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3화

카리타스 편

“성녀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가게 밖에서 카리타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사색이 된 피에르 경과 그 뒤에서 마찬가지로 당황한 메릭이 있었다.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온 건 메릭이었다. 그는 카리타스에게 어디 다친 곳이 없냐고 물으면서 꼼꼼하게 카리타스를 살폈고 아무런 위해가 없었다는 게 확인이 되고 나서야 상황을 살폈다.

‘아까 세쿠리스한테 붙잡혔다는 건 말하지 말아야지. 괜히 잔소리 들을라.’

“왜 피에르 경과 함께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교대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하셔놓고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시다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에르 경의 명령까지 제가 무시할 순 없었습니다.”

할 말이 없었던 카리타스가 괜히 딴청을 피우며 자작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메릭이 손을 들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기,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있는 저 나체의 사내가 혹시….”

“네, 세쿠리스에요. 어…그, 이 사람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봐버려서 고해성사, 해야 할 거 같거든요. 나중에 일정 좀 살펴봐 주세요. 그리고 피에르 경께 부탁해서 이번 일을 정식으로 사제 회의에서 엄벌할 수 있도록….”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낮은, 조용한 목소리로 메릭이 속삭였다. 덩달아 목소리를 낮춘 카리타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메릭은 피에르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피에르 경께 이곳의 위치와 이름을 말하니 대단히 화를 내시더군요. 당장 성녀님을 찾아서 데려와야 한다고 하시길래 정신없이 따라왔는데, 이곳까지 오면서 여쭤보니 여기가… 교회에서 암암리에 출입을 허가해준 곳이라고 하더군요.”

메릭은 그 뒤로 피에르가 덧붙인 말은 생략했다. 그랬는데도 카리타스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허겁지겁 옷을 주워입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여자들은 일반인 같았는데, 그 사이사이로 사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그제야 피에르가 다가와, 카리타스에게 무슨 무모한 생각으로 혼자 이런 곳을 오셨냐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그런 호통 따위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경,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잘 들립니다. 지금 제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가 아니지 않나요?”

“….”

어느새 자작나무가 사라졌고 옷을 다 갖춰 입은 사람들은 가게 밖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모여있었다. 나무에 걸려있던 세쿠리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다른 사제들이 그의 몸 위에 천을 올려두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카리타스가 칙칙한 로브와 머리를 가린 천을 벗었다. 치유 사제의 복식으로 돌아온 카리타스는 피에르에게 이들을 잡아서 가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피에르는 어물쩍거리며 망설였다.

“성녀님, 아까 메릭 경께 들으셨겠지만, 이곳은 교회에서 암묵적으로 허가를 내준 시설입니다. 이곳을 이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성하의 인가를 받은 증서가 있습니까?”

“아뇨, 하지만… 이런 시설이 없다면 사제들이 욕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욕망을 절제하고 신을 향한 충성과 이성만을 갈고 닦는 것이 수양의 목표이긴 합니다만, 인간이니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걸 억지로 누르기만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군데를 지정하고 교회에서 관리하는 것입니다.”

카리타스는 진지하게 변명하는 피에르를 보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고 메릭은 자신이 생략한 말을 기어이 카리타스에게 하는 제 상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후, 어떻게든 우겨서 그들을 교회 재판소에 데려가기는 하였으나, 판결을 맡은 사제들이 모조리 무죄를 선고하는 바람에 카리타스의 계획은 무산됐다. 솔직히 카리타스는 재판소에서 ‘이게 무죄라면 저도 가도 되나요?’라고 물어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건 상상으로만 남겨두었다.


일주일 후, 카리타스는 책을 덮었다. 지난번 세쿠리스를 따라갔을 때와 비슷한 시간대였다.

“요즘 그 사제는 어떤가요?”

방금 막 피에르와 교대한 메릭이었지만, ‘그 사제’가 세쿠리스를 의미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일단 제가 보기엔 평소보다 위축된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 앞에선 여전히 비슷할 수도 있죠. 편지를 보내준 아이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소식은 없어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다음날 도착한 코지의 편지에는 세쿠리스가 더 발작적으로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는 답변이 적혀있었다.

[네게 망신을 당한 게 어지간히 분했나 봐. 솔직히 더 아프게 아이들을 괴롭히는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네 탓을 할 필요는 없어. 잘못한 건 사제 신분으로 그런 곳을 들락날락한 그 인간한테 있잖아. 그리고 복수할 방법 말인데, 올리비아를 찾아가 보는 건 어때? 세쿠리스에게 당해서 동기도 충분한데, 신전 밖에 살고 있으니까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어서 코지가 덧붙인 말에 카리타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이들이 더 심하게 혼났다는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웃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방법을 찾아냈으니까.

‘그런데 올리비아가 내 말을 순순히 따를까?’

코지는 카리타스가 올리비아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랐다. 당연하게도 카리타스가 코지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코지는 올리비아가 카리타스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버티면 자신과 있었던 일로 협박해도 좋다고 추신을 달았다.

카리타스는 코지의 편지 밑에 깔린 시도폰의 편지를 읽으려다가 메릭을 대신해서 연장근무 중인 기사를 흘끗 쳐다보았다. 호위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메릭은 일주일 때 징계를 받고 있는데, 그 내용을 물어도 메릭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넘길 뿐이었다.

아무튼, 피곤한 표정의 기사를 보고 있으려니 카리타스는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아, 산책하겠다며 일어났고 손에는 시도폰이 보낸 편지가 들려있었다.


해를 등진 채, 제 몸이 만들어낸 그늘에서 편지를 읽으며 걸어가던 카리타스는 아르카눔과 캐서린이라는, 악마인지 악마 숭배자인지 모를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됐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이미 시도폰 선에서 해결된 일이니까 관여하지 말자. 지금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 시도폰이 무사하면 된 일이라고 생각해.’

지금 중요한 건 이미 사라진 악마가 아니라, 악마 못지않게 추악한 인간을 처벌할 방법이었다.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니, 막 돌아온 듯한 메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피곤한 표정의 기사와 교대하며 그에게 먹을 것을 건넸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거 드시고 푹 쉬세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냉큼 음식을 받아든 기사가 사라지자, 카리타스는 메릭에게 조만간 신전 직영점으로 시찰을 나갈 거라고 통보했다.

“저를 두고 가지만 않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다만… 주기적으로 시찰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닌데도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신 건가요?”

“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세쿠리스를 끌어내릴 정도로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 만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를 포기하지 못하신 겁니까?”

미세하지만 메릭의 어조엔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세쿠리스를 언급하는 것조차 진절머리가 나는지 메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리타스에게 이쯤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밖은 산책갈 정도로 맑은 하늘이었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조금씩 끼고 있었다.

“이정도만 하라니요. 세쿠리스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고 이번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잘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더 강한 고통을 받고 있고요.”

“성녀님께서 또래 아이들에게 그런 연민을 가지고 계신 건 알고 있지만, 당신의 직위 때문에 억지로 이런 일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메릭의 말에 카리타스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제 직위 때문에 괜한 부담감을 느끼는 게 아니에요. 저는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제가 이만한 신성력이 없어서 성녀로 떠받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거주관에서 살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세쿠리스를 내버려 둘 수 없죠.”

“….”

“징계를 받는 게 두려워서 절 말리는 거라면 이번 일에서 빠지세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당신께서 다치실까 봐, 그게, 그게 두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메릭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반응에 카리타스는 더 쏘아붙이지 못했다.

“동행하겠습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곁에서 안전은 지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알겠어요. 당신의 의도를 곡해해서 미안해요.”

비가 내릴 것처럼 먹구름이 낀 하늘을 등지고, 카리타스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지만, 내용에 집중이 되진 않았다. 메릭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진심으로 안위를 걱정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정신 차려. 오랜만에 누가 걱정해 줘서 들뜬 것뿐이야.’

심란해진 카리타스가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려는데, 밖에서 빗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까의 이야기 때문에 창문은 닫아두어, 안으로 비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빗방울이 유리를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 카리타스는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올리비아를 어떻게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지, 메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카리타스가 며칠을 보낼 동안, 메릭은 열심히 교황에게 거짓을 고했다.

아무 일이 없다고, 성녀는 성실하게 제 할 일을 쳐내느라 바쁘다고. 그것은 사실이었지만 교황이 원하는 진실은 더 내밀한 것이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얌전하게 굴어주시는 게 참 다행이긴 합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은 이런 일을 보고도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란 말이죠?”

“….”

교황의 평가에 메릭은 침묵을 선택했다. 메릭이 카리타스를 알고 지낸 시간보다 교황이 카리타스를 가르친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여기서 메릭이 아니라고 부정했다간 더 의심을 받을 게 뻔했다.

“호위로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이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공기까지 알아내는 것이 당신의 임무입니다. 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겠지요?”

결국 메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교황의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자로 징계는 끝났기에 그는 바로 카리타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 앞에 서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와 그는 문을 두드리려는 손을 멈췄다. 비슷한 걸 느꼈는지, 문 옆을 지키고 선 기사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방문객이 있는가?”

“아, 옙. 아세쿠토레 저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오신 지는 얼마 안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분위기라니. 교대해야 하는데.”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삼킨 메릭과 그 뜻을 알아들은 경비병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대감이 만들어졌을 때, 메릭을 기다리던 또 다른 호위 기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메릭에게 언제 왔느냐 물었다.

“방금 오셨습니다. 막 들어가시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오드샤 경.”

애써 웃어 보인 메릭을 흘끗 쳐다본 오드샤가 ‘교대하겠습니다.’라며 방을 나섰다. 본래 제2 신전이 근무지였던 오드샤는, 동생이 북부에 아예 정착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부 수행단이 남부에 올 때마다 들르는 제3 신전으로 근무지를 바꿨다.

“메릭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원래는 호위 후보에 지원하지도 않았던 오드샤는, 피에르의 부탁으로 임시 호위 업무를 맡게 되었고 종종 메릭이 교대하러 올 때 카리타스와 북부에서 있었던 일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쉰 메릭이 카리타스가 앉아있는 접객용 소파 뒤에서 자세를 잡았다.

‘이 두 사람은 나름 오래 알고 지낸 거로 아는데 뭐가 문제길래 이런 분위기인 걸까.’

메릭이 들어오자 다른 두 사람이 약속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무형의 긴장감이 공간을 짓누른다고 느낀 메릭은 내보내 달라며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막함을 먼저 깨버린 건 아페였다.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카리타스의 표정은 평소보다 몇 배는 서늘했다. 물론 메릭은 들어올 때 말고는 카리타스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 그는 머릿속에서 계속 카리타스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니, 철저히 준비해서 기사단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제가 북부에 가기 전에 시험해보셔도 돼요. 특히 집행자께서 안전하실 수 있도록, 물론… 그분이라면 제 도움 없이도 다치지 않으시겠지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주 모범적인 사제의 태도였다. 메릭은 아페가 북부에 가겠다고 말하는 걸 처음 들었기에 놀랐으나 자신의 의견을 티 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점잖은 척 눈을 내리깔았다.

“부디 당신의 몸도 잘 챙기시길 바라요. 말씀하신 대로 집행자께선 잘 다치지 않으실 테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겠죠. 그리고 저는 딱히 시험 같은 걸 칠 생각은 없답니다. 어련히 해내실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카리타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메릭은 그가 웃고 있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훈훈한 내용과 다르게 말에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메릭의 예상은 정확했다. 말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넘긴 카리타스는 잠깐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5년이나 뒤에 있을 일을 계속 이야기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시도폰이 신경 쓰였나 보네. 가르쳐보니 유능하기도 하고 북부에 기사는 많아도 치유 사제는 지원을 적게 한다고 해서 보내려고 결심했던 건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물론 카리타스는 시도폰이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모를 리가 없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집행자를 향한 대중의 기대감과 지지, 실질적인 단장을 향한 기사단의 복종과 존경,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과 나누는 우정. 너무도 선명하게 따뜻한 감정이었으니 그걸 가지고 있지 않은 카리타스는 그 온기를 외면하지 못했다.

어쩌면 세쿠리스의 일에 매달리는 것도, 우정이라는 걸 느껴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카리타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식지 않은 찻잔을 매만졌다.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없으시다면 자리를 마무리하도록 할까요?”

“네, 언제나처럼 건강하시길.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기고 아페가 떠났다. 무거운 한숨을 짧게 내쉰 카리타스가 조용히 차를 마셨다. 깨끗이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고, 카리타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릭, 나가죠. 오늘 시찰을 갈 테니까요.”

“같이 가는 겁니까? 지난번처럼 몰래 가시지 않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메릭의 물음에 카리타스가 뒤돌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지금 직영점에 시찰 가는 거니까요. 굳이 그것까지 숨길 필요는 없죠, 진짜 목적만 숨기면 되는 일이에요. 둘러댈 만한 핑계는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누군가 물어보지 않는 이상 굳이 알려주지 않으려고요.”

차분하게 겉옷을 입은 카리타스의 뒤로 안절부절못하는 메릭이 있었다.

‘어쩌면 저 가짜 목적이라도 성하께 알려드리면 의심이 조금 사그라들려나.’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는다면, 교황이 자신에게 카리타스의 호위를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메릭은 주먹에 힘을 줬다. 소파 등받이 뒤로 그의 손이 가려져 있었지만, 카리타스는 그곳이 아니라 메릭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카리타스는 왜 자신이 그걸 알려줘야 하는지 물어볼까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메릭이 내일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죠. 누가 물어보거든, 점장의 부실 회계를 불시에 점검하러 갔다고 해주세요. 뭐, 실제로 조금씩 오차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하겠다며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메릭이 대답하자, 카리타스는 제 기분도 살짝 들뜨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신전을 벗어나 교회 직영 직물점을 향했다. 당연하게도, 올리비아가 일하고 있는 그곳이었다.

“…오신다는 연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누추한 꼴을 보여 죄송합니다.”

점장은 허둥지둥 카리타스를 맞이하며 책상 위에 흩어져있던 문서를 그러모았다. 그렇게 정리한 문서를 대충 뒤집은 뒤, 점장이 책상 앞을 가로막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시게. 바빠 보이는데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나?”

카리타스가 고개를 길게 빼서 점장의 어깨너머를 보려고 하자, 점장은 잔뜩 경직된 어깨를 억지로 끌어올려 그의 시야를 가렸다.

“제가 어떻게 감히 성녀님께 이런 일을 시키겠습니까? 지루하고 실수하면 손해가 커질 수 있는 회계 업무라 점장인 제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습죠. 실례가 안 된다면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사실 일은 없네. 항상 신전 안에 있으려니 심심해서 밖을 나가고 싶었거든. 이곳을 방문한다는 건 단순한 핑계일세, 조금 돌아다니다가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그러십니까? 그럼 응접실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지난번처럼 작업장만 둘러봐도 충분해.”

점장은 카리타스에게 천천히 둘러보시라고 이야기하고 문을 닫았다.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카리타스는 그의 부정 회계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럼 이제 올리비아를 찾으러 가보죠. 낮이니까 작업장에 있을 거예요.”

잠시 후, 아주머니의 부름으로 잠깐 밖에 나온 올리비아는 카리타스를 보자마자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선 채로 얼어붙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메릭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카리타스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제 입술을 짓씹으며 카리타스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고, 한참이나 그런 반응을 지켜보던 카리타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때보단 똑똑해진 것 같아 기쁘네, 네게 협조를 구할 일이 생겨서 왔으니까.”

그 말에 올리비아가 긴장해서 쉬어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키실 일… 이라니요.”

“아니, 협조.”

카리타스가 고개를 저었고 올리비아는 두려움이 섞인 의아한 눈으로 그와 메릭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본다 한들 메릭은 대답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카리타스는 올리비아를 이용해서 세쿠리스를 실각시키겠다곤 했지만, 올리비아와 어떤 일이 있었던 지라든가 이 아이가 왜 거주관에서 나와 직물점에서 일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세쿠리스를 끌어내릴 거야. 앞에 설 사람은 나고, 넌 나와 연관이 없는 익명의 제보자로서 증거를 가져다주면 돼. 어떻게 생각해?”

“… 왜 이제야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저를 위한 복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지난번처럼 카리타스가 제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로 대하자, 올리비아도 슬슬 말문이 트였는지 낮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널 위한 복수…는 아니지. 뻔뻔하게, 내가 널 위한 복수를 해주길 바라나?”

“그럼 왜…!”

“거주관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투서를 받았어. 발신자는 코지, 당한 사람은 거주관 아이 중에서도 낮은 구역에 있는 아이들이었고…. 세쿠리스, 그자는 널 괴롭히면서 새로운 재미에 눈을 뜬 모양이더군. 이제 내가 왜 협조를 구하는지 이해하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메릭이 조심스레 카리타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제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건 협조 요청이 아니라 협박 같습니다.”

진지한 이야기인 줄 알고 귀를 기울였던 카리타스가 맥이 빠진 표정으로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코지는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아주 잘 지내지. 북부 수행도 다녀왔고, 신앙생활에도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걸. 이 일을 해결하고 나서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과를…, 제대로 하고 싶어요. 제가 뭘 하면 되죠?”

그렇게 카리타스는 올리비아를 통해 점장의 회계 서류를 얻어냈다. 신전에 제출한 회계 명세와 점장이 실제로 벌어들인 수익이 기록된 장부를 대조해보니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그 차액이 어디로 누출되었는지는 바로 밝혀졌다.

‘세쿠리스에게 직통으로 연결되어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어. 점장을 털어서 관련된 정보가 안 나오면 올리비아를 다른 지점으로 보내기라도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세쿠리스는 파면되었다. 그가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은 대부분 신전으로 회수되었고, 일부는 카리타스의 주장대로 거주관 아이들을 위한 지원에 사용되었다.

코지는 카리타스를 통해 올리비아가 사과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을 받아들였다. 직접 코지를 만난 올리비아는 그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했고, 코지는 올리비아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무사히 잘 끝나서 다행이군요. 세쿠리스 사제가 마지막까지 부정하길래 파면까지는 힘들 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메릭의 말에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쿠리스의 파면이 결정된 다음 날 점심,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엔 하얀 구름이 몇 덩이 있을 뿐이었고,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 바람이 따뜻하게 정원을 데웠다.

“이번 일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거절해도 뭐라 할 순 없었을 텐데.”

앞에서 걷던 카리타스는 메릭을 향해 뒤돌았다. 편안해 보이는 그의 미소에 메릭은 마찬가지로 웃으며 답했다.

“저는 당신의 호위 기사니까요. 물론 아주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내 호위 기사라…. 그렇네, 어쩌면 이 신전에서 내 편인 건 이 사람뿐일지도.’

시도폰도, 코지도, 모두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두 사람 다 신전 안까지 들어올 순 없었다. 카리타스는 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제대로 땅을 밟고 선 듯한 느낌을, 들떠서 부유할 때 느끼는 감정과는 분명히 다른 편안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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