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
2019.08.20
글월 문집 1회차
“무엇을 보고 있어?”
“토끼.”
“토끼?”
나는 눈을 바로 뜨고 선희가 보는 곳을 보았다. 마른 수풀밖에 없었고 바스락거리는 낌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애는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응, 토끼. 저기 봐. 알록달록한 저고리를 입고 있어. 아까는 여우가 멋진 옷을 입고 지나가던데. 호랑이의 생일잔치에 가나 봐.”
선희는 무언가의 광경을 선명하게 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선희와 나는 서로 이웃집에 산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양쪽의 부모님은 매일 같이 마주 보며 친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의 아이를 번갈아 가며 봐주고 같이 어울려 놀게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상세하게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나는 선희와 자연스럽게 붙어 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처음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나가 친구를 사귀기 전, 가족이 전부이던 시절에 이미 선희가 있었다.
그래서 선희가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을 안다. 골목의 텅 빈 길가를 보고, 시냇물을 보고, 늘어진 나뭇가지를 보고 저곳에 무엇이 있다고 종알거렸다. 엉뚱한 곳에 서서 마을을 지킨다는 장승, 두루마기에 검은 갓을 썼다는 개구리, 나뭇가지에 매달려 장난칠 준비를 한다는 도깨비.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순수한 믿음으로, 보지 않더라도 들뜰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 애는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광경을 들려주었고 나는 한편의 동화를 듣듯 몰입했다.
“진짜?”
“응, 진짜야. 아, 갔다. 토끼는 잔치 시간에 늦었나 봐. 헐레벌떡 뛰어가더니 사라졌어.”
부모님들은 선희의 이야기가 아이의 상상력이 통통 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정하신 분들이셔서 나무라는 대신 같이 어울려주었다. 같은 것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니 나도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믿었다. 그때는 나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인 것 같았다. 토라지기도 했고, 서러워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선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차츰 자라고 다른 이들과도 어울리며 어중간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선희의 말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거짓말이지?”
“정말이라니까. 현진이 넌 저게 보이지 않는 거야?”
선희는 선희 나름대로 답답해하며 손을 뻗어 가리켰다. 그러나 그런다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야말로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에 뭐가 보인다는 거야. 전부 꾸며낸 이야기지? 다른 애들도 그런 거 없댔어. 안 속아.”
그러면 선희는 화가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는 안 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나왔다. 그러나 실은 선희의 이야기가 무척 듣고 싶었다. 나는 슬쩍 꼬셨고 몇 번 그러다보면 그러면 그 애는 못 이기는 척이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 애도 떠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나 외에 선희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이는 몇 없었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로 시작하는 그저 이야기였다면 모를까, 선희가 말하는 것은 선희의 눈앞에 그려지는 선명한 세계였다. 의심할 여지 없는 광경이었기에 선희는 제 것이 아닌 척 타협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저기 무엇이 있어”, 로 시작을 해서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공들여 묘사했는데 그것은 다른 아이가 짓궂게 거는 시비, “나는 보이지 않는데?”에 쉽게 무너졌다.
그래서 내게 많은 이야기를 풀었다. 그러나 떄때로는 나도 시비를 걸었다. 이야기를 아무리 듣는다 해도 내 눈앞에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럴 때면 확고하게 앞에 있다는 듯 행동하는 선희가 가증스럽고 거슬렸다. 분명 이상한데, 사실이 아니라고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무렵의 충돌을 기억한다. 어느 한번의 일로 길고 치명적인 갈라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여느 또래가 그렇듯, 우리는 갖은 이유로 서로 투닥거렸으니 싸움들이 특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 일들은 서로에게 자잘하지만 분명한 금을 내었다. 나는 믿음이 조금씩 부스러졌다. 그리고 선희는, 제 세계가 위협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웃이었다. 우리는 자라 같은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도 서로 이웃집에 살았다. 집이 같은 곳에 있었으니 하교 시간이면 때면 같은 방향으로 걸음이 겹쳤다. 그때 항상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면 학교에서는 조용한 아이로 인식이 박혀 있는 선희는 점점 떠들기를 좋아하는 활기찬 사람으로 변해갔다. 어울리기 위해 애들 앞에서 무리하게 나서서 말하던 나는 차분하게 선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의 우리와 단둘이 있을 때의 우리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어느 것이 서로의 진짜 모습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겨울에는 해가 일찍 저물었는데, 학교 주변의 번잡한 시내에서 집과 집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에 노을이 드리워졌다. 붉은빛이 얼룩진 보도블럭을 밟는데 학교에서는 내지 않던 선희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학교와 집은 다른 공간이었다. 그리고 건너가며 우리는 각 공간에 맞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이런 생각을 하고 했다.
중학생인 선희는 더 이상 그 이상한 세상에 대해 말하지 못해 안달을 내지 않았다. 나도 친구들 사이의 유행같은 다른 것들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며 나는 전만큼 이야기에 매달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선희가 그 세계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멍하게 허공에 길게 머물러 있는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야, 현진. 지금 분식점 뒤 골목길로 줄 수 있어?”
“뭔데? 떡볶이 값 대신 내달라고?”
“아니거든? 그거야...... 그거. 돈 안 들고 와도 되니까 그냥 와 줘. 부탁이야.”
선희는 가끔 전화로 나를 부르곤 했다. 그냥 산책 나간다고 생각할 정도의 가벼운 걸음이었으니 크게 수고로울 건 없었다. 솔직히 귀찮기는 했지만 가끔 내가 두고 온 숙제를 대신 들고 오거나 내가 앓아누울 때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대신 전해주는 일이 있었으니 주고받는다고 생각하고 나갔다.
그렇게 선희가 부르는 곳으로 나가면 길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선희를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선희는 앞에 벽이라도 세워진 듯 나가질 못했다. 나는 선희에게 다가갔고 손을 내밀었다. 선희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선희는 눈을 감았다. 나는 선희를 이끌고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전봇대나 사람에게 부딪히거나 턱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이쯤이면 되었어?”
“어디인데?”
“우체국 앞.”
“조금만 더 가자.”
“.....빵집이야. 아직도 더 가?”
“이제 되었어.”
선희는 손을 놓고 그제야 눈을 떴다. 걸어온 길을 되짚으며 내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나는 표정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뭐였어?”
“어둑서니. 어둑서니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 원래 적당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길을 제대로 막고 있어서.”
선희는 자신이 보는 것들이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가끔 방해가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럴 때면 다시 선희가 가증스러워지곤 했다. 선희가 혼자 망상을 가지고 있든 말든 이제는 신경 쓰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내 동조를 얻고자 하면 짜증이 났다. 그래도 선희가 입 밖으로 꺼내면 쓸데없이 싸우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번 묻기는 했다.
“실체가 있는 것이 네 눈을 감으면 실체가 사라져?”
선희는 진지하게 답했다.
“응. 보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 되거든.”
방에서 눈을 감고 손을 뻗어보았다. 벽이 만져졌다. 벽에서 등을 돌려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세 걸음이면 책상이 닿았고 책상을 만지며 오른쪽으로 향하니 침대가 만져졌다. 나는 매트리스를 쓸며 가장자리까지 향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대로 옷장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선희의 말이 걸려 실험까지나 해본 내가 한심해졌다. 나는 맥이 풀려 침대에 드러누웠다.
선희는 어떤 세계를 살까? 남들이 눈앞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듣고 받아들일 때 선희는 항상 의심하면서 살아야만 했을까? 그 애의 굳건한 태도를 보면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혼자 맞다고 주장할 때의 기분은 어떨까? 의심하기 싫어서 오히려 굳건한 태도를 내세웠을까? 또한 선희는 자신이 본 것을 얼마나 부정당하며 살까? ...... 그 애가 보는 것은 내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으니 선희가 보는 세상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너 선희네 옆집에 살지.”
붙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귀는 거냐고 짓궂게 놀려 댈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사실대로 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집을 어떻게 옮길 재간도 없다.
“응. 왜?”
아이들은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있잖아. 선희말이야.”
“걔 이상한 것을 본다고......”
“그...게.”
나는 반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 묘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우리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들었던 이가 있었으면, 그 사람은 우리가 그저 친구들 사이에서 어울리면서 달라지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더 자세히 볼 수 없었으니까 모른다. 내가 왜 무리하게 나섰으며 선희는 왜 조용해졌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쉽게 따돌림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나부터 선희를 이상하게 여겼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희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억지로 친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유치원 때의 소문이 번졌었다. 우리의 노력은 전부 조용없어졌다.
그 시절의 담임 선생님은 엄한 분이셨다. 사소한 잘못에도 혼을 내곤 했으니 아이들은 앞에서는 아무것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뒷담만이 간간이 오갔다.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몰랐다. 가끔 함부로 험담하지 말라고 윽박은 질렀지만 그걸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도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고 모르는 일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무엇도 참여하지 않았다. 방학 중 프로그램 권유 가정통신문 같은 것은 접어서 가방에 박아두었다. 우리는 둘 중 한 명의 집에 틀어박혀 방학을 보냈다. 영원히 이렇게만 있고 싶었다. 얼마 안 떨어진 학교 같은 것은 없는 것으로 치고.
유독 침울해 보이는 우리를 들뜨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지, 양측의 부모님은 느닷없이 여행 일정을 잡으셨다. 캠핑장에서 캠핑도 하고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자고 신나게 말씀하셨다. 방학이 끝나가는 시점이어서 다시 학교에 돌아갈 일만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나와 선희는 기쁜 척을 해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 날은 비가 왔다. 바비큐도 취소되고 할 수 있는 일은 캠핑장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골아 떨어지고 나는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때 나처럼 지루하게 앉아있던 선희가 벌떡 일어나 우산도 없이 빗길로 걸어 나갔다. 나는 선희가 또 이상한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른들을 보며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가 나 혼자 뒤따라 나갔다.
선희는, 거침없이 캠핑장을 나가 숲으로 들어갔다. 이정표가 있기라도 한 듯 방향이 단호했다. 나는 억센 덤불을 헤치며 간신히 쫓아갔다. 도중에 냇물이 있었는데 눈을 뗀 사이 선희는 이미 건너 있었다. 나는 멀리서 보이는 징검다리로 달려가 간신히 건너 따라갔다. 이쯤되니 온통 모르는 숲속이었고 아는 건 선희밖에 없어서 쫓지 않을 수가 없어졌다.
“선희야!”
나는 선희의 이름을 외쳤지만 선희는 힐끔 돌아보기만 할 뿐 무언가 말하지는 않았다. 꾹 다물린 입에는 시끄럽게 해서는 안된다는 엄숙함 같은 것이 있었다. 다만 나를 기다려주고 보조를 맞춘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숲길을 올랐다. 경사가 가팔라졌고 세찬 물소리가 들렸다. 비를 맞고 가끔 발이 미끌어졌지만 선희는 굳게 올랐다. 선희는 대체 왜그러는 것일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선희는 혼자만 보이는 특유의 무언가를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건 선희의 망상 아니던가? 그깟 망상에 내가 언제까지 휘말려야 하지? 내가 그런 선희와 친하게 지내니까 학교의 아이들이 나도 밀어내는 거잖아. 나는 아무 잘못 없잖아. 만약 내가 선희를 모른 척하면, 나는 다시 원만한 학교생활을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고 우렁찬 폭포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튀어나온 벼랑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아래에는 폭포가 부셔지고 있었다. 선희의 시선은 폭포 아래를 향해 있었다. 비에 잔뜩 젖은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희가 벼랑 가장자리에 너무 가까이 서 있었고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이 확고해서 혹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선희야......”
나는 작게 선희를 불렀다. 선희가 돌아보았다. 뛰어내릴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선희는 환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봐봐, 저기 이무기가 있잖아.”
선희는 폭포를 가리켰다.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따라 걸으며 아까 생각했던 의문이 아직 머리에 돌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해. 선희의 이야기에 조금도 동조해주지 않고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거야. 선희는 상처 입겠지만 거짓말은 아니잖아. 그리고 돌아가서 며칠 동안 선희는 못 본채하고 개학하면 학교에 돌아가서 애들에게 다가가는 거야. 확실히 선희가 이상하다고. 그러면 아이들은 나를......
그러나 선희의 확신 어린 표정에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선희는 바로 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선희의 심정은 어떨까? 아이들의 따돌림에 마땅한 증거가 없어 어찌할 수 없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선희의 매 순간이라면?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
“선희야. 무엇이 보여?”
나는 선희에게 물었다. 선희는 아득한 여전히 허공을 보며 조근조근 소리를 낮춰 들려주었다.
“여기 이무기가 있어. 원래 이무기는 혼자 폭포 속에 똬리를 틀고 살지만 오늘은 잠시 나와 산을 둘러보았나 봐. 아까 스쳐지나가는 꼬리를 보았어. 분명 온화하고 존경받는 이무기일 거야. 온 동물의 혼백이 행렬을 지어 따르고 있었어. 흰 뱀이 부유하며 따르고 있어. 그렇게 찬란하고 희미한 흰 길이 생겨. 아니면..... 어쩌면 이무기가 아니라 길을 잃은 동물들의 혼을 이끄는 영물일지도 모르겠어. 하늘에 흰 천이 흩날리고 있어. 그들을 안내하듯.”
나는 선희의 말을 듣고 선희가 보고 있을 풍경을 그려보았다. 장엄하고 엄숙한 행진. 많은 이들이 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은 움직임. 어쩌면 보는 순간 압도되며 마음이 뭉클해질 그런 광경. 비가 장막처럼 드리워지고 아래의 물보라가 일었다. 나는 그 사방에 가득 찬 흰 수분에서 그 행렬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나는 선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희는 그 긍정에 잠시 놀란 눈으로 보다가 싱긋 웃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고 내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받아들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가늘어지는 빗줄기와 물보라 사이에서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선희를 보며 나는 앞으로 선희가 보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리란 걸 알았다.
우리는 간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갔다. 그런데 냇물이 불어 있었다. 기껏해야 무릎 께에서 찰랑거리던 맑은 물이 혼탁해진 채 평소의 수위를 한참 넘어있었다. 나뭇가지 따위가 소용돌이치는 바위 사이로 휘말리며 찢겨나았고 물은 무섭게 내달렸다. 우리가 건너온 징검다리는 흙탕물 아래 가라앉아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섣불리 발을 내밀었다가는 그대로 물귀신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냇물 건너에 부모님이 계셨다.
속이 서늘해졌다. 어찌해야 하지? 세상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비에 잔뜩 젖은 몸은 추웠다. 막막해서 머리가 하얘졌다. 부모님이 어떻게 와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님께 말도 없이 나간데다가, 휴대폰도 두고 왔다. 게다가 우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의 문제는 둘째치고 저 물살을 부모님이라고 어떻게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이곳에 갇히게 되는 걸까? 나는 덜덜 떨면서 선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선희는 태평했다. 오히려 나를 의아하게 보며 물었다.
”“왜 그래?”
“징검다리가.....”
“그게 왜?”
선희가 강을 보았다. 그리고 징검다리가 있었던 곳과는 약간 어긋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솟다리가 있잖아.”
분명히 선희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희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당장 허공을 밟고 걸어서 건너가기라도 할 것 같은 태도였다. 선희는 나를 이끌었다. 방금 선희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시 물러나게 되었다.
“선희야, 나에겐 보이지 않아.”
선희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선희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선희가 키득 웃었다.
“그래, 눈을 감아.”
“눈을 감으면 없는 것이 된다면서. 없는 것이 생기기도 해?”
평소에는 내가 하던 일이었는데 상황이 뒤바뀐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따지듯 물었다. 선희는 태연하게 답했다.
“응. 이제는 내가 네 눈이 되니까.”
그리고 휙 나를 이끌었다.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이끄는대로 끌려갔다. 물소리가 훅 커졌다. 모든 것을 쓸어갈 듯 세찬 소리였다. 따라 걸으면서 나는 발에 닿는 감각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도 긴장해서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선희가 갑자기 나를 툭 밀쳤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우리는 이미 강을 건너 있었고 평지에 있었다. 분명 다리는 없었는데? 나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고 선희는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49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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