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5화

기사단장 취임식, 남부편

이때, 멀리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다. 프라이에가 그를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였고 두코는 뒤늦게 그를 따라 했다.

“두 사람은 여기 어쩐 일인가? 밤이 늦었는데.”

“오순절 전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러는 집행자께서도 이 시간에… 설마 훈련하다가 나오신 겁니까?”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시도폰의 이마엔 땀이 맺혀있었다. 황급히 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시도폰이 어색하게 웃었고, 두코는 밤늦게까지 무리하지 말라며 나무랐다. 함께 잔소리하려다가 말았던 프라이에 시도폰의 뒤에 말없이 서 있는 솔라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대로 쓰러졌고, 화들짝 놀란 시도폰이 그를 업었다.

“제게 넘기시고, 의무실 문이나 열어주세요. 며칠 동안 솔라에게 대련 상대를 맡긴 겁니까?”

프라이에가 솔라를 받아 의무실로 달려가면서 물었다. 시도폰은 조심스레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함께 뛰던 두코가 삼 일은 아닐 테니 삼 주였냐고 물었고 시도폰이 고개를 저었다. 조심스레 프라이에가 석 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그러면 거의 부단장 결정 직후부터 했다는 소린데 그러면 솔라 몸이 남아나겠어? 왜 그런 표정이신… 정말 석 달 동안 부관을 괴롭히셨습니까?”

“아니, 그게… 내가 대련 상대가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솔라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당분간은 쉬게 해야겠군.”

세 사람이 떠드는 동안 어느새 의무실에 도착했고, 솔라는 침대에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불침번이었던 치유 사제가 시도폰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금세 진정한 뒤 솔라가 기력이 쇠했을 뿐 건강 자체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저녁 식사 전까지 악마들을 토벌하고 다니시면서 이 늦은 밤에 대련까지 하시다니요, 당신께서 대단한 체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알겠지만 솔라는 평범한 인간이라고요.”

두코의 핀잔에 프라이에가 지적했다.

“아냐, 저거 다 따라다니면서 대련 상대를 석 달 동안 한 걸 보면 솔라도 평범하진 않아….”

“그…!”

시도폰은 그래서 솔라에게 맡겼다고 말하려 했지만, 두코와 프라이에의 눈빛에 입을 다물고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솔라를 치유한 사제도 굳이 시도폰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저 솔라가 깨어나면 연락을 드릴 테니 세 사람은 돌아가 계시라는 말만 건넸다.

다행히 솔라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까지를 멀쩡하게 기억했고 일상적인 생활도 가능했지만, 시도폰은 그에게서 일을 최대한 가져갔다.

솔라가 참다못해 일하게 해달라고 시도폰에게 읍소하자, 그는 ‘내 임명식을 보고 싶으면 가만히 있게.’라고 거절했다. 일을 다 마친 솔라가 미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나가려고 일어섰을 때, 베론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베론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나가는 솔라를 흘끔 쳐다보고 왜 부관의 기가 죽었냐고 물었다. 사정을 설명한 시도폰에게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베론은 본래 목적을 떠올리고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이건, 내가 작성한 남부행 계획표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동 시간이 왜 보름이 아니라 3일로 되어있습니까? 워프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걸 눈치채다니…, 솔라가 확인 못 하게 막은 김에 장난을 좀 쳐봤는데.”

난처한 미소를 지은 시도폰과 다르게 베론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는 어쩌다가 삼 일이라는 시간을 생각해냈는지 물었다.

“첫날 워프 게이트를 4개 뛰어넘고, 다음날까지 2개를 직접 걸어가면서 신성력을 회복한 다음, 마지막 날에 나머지 4개를 뛰어넘을 생각이었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시도폰이 대답했다.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베론이 계획표의 숫자를 15일로 고쳤다. 그러자 시도폰은 10일로 줄일 수는 없겠냐고 제안했고, 30여 분 동안 베론의 잔소리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항복, 항복. 그냥 평소처럼 갈 테니 준비해주게.”

고분고분해진 시도폰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베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갔다. 시도폰은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손을 움직여 서랍을 열었다. 답장하지 못한 카리타스의 편지가 세 개나 쌓여있었고, 서류 더미를 외면한 시도폰이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을 꺼내어 읽었다.

‘한 달 전에 도착했던 걸 이제 읽다니, 카리타스가 화내도 할 말이 없겠는데. 가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렇게 쌓여있는 일을 미루고 편지를 읽은 시도폰이 급하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도착했던 편지에 적힌 내용 때문이었다.

[계속 답장이 없어서 걱정되네. 여기도 오순절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빠, 거긴 해야 할 일이 더 많으니까 너도 정신이 없겠지? 내가 편지를 너무 자주 보내서 부담스러운 거면 (검은 자국으로 덧칠되어 있다) 자제할게. 나쁜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부담가지지 말았으면 좋겠어. 너를 걱정하는 카리타스가.]

“루카! 밖에 있나?”

다급한 시도폰의 목소리에 루카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루카에게 시도폰이 편지를 가능한 한 빨리 전달해달라고 부탁했고, 루카는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고 그걸 받아들고 나갔다. 조용해진 방에서 시도폰은 제 머리를 감싸고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일이나 하자.’라며 서류를 다시 뒤적였다.

얼마 뒤 편지를 부치고 온 루카와 보고를 하러 온 솔라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고, 시도폰은 아까의 일을 잊은 것처럼 태연하게 업무를 봤다. 그런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마침내, 남부로 출발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시도폰은 성장한 체격에 맞게 새로 맞춘 무장을 하고 말에 올라탔고, 단장을 상징하는 흑색의 망토를 잘 정리한 뒤 기사단 앞으로 말을 몰았다. 이번 취임식에 기사단 인원 대부분이 참석하였는데, 슈바헨은 나이가 있어서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쉬움을 표현하는 대신, 그는 시도폰의 망토 끝자락을 이마에 대고 시도폰을 축복했고, 인자한 미소로 기사단을 배웅했다. 옆에선 루카가 같이 손을 흔들었고 기사단이 저 멀리 사라져 더는 뒤 돌아보지 않을 때까지 팔을 내리지 않았다.

“취임식 현장을 담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프라이에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무기를 등에 메고 말을 몰던 시도폰은 괜히 망토를 한번 쥐었다가 놓았다. 일행은 매년 수행단을 데리러 갈 때처럼 워프 게이트를 타거나 말을 몰면서 남부로 향했다.

날씨는 대부분 온화했으며, 간혹 비가 오는 날도 있었으나 바람이 심하지 않았다. 기사들은 신께서 도우신다며 남부에 가까워질수록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들 영지를 지날 때 기사단 일행을 발견한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왔고,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길게 빼며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프라이에는 어느새 제 옆에 바짝 말을 붙인 두코를 발견했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를 흘겨보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 그게 전남편? 아니, 정식으로 혼인한 건 아니니까 남편 될 뻔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내 동생이랑 혼인했다니까 여기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지만, 지금 날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좀 숨겨주라.”

두코가 속삭인 말에 프라이에는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낯선 이의 시야에 두코가 들어가지 않도록 말의 속도를 조절했다. 결국, 두코를 발견하지 못한 낯선 이는 기사단의 앞을 가로막을 용기까진 없었는지 길에 멍하니 서서 떠나가는 일행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도폰은 일행을 이끄느라 긴장했는지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기사단은 그 뒤로 아무 일 없이 남부에 도착했다.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우렁찬 경비병의 외침에 따라 성문이 열렸다. 시도폰이 집행자로 각성하고 처음 맞았던 오순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도로가 펼쳐졌고, 꽃잎과 색색의 종이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맨 앞에서 천천히 말을 모는 시도폰의 망토는 꽃잎이 빼곡하게 달라붙어 흑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제 형태가 온전한 것이라곤 시도폰이 어깨에 메고 있던 창뿐이었는데, 은백색의 할버드가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얼떨떨한 마음은 잠시뿐, 기사들은 익숙하게 호의를 즐기면서 교회로 향했고 민중들이 임명식을 보기 위해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5월의 맑게 갠 하늘이 그들을 축복하는 듯했다.

교회의 문은 당연하게도 활짝 열려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말의 속도를 줄여서 멈춘 시도폰이 사뿐히 땅으로 뛰어내렸고 자연스레 망토에 붙어있던 것들이 펄럭이며 떨어져 나갔다. 교황이 그를 반갑게 맞았고 시도폰은 공손하게 인사한 뒤 등에 메고 있던 창을 손에 들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창이 주인의 발걸음에 맞춰 회중석을 가르는 중앙의 복도 끝, 단상으로 향했다. 기대와 어수선함으로 가득 찬 회중석의 시선이 반짝이는 창과 그 아래의 망토를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저분께서 각성하셨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장성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올해 열여섯이 되셨다고 하니 앞으로 백 년은 평안하겠군!”

마침내 다다른 단상, 거기엔 베일을 뒤집어써서 턱 끝까지 가린 누군가가 서 있었고, 시도폰은 그의 눈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베일에 입술과 눈가, 눈썹이 전부 가려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쉬웠지만, 시도폰은 그가 종이를 쥔 손만은 가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고 고운 손이 종이를 힘주어 잡는 것이 보였다.

‘카리타스도 긴장했구나. 지난번 오순절 행사까진 교황 성하께서 주관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젠 카리타스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는 건가?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푸른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복도를 채우자 사람들은 2층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장미 꽃잎을 뿌렸다. 그들은 꽃잎 하나하나에 가호를 내리는 것처럼 감사와 존경의 말을 담았다.

자신들을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당신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살아있노라고. 다들 고개를 들어 꽃잎과 사람들을 둘러보기 바빴으나, 시도폰은 단상을 보느라, 솔라는 그런 시도폰을 보느라 다른 곳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꽃잎의 비가 멈추고 2층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회중석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모두가 단상을 주목하고 있을 때, 그제야 카리타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위대하신 분께서 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잔잔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길고 긴 개회사와 노래 몇 곡이 끝나고 나서야 시도폰의 차례가 되었다. 처음엔 바짝 긴장하고 자리를 지켰던 시도폰은 계속 이어지는 곡조에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고, 저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들어 단상 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카리타스가 베일을 벗었다. 그는 이제 죄지은 인간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주색 머리칼과 하늘색 눈동자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 모습이 아주 엄숙하고 성스러워 보인다며 감탄하기 바빴지만, 시도폰이 보기에 카리타스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등지고, 모두가 좇는 빛을 홀로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성스럽다기보다는 그 반대 방향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짝이는 하늘색 눈과 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도폰이 살짝 눈을 찡그렸다. 물론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고 금방 원래 얼굴로 돌아왔기에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잠깐 눈 색이 탁해진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창문을 등지고 있으니 햇살이 비쳤을 리도 없고.’

“단장님, 창을 바닥에 내려놓으시고 지금 무릎을….”

제 곁에서 속삭이는 사제의 말에, 시도폰이 시키는 대로 창을 내려두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카리타스가 빈손으로 단상에서 내려와 천천히 시도폰에게 다가갔다. 모두가 숨죽여 그 장면을 바라보았고, 카리타스는 오른손을 내밀어 시도폰의 어깨에 얹었다.

“[그대는 무엇인가?]”

분명 카리타스의 입으로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울림이 교회를 삼켰다.

2층에서 그 장면을 보던 아무개가 순간 놀라며 제 옆 사람을 쳐다보았으나, 그이 또한 놀란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입술은 꾹 다물려있었다. 사람들은 귓가에서 한 뼘쯤 거리에서 울린 말에 벌벌 떨면서 자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답했다.

“[저는 당신의 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절대로 부러지지 않을 검입니다.]”

“[맹세하는가?]”

물음과 함께 카리타스의 손이 어깨에서 목을 스쳐 뺨으로 올라왔다. 닿을 듯 말듯 다가온 하얀 손과 그것을 따라오듯 가까워진 얼굴에 시도폰이 대답을 잊고 숨을 멈췄다.

자주색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흘러내려 시도폰의 이마를 간질이고,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도저히 마주 보고 답할 수 없었던 시도폰이 하늘의 시선을 외면하고 땅을 보았다.

“[맹세합니다.]”

의연하게 대답한 것과 다르게 시도폰의 마음속은 난장판이었다. 끓어오르는 신성력에 머리가 어지러워, 카리타스가 아닌 누군가의 음성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시도폰이 그런 것들을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았기에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새 카리타스는 시도폰에게서 등을 돌려 단상으로 돌아갔고 여전히 베일은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의 뜻을 받들어 평생을 봉사할 것을 맹세하였으므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그대의 이름이 후세에 세례명으로 이어지길 바라니…,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그제야 시도폰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는 손의 떨림을 애써 참고 창을 잡고 일어났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흑색의 망토가 우뚝 섰고, 시도폰이 제 이름을 말하며 창을 아래로 향하게 휘둘렀다. 망토가 펄럭였고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집행자를 쓸 듯이 비추고 지나갔다.

카리타스의 옆에 있던 서기가 황금색 안료로 그의 이름을 두꺼운 책에 받아 썼고, 성녀는 잠시 눈을 길게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다시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벗기 전보다 더 아래로 눌러쓴 듯한 베일이 흔들리자 본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뒤는 매년 해왔던 오순절 행사가 이어졌다. 계속 복도에 서 있을 필요가 없었던 시도폰이 단상 뒤쪽의 제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고, 옆에 앉은 교황은 시도폰에게 푹 쉬라는 말을 전하고 의식에 집중했다.

하지만 시도폰은 그의 손가락이 불안하게 무릎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았다. 천 아래에 가려지긴 하였으나 명백하게 보이는 움직임에 시도폰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티 내지 않았을 뿐, 그도 비슷한 상태였으니까.

‘카리타스가 베일을 벗는 건 단순히 상징적인 절차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땐 정말 신께서 카리타스의 몸을 빌려서 대신 말하는 것 같았어. 성하께서도 그걸 느끼신…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꼈을 테지.’

역대 집행자들이 기사단장에 임명될 때도 같은 의식을 치렀다. 하지만 기록에서 신이 직접 이 행사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첫 번째 집행자인 요한이 신께 직접 기사단장으로 임명받아 군대를 이끌고 사악한 이들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있었고, 이후 의식에서도 그 전설의 영향으로 성녀가 베일을 벗고 신의 의지를 직접 전달하듯 단장을 임명하긴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장이었지, 실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선 그저 행사를 구경하러 왔을 일반인들조차 명백하게 신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으니, 행사가 이어지는 내내 군중 속에선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께서 기사단장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을 내리신 게 아니냐며 속닥거렸다.


행사를 마친 사제들도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겉으로는 대화하지 않는 척하며 옆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이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이야기했다.

“이렇게 직접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적어도 저는 들어보지 못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두 사람 중 젊은 편인 사제는 상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 근거라고 들 만한 것은 없지만. 그분께서 이렇게 직접 의지를 드러내신 적은 거의 없으니까요.”

나이든 쪽 사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말이 씨가 될까 무서워 차마 입 밖으로 자신의 추측을 내뱉지 않았지만, 이번 집행자의 시기에 신과 관련된 어떤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은 그것을 알고 있으나 인간에게 그것을 알릴 수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인간에게 경고하려 했던 것이리라. 갑자기 입을 다문 그에게서 어떤 불안감을 감지한 상대방도 조용해졌다.

이때, 이들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를 보고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시도폰도 응대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흑색의 망토가 펄럭이며 사제 무리를 지나쳤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려 묶은 집행자는 여전히 베일을 뒤집어쓴 성녀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사제들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집행자의 표정은 태연했고 성녀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으니 사람들은 감히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추측할 수 없었다.

성녀의 호위 기사가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성녀는 손을 저어 그를 막았다. 홀로 남겨진 그는 망연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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