮았다. 일부러 다른 이에게 헛된 화살을 겨눠 상처 주지 않고 오롯이 내게 쏟아내는 건 다 받아줄 수 있었다. 설령 그게 응석이든 분노든.

“데리러 온 거 아냐. 줄 거 있어서 왔어.”

“네가?”

“응.”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한쪽만 내놓은 눈이 일자로 가라앉았다. 아직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지만 결국 또 쓰잘데기 없는 것일 거란 판단이 이미 내려진 채였다.

“……줘 봐.”

선물이 있다는 순간부터 줄곧 의심의 눈초리로만 바라보던 너였지만, 그래도 궁금하긴 했는지 왼손을 척 내밀어 어서 달라고 손짓했다. 줄 거면 빨리 달라고 아이처럼 파닥이며 재촉하는 손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지만 꾹 참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완전히 토라져서 영영 가게에서 못 데리고 나갈 것 같았으니까.

“의리 초콜릿.”

“…초콜릿이라고?”

상자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달콤함까지 사로잡아 버릴 만큼 쌉싸름한 풍미가 농후하게 담긴 초콜릿을 이미 먹은 것처럼 인상을 팍 찌푸린 너는 도로 고개를 파묻었다.

포장이 별로인가? 나름 신경 써서 한 건데.

“그건 밸런타인데이잖아.”

곁에 두고 찾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은근히 단 걸 즐겼는데.

그새 입맛이 바뀌었나. 아니면 너무 작은 걸로 줬나.

그렇게 홀로 이쪽저쪽으로 열심히 추론하며 이유를 고심하던 찰나, 짜증으로 버무린 네 목소리가 고막으로 쏙쏙 들어왔다.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오늘은 화이트데이라고. 내가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가이?”

“둘이 다른 건가?”

“전자는 초콜릿, 후자는 사탕. 그러니까 사탕을 줘야 한다고. 한 번 말하면 알아들어라, 좀.”

말은 퉁명스럽기 그지 없었지만 행동은 달랐다. 어느 틈엔가 상자는 네 손에 소중하게 꼬옥 쥐어졌다. 제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일단 이것 또한 선물이니 내가 변심해서 무르지 못하도록 유치한 욕심을 부렸다. 애초에 나는 다시 가져갈 생각도 없었는데.

“잠깐만. 하나 더 있어.”

네 취기를 빌려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뻔하던 걸 얼른 헛기침으로 가렸다. 그리고 겨우 불을 지펴둔 네 흥미가 사그라들기 전에 잽싸게 재킷 겉주머니를 뒤적여 망부석으로 꿈쩍 않는 널 달래줄 두 번째 선물을 찾았다.

“또 뭔데.”

너는 술에 잠겨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틱틱거리며 어김없이 툭 손을 내밀었다. 나는 보지도 않고 거칠게 던지는 손짓에서는 일말의 기대조차 없었다.

“여기.”

빳빳한 비닐 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곁들여 네 손바닥에 이물감을 얹어주었다. 거의 포기 상태에 수렴한 너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고도 거치기 귀찮아서 촉감으로 더듬기만 했다. 하지만 무언가 작은 물체가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그것의 정체를 드러내고 정확하게 명명할 이름이 무엇인지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선물을 사방으로 한참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너는 결국 포갰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들어야 했다.

“이거…….”

“너 그런 거 항상 하고 다니잖아. 봄이기도 하고.”

어느 별에서 미션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린 야시장에서 산, 만개한 벚꽃 한 송이가 담긴 이어커프였다. 달이 비추는 밤 아래 그것을 발견하니 문득 네가 떠올라 주섬주섬 동전을 건네고 샀었는데, 이제야 네 손 위에서 엷은 은빛으로 핀 꽃잎 사이로 적분홍색 결정이 자그맣게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만날 줄 알고.”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너와 교차하는 순간은 언젠가 돌아오겠지 싶어 줄곧 소지하고 다녔던 터라 뒷머리만 긁적였다. 취기가 올라오는 만큼 구겨졌던 미간은 서서히 풀리며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 된 너는 별말 없이 이어커프만 지그시 바라봤다.

“…….”

“마음에 안 들어?”

“……해 줘.”

디자인이 별로라든가, 저와 안 어울리게 무슨 꽃이라든가 아까처럼 한마디는 들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예상을 빗겨나간 단어의 조합이라서 조금 놀랐다.

치장에 한해서 더욱 까다로운 터라 따끔하게 날아들어야 했을 일침은 잠잠했다. 대신 너는 은색 뱀이 휘감은 귀가 잘 보이도록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빨리.”

“어? 아, 응.”

멍하니 있다가 얼른 먹고 싶은데 껍질이 잘 까지지 않는 사탕을 눈앞에 흔들어 뵈는 아이처럼 네가 은근하게 졸라와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포장을 벗긴 이어커프를 건네받았다. 어느샌가 훌쩍 자라 단단히 매였던 뱀부터 자유롭게 풀어주고 빈자리에는 봄 햇살을 머금은 소담한 꽃을 활짝 피워냈다.

새로 자리한 장신구가 어색하면서도 만족스러운지 너는 가만히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평상시의 너였다면 내가 주는 것 따위 받으려고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 그걸 알았기에 나 또한 네가 취했다는 것을 핑계 삼아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번 기회를 틈타 선물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반짝이는 봄꽃은 내 손때만 잔뜩 묻은 채 주머니 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한 잎조차 펴보지 못한 채 시들었을 거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뿌듯했지만 일부러 감춰뒀던 씁쓸함이 배어 나오는 것까지는 다 막을 수 없었다.

“이제 가자.”

“혼자서 간다고.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꺼져.”

풀린 다리에 힘을 주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너를 부축하려 하자, 일순에 정색하고서 나를 팍 밀쳤다. 그러나 네 의도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비틀거리는 걸음은 제자리를 맴돌기만 해서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둘러 계산을 대신하자마자 너는 엉킨 스텝으로 넘어지려 했고 나는 얼른 붙잡아 팔을 내 어깨에 둘러 받쳐줬다.

“이거 놔. 싫다고―.”

그럼에도 끝까지 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입으로만 있는 투정, 없는 투정 다 부리길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함께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점장은 우리를 배웅해 주고 드디어 퇴근할 수 있겠다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잔을 정리하러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당시 화구 님이 그려주셨던 멋진 연성도 같이 올려둡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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