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왕의 자질

2019.08.20

글월 문집 2회차


왕이 왕으로 즉위한 날이었다. 왕은 그간의 관례대로 성의 한쪽의 예배당에 들어가 밤을 보내며 신께 기도했다. 자신이 이 나라에 왕이 되었음을 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신께서 굽어보시고 그 왕이 통치하는 동안 축복을 내린다는 것이다. 낮에는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이 있었다. 커다란 망토와 금실과 보석 단추로 한껏 꾸며진 옷을 입은 채 높은 단 위에 올라서며 아래로는 기사들이 나열하고 관리들이 외쳐대는 즉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공표했었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예배당은 낮고 어둡고 고요했다. 지켜보는 신관도 준비된 의식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내내 별일이 없었다. 왕은 경건하게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으나 새벽 즈음이 되자 왕은 희미한 졸음에 겨워 있었다. 그때 찬란한 빛이 예배당 바닥에 내려앉았다. 희미하기 그지없는 여명을 모두 지우는 하얀 빛이었고 그 위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왕은 잠이 확 달아났으며 마주한 천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천사는 바닥을 딛고 거침없이 걸어와 왕을 내려 보며 곧장 말했다.

“너는 항상 배를 곪지 않을것이다.”

천사가 왕에게 어떤 인사 치례나 치하도 없이 선언하였다. 축복의 내용이었다.

“병들 일도 없을 것이며 다칠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상처는 통증을 남기지 않고 치유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사람으로서 정해진 삶을 온전히 누리고 나서야 죽게 될 것이다. 유리구 안의 성처럼 너는 항상 변함없이 온전할 것이다.”

왕은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은 실로 고귀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전설 속에 내려오는 처음으로 추대된 왕이 그렇듯이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전율에 몸이 떨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천사는 어리석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오만하게 굴지 말아라. 네게 축복이 내려진 이유는 그저 네가 왕이기 때문이다.”

왕은 퍼득 천사를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왕의 위치에 걸맞는 신성한 힘을 내려주신 것이 아니십니까?”

“아니.”

천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표정이 싸늘해졌다.

“신이 너를 위해서 존재할 것 같으냐? 네가 신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가 네게 축복을 내려준 이유는 네게 인간 수만 명의 삶이 달렸기 때문이다. 혹여 통치자인 네가 순간의 고통으로 그릇된 판단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다. 네 오만이나 어리석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나 고통에 나약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미치는 일은 우리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나라에는 그 가능성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왕이 된 이후로 모든 것의 위에 섰던 자는 종으로 전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분노 그 이전에 공포로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 공포는 다름 아닌 모든 것에 위에 있던 신의 자질을 향해 있었다. 왕은, 왕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신의 사자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을 용서하소서. 허나 신께서는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천사는 팔짱을 끼었다. 어디 볼 때까지 보자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위의 존재에게 제멋대로 전능을 기대하지. 그리고 제멋대로 실망해. 너라면 알 텐데? 아니 착각했군. 왕이 된 지 고작 하루라고 했지? 허나 곧 알게 될 거야. 왕이 된 네가 가장 높을 자리에 있는 것 같더라도 전능하지 않다는 걸. 그리고 신이라고 다를 바 없어. 그러니 경고한다. 멋대로 신에게 기대하지 말 거라. 특히 네 무능으로 벌어진 일이 신에 의한 기적으로 해결되리라 기도하지 말 거라.”

천사를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신의 뜻과 계시보다 어명과 관리들을 더 두려워하는 세상이 도래했구나. 신이 세상을 창조했으나 많은 부모가 아이를 기르는 일에 처음이듯, 이런 세상은 신에게도 처음이지. 너희들이 법을 만드는 바람에 천사가 악인에게 엄벌을 내리는 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절차를 거쳐야만 일이 해결되는구나. 그러니 우리는 너를 통해 세상을 관리해야겠구나. 이 나라의 사람 위에 선 존재야. 가거라. 그리고 바르게 행하거라.”

천사는 손을 까닥하며 나가라고 말했다. 왕은 튕겨 오르듯 일어나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예배당을 뛰쳐나갔다. 그가 제 권능의 무게를 깨달아 진정한 왕의 자질을 갖추게 된 날이었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50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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