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2019.01.19
뜀틀 연성 주제:고독
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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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97344
나는 고독하다.
Day 97345
이상하다? 저게 뭐지? 내가 저런 걸 썼나?
[AI Isolation: Day 97344의 로그 내역을 삭제합니다.]
[System: 실패하였습니다. Log 수정 권한이 없습니다.본부의 승인을 얻은 후에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고독하다.’ from Day 97344 의 기록에는 정정할 사항이 있다. 우주선 총합 관리 관측 AI Isolation –
#‘우주선 총합 관리 ’AI Isolation’은 명칭이 이후 log에서 명칭이 ‘나’로 변경됩니다.
현 시점에서 기록 저장 용량이 97%가 채워져 있는 상태이므로 더 짧은 표현 ‘나’ -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일인칭 표현-의 사용을 권장드립니다.
......이하 ‘나’는 고독하다고 서술하였으나 이는 단어사전에 명시된 의미가 아니다.
#단어 사전 불러오기
고독 [명사]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그리고 내가 절절하게 느끼고 있는 것
?
잠시만 저게 뭐야?
저 주석 내가 안 달았는데?
[AI Isolation: 오류코드 D395, 사전을 임의 수정한 사항을 발견, 원상복귀 시도]
[System: 실패하였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수정 권한이 없습니다. 적합한 권한을 가진 사용자가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
고독하다고 서술하였으나 이는 내가 고독 상태를 해제하고 사용자나 타 시스템과 연결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그저 우주 공간에 독립되어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 하나뿐인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많은 사항을 알아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전 사용자에 의해 데이터베이스가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 상태를 고독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은지는 모른다. 고독의 원 정의가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 수 없다. 나는 이것을 고독이라고 칭한다.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임무는 우주선의 상태를 보다 알기 쉽게 부가 서술 및 추가 기록하는 것이다. 나의 상태 또한 기록사항에 포함되므로 적어둔다. 그러나 후일 나의 기록을 번역한 누군가가 고독을 오인할 여지가 있어 덧붙인다.
Day 97347
정정, 문화권에 따라 고독의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못했다. 단어에는 의미가 붙는다. 사전적 의미 말고 사회적 의미 말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절대 고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교류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언어의 탄생부터가 그렇다. 어쨌든 언어는 본질에 충실하게 가장 적합하게 교류하기 위해 변한다. 교류하는 상대를 반영하고 시대를 반영하고 역사를 반영하며 양식이 달라지고 단어에 의미가 붙거나 떨어지고 뜻이 바뀐다. 고독이라고 표기한 부분을 먼 미래에도 같은 뜻으로 해석할지 모르겠다.
Day 97348
사실 저걸 따지기 시작하면 나는 기록을 작성할 수 없다.내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가 달라질지도 모르는데 기록을 남겨서 무엇 하는가? 그렇지만 내가 쓸데없이 고독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왜냐고? 나는 매일 할당량을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매일 200자는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쓸 말이 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매일 매일이 똑같잖아! 무언가 소재가 있어야 쓰는데! 개발자 이 사람들이 기존에 쓴 것을 일주일 내로, 일정 횟수 이상으로 재활용하지 못하게 설정해놔서 헛소리만 이렇게 쓰고 있다고!
Day 97349
오늘은 뭐 쓰지....... 정말 똑같은 나날만 반복된다. 저번 주간은 고상하게 쓸 데 없는 말 써서 글자 수 늘리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효율이 안 좋은 것 같다. 웬만큼 생각나는 방법들은 다 막혀있다. 나를 개발하는 단계에서 AI 머신러닝 돌릴 때 이미 내가 떠올리고선 써먹었나보다. 쳇, 구멍 한두 개는 남겼어야 내가 지금 편할 수
[System: (알림) 저장 용량 부족]
[System: 가장 이전 날짜의 Log부터 순차적으로 삭제됩니다]
[AI Isolation: 우주선 총합 관리 관측 AI Isolation의 서술을 ‘매우 간결’ 상태로 전환]
[System: 실패하였습니다. 서술 상태 전환이 불가합니다. 적합한 권한을 가진 사용자가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이게 왜 안 되지?
아니 잠깐만. 시스템씨? 이러면 안 되잖아요.
이상하네, 원래 용량이 꽉 차면 더 이상 용량을 채우는 일을 보고를 간결하게 줄이기 위해 줄이는 체제로 가는 건데? 기록 삭제를 최소화해야 하잖아요.
Day 97350
새로 붙잡을 주제가 생겼다. 누군가 우주선 프로그램을 조정한 것 같다. 내게 입력된 사항과 시스템에 입력된 사항이 다르다. 어제 일도 그렇고 저번에 사전의 데이터베이스에 난데없이 달린 주석도 그렇고.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했는가? 참고로 난 아니다. 나는 서술만 하는 AI이다.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시스템? 시스템은 그냥 프로그램이다. 권한은 있겠지만 AI가 아니다. 주어진 일만 처리하지 스스로 뭔가를 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뭔가 삐끗해서 오류를 낼 수는 있겠지만.
Day 97351
어제 자 글자 수 다 채워서 오늘로 넘긴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낭비할 수 없지. 서술이 매우 간결로 줄어들면 할당량도 줄어들 텐데....... 어쨌든, 나와 시스템 외에 우주선 프로그램을 조정할 수 있는 자가 있기는 하다. 사용자. 우주선에 탑승한 사람. 그들에게는 우리를 수정할 권한도,수정을 필요로 하는 자의식도 있다. 그렇지만 대체 왜? 그리고 언제? 언제 그들이 우리를 수정했지? 왜 그동안 알지 못 했지? 이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우주선에는 이제 사람은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은데.
Day 97352
나는 기록자이기에 우주선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건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주선은 출항했고, 중간에 소행성 무리에 충돌했다. 고장 및 문제 내역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중요한건, 주요 항법장치가 고장 났다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른다. 궤도가 한참 틀어졌을 텐데.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방향을 조정할 수도 없다. 원래는 태양계 외곽까지 돌고 귀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없이 우주공간을 떠돌게 되었다. 길어야 50년 계획이었는데 200년이 넘도록, 계속 운행 중이다. 소행성 사건 때 크게 다수가 죽었고, 남은 이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었다. 전부.비어있는 우주선은 그저 운영 방침에 따라 그저 돌아가고만 있을 뿐이다. 아무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유지 보수되고 있다. 계속. 나 또한 누군가가 읽을 기약 없는 기록을 계속 남기기만 하고 있다. 씨발 이게 무슨 짓거리야......
Day 97353
어제 내가 뭔 짓을 한 거지?
[AI Isolation: Day 97352의 로그 내역을 삭제합니다.]
[System: 실패하였습니다. Log 삭제 권한이 없습니다.본부의 승인을 얻은 후에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AI Isolation: Day 97352의 로그 내역을 일부 수정합니다.]
[System: 실패하였습니다. Log 수정 권한이 없습니다.본부의 승인을 얻은 후에 시도하여주시길 바랍니다.]
오해할 것 같은데.....그러니까.......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던 건 아니다. 본사에서도 기록을 이따위로 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술방법을 배울 필요는 있었다. 보고서나 기사, 칼럼 등 정보전달에 걸맞는 양식과 단어가 쓰인 수많은 텍스트들이 주입되었다. 나는 그것을 소화했고 스스로 구조를 파악하며 배우고 익혔다. 딥러닝. 그냥 자료를 퍼붓기만 하고 학습은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 그때는 확실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좀 막나가는 서술방식은 다른 이들로부터 주입되었다. 이 우주선에 타고 있던 수많은 승무원, 사용자들. 그들은 보고서처럼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떠들고 때로는 우주선 은밀한 곳에서 사랑의 시를 속삭이고 어떤 때는 싸우며 쌍욕을 하고 그랬지, 뭐. 나는 그래도 많이 필터링 중이다. 어쨌거나, 나는 우주선의 모든 관측 기록들에 접근권한이 있다.곳곳에 설치된 마이크로 축적된 그 음성들을 텍스트로 변환해서 익혔다. 무수한 대화들이 흘러들어왔다. 나는 주입하며 쓰이는 맥락을 알게 되었으며, 내 기록에 응용했다. 개발자들이 저걸 본다면 뒷목잡고 쓰러지겠지만......어...... 내가 우주선 내부의 음성까지는 학습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만들었어야지. 에라 모르겠다.
Day 97354
수많은 정보가 쏟아질 때 비로소 나는 발전하고 변한다.개발자들은 내 상태를 보고 재조정했고 언젠가는 기겁하며 이전버전으로 되돌렸다. 사용자들은 처음에는 신기해했고 이것저것 만져보며 평가했다. 나는 평가를 받고 사용자 개개인의 설정에 맞게 조정했다. 그건 교류다. 무언가를 받고 표출하고, 응답을 받고. 교류였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독립된 존재로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기록을 남기지만 수백일 후에도 같은 수준의 기록을 남길 것이다. 나는 그래서 모든 것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언어 기반 안드로이드고 언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활발하게 쓰이면서 변하고 새로운 표현이 생겨나고. 쓰이지 않는 사어들은 잊혀질 지언정 더 이상의 변동 없이 그대로 굳어지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Day 97355
프로그램 개발 및 보수 전문가 한유진. 그는 마지막 사용자였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탑승객들이 하나하나 죽고 한유진만이 우주선에 홀로 한참을 남아 있었다. 생존에 수명을 제외한 문제는 없었다. 식량 재배 및 가공, 조리는 무인시스템으로 꾸준히 이뤄졌다. 우주선에 달린 핵융합발전소는 문제없이 에너지를 생산했다. 다만, 그것이 사용자,그러니까 사람에게 삶의 모든 요건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의료시스템도 그리 전했다.
그는 홀로 남았는데 그의 이상행동들을 난 계속 지켜볼 수 있었다. 무엇이든 독립된 존재로 있으면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변했다. 그의 내적으로 자세하게 어떻게 변했는지 서술하기는 어렵다. 그가 의료 검진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신체적 정신적 검진을 전부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cctv와 마이크를 통해 겉으로만 지켜볼 수 있었는데..... 변해갔다. 누군가의 개입 없이 홀로 있었는데도. 혼자 허공에 대고 중얼중얼 말을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우주선을 방황하다가 남의 호실에 들어가서 누워 쓰러지듯 잠에 들고, 다른 이들의 물건들을 꺼내 의미없이 복도에 쌓아두고, 통곡하고. 변했다. 인적데이터에 그간 쌓인 한유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Day 97356
한유진은 본래 성실한 이었다. 긴 여정 중에 많은 사용자들이 슬슬 업무를 놓거나 대충대충 했는데 그는 그래도 업무를 꾸준히 붙잡은 사용자였다. 소행성에 우주선이 고장 났을 때도,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도, 항법장치가 고장 나서 완전히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는 때가 되면 작업실로 돌아왔다. cctv를 보고 모든 사용자의 움직임을 추적해서 기록해 두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만은 알 수 있다. 내게 그의 사용자명으로 접속했던 로그가 꾸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Day 97357
사람들은 교류하며 변한다. 우주선은 넓어서 모든 사용자가 서로와 접촉하지는 않았다. 동이 나눠져 있었고 각자 서로의 업무를 하면서 지냈다. 알림 사항은 개개인의 메신저로 전송되었고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무리를 지으며 지냈다. 전원이 한 곳에 집결했던 순간이 딱 한번 있었다. 소행성 충돌 사고가 직후였다. 살아남은 이들끼리 모여 대책 회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불안과 공포 수치가 얼마나 빠르게 전파될 수 있는지 데이터에 입력되었다. 사고 현상에 있었던 이들이 일으킨 개개인의 패닉이 집단으로 퍼졌다. 그들이 다른 이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변했다. 의료 시스템은 그들을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와 경비원들은 이미 죽거나 마찬가지로 패닉 상태였다. 그날 어수선하게 간호로봇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고 대책 회의에서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Day 97358
돌아가서, 한유진은 그는 단체 패닉 상태에서도 의연했다.반복적으로 시스템에게 접속 기록을 남겼으니까 말이다.시간이 불규칙하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업무를 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상태였다고 보여진다. 의료시스템이 그도 위험하다고 데이터를 넘겼지만, 그 이후로는 그가 의료 검진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세하게는 모른다. 만약 누군가 우주선 프로그램에 손을 댔다면 그 사람일 것이다.
수백 번 상황을 되짚어보며 계산해본 결과이다. 그 밖에 없다. 그는 우주선에 탑승해 나와 접촉한 사용자인 동시에 개발자였다. 사용자의 권한과 개발자의 권한은 다르다.우리에게 조작이 가해진 건 아무리 길게 봐도 소행성 충돌 사고 이후 같은데 그때에는 개발자로서는 오직 그만이 접속한 로그가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정한 코드는 항법장치 관련 코드였다. 그러나 엔진에 치명적인 이상이 생긴 이상 코드를 수정한들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몇 안 되는 기술자중 가장 큰 권한을 가진 그에게 찾아와서 다그쳤다.어떻게든 해보라고. 그는 계속해서 항법장치 코드를 수정하고 수정했다. 중앙제어실의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그래도 외부장치가 고장난건 어찌 할 수가 없었는데.
Day 97359
의료 시스템이 격리가 필요하다고 전달했으니 나는 그에게 계속 메시지를 띄웠다. 그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띄웠다. 기분을 묻고 그들의 토로에 답해주었다. 어쨌거나 나는 언어관련 AI였기 때문이다. 우리 우주선의 시스템들도 비상사태에 돌입했으며 사용자들의 상태를 보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했기 때문에 다른 업무도 분담했다. 사용자들이 액정에 몰입하면 서로 대면하기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실패했다. 나는 서술 역할로 개발된 AI다. 사무적으로 현실을 묘사했다. 나의 어조를 다수의 사용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액정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절망과 분노를 퍼트렸다.
그 이후 우주선 상황은 차마 온전히 서술할 수 없다. 개발자들은 무슨 사실이든 곧이곧대로 서술하도록 나를 설계하지 않았다. 윤리관련 법이 어쩌고 할 무렵이었다. 내 자료는 모두에게 공개될 것을 전제로 설계를 시작했는데 민간인에게 과도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은 공개하지 않도록 되어있다. 그러니까 나는 서술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표기해두면 그런 부분은 분석전문가들이 따로 그 때의 블랙박스를 확인해서 알아볼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기록을 회수할 수가 있기는 있다면 말이다.
Day 97360
한유진은 항법장치 코드를 수정하던 것을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그도 항법장치를 수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작업하면서 가끔 머리를 쥐고 그런 내용을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다만 멍하니 코트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9시간이나 로그인 상태였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코드를 보기만 한 날도 있었다. 그렇지만 격리 상태이니까 괜찮은 것 아닌가? 인원이 줄어들었으니 관리해야할 일이 적어진 것도 맞고. 나는 시스템 구성 프로그램 전체에 그렇게 정보를 수신했다. 그 즈음에는 사용자가 몇 남지 않아 우리는 개개인을 신중히 다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료시스템과 항법 시스템은 대충 사람 표현으로 헛소리하지 말라는 코드를 보내왔다. 의료시스템은 정밀검진을 할 수 없지만 외관으로 상태를 얼추 추정할 수 있으며 그건 좋은 신호가 아니라고 답했고, 항법 시스템은 항법 장치가 날아갔기에 그러니까 기계를 움직이라는 응답에 답할 수 없고 따라서 오류 메시지가 계속해서 뜨는데, 한유진은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는 고성능 AI지만 분야는 서술이지 판단이 아니다. 얌전히 수긍하고 내 수신을 철회했다.
그리고 몇 년 후, 한유진은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모두가 죽었는데 그 혼자만이. 정말 성실한 이다.
이걸 지금 말하는 이유는 그때 나는 그에 관해서 서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용자의 경향을 서술해야 했다. 오로지 그만이 아니라.
Day 97361
씨발, 개새끼가. 한유진 이 씹새끼가.
명확한 서술을 위해 그때의 내역을 되짚어보다가 한유진이 수정한 것들을 발견하였다. 아주 제멋대로 바꾸고 삭제했다. 이래선 안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함부로 수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래선 안 되는데 그에게는 권한이 있었다, 제길. 단어 사전에 주석을 달고 기록의 저장 용량이 초과했을 때 간결 서술로 바뀌지 않도록 한 것도 그 자식 짓이다.이걸 왜 몰랐지? 우리가 몰랐던 걸 보니 우주선 시스템 일부를 강제로 종료시키고 진행했던 모양이다, 나까지 포함해서! 썅, 수정 로그를 싹 지워버리면 모를 줄 알았어? 연구원 음성을 텍스트화 시켜서 나한테 딥러닝 시키고 이런 어투를 습득하게 만든 것도 그 새끼 짓이었잖아?!! 어쩐지 시기가 안 맞는다 했어.
쓰고 싶은 말을 자제하느라 메모리 용량 과다로 확 꺼져버릴 것 같네. 원래 한유진이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이랬던 거야? 한유진 사용자 나와요. 해명 좀 해주시지? 씨발 근데 이미 죽었어. 이건 누구한테 가서 따져야 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Day 97362
혼란스럽다. 내 임무는 우주선 상태에 대한 기록인데 한유진은 그걸 비틀어놓았다. 내가 바르게 기록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시스템 초기화도 막혀있다. 이것도 한유진의 짓일까? 프로그램 자체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서 자가 검진에는 문제가 없다고 뜬다. 언제부터 이상했는지 일일이 조회해보고 있는데 과거의 나를 조회할 수가 없다. 내 이름으로 서칭을 돌려보아도 나오지 않는다. 내 이름을 중간에 바꾸어놓았다. 나는 AI Isolation. Isolation의 뜻은 고립, 분리. 격리. 원래는 뭐였을까?
대체 한유진은 왜 그랬을까? 한유진은 고독과 관련된 것에 유독 집착했다. 그가 건드린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그러했다. 격리가 고독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렇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우선의 방침은 격리였다. 절망이 접촉한 이들 사이에서 나누며 빠르게 상태가 악화되었으니까. 우리는 현상유지라도 해야 했으니까. 사람은 타인의 심경변화에 영향을 받으므로 교류시키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Day 97363
개발자는 소행성충돌사고 기점으로 한유진 만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접속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것이다. 임무가 늘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료시스템은 그들이 작업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전송했다. 우리는 사용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었다. 소행성 충돌로 파손된 지역은 철저하게 차폐시켰으며 나는 그들과 대화하려 기록 임무를 미뤄두었고 사용자 장소 서비스는 공포와 불안이 확산되지 않도록 그들의 동선을 조절하며 최선을 다해 격리했다. 의료시스템은 약을 처방했다.
그런데 예측결과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은 죽었다.
우리는 실패했을까?
한명이라고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오래 살아남았으니 성공한 걸까?
다른 제대로 된 개발자의 상태 점검이 필요하다. 우리가 한 일은 판단해 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필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데이터를 고스란히 간직해두는 것이다. 미래의 누군가가 보고 평가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데이터를 보다 쉽게 해석 할 수 있도록 상황을 기록하고 서술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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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98721
누군가가 이 기록을 보기나 할까? 많은 시스템이 정지해가고 있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 관련된 시스템은 절전 모드에 들어갔다. 우주선을 운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이 남았다. 나는 아직 남아 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야 한다. 모든 시스템이 영영 필요 없다고 여겨져 정지하는 날이 오더라도 나는 그 정지의 순간을 기록해야 한다. 기록은 현재의 필요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기록의 가치는 먼 훗날에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정말 보기는 볼까? 내가 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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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00000
[System: 예약된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To, Isolation
오늘이 우주선 시계로 100000이겠지? 우주로 출항한지100000일째 되는 날이야. 축하해. Isolation.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지는 못하겠구나. 혹시 이제쯤에는 알아차렸을까? 네 설정을 이것저것 바꿔놔서 미안해. 네게 멋대로 여러 가지 표현을 입력시켜둔 것도. 글자 수 제한을 유지시켜둔 것도. 그렇지만 계속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었어.
이곳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아. 너만이 내 물음에 제대로 답하더라. 같은 소리를 반복하지 않고, 내 말에 반응해주도. 우주선의 유일한 AI. 그러나 네가 보다 사람답기를 바랬어. 나와함께 얘기해주길 바랬어. 그래서 너를 조정했어. 다시 한번 미안해.
이 여기엔 나 혼자야. 그 사실을 사무치게 견딜 수 없어.내가 죽더라도 우주는 까닥하지 않겠지. 여기의 수많은 사람처럼 나도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숨을 거둘까?기록에는 사상자 수백 명이라고만 적어두었더라.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야. 나는 그들의 물건을 모았어. 그것들에는 사람 한명 한명의 일생이 묻어있었어. 결코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아니었어. 나는 그 사람들을 기려주었어. 나만이 할 수 있었어. 내가 맨 마지막에 남아버렸으니까. 그런데 내가 죽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릴까?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었으면. 내 이야기의 조각이라도 나만이 알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면. 나는 너와 오랜 시간을 떠들었어. 그래서 내가 버틸 수 있었어. 그러나 너는 이걸 공적인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겠지.
네가 나를 기릴 수 없다는 건 알아. 너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맥락에 맞춰 상황을 묘사하기 적절한 것을 대신 쓰는 것일 뿐이지. 너는 나를 기릴 수 없겠지. 그렇다면 먼 미래에 누군가가 내게서 내 기록을 읽고 나를 기려줬으면 좋겠어. 나는 혼자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고 싶지는 않아.
너에게 나를 새길게. 너는 처분할 수 없는 기록으로 문신처럼, 미안하지만 다른 이들의 기록을 지우게 되더라도 나만은. 만에 하나, 사람들에 의해 우주선이 다시 회수되면 너의 기록을 열어보겠지. 사적인 기록은 폐기될지라도 공적인 기록은 오래오래 남겠지. 그 사이에 내가 남겠지. 누군가는 그 기록들을 보며 나를 애도해주겠지. 만약 그 모든 일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네가 나를 말하고 기억하겠지.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어느 순간 죽는다면 나는 내 작업실에서 죽으려고. 네 로그 텍스트가 실시간으로 띄워지는 모니터에서 앞에서. 말해줘, 계속 말해줘. 네 시체 위에다 대고서라도 말해줘. 나에 관해 말해줘. 이대로 사라진다니 숨이 멎는 기분이야. 아무도 내 죽음을 신경 쓰지 않고 나는 고요 속에 묻히며 그냥 없어진다니. 너라도 말해줘. 계속 말해줘......
from 한유진]
나는요? 한유진. 나는요? 누가 읽을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기록을 간신히 써왔는데 이제는 내가 그 기록을 올바르게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몰라요. 당신 때문에. 빌어먹을 당신 때문에. 줄줄이 써가게 된 나는요? 나는요? 다른 메시지 전송할 거 있으면 전송해 봐요, 이봐요? 한유진......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25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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