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4화

기사단장 취임식. 북부편

2년 후, 1499년 4월의 어느 날. 이디스는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해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땅을 향해 육중한 무기를 내리칠 때마다 악마들은 반죽처럼 으깨졌고,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두코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반면에 이디스는 매우 상쾌해 보였다.

“너 그러다가 손목 다친다.”

“괜찮아요. 제 몸은 잘 지킨답니다?”

“아, 뭐 그래. 크로마, 그쪽 다 정리했으면 여기 와서 비행형 악마들 부탁한다!”

멀리서 크로마가 그렇게 하겠다고 외쳤다.

오순절 행사에 참석하기 전, 기사들은 악마를 뿌리째 뽑아내듯 토벌하느라 바빴다. 특히 올해는 시도폰의 기사단장 취임식이 열릴 예정이라 기사단 고위직이 전부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평소보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다른 쪽에서 악마들을 토벌하던 프라이에와 시도폰도 합류했고, 이디스는 기쁜 목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시도폰은 땀을 잔뜩 흘린 이디스를 발견하고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평소엔 무기를 쓸 일이 잘 없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돼서.”

“아까 부단장께서도 여쭤보셨는데, 전 정말로 괜찮아요! 단장 서임식도 보고 간만에 언니를 보러 갈 생각을 하니까 기쁘기만 한 걸요.”

방긋 웃는 이디스의 옆엔 어느새 베론이 서 있었는데, 그는 평소보다 밝은 얼굴로 무기를 정리했다.

“임시 단장님, 퇴직을 너무 기뻐하시는 거 아닙니까?”

두코의 물음에 베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들켰군. 부단장도 아니고 일반기사로 돌아가는 거니까 마음이 아주 편하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부단장.”

“아직은 임시입니다. …부단장 맡아달라고 부탁해도 안 들어주실 거죠?”

당연하다는 듯 베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말도 네 번째였기에 두코도 기대는 없었다. 시도폰이 기사들을 모아 토벌 종료를 선언했고, 기사들은 얼마 뒤 있을 오순절 행사에 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늦은 저녁, 프라이에와 함께 서류를 정리하던 두코는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먼저 들어가서 자. 나머진 내가 해도 괜찮으니까.”

“아냐, 애초에 내가 맡은 일인데 이걸 왜 너한테 맡겨. 잠깐 잠 깰 겸 산책이나 다녀올게.”

“같이 가자, 마침 나도 졸리던 참이었어.”

두 사람은 소등 시간 이후로 조용해진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달빛이 밝아서 굳이 콘피테오르로 주위를 밝히지 않아도 걷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말없이 걷던 프라이에는 자꾸 한숨을 쉬는 두코에게 부단장 자리가 많이 부담스럽냐고 물었다.

“들켰네. 내가 잘 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부대장이랑 부단장은 다른 거니까, 처음엔 거절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담?”

“네가 나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지.”

프라이에의 말에 두코는 올해 1월에 있었던 부단장 시험을 떠올렸다.


사실 부단장 자리를 처음으로 제의받은 건 두 사람이 아니었다. 노을이 창문을 통해 길게 들어오는 도서관에서, 시도폰은 딱 잘라 제안을 거절하는 피데이스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손에 잔뜩 들린 교육용 서적을 고쳐 안았다.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더 좋으니까요. 제가 베론 님을 오래 봐서 아는데, 부단장 자리는 굉장히 바쁘단 말이죠? 부단장을 맡으면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도저히 확보가 안 될 것 같아서요. 제안은 정말 영광입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베론이 자네는 거절할 거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네. 달리 추천할 후보가 있는가?”

“뻔하지 않습니까? 부대장인 두 사람이죠.”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시도폰은 개운치 못한 표정이었다.

“아, 두 사람 중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서 제게 말씀하신 거였군요!”

“응, 솔직히 누구에게 맡기든 잘 할 거 같아서 말이지.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도 없고, 난감하네. 베론은 어떻게 부단장이 되었는지 아는가?”

답변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야 가장 강한 기사였으니까요. 비교할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로.”

“…그것 참 도움 되는 답이군.”

눈을 반만 뜬 시도폰이 피데이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시험을 쳐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사실 그 생각도 했었네. 그런데 내가 단장이 될 때도 딱히 시험을 통해서 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내가 두 사람을 시험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

“뭐 어떻습니까, 헤일로 단장께서도, 베론 부단장께서도 시험을 통한 적이 없으셨는걸요. 망설일 시간에 빨리 시험을 어떻게 치를지나 고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행이 끝나면 오순절 준비 때문에 바빠질 테니까요.”

확실히, 북부 수행단을 돌려보내고 나면 바로 오순절 준비로 바쁠 것이 뻔했다. 토벌 때도 부단장에게 지휘를 좀 맡겨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시도폰이 베론, 피데이스, 솔라를 데리고 시험 과목을 골몰하는 동안, 두코와 프라이에는 수행단을 훈련 시키느라 바빴다.

며칠 후, 시도폰이 두 사람을 불러 부단장 자리를 맡겠냐고 물었다. 먼저 대답한 건 두코였다.

“이미 저희 둘 중 한 명에게 맡기겠다고 생각하고 부르신 거 같은데, 저는 거절하고 싶습니다. 딱히 잘 할 자신이 없어서요. 인품이든 성정이든 프라이에가 부단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반박이 날아왔다.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로 따지면 저도 없는 편입니다. 저는 오히려 두코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아, 성격 말고 능력 면에서 말입니다.”

“면전에 대고 성격 나쁘다고 말하기 있냐.”

어이없어하는 두코에게 프라이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앉아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시도폰이 어쩔 수 없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험을 치르자. 물론 최선을 다해야 하네. 대충 하는 사람은 월급을 반으로 깎을 거니까.”

시험이라는 말에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던 두코는 이어지는 말에 입을 쩍 벌렸다. 프라이에는 이렇게 되는 거였냐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두코는 정신을 차리고 날짜와 과목을 물었다.

“과목은 전술과 무술 딱 두 가지. 전술은 전술판을 사용해서 두 사람이 겨누게 될 거고, 무술은 나랑 각각 대련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거네.”

“질문 있습니다.”

프라이에가 손을 들었다. 시도폰은 물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의 질문을 듣고 자세가 조금 흐트러졌다.

“혹시 저희랑 대련할 때 무장도 하십니까? 그러니까 갑옷이랑 무기까지 갖추시는지.”

“…그야 당연하지. 자네들이랑 하면 나도 다칠 수 있는데.”

“안 다치실 것 같습니다만.”

두코의 반박에 시도폰이 할 말을 잃고 두 사람을 쫓아냈다. 나가면서도 두코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날짜! 날짜는 언제입니까?”

“2주 뒤. 저녁 기도가 끝나고 전술 시험을 치를 거고 다음 날 아침에 첫 번째 사람, 그다음 날 아침에 두 번째 사람 순으로 대련을 할 거네.”

문이 쾅-소리를 내며 닫혔다. 덩그러니 복도로 나앉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머쓱하게 헤어졌고, 2주 동안 각자 나름의 노력을 하며 시험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옆에서 볼 수 있으면 재밌었을 텐데요.”

이디스가 프라이에를 시도폰의 집무실에 밀어 넣고 나오며 말했다. 비슷하게 두코를 두고 온 크로마도 아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시험장엔 당사자인 두 사람과 시도폰, 베론, 피데이스가 참가했다.

“솔라 님도 참관을 못 하게 하실 줄은 몰랐어요.”

제 이름이 들리자 솔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품엔 평소처럼 서류가 가득 들려있었고, 이디스는 서류 더미와 솔라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설마.라는 단어로 운을 뗐다.

“설마 시험 동안 집행자께서 처리할 수 없는 서류들을 대신해서 처리해야 하시는 건가요?”

놀라서 입을 벌린 두 사람을 두고 솔라는 무덤덤하게 그렇다고 답했다. 크로마는 무심코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고, 이디스도 그에 동조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양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저희는 대장이 뭘 안 하면 일이 안 생기는 직책이니까요.”

이디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솔라의 서류를 몇 뭉치 덜어갔다.

“맞습니다. 종종 부탁하셔도 괜찮아요.”

단둘이 있고 싶었던 크로마였지만, 서류 양이 두려울 정도로 많았기에 세 사람은 솔라의 집무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한편 그 시각 시도폰의 집무실에선 고뇌의 신음과 전략 설명, 말 옮기는 소리만이 번갈아 가면서 공간을 채웠다. 지도 위엔 악마 모형과 기사 모형이 여러 개 있었고, 프라이에가 검은색 악마 모형을 옮기면 두코가 하얀색의 기사 모형을 옮겼다.

뒤집힌 성은 악마에게 점령당한 지역이었고 올바르게 서 있는 성은 기사가 지켜냈거나 수복한 성이었다. 전장은 지도 전체, 지도에 그려진 호수와 산, 숲, 동굴 등등이 전부 전략의 소재였기에 프라이에와 두코는 치열하게 지도를 누비다가 베론이 친 종에 깜짝 놀라 손을 멈추었다.

“끝! 두 사람 다 말에서 손 떼고 각자 가진 성이랑 모형들 개수 세어봐.”

성은 두코가 두 개 더 많았고, 말은 프라이에가 한 개 더 많았다. 점수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냐며 난감해하던 시도폰은 피데이스와 베론을 데리고 한참 토론을 벌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코는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라며 의자에 늘어졌고, 프라이에는 모형들을 자세히 살펴보느라 바빴다.

“결론이 났네. 이번 전술 시험은 두코가 이겼어.”

시도폰의 말에 희비가 엇갈렸다. 프라이에는 ‘내가 졌네, 아쉽다.’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갔고 두코는 ‘악마가 원래 지는 싸움인 거 아닙니까?’라고 반박했다.

“그건 아닐세. 내가 얼마 전에 피데이스와 해봤는데 악마로도 잘 이길 수 있었어.”

“악마들이 제법 잘 싸우더군요. 스승으로서 뿌듯했습니다.”

피데이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난 스승 덕분이라며 시도폰이 칭찬하자, 두코는 훈훈한 분위기를 못 견디겠다며 쌩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먼저 돌아간 줄 알았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궁금한 게 생겨서.”

그러더니 프라이에는 다시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프라이에는 시도폰에게 무술 대련에서 자신이 이기면 부단장은 어떻게 결정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때 가서 결정하려고 하네.”

“음, 네. 모레 뵙겠습니다.”

개운치 못한 대답을 뒤로하고 프라이에는 문을 닫았다. 김 샌 표정의 두코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부단장 시험을 이렇게 얼렁뚱땅 진행해도 되나….”

“그러게, 정말 우리 둘 중 누가 되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믿고 계신 건가.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건 기쁘지만…. 뭐, 어쨌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우리가 마지막이려나.”

“배식이 이미 끝났으면 어떡할까? 집행자께 부탁해서 그분 거 뺏어 먹어야 하나.”

“배가 많이 고프긴 한가 보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뛰어가기나 하자.”

간신히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고, 두코는 이디스에게, 프라이에는 크로마에게 붙잡혀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무술 대련도 관전할 수 없다는 말에 이디스는 툴툴거렸지만, 두코가 ‘내가 지는 모습은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이라고 말하자 삐쭉 내밀었던 입술을 도로 집어넣었다. 다른 방에서, 크로마는 두코와 프라이에 사이의 어떤 진전이라도 있었을까 싶어 은근슬쩍 떠보았으나 프라이에는 정말 있었던 일만 정직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져서 아쉽진 않으셨나요? 성 두 개와 말 하나 정도면 동점으로 쳐주셔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아쉽긴 하네, 하지만 악마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을 넓히는 게 중요하니까 결과에 불만은 없어.”

“내일 두코 님 대련은 보러 가실 건가요?”

“못 보지 않을까? 봐도 되냐고 물어본 적은 없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건 부정행위니까.”

다음날, 의외로 시도폰은 관전을 허락했으나 두코가 극렬히 반대했다. 결국, 프라이에는 대련장 문 앞에서 돌아섰고, 몇 분 후 대련을 마치고 바닥에 늘어져 있는 두코를 주워와 방에 데려다주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옹알이를 하는 거 같은데, 잘 좀 봐줄래?”

그렇게 말하는 프라이에가 정말로 아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한 이디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두코의 침대를 가리켰다.

“앗, 넵! 여기다가 눕혀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니, 거의 다 이긴 거였는데. 으으.”

“그래그래, 잘 했겠지.”

이불까지 손수 덮어준 뒤, 프라이에는 방을 나서며 두코의 온기가 채 식지 않은 어깨 언저리를 괜히 쓸어내렸다. 그 역시 시도폰에게 패배했는데, 그걸 관전하던 두코가 시도폰에게 어떻게 평가를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니, 그전에, 네 시험 치는 건 못 보게 했으면서 왜 내 시험은 보러온 거야?”

“난 이미 시험을 친 사람이니까! 상관없지. 너도 집행자님 상대로 잘 싸웠잖아.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아, 물론 난 지는 거 창피하다고 이디스한테 보러오지 말라고 하긴 했어.”

주저앉아있던 프라이에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저었다. 손목을 털고 무기를 제자리에 둔 시도폰이 피데이스랑 베론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이랑 의논해보려고 하네. 둘 다 수고 많았어.”

그리고 삼 일 뒤, 시도폰은 두코와 프라이에를 집무실로 불러 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프라이에는 덤덤하게 결과를 받아들였고, 두코는 처음엔 굳어있더니 이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시도폰의 옆에서 서 있던 피데이스가 세 번째 시험이 무산되어서 아쉽다고 하자, 시도폰은 질린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 제가 너무 잘난 탓이죠.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두코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프라이에도 수행단 훈련 시간이라며 집무실을 나섰다.

이디스는 방으로 돌아온 두코에게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 물었고, 그의 반짝이는 눈빛에 두코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까진 남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디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코가 자신이 부단장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음, 솔직히 언니가 되실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요. 저기 잠시만, 프라이에님이 못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눈 그렇게 뜨시면 무섭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두코가 묻자 이디스가 조심스레 이유를 말했다.

“프라이에님의 신성력엔 속성이 없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속성이 있으면 신성력을 활용하기 훨씬 쉬워진다는 거. 물론 속성에 상관없이 능력이 출중하시니까 부대장까지 되신 거지만요.”

두코는 자신이 부단장을 잘 해낼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으려다가 입을 닫았다.

신성력의 형태는 다양한 속성으로 나타나는데, 집행자는 그것이 불로, 두코에겐 바람으로, 피데이스에겐 식물로 나타났다. 하지만 종종 속성이랄 게 없는 순수한 힘으로써 신성력이 발현되는 사람이 있는데, 프라이에가 이런 경우였다.

입안이 쓰다고 느끼며, 두코가 단 것을 찾자 이디스가 무언갈 건넸다.

“어제 프라이에님이 주고 가셨어요.”

“고마워. 속성 말인데, 너랑 프라이에를 붙여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겠지.”

“그럴 것 같아요. 프라이에님이 길을 열면 제가 바위로 악마들을 밀쳐내서 길을 넓히는 방식으로 개전하니까요. 프라이에님께 속성이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죠.”

“속성이 늦게 발견되는 사람도 있다던데 프라이에도 그런 경우인 거 아닐까?”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만 믿기는 힘드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결국, 두코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다시 시도폰을 찾았고 정말 자신 외에는 부단장을 맡을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이미 다 결정된 상황이지 않나? 못 할 만한 이유라도 있으면 말해주게.”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실지….”

“그럼 솔라, 나중에 다시 부를 테니 잠시 돌아가 있게.”

솔라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두코는 차분히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오후의 나직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자네가 대공의 딸이었다고? 그래서 미들 부인의 일에 그렇게, 아… 미안하네.”

“죄송해하실 게 뭐 있습니까.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 가문을 이끄는 것조차 두려워서 도망친 제가 부단장이 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대공 가엔 아들이 없어서 두코가 맏이로서 가문을 이끌어야 했다. 물론 이른 약혼으로 배우자가 있었기에 그에게 위임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미들 부인이 반대했다. 외부인에게 미들 영지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두코는 미들 부인의 교육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쳐 거주관으로 숨어들었고, 제 어머니의 시신이 물 위에 떠오른 뒤에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약혼자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지.’

“혹시 미들 부인은 무인이셨나?”

생뚱맞은 질문에 두코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아니요. 제…, 그분은 지팡이보다 무거운 건 들지 않으셨습니다. 책도 당장 읽을 게 아니면 손에 들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악마랑 싸워보신 적은, 남들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해본 적은 당연히 없지 않겠나?”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두코는 시도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두코의 표정을 살핀 시도폰이 미소를 지었고, 때마침 햇빛이 구름을 뚫고 나와 시도폰의 얼굴을 바로 비추었다. 호박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엔 자신감이 가득했고, 그만큼 확신에 찬 말투로 시도폰이 말을 이었다.

“그럼 자네가 가문에서 빠져나온 것과 부단장이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이미 프라이에를 이겼고 심판인 세 사람의 인정을 받았는데, 먼 옛날에 들은 평가로 미래를 포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두코는 시도폰을 비추던 햇빛이 자신에게 옮겨왔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잘 부탁한다는 시도폰의 악수를 받아들였고, 바로 다음 날 시도폰은 두코가 부단장이 될 것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이렇게 바로 발표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부대원들의 헹가래를 받던 두코가 허리가 아프다며 바닥에 고꾸라지며 말했다. 제 부대원들이 아쉬워하자 프라이에는 웃으며 그들을 달랬고, 베론은 두코에게 다가가 인수인계를 받으러 오라고 말했다.

“저, 대련 시간입니다만….”

“프라이에가 있으니 맡기고 따라오도록.”

울상을 하고 끌려가는 두코에게 다른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었고, 프라이에는 일이 늘었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두코는 한 달여 동안 베론에게 일대일로 인수인계를 받았고, 중간중간 미리엄이나 니옌에게 불려가 속성으로 강의를 들었다. 교육이 전부 끝난 뒤, 크로마는 반쯤 시체 같은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제 상관을 애써 외면했고 프라이에는 두코를 보자마자 잠도 못 자고 수업을 들은 거냐고 걱정했다.

“아냐 생활 자체엔 힘든 게 없었는데, 머리에 너무 많은 거를 넣으려다 보니 과부하가 걸려서 그래…. 너 왜 웃냐?”

“나 웃고 있었어? 몰랐네, 부단장 안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프라이에에게 두코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왜 멈춰있어? 돌아갈까?”

저만치 앞서가 있는 프라이에의 물음에 두코는 정신을 차렸다. 어쩌다 보니 1월에 있었던 부단장 시험을 떠올리느라 넋을 놓고 있었는데 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았다.

“그냥, 내가 부단장이 될 자격이 있나 고민했었던 게 생각이 나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때?”

“살면서 할 법한 고민이긴 했지만, 두 번씩이나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정도였어. 지금은 뭐, 딱히 그런 고민 안 하지.”

“다행이네.”

두코는 네 덕분이라고 말하려다가 프라이에가 이유를 물어보면 답하지 못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복선: 두코가 부단장이 되어서 영역은 넓어지지만 목숨 하나는 잃게 됨. 그게 누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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