Боженочка
보제노치카
1
이제는 아나톨리라는 이름이 더없이 익숙해진 체르노보그는 서대산맥의 한 봉우리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동대륙의 광활함이란.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문명의 ―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단어를 골랐다 ― 위대함이란.
‘체르누슈카, 아나톨리가 도착했어.’
그렇게 속삭이듯이, 불어오는 바람에서 평화의 향기가 났다.
그는 한 드워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에는 얼굴보다 이름이 더 선명히 남는다. 이름보다 더 선명히 남는 것은 소리고, 그보다 더 청명한 것은 향기이다. 해서, 그 드워프의 얼굴보다는 ‘보제나’라는 이름이, 그보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목소리보다는 그때 그 배 위에서 불던 바람의 향기가 아나톨리에게는 더 가까웠다. 짜고, 차고, 맑은 바닷바람. 그러고 보면, 그 드워프는 이 대륙을 사랑했을까? 드넓은 땅 곳곳에서 찬란히 살아 숨 쉬는 꿈의 향기를, 저마다의 도시와 마을을 등불처럼 밝히는 희망을.
“그래서, 그런 이유로 떠돌고 계시겠다?”
그녀가 깔깔 웃었다. 아나톨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웃지 마, 보제노치카.”
그들은 만난 지 수 시간도 되지 않아 서로를 애칭으로 부를 만큼 편해져 있었다. 그건 어쩌면 알코올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단순히 말이 잘 통해서였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 그리고 애칭을 만드는 방식이 닮아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전부일지도.
“하지만 웃긴걸, 톨류샤! 그렇지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보제나는 취기 때문인지 잠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다가, 몇 초가 지나서야 눈을 뜨고 덧붙였다.
“언젠가 그게 널 지치게 할 거란 거야.”
아나톨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그녀는 잔에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얼굴을 구겼다. 조금 쓰네.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에 보제나는 아나톨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바로 옆에 붙어 앉은 그녀는 무서울 만큼 진지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네 것이 아니니까, 톨류샤. 그건 그 사람 거지. 그런 방식으로는 안 돼. 네 말에 따르면, 너는 지금 이름조차 네 게 아닌 거잖아.”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취한 듯 나른하고 장황한 말에 아나톨리는 듣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머리가 흔들리자, 취기가 더욱 빨리 돌기 시작했다. 그래서 끝내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널브러졌다.
“내가 아까 그랬지, 너 그만 마셔야 한다고.”
아직 술에 익숙하지 않은 아나톨리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며, 보제나가 깔깔 웃었다. “술 깨러 갈까?” 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웃음 뒤를 곧장 따라붙었다.
“우린 지금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가긴 어딜 가요.”
아나톨리는 팔꿈치로 퉁명스럽게 보제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보제나의 체구가 훨씬 작은데도, 아나톨리의 가벼운 몸짓 정도로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아나톨리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아직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바닷바람이란 모든 걸 깨우는 법이거든.”
흥, 하는 노랫소리 같은 코웃음과 함께 보제나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비치적대며 물었다. 나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그에게 화답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옥을 깎아 만든 음률처럼 청량했다.
“술까지도?”
“숙취까지도!”
2
보제나는 아나톨리를 갑판으로 끌고 나와서는 난간을 붙들고 섰다. 밤바다에 달빛이 물결을 부수듯 내리고 있었다. 바람은 고요히 불었다. 톨랴는 보제나의 옆에서 난간을 붙잡고 섰다. 메슥거리던 속은 찬 공기가 폐부를 침범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고, 핑 돌던 머릿속도 한결 차분해졌다.
“그래서, 네 진짜 이름은 뭔데?”
멍하니 윤슬의 수를 헤아리던 아나톨리는 보제나의 질문에 어디까지 세고 있었는지를 아주 잊어버렸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나톨리가 방랑을 시작하며, 새로 만나는 이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그 이름이었다. 보제나는 굳이 재촉하지 않고, 그가 고민하게 두었다.
고민이 깊어지자, 문득 멀리 바다 한가운데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금빛 등대가 보였다. 그가 눈을 비비고 다시 바다를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느린 호흡으로 그의 지난 이름을 뱉어냈다.
“체르노보그.”
그가 그 이름을 꺼내기로 마음먹은 건, 결국 그 금빛 등대 때문이었다. 아나톨리는 신이나 운명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길이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믿었으므로.
“체르노-보그?”
그의 지난 이름을 들은 보제나가 오, 하고 감탄했다. 물결이 배에 부딪는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둘 사이를 바닷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새벽 바다의 바람은 짜고, 차고, 맑았다. 보제나가 손끝으로 몇 글자를 그리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완연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아나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의 끄트머리에는 계속 보제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체르노는 검은 거고, 보그는 신을 의미해. 그러니까 ‘검은 신’인 셈이지. 어둠과 악, 그리고 죽음 같은 걸 상징하는 신.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보제나는 뒤를 돌아 난간에 기대며 아나톨리를 바라보았다. 아나톨리는 이제 조금 흥미로워졌다는 얼굴로 아나톨리를 마주봤다.
“아나톨리는 일출을 의미한다는 거야.”
그녀의 등 뒤로 조금씩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보제나는 환하게 웃었다.
“장담하건대……. 아나톨리는 그의 이름을 아주 공들여 골랐을 거야, 체르누슈카. 그게 네 이름이 될 것까지 알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보제나와 헤어진 뒤, 선실로 돌아와 아나톨리는 생각했다. 카제인을 떠난 사비가 어째서 아나톨리라는 이름을 골랐을지를. 그러나 스물 하나의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제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깊게 골몰해 본 일이 없으므로.
불현듯 그는 옛 보호자의 ‘진짜’ 이름을 떠올렸다. 그의 원래 이름. 그러고 보면 장례에서조차 그 남자는 ‘아나톨리’였다. 그러면 ‘사비’는 정말 어디에도 남지 않은 걸까? 그의 묘비에조차 그 이름은 남아있지 않으므로. 톨랴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상념에 잠겼다. 카제인을 떠난 뒤에 그를 ‘사비’라고 부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그러면 그 이름은 영원히 북대륙과 서대륙 사이의 바다 어딘가에 잠기게 된 걸까?
상념은 곧 침몰한다. 배의 흔들림이 영혼까지 뒤흔드는 것 같았다. 이름을 돌려주어야 할까? ‘사비’에게? 어쩐지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이 아직도 덜 깬 모양이었다.
그날 꿈에서 체르노보그는 북대륙의 요새에 있었다. 정확히는 일종의 유령처럼 열 살 남짓인 체르노보그 자신을 쫓아 다니고 있었다. 체르넨카―아주 작았던 시절의 체르노보그―는 작은 발로도 카제인 요새의 온갖 곳을 뛰어다녔다. 아이의 시선은 늘 다넬과 리타를 향해 있었다. 그를 데려온 건 다넬이었고, 마법을 가르친 건 리타였으므로. 체르넨카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 번도 사비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체르넨카가 리타를 보고 있는 동안, 체르노보그는 문득 사비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슬픔에 잠겨 죽어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체르노보그는 남자를 불렀다.
“사비?”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자의 시선은 체르넨카를 쫓고 있었다. 체르노보그는 그가 흘려 넘겼던 남자의 말을 떠올렸다. 가만, 그 때도 배 위의 공기는 짜고, 차고, 맑았었나? 점멸하는 시야에, 열린 창문으로 우박이 들이치듯이, 그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런데 사비는 왜 날 데리고 도망치려던 거예요? 그러니까 왜 날 구한 거죠?”
“누굴 구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참회하려는 거야.”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는데요.”
“쉽게 말하자면, 딱 너만 한 아들이 있었거든.”
“하지만 어차피 저는 사비의 아들이 아니잖아요.”
“맞아, 그렇지만 그냥 내가 해야 했던 일을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거라고만 알아 두렴.”
사비. 아나톨리는 남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사비의 시선은 체르넨카를 좇고 있었다. 붉은 향과 푸른 빛을 잔뜩 실은 바람이 그의 목을 에는 듯 했고, 남자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선 한숨이 죽음처럼 새어나왔다. 그는 시체처럼 앉아서 칼을 닦으며 눈으로는 체르넨카를 따라다녔다.
체르노보그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가 아나톨리를 잃었을 때 꼭 그런 마음이었으므로. 카제인 요새에서 보냈던 시간보다 훨씬 짧은데도, 오카르도리스에서 아나톨리와 함께 보낸 이 년 남짓한 시간이 너무 눈부셔서 아나톨리를 상실한 뒤엔 아주 깜깜한 밤을 살았으므로. 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 쯤엔, 눈부셨던 흔적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오카르도리스를 떠나 도망칠 정도였으므로.
아이를 잃은 사비와, 아버지―그것이 가짜였대도―를 잃은 체르노. 그가 디디고 서 있는 곳이 한낱 꿈 속이어도, 체르누슈카는 그 둘의 감정이 맞바람으로 부는 가운데에서 소리도 없이 울었다. 그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는 소리는 꼭 벽에 돌을 던지는 소리와도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깨어지는 벽이란, 누구의 무엇이려나.
“아가,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지?”
그녀는 과장되게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며 톨랴에게 다가오더니. 옆자리에 털썩 앉아서는 턱을 괴고 흐흐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란다, 체르누슈카!”
“놀리지 마요. 보제노치카.”
단호한 어조였다. 그마저도 톨랴의 두 배를 넘는 생을 살았을 보제나에겐, 그저 어린애의 칭얼거림으로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나톨리는 한숨을 내쉬고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버지가 되는 건 어떤 걸까요? 아들이 되는 건 또 어떻고요.”
“그런 소릴 하다니, 갑자기 다 큰 조카가 생긴 것 같네!”
크게 웃으며 감탄하는 보제나를 보고 아나톨리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뒤에 의자에 기댔다.
“그런 것까지도 말야.”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했다.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의 말처럼, 정말 고모라도 생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어제 네 말에 따르면, 너는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했잖아?”
“그렇죠.”
“아버지로 대했다고 했고.”
“맞아요.”
아나톨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제나는 그게 뭐 어렵냐는 듯 말했다.
“그러면, 그게 아들이 되는 일이지. 간단하잖아?”
“하지만 그거랑은 다르잖아요.”
그 말에 톨랴가 헛웃음을 짓자, 보제나는 입술 양 끝을 늘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네 ‘진짜’ 아빠는 기억도 안 난다며.”
“네.”
“그러면 뭐가 ‘다른’ 건지는 어떻게 아는데?”
그녀는 일부러 ‘다르다’는 말을 길게 강조하며 물었다.
“그러게요.”
아나톨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또다시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 닳겠다, 톨류샤. 그 사람은 널 아들이라고 불렀고, 그렇게 대했고. 그거면 되는 거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흰 함께였고, 서로를 믿었고. 더 뭐가 필요하겠어? 그게 바로 가족이잖아?”
“하지만 전 아무것도, 사비에게 해준 게 없는데요.”
“아빠들은 그런 건 필요 없어.”
“하지만, 어떻게…….”
“그게 아버지가 된다는 거야.”
흠, 하고 가만히 아나톨리를 쳐다보던 보제나가 물었다.
“체르넨카, 너는 그 사람과 행복했니? 웃음이 나올 만큼?”
“눈부실 정도로요. 하루도 웃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아요.”
톨류샤는 감정이 벅차오른 듯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뱉더니, 한번 더 말했다.
“정말로, 눈부실 정도로요.”
보제나는 그의 옆에 의자를 당기고 앉아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럼 넌 그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걸 준 거야, 체르누슈카.”
“…그렇게 말해도 저는, 모르겠어요. 아직도…….”
아나톨리가 억지로 울음소리를 참아내자, 그녀는 그의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아이들은 울면서 크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는 좀 늦게 크기도 하는 거고. 눈물도 참으면 빚이 되는 법이거든. 그러니, 오늘 싹 청산하는 거야. 여태 실컷 어른인 체 해 왔으니까 오늘은 그냥 네 눈물로 이 배를 가라앉혀 보자.”
아나톨리는 그녀의 말에 울음이 터졌으면서도,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동대륙에 가야 하는데요.”
보제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에서 과장법은 알려주지 않았나보네.”
둘은 동대륙에 배가 도착할 때까지 며칠을 더 어울렸다. 며칠에 걸친 항해가 끝나고, 배가 뭍에 다다르는 날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멋쩍게 웃었다.
“이대로 영영 못 보게 되는 건 아무래도 아쉽지, 우리?”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체르누슈카’에게 작별주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난 ‘다시만나주(酒)’가 좋은데요.”
“작별주가 있어야 ‘다시만나주’도 있는 거 아니겠어?”
하하, 하고 보제냐가 웃었다. 두 잔이 마주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톨류냐가 햇빛이 닿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항해하고, 닿지 않는 데까지도 바람처럼 날아서 다니기를! 그러다 언젠가 지치면 또 같이 한잔하러 오라고. 나는 제국의 마이아 마을에 있을 테니까.”
3
스물일곱의 아나톨리는 이브에론 왕국의 한 마을로 향했다. 굳이 황무지를 통하는 길을 고른 건 황무지에서 아주 독특한 보석―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 보석을 찾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 보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그야말로 미스터리에 가까운 소문. 톨랴는 원래대로라면 그런 근거 없는 일에는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어쩐 일인지 이왕 지나가는 길이라면 황무지를 거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황무지의 외곽에서 찾아낸 것은 보석이 아니라 울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길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없는 황무지에서 홀로 엉엉 울고 있던 아이는 아나톨리와 마주치자마자 안간힘을 다해 아나톨리의 다리에 매달려서는 놓아주질 않았다.
“도와주세요!”
아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아나톨리를 보며 소리쳤다. 아나톨리는 아이와 시선을 맞출 수 있도록 쭈그리고 앉았다.
“왜 여기까지 나와서 울고 있었어?”
아이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아버지 생일선물로, 그, 보석을… 보석을 구해다 드리고 싶어서 나왔다가…….”
아나톨리는 아이를 토닥이면서도, 부드럽게 나무라듯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무지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런 데까지 혼자 나오면 어떡해.”
아이는 혼을 내는듯한 톨랴의 말에, 그쳐가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그치만, 그치만요!”
아이는 울먹거렸다. 요새 아버지가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기분이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곧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니, 귀한 걸 드리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나톨리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를 안아 들었다.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아이의 걸음으로는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혼자라면 노숙을 해도 상관없었겠지만, 아이에게는 어려울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나톨리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아이는 아나톨리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
“우리 아빠는요…….”
아이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점점 밝아졌다. 주로 아빠가 얼마나 재미있게 놀아줬는지, 어떤 선물을 줬는지, 얼마나 멋진 건지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아나톨리는 웃으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그런 분이 아버지여서 행복했구나?”
“그럼요!”
“얼마만큼?”
“음, 그건 너무 어려운데!”
하하, 하고 아나톨리는 작게 웃었다. 아이를 달래듯이 느리고 다정한 말투로 톨랴는 속삭였다.
“한 번 생각해 봐. 네 키만큼 행복한지, 아니면 아버지 키만큼 행복한지, 아니면 여기 이 나무만큼 행복한지, 아니면…….”
아나톨리는 문득, 오래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바다 위에서 나눈 대화가. 장난스럽고 다정한 보제노치카의 목소리와 그녀가 알려준 ‘아나톨리’의 의미가 아이가 그의 품속에서 꼼지락거릴 때마다 선명해졌다. ‘아나톨리는 그의 이름을 아주 공들여 골랐을 거야, 체르누슈카.’ 그녀는 그 말을 할 때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사비는 ‘체르노보그’에게 빛이 되고 싶어서 그런 이름을 골랐을 거란 걸.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 거란 걸.
“음, 알겠어요!”
아이가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아나톨리를 쳐다봤다.
“얼마만큼 행복한데?”
“어제는 이-만큼 좋았다가도, 자고 일어났더니 오늘은 아빠가 이이이-만큼 좋은 거 있죠? 그러니까, 황무지만큼으로 할래요! 왜냐면, 어른들이 황무지는 점점 커진다고 했거든요.”
아이가 양손으로 그릴 수 있는 만큼의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말했다. 톨랴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는 품에 안은 아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면, 선물 대신에 아버지께 그렇게 말씀드리자.”
“그렇지만, 뭔가를 선물해 드리고 싶단 말이에요.”
“네 그 말이, 아버지께는 무엇보다 큰 선물일 거야.”
“하지만 선물은 장난감이나, 신발이나, 옷이나… 뭐 그런 거여야 하잖아요?”
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이제야 보제나의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알 것 같았다.
“아빠들은 그런 건 필요 없어.”
“왜요?”
“그게 아버지가 된다는 거거든.”
아이와 함께 마을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세상이 아주 깜깜해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멀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렸다. 그들이 애타게 부르는 것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아빠 목소리예요!”
아이가 횃불의 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나톨리는 “그래, 그런 모양이네.” 하고 아이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아이가 잰걸음으로 빛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톨랴는 아이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너무 서두르지 마, 그러다가 넘어진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아이는 돌부리에 걸린 건지 금방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아나톨리는 가볍게 탄식하고는 아이가 넘어진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넘어진 아이의 옆에 털썩 앉아서는, 아이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무릎이 크게 긁혀 있었다.
“아버지가 저렇게 널 찾으시는데, 다친 모습으로 돌아가면 안 되잖니.”
“그치만 너무 보고 싶었는걸요!”
“그래도, 조심해야지.”
톨랴는 아이의 무릎에 간단한 치유 마법을 걸어 주었다.
어느새 횃불들은 지척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가 “아빠!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대답하자, 곧바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아나톨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아버지는 횃불도 내팽개치고 달린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젖어 있었다. 아버지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널, 널 영영 못 찾는 줄 알았다. 나는…….”
아나톨리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 내가 해야 했던 말을 너는 네 아버지에게 해 드릴 수 있겠구나.
4
아나톨리는 마을에서의 용무가 끝난 이후에, 이브에론 왕국과 루퍼트 왕국을 거쳐, 마이아 마을로 갈 계획을 세웠다. 언젠가 지치면 함께 하자던 그 약속을 위해서. 이미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데다, 그가 딱히 지친 것도 아니었지만, 톨랴는 그저 보제노치카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또 이리저리 방랑하며, 여정 내내 일어나는 일들을 피하지 않고 부딪히며, 그렇게 가다 보면 늘 예정했던 것보다 속도는 더뎌지기 마련이다. 그는 결국 10월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마이아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숙소를 잡고 마을을 돌아보았다. 보제나가 이야기했던 광장 가운데의 분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화려했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분수에 관하여 쑥덕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니까 골드를 던지면 소원을 이뤄준다더라고. 에이, 그런 걸 누가 믿어? 글쎄 저번에… 진짜 이뤄졌다고 하더라고! 그는 슬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가 광장 다음으로 향한 곳은 상가였다. 그는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물었다.
“이 마을에 사는 ‘보제나’라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그러나 상인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람은 없는데요.”
젊은 청년들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모두 같은 대답만을 돌려주었다. 그 유명하다던 ToB의 길드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상가를 나섰다. 마침 상가 밖이 소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상단이 마침 방문하는 날인 모양이었다.
그는 상단 사람으로 보이는 이를 붙잡고 같은 질문을 했다. 아주 잠깐 희망이 스쳤던 탓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허탕이었다. 상단 사람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모두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드워프는 만난 적이 없다면서. 마이아 마을이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심지어는 다른 대륙에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고 한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보제나는 애초에 마이아 마을에 온 것이 맞나? 그녀는 분명 이 마을이 제 고향이라고 했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톨랴는 혼란스러웠다. 의심해야 할 것은 보제나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기억일까?
당황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던 톨랴의 손목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톨랴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체르노보그?”
“…오스카?”
톨랴는 제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오스카도 가볍게 그의 손목을 놓고는, 크고 호탕하게 웃었다. 전부터 성격이 좀 바뀐 것 같긴 하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제 이쪽이 거의 본 성격인 듯 싶었다. 그 전의 성격이 어땠는지 가물거릴 만큼. 뭐, 그거야 다들 크면서 성격이 변하곤 하니까.
“응, 이렇게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아나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대답했다.
“마찬가지야. 이런 데서 보니 반갑네.”
“그러니까, 응, 정말 반갑다! 이렇게 오랜 인연을 마주치는 것도 삶의 묘미 아니겠어?”
둘은 한참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했다. 오스카는 자연스럽게 마을의 곳곳을 소개했다. 자연스럽게 오스카가 이 마을에 온지 일 년이 넘었다는 것, 마을 유일의 길드 소속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는 톨랴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으나 톨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다음 기회에.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사람 하나를 찾고 있거든.”
그러나 아쉽게도, 오스카 또한 보제나라는 드워프를 알지는 못했다. 아나톨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어쩌면, 정말로 보제나는 신기루였을까? 그가 배 위에서 잠시 보았던 그 금빛 등대처럼?
이후로 몇 주를 더 머물렀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 동안 몇 번인가 길드를 찾아가 그 드워프의 행방을 아는 이가 없는가 캐묻기도 했고, 새로운 얼굴만 보이면 달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허탕이었고, 대부분의 날들은 그런 희망도 없이 지나갔다. 그저 몇 번 오스카와 술을 마시거나, 오며가며 마주쳐 익숙해진 몇 길드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가 한 달을 넘게 한 마을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나톨리는 도무지 마이아 마을을 떠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서, 그는 천천히 길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로서는 큰 결단이었다. 어딘가에 정착하는 것도, 소속되는 것도.
5
평소처럼 마을을 돌고 있던 아나톨리를 향해, 에이미가 달려왔다. 에이미가 숨을 고르며 묻는 말에, 아나톨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보다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걸?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모험가가 되는 법이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들어갈 수 있을까요?”
“글쎄……. 같이 고민해 볼까?”
에이미는 눈을 빛내며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힘이 더 세져야 할까요?”
아나톨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마침 들고 있던 병을 낑낑대며 따는 시늉을 하더니 말했다.
“힘은 아닐 것 같지 않아? 날 봐, 병 하나도 못 열어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잖니.”
그는 한참 씨름하는 체를 하다, 아휴, 하고 한숨까지 부러 내쉬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픈 연기로 아이의 눈을 속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짓말!”
아이가 토라진 얼굴로 아나톨리를 올려다봤다. 아나톨리는 웃었다.
“역시, 에이미는 못 속이겠는걸?”
아나톨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병의 뚜껑을 열어, 에이미에게 내밀었다.
“사탕무 주스라던가, 메뉴어 부인의 신메뉴라고 하더라고. 에이미도 마셔볼래?”
에이미가 곧 양 손으로 병을 받아들었다. 아나톨리는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이미의 똑 부러지는 통찰력을 보면, 어른이 되면 분명 들어올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함께 몬스터도 잡으러 다닐 수 있겠다. 그렇지?”
어떻게 들어왔냐니. 나는 보제나를 만나려 여기에 왔고, 보제나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로 여기에……. 거기까지 생각한 아나톨리는 어쩐지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생각해보면 근 2주간은 보제나의 목소리도 떠올린 일이 없지 않았던가? 톨랴는 에이미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에 길드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면, 혹시 무슨 소식이 있진 않을까? 어쩌면 누군가가…….
마침 하이스탄이 1층에 내려와 있었다. 아나톨리는 그에게 깍듯이 인사한 후 물었다.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마침 마주쳐서 다행이예요. 혹시 아직도 ‘보제나’라는 드워프를 아는 사람은 나타나질 않았나요?”
하이스탄은 그의 인사에 짧게 답하고는, 이어진 질문에는 늘상 그렇듯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아나톨리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정말로, 하나도 없었나요?”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아나톨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톨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에, 체념한 얼굴로 짧게 목례했다. 그는 천천히, 무거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의뢰소를 확인하고, 다시 길드 건물을 나설 때까지도 걸음은 다시 가벼워질 수 없었다.
아나톨리는 산길을 따라 걸었다. 그저 높은 곳에 가고 싶었다. 탁 트인 곳에서 바람이 쐬고 싶었다. 스물 한 살, 바다 위에서 쐬었던 것 같은 그런 바람을.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지쳐야 하는 걸음은 외려 가벼워진다. 그리고 끝내, 정말이지 바람과 같은 그 마지막 걸음을 디뎠을 때 그는 정상에 섰다.
이제는 아나톨리라는 이름이 더없이 익숙해진 체르노보그는 서대산맥의 한 봉우리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동대륙의 광활함이란.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문명의 ―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단어를 골랐다 ― 위대함이란.
‘체르누슈카, 아나톨리가 도착했어.’
그렇게 속삭이듯이, 불어오는 바람에서 평화의 향기가 났다. 짜고, 차고, 맑은 평화의 향기가.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다. 체르노보그는 보제나(Божена)가 알려준 아나톨리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는 온 땅을 내려다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 신이시여(бо́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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