忘却

드림, 과거

푸른잔향 by R2d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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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tLPYPQHLXs?si=1N5GoU0fuMoPzatU


세상에는 출중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누군가는 역사책에 기록되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희대의 악역으로 기억되기도 하였다. 노래 하나로 아주 길게 이어졌던 전쟁을 잠재웠다고 전해지는 디바, 한번 읽은 책은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그를 이용하여 정보를 팔던 필사자,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뛰어난 무기로 활용하더라고 기록된 왕. 사람들은 아주 뛰어난 능력을 신이 내린 선물 '축복'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누군가에는 그 축복이 저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신은 어떤 면에서는 공평하니까. 디바는 질투와 시기에 마녀라 칭해지며 마녀사냥을 당했고, 필사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여 암살의 대상이 되었고, 끝없는 전쟁에 왕은 백성들에게 최악의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축복이라는 이름의 양날의 검은 누구에게나 겨뉘어져 있다는 것이니, 이 세상에 사는 이라면 모두에게 겨뉘어져 있는 것 또한 있는 법이다. 정확한 용어로 명칭하자면 '망각'.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사람의 뇌는 기계처럼 이용할 수 있는 저장용량이 정해져 있어 허용 범위를 넘어서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기억, 오래된 기억은 버려진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괴로운 기억은 각색하여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억하거나 아예 버려지곤 한다. 우리가 망각을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이유에서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죽었다는 것을 가정 해보자. 당연히 사람이 죽는 장면은 충격적이기에 그 누구도 이런 것을 입 밖으로 내거나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뇌는 이 기억을 버려버리고 다른 기억으로 채워 넣거나 혹은 중요한 부분을 다른 내용으로 대체하곤 한다. 그렇다면 만약 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최악의 수를 둔다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영웅은 이상하리치만큼 모두의 특징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스쳐지나가 듯 이야기한 것도 가끔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이다. 온 신경을 몰두하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을 기억할 리가 없으니 그런 모습을 안쓰럽다고 생각한다. 모든 순간에 신경을 쏟으면 쉽게 피곤해지기 마련이기도 한데 말 그대로 영웅이니 거기다 세상을 구하고 있는 일까지. 한 명 즈음은 휴식을 권하기도 하고 다른 한 명은 차라리 기록을 통하여 기억을 소거하라 권한다. 물론 영웅은 또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속내를 털어놓는 법이 없는 그가 기억하고 곱씹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해지곤 한다. 그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그를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온 적도 없었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영웅의 이름과 좋아하는 것, 평소에 무얼하는 지 정도의 얕은 양의 정보 밖에 알지 못한다. 그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 진위여부를 파악할 정보 조차 또한 없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해주고 싶어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선물을 해줄 수 있을 텐데. 뭐…, 무엇이든 척척 해내서 음식이든 물건이든 게다가 옷까지 만들어내니 또한 애매하다. 아무튼 말이다 모두가 그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은 한가득이지만 해주지 못해 고민 아닌 고민을 안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니베이아의 과거는 그 스스로가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른 쪽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 되어버리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그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라는 애매한 답변이 된다. 기억력이 좋긴 좋았지만 과거의 그는 현재의 그처럼 소름 끼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잃는 사례가 많았지만 극히 드물게 한 능력이 뛰어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니베이아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단 한 사람만이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

그의 종족은 비에라로 그중에서 비나 비에라였다. 비에라는 달마스카의 언어로 숲의 민족이라 뜻하며 본디는 숲을 수호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금하지만, 비나 비에라는 근래에 도시에서 사는 비에라를 이야기한다. 다른 종족에 비해 꽤 오랫동안 사는 종족으로 거기에다 젊음이 200살까지는 유지가 되니 나이의 가늠도 매우 어려운 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20살 초중반 정도처럼 보이지만 니베이아는 이미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말하자면 가장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특별히 지식으로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아는 척을 하거나 잘못 알려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꺼려한다. 그런 그가 기억하는 역사 중 가장 끔찍한 역사가 있다면 당연히 재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들이었다. 

에오르제아는 번영의 시대 성력(星暦)'과 쇠망의 시대 '재해(霊災)'를 반복하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니베이아는 제 6성력 1403년, 도시국가들이 성숙기에 접어들던 시기에 태어났다. 나이를 세는 것은 아주 오래전에 그만두었기에 태어난 날짜 같은 것은 오래전에 잊어버린 지 오래다, 정확히는 잊어버린 척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 표현이지만. 생일이라고 이야기하는 날짜도 실은 그저 아무 날짜나 잡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남한테 이야기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쪽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항상 자신의 존재를 되새기기 위해서는 그런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리 없는 것이지. 어찌 되었든 아무리 도시가 성숙되어가는 시기라고 하더라도 전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알라미고가 그리다니아의 영토를 노리고 일으킨 '단풍전쟁'. 이는 제 6성력 1500년이 지나서도 이어지다 결국 알라미고의 패배로 마무리 되었었다.

리세를 도와 알라미고의 해방을 도울 때에도 그는 어릴 적 과거를 떠올리고 말았다. 제 가족들이 숲에서 나와 도시로 이사하게 된 것도 전쟁 때문에 숲속으로 숨어들어와 자연을 해치고 함정이 설치 되어 걸리는 등 위험한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도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군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숲속 깊이 적대하는 자들이 무작정 침입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숲을 수호하는 자라는 이름 임에도 도시로 빠져나오게 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상황이라도 목숨이 언제나 최우선이 되는 것이니 결국에 그들은 몇 동족들을 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 숲에 남아있던 동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름대로 그들은 잘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마는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때문에 만약 니베이아가 새벽의 혈맹을 만나지 않고 영웅이 되어버렸다면 어딘가 나사가 빠진 도덕적인 관념으로 그들을 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 쪽과 얽힐 일을 만들지도 않았겠지.

전쟁은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다고 생각이 들면 일어났고, 100년 넘게 이 모든 전쟁을 지켜본 자로써는 그 모든 것은 그저 무의미한 세월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전쟁만큼 반인륜적이고 쓸모없는 감정소비인 것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은 모두와 다를 것이 없는 같은 것이었다. 그것 또한 따지자면 꽤 최근의 일인 7재해 때문에 잃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기억력도 7재해가 발단이었다.

제국의 달라가브 투하 작전. 니베이아와 그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다. 처음 생명을 죽였던 끔찍한 감각도 사라지지 않고 항상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갑옷이 뚫리고, 살을 뚫는 감각과 뼈가 부서지는 소리, 상대가 울컥거리는 피는 그의 호흡에 따라 얼굴에까지 튀는 장면. 동물을 사냥하는 것 또한 같은 감각이었지만 익숙하게 해쳐온 생명에는 경중을 따지지 않았었으니 이 비현실적인 감각에 최초의 날에는 아무것도 입속으로 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은 생명의 소중함이라고는 쉽게 망각해버리게 하는 장치로 지금은 주변 이의 생명이 아니라면 적을 상대로 보이는 잔혹한 면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피를 흘리며 온 대지가 쇠 비린내로 뒤덮였다. 그 피는 적의 피뿐만이 아닌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이기도 했고, 스쳐 지나가며 본 사람이기도 했고, 등 뒤를 지켜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실은 괴물이 되어야 헤쳐나갈 수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긴 꿈. 꿈은 깨어야 꿈인 것이야. 달라가브가 추락하며 그 속에서 바하무트가 현신하는 모든 장면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쉽게 끝날 수 있는 일인가. 일부가 부서져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누구의 피인지도 모를 것들이 굳어 진득해진 창을 들고서 세상이 멸망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붉게 물든 하늘은 쉬이 멸망을 연상케 하였고 그 장면을 직접 본다면 누구나 당연히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의 니베이아는 아직 현재의 그처럼 이 세상을 구할만큼 강한 힘을 가지지 못한, 다른 이들과 다를 거 없는 그저 이 모든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가장 눈에 띄는 영웅이 된 것일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로 힘겨운 선택이었다. 때문에 이제는 이 창을 놓아도, 내가 더 노력한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 순간 바하무트의 봉인 시도는 지금의 영웅이 만들어지는 주축이 된 것이다. 

현자 루이수아.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며 함께하는 새벽의 혈맹들도 잊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 봉인의 시도와 실패 그러나 결국에는 해내고야 만 세상의 구원. 이후 그 실체는 사람들의 강렬한 기도로 바하무트와 마찬가지로 같은 야만신 피닉스가 되어 가능케 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야 말지만. 그래도 그 셀 수 없는 많은 기도와 믿음 중에서는 니베이아의 것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평화로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에게 그런 세계를 만들 수 있는 힘을 바란다는-, 그런 기도. 사실 그는 세상이 구원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하였다. 떨어지는 달라가브 파편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쳤었다는 어쩌면 조금 부끄러운 사고 때문에. 이 덕에 관자놀이 부근에는 흉터가 진하게 남아 그다지 명예로운 흉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는 어깨 위의 길이였던 머리를 기르고 앞머리를 잘라 흉터를 가렸다. 그가 현재 머리를 잘 묶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말 꿈이라도 꾸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잃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얻은 것도 있을 테지만 잃은 것이 더욱 많은 마무리였다. 그렇게 전과 같은 일상이 아니더라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없는 법. 이상하리만큼 겪었던 장면들을 떠올리면 마치 당시 그 자리에 다시 있게 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후 이것을 힘에 눈을 뜨게 된 여파라고 짐작하게 되지만,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던 이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은 감각이었다. 특히나 떠오르는 장면들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주변 이들이 모두 죽는, 이제는 혼자 남아버린 되새기고 싶지 않은 것들만 떠오르니 이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웠다. 

창을 버렸다. 진득한 쇠비린내에 본래의 색은 바래 없어진 죄책감의 상징을 쓰레기통에 내다 던져버렸다. 잔인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굳이 눈앞에 두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창을 손에 들 생각은 없었다. 만약 다음이 있다면, 다시는 없어야 하지만 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에는 구하지 못한 이들을 기리며 사람들을 구하리라 다짐했다. 

다들 바빴으니 쓰러져 있는 자를 구조하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이후 그가 살아있는 지를 간간히 확인하러 올 뿐, 부상자와 사망자 처리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온갖 먼지와 피에 엉키고 몇 주를 씻지 못해 엉겨 붙고 세상의 온갖 괴이한 냄새는 한 곳에 모아놓았나 생각될 정도로 드는 악취는 자연스레 제 코를 쥐어잡게 만들었다. 거울에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제 모습같은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온갖 세상의 불온한 것을 감당하게 된 듯 불행만이 남은 모습의 사람이었다. 

사는 곳으로 돌아가니 외곽 변두리에 있었던 도시여서인지 모두 불타 눈으로 간신히 이 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 뿐,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감정이라고 불리던 것은 무뎌져 버려 누군가 남지 않았다는 것이 슬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앞에서 친구의 머리에 화살이 박히는 것도 보았고, 오라비가 불길에 휩싸여 살이 타는 냄새도 맡았는데 고작 돌아갈 곳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 슬플 리가 없었다. 방랑자가 마찬가지인 모험가가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고, 이제는 사람을 잃지 않고 구하고자 했으니 직접 찾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 것에는 기이할 정도의 뛰어난 기억력은 도움이 아주 많이 되었다. 스치듯이 읽었던 치료법, 치유술에 관한 모든 내용이 원래 자신의 힘인 것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길로 니베이아는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다니며 사람들을 도와주며 다녔다. 본래 사용하던 힘이 아니었으니 미흡한 힘이었지만 이 혼란한 곳에서 그나마 이런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은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과정을 에 스미 얀이 보게 된 것이고 본격적으로 니베이아는 백마도사로써 사람들을 돕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정한 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잘 웃어주고, 그들에게 공감만 해주면 사람들은 멋대로 니베이아를 다정한 사람이라고 정의해주었으니 말이다. 감정이 무뎌졌으니 머리로만 이해를 하고 기억에 남아있는 책에서 보았던 인물들의 모습을 표현해 보이고 있었을 뿐. 연기자로 진출했다면 아마 그 누구도 그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100년 동안 쌓여온 지식을 그 누가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이따금 책의 내용을 떠올리니 그 장면 그대로 죽은 이들도 주변에 있던 그때가 그대로 보이니 가슴이 얹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빼고는… 나름 괜찮았다. 어찌 보면 인형처럼 사는 것이나 다음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현실을 살며 보고, 들으며 익힌 것은 이런 것 뿐이었다. 현실은 잔혹했다. 동화책 마지막 페이지의 모두 행복했습니다-같은 간단한 결말은 없었으니까.

영웅이 된 이후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 겉모습을 보고 어떤 이들은 미련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의외로 그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제 주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예 관심에서 제외해버렸다. 다정과 사랑은 별개의 영역이니까. 세계를 구하는 막연한 선택을 한 것도 소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니까 정도일 뿐, 소중한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주변 이들은 그가 무너질 때 손을 잡아주었고,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도 있었으며, 그 스스로보다도 그를 위해주고 아껴주었다. 또 하나 있다면 전쟁은 지겨우니까. 가는 곳마다 전쟁이 자리 잡고 있었고 모든 전쟁의 끝에는 아씨엔들이 있었으니 니베이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이 명확해졌다. 아씨엔들을 모두 멸하는 것, 그들만 없다면 원초세계를 비롯한 거울세계도 평화로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씨엔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또한 마음 속 어딘가에는 망설임이 생기고 말았다. 그들 때문에 이 모든 전쟁이 일어나고 세계가 멸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고는 했지만 그들도 자신처럼 소중한 사람도, 주변 이들을 모두 잃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것도 전쟁도 아닌 그저 별의 멸망으로 인하여. 그곳 주민들의 영혼이 조각조각 나뉘어 만들어진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들으며, 그리고 에메트셀크가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비추어보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과연 우리는 그들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결론은 '아니다'가 맞지만 마음속에 남는 작은 먼지는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우리는 별개의 존재지만 그들도 결국 무언가를 되찾기 위한 마음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성과 지식만 남은 사람에게는 완벽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다. 별이 모두 하나로 합쳐지는 일이 생기면 현재의 자신과 주변 사람들 모두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명확히 죽는 것보다는 그들이 행하는 일이 성공한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그것이 정말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면 명쾌한 답이 나올 수 있을까.

"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은 끝없는 고민을 하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에메트셀크는 여지껏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말이라는 것을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표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 나는 그래도 나름 오래 살아온 종족이거든요. 저는 당신이 황제로 있었던 시절에도 살아있었으니까요. "

물론 아씨엔을 이해한다는 것이 당신이 일으킨 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입버릇처럼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찻잔 속에 담긴 카모마일을 후-하며 식힌다. 

" 이런 쓸모없는 대화를 하자고 초대에 응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황제였던 자는 차는 입에 댈 생각이 없는지 의자 팔걸이 한쪽에 턱을 괸 채로 앉아 앞에 앉은 니베이아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영웅에게 기대를 걸고 있고, 누군가를 빗대어 보고 있다는 것을. 대상은 처음에는 그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쪽이었다.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정말 괜찮아지는 것이 아닌 무뎌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건 완벽한 자도 마찬가지인 것이었나 보다.

" 너는 망각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건 잘 알 텐데. "

어떤 종류의 역사던 지식을 설명하여도 다른 이들처럼 되묻지 않는 것에, 방금 한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더 묻지 않아도 쉽게 돌출해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역시 다된 자는 다른가봐요? 라는 언뜻 비꼬는 듯 보이지만 정말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묻는 니베이아였다. 모든 뛰어난 능력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 뛰어난 기억력에 따르는 괴로운 기억들. 세상을 구하는 힘과 모두의 선망이 있으니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받고 소수의 두려움과 원망을 샀다. 그래서 그 말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갖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 솔직히 의외의 답변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제가 당신들을 이해하게 된다면 손을 잡아줄지도 모르잖아요? "

" 그렇게 쉽게 손을 잡아줄 위인이었다면 내가 이러고 있었겠나. "

이상한 부분에서 빈 말을 하지 않은 칼같은 답변. 역시 이런 성격이니 친구가 없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 아무튼 맞아요, 망각은 소중하죠. 하지만 제가 지나간 일들을 망각했다라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마주 앉아 차를 마실 일도 없었겠죠. 나름 당신에게도 이득인 것 같아 보이는데. "

이제는 다 식어 차가워진 차를 창가 옆 화분에 붓는다. 전쟁은 싫지만 당신들을 이해하고 싶고, 괴로운 기억은 싫었지만 진실은 알고 싶었다. 물론 에메트셀크는 딱히 모든 것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들었음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와서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라는 잣대를 세우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겪은 후였다.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멸망의 순간.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야수들이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고 미래 또한 불태웠다. 손을 쓸 틈새도 없이 강렬한 불길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멸망은 그림자처럼 빠르게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이 모든 장면들이 세세하게 뇌리에 박혀있기에 목표를 잃지 않고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왔던 일에 후회를 하는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단 하나 눈앞의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 유일무이하게 후회를 하는 일이었다. 애초에 기대를 걸지 않으면 후회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털어도 흩어지지 않는 잔향의 향수라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 그는 앞서서 일을 주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흥미를 채우기 위한 일에는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이 자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앞서 나가지만 자신의 흥미가 아님에도 이상한 부분에서 다른 사람에게 쉽게 휩쓸리곤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느 눈에 비추어져도 항상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이었다. 세상은 푸르고 모두가 걱정 없이 살던 그때의 하데스는 빛나는 그 사람에게 닿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 올곧을 수 있는지, 저렇게 빛날 수 있는지. 여러 부분을 동경했다. 이제 와서 그 감정은 퇴색되었지만 이따금 그 영혼이 구성하는 문장에는 어떤 절대성이 있었다.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거스를 수 없고 감히 위에서 바라서도 안되는 그런. 현재의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서로의 신념이 확고하지 않았더라면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손을 마주 잡아 온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불경한 생각들이 드는 감정. 절대 잊히지 않는 것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망각은 구원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지 못하기에 이런 감정을 새기게 되고 말았으니. 과거는 지워지지 않고 흐려질 뿐, 그렇지만 흐린 것에 잡아먹히지 않아야 한다. 더 아득한 것이 우리의 눈앞에 있으니. 신념으로 눈을 가리는 감정을 치워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 뭐, 네가 모든 것 잊질 않았다면 무언가 하나둘 즈음은 달라졌었겠지. "

바랜 영혼이 잘게 흩어져간다. 어찌하여 그 모습은 오래전 내 버렸던 창과 같은 색을 하고 있는지. 항상 혼돈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올곧은 것이, 창을 들고 있던 자신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어서 정이 갔을지도. 혹은 '情'이라는 단어 앞에 생략 된 '愛'가 붙어있는 것일지도.

" 이제 당신을 잊어버릴 일은 없겠네요. 불쑥불쑥 내 기억의 문을 두드려도 환영해줄게요. "

잊히지 않을 풍경들을 몇 번이고 눈에 되새긴다. 에메트셀크를 떠올릴 때면 무너져가는 유토피아 같은 이 곳도 함께하겠지. 무엇도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모습보다 오히려 바스러지는 이 풍경이 더욱 생명이 넘치는 것 같지 않은가. 마법은 시전자의 무의식 또한 반영이 될 테니 당신은 이 순간이 자유를 되찾는 순간인 것인가 생각하고 만다. 자신에게는 잊지 말라며, 그리고 감정을 심어놓고서는 떠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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