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외전(2)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

오늘부터 궁을 떠나서 신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첫째 오빠는 입구까지 나와 내가 탄 마차를 배웅해주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았다. 마차가 정원을 지나 궁 입구를 나서자 멍청한 시종이 다른 가족분들이 매정하다는 둥 내 눈치를 보며 조잘거렸다.

“조용, 말이 많구나.”

이제야 조용해진 마차 안에서 멀어지는 궁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창문 안에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둘째 언니와 눈이 마주쳤기에 손을 살짝 흔들어 인사하고 그대로 커튼을 쳤다. 왕위 계승권 변방에 같이 있었던 주제에 나만 이렇게 탈출하는 게 아니꼬웠는지 언니는 오늘 아침까지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 같냐, 인질로 끌려가서 일만 잔뜩 하게 될 텐데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냐 등등, 1년은 들어온 말이라 그대로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질이든 뭐든 나는 궁을 나오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런 취급이래도 괜찮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은 전혀 꺼릴 것이 아니었다. 방에 갇혀서, 쓰지도 못할 교양만 쌓는 지루한 일상은 이제 끝일지도 모른다.

내가 머물 제3 신전은 수도에 있으나 궁에서 가장 먼 곳이었기에 잠깐 눈을 붙였다. 아버지께서 교황 성하와 잘 이야기하셔서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해서 긴장이 그대로 풀려버렸다.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시종이 조심스레 커튼을 걷고 문을 열었다. 교황 성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실 거라곤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내 또래로 보이는, 둘째 언니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사람들을 이끌고 나를 맞아줄 줄은 몰랐다. 아,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성녀인가? 나이가 비슷한 데다, 하는 일도 겹치는 것이 많을 테니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동안 아이는 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예뻤지만,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제3 신전 수습 사제 카리타스입니다. 오늘 왕녀 저하를 모시고 가게 되어 영광입니다.”

입과 표정이 따로 노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저쪽인데 왜 내가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껴야 하나. 지기 싫어서 살짝 고개를 들고 인사를 받았다.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입니다. 이름이 많이 길지요? 다들 아페라고 부르십니다만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그는 교황 성하께 안내하겠다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우리 둘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없었다. 카리타스 사제가 어느 문 앞에 멈춰 서자, 기사는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성하께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 저하를 모셔왔다고 알리시게.”

마침내 열린 입에서 나온 말이 무미건조하여 당황스러웠지만, 문이 열리고 교황 성하가 바로 맞아주시는 바람에 토를 달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께 신전 사람들에 대한 많은 경고를 듣긴 했지만 교황 성하께선 그런 말이 무색하게 따스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반갑습니다. 제3 왕녀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입니다.”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고 긴 소파에 앉았다. 카리타스는 내 맞은편 소파에 소리 없이 다가서서, 우리 사이의 작은 소파에 앉은 교황에게 인사를 올렸다. 교황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자 그제야 카리타스는 자리에 앉았다.

“인사드립니다. 신의 종이 되길 맹세한 자들을 이끄는 이로서, 교회와 왕가의 화합을 위해 직접 이곳에서 생활하시겠다는 마음가짐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는 길은 괜찮으셨습니까?”

“네, 그리 거리가 멀지도 않았고 도착하고 나서도 오래 걷진 않았으니까요.”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신전에서의 생활은 왕궁에서와는 많이 다르실 겁니다. 하지만 아직 어리시니 차차 적응을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어려운 것이 있으시면 여기 있는 카리타스 사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또래니 제게 말하는 것보다는 편하리라 생각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흘끔 맞은편을 쳐다보자 카리타스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일 뿐 빈말로라도 잘 지내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이라곤 별것 없습니다만….”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해가 언덕에 걸려갈 즘에야 끝이 났다.

 

“성하, 저녁 미사가 있을 시각입니다. 아세쿠토레 저하께선 바로 참여하기 힘드실 듯하니 미사 동안은 제가 신전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근래에 예언도 없으니 부탁드려도 될 것 같네요, 아세쿠토레 저하께선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주십시오.”

“예, 성하.”

교황 성하께서 나가시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앉아있기만 했는데도 힘들었는지 일어선 다리가 후들거렸고 빨리 나에게 배정된 방에 들어가서 눕고 싶었다.

“교황 성하께서 계신 이곳이 복도 끝이니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저 사람은 힘들지도 않나? 나와는 다르게 카리타스는 이미 방을 나서서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자 그는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찰나에 불과했다. 또다시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긴 복도를 걸어야 했고, 카리타스는 필요한 말 외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근엄한 표정으로 설명에 집중했다. 말 많은 시종이 그리워지리라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그가 아무리 실없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기꺼이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아기들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제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은 귀족인 신도들이 미사를 보는 동안 자녀를 맡겨둘 수 있도록 만든 곳입니다. 평소엔 문을 닫아두는데 오늘은 웬일로 열려있군요.”

조심스레 문을 닫은 사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 기회는 이때뿐이라는 생각에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아직 어리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엔 몸이 많이 약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께서도 걱정이 많았다고 하시더군요.”

그제야 카리타스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호의적인 느낌은 아직 없었고 ‘어디 한번 얘기해봐라’라는 표정이었다. 실망하지 말자, 아직은 계속 나를 보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커가면서 신성력을 발현하고 몸도 건강해져서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어요. 물론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께 복종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이 일을 계기로 신전에 귀의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 아이들도 나중에 부모님들과 기도를 드리며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성녀라고 불리는 분이니 이런 말이라면 마음을 열어주시려나 싶어서 힘을 주긴 했다. 하지만 그는 ‘저도…,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언제나.’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고 다시 뒤돌아버렸다. 신께 감사할 줄 알게 되는 삶이니 행복하다고 이야기한 것이겠지? 내가 너무 길고 의도가 빤히 보이는 말을 해서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진심이었다. 신성력이 없었다면, 어머니께서 날밤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세 살 무렵에 얻은 병 때문에 뛰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어쩐지 아까보다 빨라진 그를 뒤쫓기가 힘들었다.

“잠시, 쉬어갈 수 있을까요?”

적당한 장소를 보자마자 나는 그렇게 외쳤다. 내가 가리킨 곳은 낮은 담벼락이 있는 정원이었다. 구조상 신전의 후문인 것 같았는데 목을 빼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엔 다른 건물이 있었다. 마침 정원엔 테이블과 의자도 마련되어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카리타스는 그다지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지만, 지쳐서 기가 죽은 나를 내려다보더니 약간의 망설임을 거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낯선 시종들이 나타나 테이블과 의자를 청소하고 찻그릇을 들고 와 테이블에 보기 좋게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렇게 도구만 두고 시종들은 자리를 물렸고 카리타스는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차를 직접 우려본 적이 없어 난감했는데 카리타스는 소매를 살짝 걷더니 능숙하게 내 잔과 자신의 잔에 맑은 차를 따랐다.

“차를 즐기시나 봐요.”

“…정확하겐 이 장소를 좋아합니다. 이런 곳에서 즐길만한 거리가 다양하지 않다 보니 어쩌다 차를 마시게 되었지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 편해 시종들을 물리고 혼자 차를 내려서 마시는 편입니다. 익숙해질 수밖에요.”

처음으로 장소에 관한 무미건조한 설명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기쁨과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피로감이 겹쳤지만 나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나는 그에게 좋아하는 향과 맛은 무엇인지, 주로 읽는 책은 어떤 분야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아쉽게도 답이 될 만한 정보를 모두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대화 중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내 질문이었기에 휴식을 취하는데도 피로감이 크게 풀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면 잠은 편하게 자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경박하게 너무 많은 것을 캐물은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솔직히 신전에서 또래를 만날 수 있으리란 걸 기대하지 않고 왔거든요. 물론 성녀님의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안다고 해서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동안 신전에서 또래 분들과 자주 대화하지 못해서 심심하셨겠어요….”

결코,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불쌍히 여긴 것도 아니었고 그냥 지금까지 지나다니는 사제들을 보면서 느낀 감상을 솔직히 이야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뒤에 이어질 말은 ‘앞으로 제가 말동무가 되어 드릴 테니 언제든 편하게 제 방에 들러주세요.’였다.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강하게 짓씹은 입술은 금방 잇자국만 남기고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입은 찻잔에 가로막혀 굳게 닫혔다. ‘괜찮습니다.’ 도 아니고 ‘괜찮았습니다.’라는 건 무슨 뜻인지…. 분명 김이 가시지 않은 따뜻한 차를 두 잔째 마시고 있는데도 몸이 식어가는 듯했다. 마침 미사 중 쉬는 시간이 되어 귀족들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오늘 하루가 끝났을 것이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귀족들은 평소답지 않게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사제들만 참여할 수 있는 미사가 곧 시작되려나 보네요. 그 아이들도 곧 집으로 돌아가겠죠?”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졸린 얼굴로 걸어 나오던 귀족 중 몇이 카리타스와 나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거리를 두고 인사만 건네고 지나간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몇몇이 다가오자 카리타스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대신 막아주면 나를 좋게 봐주려나 싶었지만, 이 신전 안에선 카리타스의 존재감이 나보다 컸다.

“성녀님께 인사 올립니다. 미사 때 보이지 않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는데 저하와 함께 계셨군요.”

다가온 이들 중 가장 연식 있어 보이는 사내가 나섰다. 카리타스는 굳어있던 표정을 살짝 풀었지만 긴 인사치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오늘 도착해서 성녀님께서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미사가 중요한 행사인 데다 성녀님 또한 이런 일을 하셔야 할 분은 아니십니다만, 제 또래로 보이는 분은 성녀님뿐이라 무리한 부탁을 드렸네요.”

“그러셨군요. 연배가 비슷한 이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 즐거울 테니까요.”

그의 뒤에서 온화한 인상의 부인이 나서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이목은 카리타스에게 쏠렸다. 난처해 보였지만 도와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아세쿠토레 저하, 실은 제가 미리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투르스 거리에서 곧 봉사활동을 하실 예정이시지요? 동행해도 괜찮을지 여쭤보고 싶었답니다.”

부인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이름이 기억났다. 제일 처음 말을 건 사내의 아내이자 실질적으로 가문을 다스리고 있는 이였다. 자선사업에 흥미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그 이야기까지 알고 있다는 건 몰랐다.

“투르스 거리라면, 아이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군요.”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카리타스가 반응했다.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나보다.

“네, 신전에 들어오면서 처음 할 활동으로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았는데,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전에 들어오기 전, 성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군요. 물자는 모레쯤 도착할 예정이니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정오에 투르스 거리 입구로 오시면 됩니다.”

“성하께서 저하를 기특하게 생각하셨나 봅니다. 투르스 거리라고 하면 신전에선 꽤 거리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요.”

웃는 얼굴로 말하는 카리타스였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피곤한 걸까.

“부인, 이제 마차를 타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성녀님, 왕녀 저하께 신의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교회 건물에 달린 커다란 시계를 보더니 부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봄이지만 해가 져가는 시간이라 쌀쌀했다. 바람이 한번 우리 사이를 쓸고 지나갔고 찻물은 완전히 식어서 향이 없었다.

“슬슬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카리타스가 의자에서 일어나기에 뒤따라 일어서자, 시종들이 다시 나타나 자리를 정리했다. 말없이 걷는 분위기는 이제 익숙해진 건지 전혀 버겁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나를 불편해하는 게 분명하다.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게 배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방까지 안내해준 그는 예의상으로 하는 말조차 건네지 않고 내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열 살이 되면 북부로 수행을 떠날 수 있다고 들었다. 거기엔 내 또래들도 많이 온다니까 거기에서나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열네 살쯤에 가면 괜찮겠지.

내가 사람을 사귄다는 선택지에 카리타스를 올리면 그는 스스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간은 많으니까, 자주 보다 보면 인사는 해주려나. 기왕 오래 볼 사인데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탕-소리와 함께 문이 거칠게 닫혔다. 시종은 이미 물렸으니 침대에 편히 눕는다 해도 무어라 할 사람은 없었다. 긴장을 풀고 침대에 눕고 보니 마지막에 별 언질 없이 왕녀를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처음부터 왕녀에게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가 했던 말처럼 또래니까, 반가웠던 마음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친해지고자 뱉은 말들이 원래 의도와 다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친해지기엔 너무 신실했다. 신의 은혜를 예찬하고 교황을 믿고 따르는 태도는 가히 모범적인 사제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문제였던 거지만.

게다가 신전에 있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또래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건 한 사람뿐인데, 그 아이와 아세쿠토레는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당신이 없었어도 시도폰이 있었으니까 괜찮았었다고, 감히 그 애를 대체하려 들지 말라고.

왕녀는 시도폰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그를 미워하고자 구구절절 늘어놓는 궤변 아래엔 언제나, 내가 시도폰을 북부에 혼자 두고 왔다는 죄책감이 깔려있었다.

3월의 북부는 어떤 날씨를 보여줄까? 4월은? 오순절을 여기서 보내고 돌아간다면 그 이후는 뭘 하면서 지낼까? 이제는 우리가 같은 계절을 공유할 수 없다.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가 날씨 이야기로 가득해진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게 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마디라도 더할걸. 물론 말 못 할 이야기들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여름날의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버리면 폰이 금방 나를 질려 할 게 두려워 말을 아꼈다.

나는 그 애가 나를 바라길 바랐다. 나를 좀 더 궁금해 해줬으면 좋겠다고, 계속 여기까지 나를 보러오길 바랐다. 스스로가 추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꿎은 베개만 짓눌렀다.

‘투르스라…. 물자는 창고로 들어갈 테니 거길 안내해줘야겠네.’

쩔쩔매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첫 만남부터 망치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지. 불편해할 게 뻔해서 봉사활동엔 참여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날 교황은 나와 아세쿠토레를 불러 같이 봉사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겸사겸사 성녀께는 그 근처 직영 직물점 시찰도 부탁드립니다.”

귀찮은 일이 늘었다는 생각에 달갑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땐 그 이상의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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