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미츠루기] Frolia

2019.01.26 발행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응, 전혀.”

소녀는 내가 무섭지 않나 보다. 놀이기구를 찾아 떠도는 인파로부터 내게 다가온 사람이야 여럿 있었지만 다들 어색하게 미소란 가면만 쓰고 사라지던데. 아까부터 귀찮을 정도로 꾸준히 이것저것 물어온다.

“으으음, 그럼 먼저 부모님을 찾으러 가볼까요? 아, 나는 아사히라고 해요.”

부드럽게 물결치는 긴 머리를 한 그는 무릎을 굽혀 시선을 내 눈높이에 맞춰준다. 둥글둥글하게 가득 찬 갈빛 눈동자는 따스한 햇살을 머금었다. 입가에는 꽃바람이 섬세하게 매만져 준 싱그러운 웃음이 걸렸다. 봄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소녀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 켠에서 뭉게뭉게 피어난 청량한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을 간질이는 듯한 이 감정, 예전에도 느껴본 것만 같은 건 왜일까.

“당신은요?”

“이름 말이야?”

“네! 아이나 꼬마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이름… 내 이름이 뭐였더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단어를 그대로 말했다.

“그리죠.”

“와아, 그리죠라니 예쁜 이름이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죠 쨩의 부모님을 찾으러 가 봐요!”

소녀는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요, 라며 의자에서 내려온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오밀조밀한 손이 소중하게 감싸온다. 나보다 아주 조금 더 큰 손이었지만 절대 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와닿았다.

“그리죠 쨩, 잘 생각해 봐요. 부모님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라면 뭐라도 좋아요. 아니면 자기에 대한 것도 좋고요.”

“없어.”

“그러지 말고요오―.”

“……하나도 없다니까.”

“정말 아주 작은 것도 괜찮아요! 아니면 그리죠 쨩이 부모님과 다시 해피하게 해줄 수가 없잖아요.”

맞잡은 손을 가볍게 팔랑이며 나란히 걷던 소녀가 시무룩해졌다. 난 괜찮은데 그는 왜 이렇게 내 몫까지 걱정해 주는 걸까. 애초에 내 부모가 실존하긴 할까.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린 감정은 호흡하고 있으니 단서가 될 만한 단어에는 반응할 할 텐데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만일 그가 헛된 일을 하는 거라면…….

“아, 혹시 마지막으로 뭘 탔는지는 기억나요? 회전목마? 미니 바이킹? 아니면 롤러코스터?”

갑자기 그는 뭔가 번뜩인 듯 도로 밝아진 채 놀이기구를 하나씩 가리키며 쏜살같이 물었다.

그러니까 하얀 말이랑 마차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게 회전목마, 배처럼 생긴 기구에 주르륵 앉아서 위아래로 흔들어 주는 게 바이킹, 그리고 둘씩 엮은 열차를 타고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롤러코스터라는 거지?

“잠깐, 그리죠 쨩이라면 키 때문에 롤러코스터는 못 탈 텐데. 그러면…… 범퍼카?”

“모르겠는데.”

“으아아… 이젠 어쩌면 좋죠…….”

오만상을 쓰며 고민에 시달리던 소녀는 또 새로운 게 떠올랐는지 검지를 치켜들었다.

“우리 미아보호소에 가 봐요! 혹시 그리죠 쨩의 부모님이 찾고 계실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맑게 갠 얼굴로 내게 환히 웃어 보였다.

“그전에 배고프면 안 되니까…… 자, 사탕이에요!”

소녀는 가방에서 꺼낸 두둑한 천 주머니를 열더니 주황색 포장지를 두른 사탕을 하나 꺼내 내 손에 착 얹어 주었다. 손바닥 안을 차지하는 둥근 감촉은 날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마냥 꼭 맞았다.

그러고 보니 내 주머니에도 이거랑 똑같은 사탕이 있었는데.

그건 누구한테서 받았더라.

그 사탕은… 사탕은…… 아사히가…….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짙게 피어난 연기가 넓게 퍼졌다.

“우와앗! 그리죠 쨩 괜찮… 앗, 츠루쨩이 왜 여기 있어요?! 그리죠 쨩은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안개를 휘휘 걷어낸 아사히는 큼지막하게 뜬 눈으로 날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만 해. 어지러워. 내가 그 꼬마야.”

“그런 거였어요? 난 또 누가 납치해 간 줄 알고 놀랐잖아요. 그나저나 츠루쨩을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너는 뭐가 좋은지 다시금 싱글싱글 웃었다. 바쁜 나를 뜬금없이 불러내서는 늘 뻔뻔하게 보여주는 너만의 웃음. 그걸 마주하다 보면 나는 오로지 태양만 바라보며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가 되고 말았다. 네게 일일이 끌려다니는 건 번거로웠지만 어쩐지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네가 비춰주는 햇살 아래서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이 봄날의 개나리처럼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났다.

“츠루쨩, 우리 데이트하러 가요! 같이 못 논 지도 꽤 됐잖아요.”

“좋아.”

“안 된다고 하지 말… 정말요? 우와, 믿기지 않아요! 츠루쨩이 오케이라니 해피에요! 뭐부터 타러 갈까요? 아님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어차피 정해진 결말인데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되겠지. 오늘쯤은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지.

벌써 솜사탕이 주렁주렁 열린 가게 앞에 서서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널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지금 이 순간 오롯이 나를 위해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한 줄기 햇빛처럼 화사하게 웃는 너의 미소를 아낌없이 눈에 담았다.

나의 소중한 친구, 아사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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