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카

권태 (2)

무밭 by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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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에 함께 미선나무를 보고 싶었다. 일본에서 자라지 않는 희귀 외래종이고, 특별한 유래와 꽃말 때문에 식물 마니아층이 아니더라도 나름 인지도가 높았다. 연초에는 꽃과 열매를 볼 수 없지만 그 나무를 신수로 모시는 사찰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매년 개최하는 새해맞이 소원나무 의식으로 크게 유명세를 탔다. 전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로 인산인해가 된 현장이 해마다 지역 뉴스에 보도되곤 했다. 그해 겨울부터는 추첨제가 도입되어 한정된 인원만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신사까지 수십 킬로미터를 떠나야 하는 여정이었다. 기록적인 폭설과 혹한의 날씨를 고려하면 확실히 기대보다는 부담이 더 컸다. 허약 체질의 리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25시에게,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 3월에 보러 가도 괜찮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당연히 반대표가 우세할 줄 알았는데, 전원 찬성이라는 뜻밖의 결과에 의아했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리송했다. 꽃도, 열매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계절에 고작 지역 행사 하나로 만장일치가 될 리는 없었다. 서클 특성상, 실리를 배제하고 무작정 낭만을 택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땐 일종의 무관심이라 생각했다. 어딜 가든 괜찮다는 말이 입버릇이었고, 뭘 하든 상관없다는 반응이 일반적이었으니까.

***

 

몇 겹의 내의와 두꺼운 외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분간 기온이 오를 예정이라던 일기 예보는 전혀 믿을 게 못 됐다. 기상청 관측 시스템에 크나큰 결함이라도 있는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핫팩이라도 두둑이 챙겨올 걸 그랬다. 겹쳐 입은 옷가지의 틈새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냉기가 닿는 곳마다 찢어질 듯이 아팠다. 온몸이 쓰라렸다. 소름끼치는 감각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목석처럼 얌전히 떨고 있을 기백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모아 더운 숨을 불어 넣었다. 미약하게나마 따뜻해진 손바닥으로 귓바퀴를 감쌌다.

수 분이 지났을까, 눈두덩이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을 치켜 떴다.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충혈되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스럽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했다간 열아홉 살 미소녀가 등장하는 현대판 설녀 신화의 주인공을 면치 못할 테니까. 아직 피지도 못한 짧은 생애를 웃지 못할 사연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센 싸라기눈이 연거푸 몰아치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를 맞은 것처럼 단숨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당장이라도 눈가를 벅벅 닦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새벽부터 공들인 메이크업이 무너질 터였다. 수 차례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정수리 끝까지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설레는 마음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게 화근이었다. 이럴 땐 느지막하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데… 쓸데없이 미련한 짓만 골라서 한 셈이다.

 "미즈키, 듣고 있어?"

청승 맞게 한숨이나 푹푹 내쉬던 찰나였다. 기나긴 정적을 깨는 나이트코드 알림이 울렸고, 곧이어 음성 채팅이 켜졌다. 반가운 마음에 다급히 마이크 버튼을 누르려다 하마터면 휴대폰을 바닥에 떨굴 뻔했다. 정말이지, 십년감수 했다…. 미제 모델이라 타사 제품에 비해 단가가 비싼 편으로 알고 있다. 액정에 2~3cm 정도 금이 갔는데, 수리비를 충당할 엄두가 안 나서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투명색 테이프를 붙이고 다녔다. 여기서 더 깨졌다간 한 달 치 아르바이트비의 절반이 날아간다. 신정부터 손재수가 붙는 격인데, 신께서 너그러이 선심 한번 썼다고 생각하면… 인생사 새옹지마랄까?

 

 "여기, 골목길 돌아가면 미즈키가 있는 거지?"

 "지도상으로는 확실해."

 "…누가 몰라서 물어?"

 "그러면 왜 물어 봐?"

 "아… 추워."

 

어지간하면 둘을 말릴 법도 한데, 언쟁이 붙든 말든 춥다는 말부터 먼저 나오는 걸 보면 어쩐지 카나데에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허약한 리더에겐 무리일 지도 몰라,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갔다. 한 수 앞선 동료의 충고를 귀담아듣는 편이 좋았을까…. 반가운 얼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밤색 모직 코트를 입은 마후유와 하얀 코듀로이 점퍼를 걸친 에나가 보였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제 덩치의 족히 두 배쯤 되는 롱패딩에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인 카나데가 있었다.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후드까지 야무지게 쓴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초행길이라 다 같이 움직인 모양이다. 이른 새벽부터 동행하기가 마냥 쉽지는 않았을 텐데 세 사람 모두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표정을 고치고 두 팔을 크게 흔들었다. 나, 여기 있어. 마치 화답하듯 반대편에서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할까. 분명 웃고 있는데도 입꼬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어쩌면 새해 첫날부터 무시무시한 추위를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고된 여정일 테고, 실컷 고생만 하다 돌아갈 수도 있다. 휴대폰 잠금화면의 디지털시계는 어느덧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먹구름을 집어삼킨 새파란 하늘은 도저히 맑아질 기미가 없었다.

 "날씨도 추운데 실내에서 기다리지 그랬어."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

 "바보야, 너 그러다 감기 걸려."

 "그 정도는 아냐. 근데, 에나가 어쩐 일로 지각을 안 했대?"

 "…이게, 걱정을 해줘도 이러네?"

 "아하하, 이래야 너답지. 아야, 아파! 때리지 마!"

에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줄곧 나를 챙겼다. 어디 보자, 여분으로 조금 더 가져왔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정신없이 가방을 헤집었다. 신사로 들어가려면 마을 어귀에서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어차피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유난스레 핫팩을 찾는 에나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코듀로이 재질의 숏 푸퍼엔 귀여운 곰돌이 자수가 박혀 있었다. 유행하는 브랜드의 신상 제품이었다. 트렌드에 민감한 쪽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는데, 이번엔 한발 늦었다. 찜 해둔 위시를 경쟁자에게 빼앗긴 기분이랄까…. 물론 상대가 에나라면 얼마든 져줄 수 있었다. 여차하면 나중에 빌려 입어도 상관 없으니까.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했는지 뾰로통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자세히 보니 입술 끄트머리가 갈라져 있었다. 춥고 건조한 날씨에 찢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엄청 따가울 텐데… 내 거라도 빌려줘야 하나? 이건 피부톤과 무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니까. 서둘러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더 부르트기 전에 발라주고 싶었다. 뚜껑이 뭉툭한 게 립밤이었지, 잠깐만…. 이리저리 굴려보다 손끝으로 하나씩 더듬어보았다. 세 번 정도 허탕을 치고서야 겨우 립밤을 찾았다.

"에나, 립밤 챙겨 왔어? 괜찮으면…."

"응? 있는데. 잠깐만."

"아, 아니… 내가 필요한 건 아니고."

"빌려달라는 뜻 아니야?"

"너 말이야, 너."

손끝으로 제 입술을 쓰다듬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에나는 고맙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분명 이런 것쯤은 너도 챙겨왔을 테고, 어쨌거나 쓸데없는 오지랖인 걸 알고 있지만…. 쥐고 있던 립밤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핫팩 찾기에 열중하는 네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민망함을 털어내고 싶었다.

새하얀 캐시미어 머플러도 따뜻해 보였다. 하얀 외투는 배색을 맞추기가 상당히 까다로운데, 에나는 어떤 컬러든 제 것처럼 잘 소화해냈다. 아무래도 옷걸이가 좋으니까, 그런 것치곤 카메라 보정도 심하잖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갈지 눈앞에 선했다.

‘나, 머리 기를래. 단발도 이제 질렸어.’

‘…혹시 헤어졌어?!’

‘웃기고 있네. 야, 너 자꾸 장난 칠래?’

‘아하하, 에나낭 또 버럭한대요~’

‘그야, 머리를 기르면 도전할 수 있는 스타일이 많아지니까!’

'응, 그렇지. 장발은 미소녀의 치트키니까.'

‘옷걸이가 좋으니까 어떤 스타일을 해도 잘 어울리는 거야!’

‘카메라 보정도 옷걸이가 좋으니까 잘 받는 거야?’

‘…에휴, 됐어. 그만 좀 놀리고, 이거나 같이 봐줘.’

 작년 이맘때였다. 에나는 열아홉 살이 되면 머리를 기르겠다며 동네방네 엄포를 놓았다. 물론 입시도 중요하겠지만, 파격 변신을 향한 장녀의 고집은 도저히 꺾일 기세가 없었다. 우리는 나이트코드 메신저로 전달 받은 카탈로그 사이트를 둘러보며, 에나에게 어울릴 법한 헤어스타일을 함께 골라주곤 했었다. 지금도 에나의 SNS 피드를 쭉 내리면 변화의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딱히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

‘글쎄? 변화를 주면 뭔가가 달라질까, 싶은 생각은 들어.’

‘…초절정 미소녀 인플루언서 에나낭도 중요하긴 하지.’

‘뭐, 고3이라고 SNS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 그건 팔로워를 향한 예의가 아니니까.’

수험생 히스테리의 일종이었을까? 대개는 불필요한 SNS 활동을 그만두고 입시 공부에 전념하지 않던가. 도망치고 싶은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도 그림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었을까. 집착은 불안에서 기인하니까, 당연히 에나의 집착증도 불확실한 자기 자신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 무렵부터 에나는 다시 외부의 반응에 의존적으로 변했다. 만약 그림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불안감을 느낄 만한 또 다른 일이 있었나. 어쩌면 25시에게도 털어놓기 힘든 혼자만의 고민이라도 있었던 걸까.

‘입시와 SNS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게, 장발도 잘 어울리긴 하겠다.’

‘오늘은 내 편이 아무도 없네…. 아, 재미없어.’

‘다들 보는 눈이 탁월한 거지. 바보 같은 누구와 달리.’

 

기억하건대, 에나는 계절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었다. 직모였다가, 컬을 넣었다가, 살짝 염색도 했다가… 그러다 금세 질리고 말았는지 늦가을쯤엔 다시 단발머리로 돌아왔다. 브릿지처럼 한 줄로 땋은 머리칼도 그대로였다. 아무리 치장하고 꾸며도 바뀌지 않는 게 있더라고, 입학시험을 마치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에나는 무덤덤하게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그리고 아주 긴 꿈을 꾸었다며, 모두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수채화로 그린 작품을 나이트코드 메신저로 보내왔다. 캔버스에는 유령이 된 여자아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평소의 에나라면 잘 사용하지 않는 색감이었다. 아이의 몸은 가볍고 투명했다. 표정도 아주 환했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분위기였지만 아이는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에나는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새벽에 쓴 일기장을 그대로 복사했으니, 마후유의 작사에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추신도 덧붙였다.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쳤다. 비바람에 뒤집힌 바다는 흙탕물처럼 더러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허우적거릴수록 바다라는 녀석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두 눈을 감고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잔잔한 물결에 모든 걸 맡긴 채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깊은 잠을 청했다. 내 몸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잠겨 들었다.

그때부터 에나는 변했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거나 제멋대로 굴지도 않았다. 기나긴 공백기를 거치고 이십 대의 문턱을 코 앞에 두고서 벌써부터 어른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극적인 감정 표현도 잦아들었고, 언젠가부터는 어리광도 피우지 않았다. 남동생의 표현처럼 작위적인 무게감일지도 모르겠지만, 에나에게서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전엔 볼 수 없던 짙은 그림자가 넓게 드리웠다. 무엇이 그토록 에나를 힘들게 했던 걸까…. 나로서는 도저히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핫팩이… 음, 일단 이거라도 줄게."

"에이, 됐어.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거든?"  

에나는 망설임 없이 머플러를 풀었다. 까치발을 들고 두 팔을 어깨너머로 넘겼다. 포니테일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레 머플러를 둘러주었다. 목덜미에 훈기가 돌자 가볍게 몸이 떨렸다. 거 봐, 따뜻하지? 오늘 하루만 빌려주는 거야. 에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손바닥에 파운데이션 묻을 텐데…. 나는 뭉개진 발음으로 바쁘게 얼버무렸다. 이런 날씨에 메이크업이 망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 핑곗거리가 못 되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미 바람에 날아갔을 테지만, 에나의 손에 조금이라도 이물질이 묻는 건 싫었다.

"미즈키가 춥잖아."

아무렇지 않게 웃는 너를 보며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끔은 에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네게 붙잡힌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는 않았을까. 얼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에나를 바라보다 꼭 쥐고 있던 손목을 풀어주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등을 따라 부드럽게 두 손을 포개었다. 혼자 있을 땐 그렇게 추웠는데…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소복이 쌓인 눈밭 위로 여덟 개의 발자국이 일렬로 찍혔다. 하얀 언덕에 남은 족적은 이 길의 끝을 멋대로 기대하게 했다. 25시에게 특별한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다. 기대와 걱정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 하는 와중에도 에나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혹한 속 얼어붙은 심장에 차가운 불꽃이 일었다. 그 웃음이 녹지 않기를 바라며, 재가 된 마른 숨을 크게 내뱉었다.

"저기, 버스 오네."

마후유는 벤치에 앉아 졸고 있던 카나데를 깨웠다. 늦은 새벽까지 작곡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피로에 지친 리더를 앞세우고, 차례로 서서 버스가 정차하기를 기다렸다. 타이어에 걸린 체인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와이퍼를 멍하게 바라보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에 정신을 차렸다. 사방으로 길게 퍼진 붉은 빛은 단숨에 두 눈을 피로하게 했다. 카나데가 앉을 자리 정도는 있겠지, 나머지 세 명은 서서 가도 괜찮으니까. 마후유의 중얼거림을 잠자코 듣던 에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문이 열렸다. 아뿔싸, 종점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렸는지 버스 내부는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다. 이거, 큰일이네…. 비상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서클의 리더를 지켜야 했다. 두뇌 회전이 빠른 마후유의 진두지휘 아래, 카나데를 중심에 두고 나머지 세 명이 둘러싸는 방법으로 입을 맞췄다.

"카나데, 힘들지 않아?"

"아직까진 버틸 만 해. 다들 힘들 텐데,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하지…."

"카나데, 이쪽으로 와. 기둥 옆이니까 중심 잡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럼 실례할게."

마후유는 카나데를 본인 쪽으로 당겼다. 마후유의 말처럼, 단단한 걸 붙잡고 있으면 적어도 중심은 잃지 않는다. 미끄러운 경사로를 달리는 만큼 차체 내부도 불안정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크게 느껴진다. 그나마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카나데가 자리를 옮기자 근처에 빈 공간이 생겼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에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 통로보다는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에나는 조심스럽게 창가 쪽으로 걸어왔다.

"에나, 괜찮아?"

"하아… 쪽팔려…."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스텝이 꼬여 휘청거리는 에나의 허리를 반사적으로 감싸 안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새빨간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에나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발목을 살짝 접질렸을 텐데, 역시 고통보다는 창피함이 더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에나는 웃지 말라는 듯 이를 꽉 깨물고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지만 귀여운 걸 어떡해.

"안 다쳤어?"

"덕분에… 근데 이 음흉한 손은 뭐야?"

"잠깐만 이러고 있자. 이게 더 안전해."

"어쭈, 나는 연하한테 관심 없거든?"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에나는 내게 천천히 기대왔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왼팔을 쭉 뻗어 창문을 열었다. 아주 속에서 천불이 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장녀의 자존심이란 뭘까, 장녀였던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남동생 군의 심정은 어렴풋 알 것 같았다.

창문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코끝에 달콤한 냄새가 스쳤다. 향기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에나였다. 이건 시트러스 향인가? 알싸하고 상큼한 감귤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시중에 이런 향을 풍기는 섬유유연제가 있었나. 역시 샴푸향이겠지…. 냄새의 근원을 찾는 집요한 시선에도 에나는 아랑곳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즈키, 너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 구는 거 딱 절반만큼만 나한테 해줄 생각은 없어?"

"무슨 말이야?"

"…너는 나한테만 짓궂은 거 같아서."

너와 똑같은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은 어떨까. 산 중턱으로 올라갈수록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당장의 기상 상황으로는 속도를 내기 어렵겠지만, 이대로라면 일정이 틀어지고 만다. 나뭇가지에 소원패를 걸고 신에게 염원을 전달하는 의식은 정확히 아홉 시 정각에 시작한다. 현재 시각은 8시 15분, 마을 어귀에서 신사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은 30분을 조금 넘는다. 폭설에 서행하지 않는, 평균 속력으로 주행할 때를 가정한다면 말이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에나낭, 설마 질투하는 거야?"

"…뭔 소리야?"

"음험 셀카녀에, 어리광쟁이에… 은근 나잇값 못 하네~"

"야, 쪼그만한 게 까불고 있어!"

"키는 내가 더 크거든?"

"너랑 말을 섞는 내가… 몰라, 짜증 나."

섭섭했던 걸까. 에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유독 에나에게만 장난이 짓궂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가끔은 나도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싶다. 네게 모질게 구는 이유가 뭔지, 왜 그렇게 너를 피하고 싶은지. 옥상에서의 그날 이후로 어떻게든 진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나 어쩌면 거리를 좁히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다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전에 어떤 핑계를 대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것만은 오직 변함없는 사실이다.

나는 25시를 믿는다. 25시 동료들은 누군가를 버리거나 외면할 심사가 못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모두가 꺼리는 '나'일지라도 그들이라면 기꺼이 ‘나’를 받아줄 수도 있다. 더는 무엇도 숨기지 않고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도 그들은 아무런 편견없이 나를 바라봐줄 수도 있다. 그리고 에나는, 언제까지든 기다려주겠다며 굳게 약속했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든 옥상의 철조망을 등지고 그 올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끝이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방랑자처럼 내 가슴은 찰랑이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나'를 오직 '나'로 이해해줄 수도 있겠지. 불결해 하지 않고, 더러워하지 않고, 색안경 따위를 들이밀지 않고…. 언제나처럼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감싸줄 수도 있겠지. 

다만 버려질 수 있음을 생각하면 두렵다. 마음을 열었던 이에게 똑같은 이유로 버려지는 게 무서웠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답시고 신중한 척 했지만, 늘 그랬듯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망치기 바빴다. 뒷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걸 버리고 내달리는 게 주특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25시가 곁에 있는 한, 회피하는 방법만큼은 선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우려하는 일들이 한사코 벌어지지 않기를 하늘에 빌어보고 싶었다. 이곳의 소원패는 영험하기로 세간에 유명했다. 미신일 뿐이지만, 어쨌든 25시에게 조금 더 희망을 걸고 싶었다. 내 마음을, 내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놓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지?"

"응?"

 

급정거 이후로 속력이 점점 느려지더니 언제부턴가 아예 움직이지를 않았다. 버스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라도 난 걸까, 아니면 고장이라도 난 걸까? 어수선한 틈을 타 승객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불안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설마 계획에 펑크가 나버리면 어쩌지….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불규칙한 심장 고동을 어떻게든 잠재워보려고 애썼지만 얄짤 없었다. 마른침을 연거푸 삼켰다. 괜찮을 거라는 자기 세뇌도 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공복이었는데도 전부 게워낼 것만 같았다.

"…다들 진정하세요. 폭설 때문에 신사로 가는 길목이 꽉 막혔어요. 눈을 치우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한데, 길이 미끄러워 당장은 우회하기 어렵습니다. 양쪽 문을 열어 드릴 테니 내려가실 분은 인도로 천천히 내려가세요."

버스 내부는 짜증 섞인 한숨으로 가득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출입문 밖을 벗어났다. 어쩔 수 없지, 내년에 다시 오자. 듬직한 풍채를 지닌 젊은이가 대여섯 살쯤 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였다. 어수선한 풍경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데, 애써 외면하고 있는 내 모습이 정말 비겁해 보였다. 

불과 며칠 전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인터넷 시계를 팝업창으로 띄워 놓고 15시 정각부터 재빠르게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티켓팅 사이트 못지않은 열기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로딩 에러를 뚫고 어렵사리 추첨 결과를 확인했을 때, '아키야마 미즈키 외 3인, 당첨되었습니다.' 그 짧은 문구를 읽고 얼마나 환호성을 질렀는지 모른다.

"혹시 모르잖아, 일정이 연기될 수도 있고…."

"그렇진 않을 거야.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열리는 거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항상 잘 해보려고 할 때마다 왜 이렇게 꼬여버리는 걸까. 이런 것도 일종의 징크스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작년처럼 가까운 신사에서 새해를 맞는 편이 나았다. 전부 내 욕심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고작 특별함 따위가 뭐라고….

올해는 나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래서 새 출발을 앞둔 25시에게 뜻깊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다. 지역 뉴스에서 보았던 멋진 광경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차를 타고 달려온 동료들을 생각하면 미안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재 시각 8시 55분, 산 중턱에서 버스가 멈춰버렸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기다렸다가 나중에 올라가도 되는 거잖아?"

"그래도…."

창밖을 바라봤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간 군중 무리도 저 멀리서 끊겼다. 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승객들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좌석이 텅텅 비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어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속상한지 모르겠다. 플랜 B를 실행해도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시내로 돌아가 따뜻한 우동을 먹고, 잠시 쇼핑몰이나 오락실에 들러 시간을 보내도 되는 일이다. 여차하면 가까운 신사에서 새해 소원을 빌어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대로 돌아가버리면, 나는 25시의 새로운 시작에 오점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꾹 닫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만큼 몰상식한 것도 없다. 에나는 기다려보자고 말했지만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욕심 때문에 모두의 시간을 빼앗고 있음을 생각하면 스스로가 구제불능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 되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궁상맞게 미련이나 떨고 있으니까. 무엇이 이토록 나를 간절하게 하는 걸까. 그까짓 나무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걸까, 나는….

"있잖아, 미즈키… 나도 그 나무 보고 싶어."

"왜?"

"꼭 빌고 싶은 소원이 있거든."

"…."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보자. 기적이라는 거 말이야…."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소용돌이쳤다. 온몸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러다 네게 화를 낼 것 같았다. 차라리 비난이나 원망을 쏟아내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태연하게 기적을 바라는 에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적이라니…. 유감스럽지만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런 무용한 것들은 사전에만 존재할 뿐, 맹신하지 않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까.

 오래 전, 우리들은 미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는 생지옥에 던져졌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아비규환 속에서 어제의 동지는 곧 오늘의 적이 된다. 생글생글 웃다가도 언제든 뜯어먹을 기회를 노린다. 각자도생의 전쟁터에서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만이 절대적인 생존 전략이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셈법이 느린 사람들은 먹히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된다. 선의를 연기하는 위선자는 어디에나 있고, 약자성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든든한 양식이 되었다. 가령 셈은 빠르지만 값이 정확하지 않으면 제 살을 내어주고 제 뼈 하나 추리지 못하는 멍청이가 된다. 복숭아를 얻겠다고 자두를 버렸다가 본전도 못 찾는 천치들이 온 세상에 널렸다. 서클의 중심인, 일찍이 빛을 잃은 그 친구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선택하지 않은 삶을 강제로 부여 받은 것도 모자라, 정해진 어떤 관습을 따르는 것만이 우리는 인간의 숙명이라 말한다. 기꺼이 나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했고, 세상은 나를 돌연변이라 칭한다. 원치 않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멸시와 조롱의 먹잇감이 되거나, 늘 그런 식이다. 희망을 품으면 보란 듯이 짓밟힌다. 심연을 밝히는 빛줄기는 언제나 먼 발치에서 끊어져 버렸다. 내게 삶이란 비행선 없이 맨몸으로 새카만 우주를 건너는 일처럼 느껴졌다. 기적이나 요행 따위는 바랄 수도 없었다. 주제 넘치게 배부른 소리인 셈이다. 그래서 기적을 바라는 네가 미웠다. 아무런 대가 없이도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랄 수 있는 네가 부러웠으니까. 희망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는 너를 마주할 때마다 냉소와 비관으로 가득찬 내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해보였다.

"다들 똑같은 마음일 거야."

"…미안해."

"너무 풀 죽어있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내 안에는 언제나 불온한 내가 있었다. 비틀린 눈으로 바라본 세계는 온전한 형태로 상이 맺힐 수 없었다. 실없는 감정에 울렁이다 권태를 느끼길 반복했고, 모든 게 엉망인 내 삶은 완전한 오답인 줄만 알았다. 저주뿐인 궤적에 기댈 곳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의 매듭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마치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올곧고 투명한 눈동자는 서늘하게 식어버린 두 눈을 정직하게 되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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