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2화

카리타스 편: 어느 봄날

“참견이 심하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어제도 피곤하다고 운동을 쉬셨잖습니까. 오늘은 하셔야죠.”

카리타스는 메릭의 권유에 고개를 저었다. 안 들리는 척 빠르게 걸어가는 카리타스의 뒤로 메릭이 따라붙었고,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페는 메릭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한테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을 수 있다니, 신기하네. 뭐, 당사자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가능한 걸지도. 나도 저렇게 했으면 좀 친해졌으려나?’

막연하게 메릭의 행동에 자신을 대입해본 아페는 ‘인제 와서 이런 상상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 원래 가려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릭은 아직 정식으로 호위 기사로 임명받지 않았지만, 다들 그가 가장 유력하다고 이야기해댔다.

성녀의 호위라는 직책과 어울리는 맑고 아름다운 인상과 그에 걸맞은 태도, 교회와 친밀한 가문 출신이라는 장점에 무력도 다른 후보생들보다 우수했으니 당연한 결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메릭이 아마 성녀님의 정식 호위 기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봤을 땐 두 분의 사이도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만.”

원래 호위를 맡았던 피에르 경이 오랜만에 근무를 섰다. 후보생들이 돌아가면서 호위 업무를 맡았는데, 그중 한 명이 ‘이미 호위는 메릭 경으로 결정 난 거 아닙니까?’라며 사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홀홀 거리며 웃고 있는 피에르였지만 카리타스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결정권은 본인이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가요? 경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저는 기사의 실력을 감히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알아서 잘 결정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믿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피에르가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흘러, 피에르가 근무를 끝내고 교대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다음 차례인 메릭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황한 피에르는 카리타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찾으러 나갔는데, 그가 사라지자마자 카리타스는 희미하게 들리는 메릭의 목소리를 알아챘다.

‘혼자가 아닌데?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문을 열고 카리타스는 고개를 내밀었다. 피에르가 걸어간 방향과 반대 방향에서 메릭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두 사람은 카리타스를 눈치채지 못했다.

방에서 조용히 빠져나온 카리타스는 기둥 뒤에 숨어, 정원 구석에서의 대화를 엿들었다. 메릭의 대화 상대는 카리타스를 등지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세쿠리스 님! 아무리 왕당파를 견제하고 성하께 튈지도 모르는 위해를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지만, 그게 아이들을 괴롭힐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세쿠리스라면…, 올리비아를 이용해놓고 내버린 그놈이잖아.’

메릭보다 키가 작은 남자, 세쿠리스는 메릭이 자신보다 시선이 높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어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느냐고 호통쳤다.

“역시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뭘 모르긴 모르시는군요. 정보란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아랫것에게서 더 많이 나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다루기가 훨씬 수월해서, 적당한 녀석을 잡아내면 아주 수지 타산이 맞는 방법이란 말입니다!”

“큿, 하지만….”

“게다가, 당신께서도 어차피 그분 곁에 근무하면서 알아낸 것들을 성하께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나 나나 각자 맡은 게 다른 것일 뿐, 성하를 위해 일한다는 목적은 같은데 왜 본인만 바른 척하려고 하는 건지… 저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메릭이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세쿠리스는 의기양양하게 마지막 말을 뱉고는 멀어졌다.

“어차피 당신께선 성녀님이 딴 맘 먹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편한 일이나 맡고 있으니 저 같은 사람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죠.”

멀리서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가 들려오자, 카리타스는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가 문을 닫고 업무를 보는 척 서류를 손에 쥐고 있자, 피에르가 메릭을 발견하고 어딜 돌아다니고 있었냐고 나무라는 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메릭은 변명도 하지 않고 죄송하다며 쩔쩔매기만 했고, 피에르는 성녀님께 아까 네 칭찬을 했는데 이렇게 굴면 어떡하냐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곧이어 그는 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피에르입니다. 메릭 경이 도착해서 들여보내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딱히 그럴 것까진 없어요. 그렇게 늦은 건 아니니까.”

피에르가 나가며 문을 닫았고, 카리타스는 그래서 무슨 일로 늦었냐고 물었다.

“사적인, 일이라서 말씀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연하게도 카리타스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어서, 그는 다시 시선을 서류 쪽으로 돌렸다.


 

“계십니까? 성녀님, 신전 소속 기사 렌입니다.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렌?”

이름을 듣고 카리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릭은 그런 카리타스를 의아하게 보다가 자신이 편지를 받아오겠다며 문을 열었고, 여전히 유쾌한 렌이 카리타스에게 반갑게 인사하자 무례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리타스가 마주 인사하자 당황한 메릭은 눈에서 힘을 풀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오랜만에요. 잘 지냈나요? 신전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도통 보이지 않았네요.”

“한동안은 저쪽 구석의 훈련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성녀님 호위 기사 후보에 들려고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후보에서 탈락했더군요. 그래서 본업이나 설렁설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이미 내정된 후보들이 있었으니까.’

렌도 알고, 카리타스도 아는 진실은 대화의 이면으로 넘어갔고 카리타스는 아쉬움을 표했다.

“그렇군요. 렌이 호위를 맡아줬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요.”

“무위를 칭찬해주시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렌의 농담에 카리타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카리타스는 렌에게 다가가 편지를 받았고, 누구에게서 온 편지냐고 물었다.

“제게 편지를 준 건 얀이지만, 얀에게 편지를 전한 건 센이고, 편지를 쓴 사람은 코지라고 하더군요. 참, 얀은 신전에서 농작물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데 센은 여전히 거주관에 있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서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카리타스는 편지 봉투에 쓰인 제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살고 있나 봐요. 다행이네요.”

“성녀님께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저야 매일 똑같죠. 기도와 업무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신 것치곤 건강해 보이시는데 운동도 하고 있으신가 보군요.”

“기사들은 그런 걸 알아볼 수 있는 건가요? 사실 제 호위 기사가 설득해서 주에 몇 번은 운동하고 있어요. 북부에서 훈련할 때처럼 강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숨이 찰 정도로는 하니까 확실히 체력이 붙는 것 같네요.”

약간 의기양양한 말투로 카리타스가 대답하자 렌이 잘했다며 칭찬하고 방을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메릭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메릭은 시도폰을 제외하고 카리타스가 친근하게 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렌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허둥지둥 답인사를 건넸다.

‘그날 시도폰이 왔을 때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던 것도 재밌었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더라?’

지난날을 추억하며 아쉬워하던 카리타스는 서류를 뒤로하고 편지를 뜯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들은 끝냈고 마침 일하기 싫은 늦은 오후였기 때문인데, 지루함에 반쯤 감겨있던 카리타스의 눈이 편지를 읽으면서 점점 또렷하게 뜨였다.

그런 변화에 메릭은 카리타스가 편지를 다 읽기만을 기다렸고, 마침내 편지에서 눈을 뗀 카리타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하실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리타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세쿠리스 사제님과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메릭은 순식간에 창백한 얼굴로 굳어버렸고, 카리타스는 뒷이야기를 듣지 않은 척, 재빨리 코지가 보낸 편지 내용으로 화제를 돌렸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건 전부 우리 둘 사이의 기밀이에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을 명령합니다. 여기, 거주관의 아이가 세쿠리스 사제의 폭력 행위를 고발하는 편지를 썼어요.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고, 아이들의 증언만이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 그게 전부인가요?”

“네 뭐, 세쿠리스 사제가 거주관에 성하께 위협이 될 만한 불순분자가 있는지 색출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핑계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 외에는 특이사항이 없어요. 아까 당신과 이야기했던 그 사제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다툰 거고요.”

그 뒤의 이야기를 카리타스가 듣지 못했다 생각한 메릭은 약간 안심한 듯 긴장을 풀었다. 아주 투명한 태도에 카리타스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고, 기침을 한 번 하여 목소리를 고른 메릭이 대답했다.

“예. 알고 있었고 말리려고 했는데 제 말은 들은 척하지도 않으셔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어떤 일이 있었던 이후로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혹시 알고 있냐는 듯한 메릭의 눈빛에 카리타스는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쿠리스 사제의 이런 행동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그분이 직접 아이를 폭행하는 걸 고위 사제님들 여럿이서 목격하지 않는 이상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본다고 하더라도 훈육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지도 모르겠군요.”

“빠져나갈 구실이 많군요. 아이들과 만날 일 없는 곳으로 좌천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이려나요.”

“세쿠리스 사제는 이미 자잘한 공적을 많이 세운 분입니다. 그러니 어지간한 건수로는 남들을 괴롭히지 못할 정도의 낮은 위치로 보내는 건 힘들 거예요.”

“당신이 보기에 세쿠리스 사제가 굉장히 치밀한 편이던가요?”

“치밀하다…라고 하시면 행동거지에 대한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람을 대할 때 상대의 지위에 따라서 놀라울 정도로 태도를 달리하긴 합니다. 아이들을 심하게 혼내고 있다가도 고위 사제의 부름이 있으면 바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공금 운용이나 신앙생활에서의 결점은 발견한 게 있…. 없나 보군요. 사실 공금 횡령이 좌천시키기에 가장 좋은 핑계인데요.”

카리타스는 세쿠리스 때문에 교회 공금 기록표를 다 뒤져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턱을 괴었다. 메릭도 기억을 더듬어가며 세쿠리스의 약점이라고 할 것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니 바깥에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네. 하긴, 그러니까 올리비아 사건 때 꼬리 자르기하고 지금도 똑같이 사는 거겠지. 게다가 교황에게 정보를 가져다준 사람이면 잘못하다간 역공당하기 쉽지.’

여러모로 손댔다간 위험한 사람이었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카리타스는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면 세쿠리스의 일정이라도 알아봐달라고 메릭에게 부탁했다.

“그중에서도 외부나 거주관으로 나가는 일정을 집중해서 살펴주세요. 당신이 근무할 시간과 겹치면 몰래 미행이라도 가볼 수 있을 테니까.”

사제로서 ‘미행’이라는 단어에 잠깐 죄책감을 느낀 메릭이었지만,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메릭은 교대하여 방에 들어오자마자 지금이라고 말했다. 그에 카리타스는 미리 준비해둔 평범한 옷을 덮어쓰고 머리카락을 가렸다.

“잠시만요, 제가 미행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창, 창문으로 넘어가신다고요?”

당황한 메릭이 카리타스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그에게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아차 싶었는지 손을 물렸다. 어정쩡하게 저를 보고 선 메릭에게, 카리타스는 당연하지 않냐고 대답했다.

“제가 없는 동안 당신이 여기 있어야죠. 여기서 제가 계속 업무를 하는 것처럼 연기하세요. 누가 오면 절대로 문 열지 말고.”

대답을 듣지 않고 카리타스는 가뿐히 창문을 넘었다. 시도폰이 했던 것처럼 정원을 통해 밖으로 탈출한 카리타스는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여태 안 나오고 있었구나. 뭐, 지금 거주관에 간다고 해서 폰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라는 생각을 하며 세쿠리스가 향했다는 가게를 찾아 마을로 내려갔다. 


‘가게라고 했지만, 보통 상점가가 이렇게 구석진 곳에 있나?’

점점 더럽고 어두워지는 좁은 골목을 조심스레 살핀 카리타스는 마침내 한 가게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자신의 발목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낀 카리타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숨을 멈췄다. 커다란 쥐가 카리타스의 다리 옆을 지나갔고, 그것이 더러운 털을 꿈틀거리며 이동하는 동안 카리타스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

“후… 진정해. 그냥 쥐였잖아.”

마음을 가다듬은 카리타스가 다시 문을 바라보고 섰다. 그런데 이번엔 쥐가 사라진 방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카리타스는 재빨리 커다란 상자 뒤에 숨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깊숙이 숨었더니 누가 오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문을 열고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마담! 내가 왔네.”

‘세쿠리스다. 딱 맞게 왔네, 그런데 마담은 누구지? 여긴 술집이었나?’

문이 닫혔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가 큰 것인지 문이 얇은 것인지 대화는 또렷하게 잘 들렸다. 마담이라고 불린 여성이 반갑게 세쿠리스를 맞았다.

‘사제님~이라고 부르네. 두 사람은 꽤 친분이 있는 사이고, 마담 쪽은 세쿠리스의 신분도 알고 있어. 아니, 어쩌면 여기가 사제들에게 몰래 술을 제공하는 곳일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단순 음주만으로 세쿠리스를 끌어내리는 건 조금 어려웠다. 카리타스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가게 안쪽에서 들린 또 다른 여성의 말에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뭐라고 말한 건지 안 들렸어. 가게가 꽤 깊은 구조로 되어있나. 그럼 이 위치에서 계속 감시하긴 힘들 것 같은데…,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실까요? 옷은 언제나처럼 이쪽의 아이에게 주시면 됩니다.”

‘옷이라니? 옷을 왜 맡겨.’

당황한 카리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거리에 사람은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미행을 들키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상자를 넘어뜨릴 뻔했다. '

비틀거리는 상자를 바로 세운 카리타스는 문득 조용해진 가게가 신경 쓰였다.

‘아까 마담의 말에 따르면 가게 안에 문이 하나 더 있고 거길 들어가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건가. 세 사람 다 그 안쪽으로 들어간 거면 가게 문은 열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카리타스는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덜컥거리는 소리에 놀라 다시 상자 뒤로 숨었다.

‘잠겨있잖아? 세쿠리스는 그냥 열었던 것 같은데, 열쇠 같은 걸 따로 가지고 있는 건가. 문을 강제로 열면 소리가 크게 날 텐데, 이걸로 해볼까.’

카리타스는 신성력으로 얇은 나뭇가지를 만들어내 문손잡이에 집어넣었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나뭇가지는 구멍 안에서 헛돌 뿐, 문이 열리진 않았다. 하지만 카리타스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자 어느 순간 철컥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손잡이가 매끄럽게 돌아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던 카리타스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창문이 없어서 낮인데도 밤처럼 캄캄했다.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카리타스는 작은 목소리로 콘피테오르를 외워 미미한 광원을 만들어냈다.

오래된 골동품을 취급하는 가게였는지, 장식장 안은 온갖 옛 물건들로 가득했고 물건을 감정하는 곳으로 보이는 책상 위엔 돋보기와 헝겊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가게가 생각한 것보다 좁네, 위장용이라 작게 만들었구나. 그럼 이제 저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야겠지.’

방을 하나 더 만들어놓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사람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카리타스는 다른 물건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히 이동하여 문에 귀를 대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카리타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울고 있는 건가? 아니, 신음 소린데? 뭐지. 기사들이 훈련한 뒤에 숨차서 헉헉거리는 소리랑 비슷한걸. 비도 안 오는데 실내에서 운동할 필요가 있나.’

적어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비슷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최대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상황을 상상해보려 한 카리타스였으나, 내부의 상황은 쉬이 그려지지 않았기에 그는 더 문에 가깝게 달라붙었다.

그러자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그대로 열려버렸고, 카리타스는 갑작스레 밝아진 환경에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작게나마 들리던 소리도 사라진 그곳에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걸 알게 된 카리타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여자들이 옷으로 몸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냥 뜨지 말걸.’

“뭐야, 이 애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마담, 입구를 제대로 잠가두긴 한 건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들어왔으면서 세쿠리스는 괜히 마담 탓을 하며 성을 냈다. 카리타스는 왜 세쿠리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의아했지만, 지금 자신이 변복하고 머리카락을 가렸다는 사실이 떠올라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내가 성녀인 걸 밝히고 이런 행위에 대해 까발려지기 싫으면 알아서 사제직을 반납하고 나가라고 협박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은 후퇴하고 나중에 증인이 될 법한 사람들을 데려와서 현장을 덮쳐야 하나.’

그런 고민은 세쿠리스가 카리타스의 손목을 잡고 로브를 벗기려 한 순간 사라졌다. 하얀 자작나무가 가게 천장을 뚫고 자라났고,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가게 전체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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