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그림 그리는 글(1)

2020.03.29

그림은 연필로 선을 긋는 것부터 시작된다.

 

일반적인 정의는 아니다. 그냥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피그먼트 펜이나, 볼펜, 만년필 같은 지워지지 않는 펜을 무턱대고 종이에 대는 일도 있지만 그건 약간의 만용이 더해졌을 경우이다. 아니면 낙서거나. 끝없이 수정할 수 없는 밑그림 없이 그림을 시작하는 건 아직 내 실력 밖의 범주인 것 같다. 가끔은 도전해보기도 하지만 공을 들여야 하는 그림에는 아니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연필의 느낌이 꽤 좋다. 가볍게 슥슥 소리를 내고는 하는 흑연. 그을 때마다 조금씩 뭉개지며 손으로 전해지는 감각. 깎아놓은 것은 날카로운 맛이, 뭉툭한 것은 부드러운 맛이 있다. 샤프를 일찍 쓰면 글씨가 안 좋아진다는 어른들의 헛소문에 충실한 학창 시절을 거치며 (모르긴 몰라도 그 소문이 헛소문일 것이다. 같은 반 애들 몇을 모으면 가장 오래 연필을 쓴 내가 글씨가 가장 안 좋았다.) 여러 연필을 쓰다가 운이 좋게도 내게 맞는 연필을 찾았다. 가장 느낌이 마음에 들고 꽁무니에 달린 지우개가 케이크에 올라간 뻑뻑한 플라스틱의 무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말 마음에 든다. 지우개의 역할에 충실한 꽁무니 지우개는 그게 두 번째이고 종이를 말아먹지 않는 것으로는 첫 번째이다. 따라서 그 연필로 필통의 반이 채워져 있고 두 갑을 집에 쌓아두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갑인 이유는 단순하다. 흑연의 종류가 두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HB와 B. 샤프심을 꽤 구매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HB는 색이 연하고 심이 단단하며 H가 떨어지고 B쪽으로 가며 2B, 4B처럼 큰 숫자가 붙을수록 점점 진해지고 심이 부드러워진다. 부드럽다는 말은 무르다는 말이어서 잘 뭉개지기도 한다. 그래서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은 HB 쪽으로 흘러가고 그 무른 느낌을 좋아하거나 진한 글씨를 원한 사람은 숫자가 붙은 B의 세계로 흘러갔던 기억이 나다. 심의 강도는 내게는 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명도였다. 연한 연필과 그에 비해 약간 진한 연필이 내게는 필요하다.

 

내가 쥔 연필이 HB가 맞는지 확인을 하고 밑그림에 들어간다. 선을 긋는다. 둥근 원을 휘휘 긋고 원 안에 십자를 그린다. 맞다. 내가 그리는 것은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시작은 얼굴. 어쨌든, 여기까지는 얼굴을 그리는 것의 정석이다. 그리고 이 다음부터 순서가 약간씩 갈린다고 들었다. 나는 원의 곡선에 의존해 턱선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곤 원의 맨 꼭대기에서 머리카락이 쌓였을 두께만큼 올라가 정수리 즈음에 연필을 가져가 머리의 윗부분을 둥글게 그리고 머리카락을 내린다. 이쯤 되면 턱선이 삐그덕한 게 보이는데 그건 옆머리로 열심히 커버하거나 깎아낸다. 그림을 늘리는데 안 좋은 습관인 건 알지만 나는 발전하기보다 일단 주어진 그림을 완성하는데 급급한 사람이라서 별수 없다.

 

오늘도 그런 글러먹은 마음으로 넘어가고 눈과 코, 입, 눈썹을 그린다. 이 부분은 표정이 되는 부분이라서 꽤 신경을 쓴다. 애초에 그림체가 단순한 편이어서 눈동자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인상을 만들어낼지 꽤 고민하며 그린다. 얼굴이란 부분은 눈가에 잘못 그어진 선이나 지우개의 흔적만으로도 순식간에 인상이 확확 달라져서 조심해야 한다. 가벼운 웃음에 선이 더해져 진중한 느낌을 주었다.

 

다음은 목으로 내려가고 어깨로 이어진다. 그리고 몸통. 인체를 매번 까먹어서 여기에서 고역이 찾아온다. 이게 맞던가? 아니던가? 하는 헷갈림에 손이 머뭇거린다. 그냥 정석대로 가면 될 것을. 별것도 아닌데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하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지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그릴 때는 유독 그렇다. 얼마나 머뭇거리고 수정하게 되는지는 날마다 다르다. 어쨌든 그 순간이 지나면 팔을 향해 뻗어 나가게 된다.

 

언젠가부터 인체를 그리는 선에는 약간의 곡선이 섞이게 되었다. 팔에서 두드러진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는 곡선이다. 인체는 원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는데 어쩌면 그에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 곡선으로 인해 인체를 잘 그리게 되었냐면 답이 좀 애매하다. 곡선이 필요한 위치에 적당한 휘어짐으로 들어가 있을 때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림체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마음에 확 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습관이 언젠가 생겼다는 것이 당혹스럽다. 언젠가 연습에 몰두해서 그림을 잘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습관을 쥐고 나아가기보다는 습관에 끌려가는 사람이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 싶은 생각을 하며 마음을 편하게 먹는다.

 

여러 개의 흔들거리는 선이 얼추 상반신과 다리가 될 즈음까지 얼추 이루었다. 여기서 그친다. 까먹고 말을 안 했는데 내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엽서 크기의 수채화 용지였기 때문이다. 상반신밖에 안 들어간다. 이 잔뜩 사다 둔 엽서 크기 종이는 전신을 그려야 할 때는 골치 아프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으니 별 문제없다.

 

오늘은 여기까지이다. 잠이 오지 않아서 책상 위의 작은 등을 켜두고 간단히 끄적인 것이다. 본격적으로 들어갈 생각은 있지만 지금 이 불빛 아래서는 안 된다. 섬세하게 작업하려면 보다 강한 등 아래에서 작업하는 게 안전하다. 그러나 그렇게 밝은 등을 키거나 확 집중하면서 잠을 달아나게 만들 생각도 없다. 그러니 이만 두고 자러간다. 흥미가 떨어져서 방치되는 일이 없기를 가볍게 기원하면서.

출처: https://leavinggarden.tistory.com/60 [방치될 정원: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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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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