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카

권태 (1)

무밭 by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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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에 쓸린 자국마다 열감이 돋았다. 위험한 감각에 서로를 내맡긴 그날 밤, 우리는 들뜬 호흡으로 사랑을 속삭였다. 낯간지러운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뇌수를 타고 흐르는 따뜻한 숨은 모든 고통을 잊게 했다. 거대한 해일에 삼켜진 나는 이 세상의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없었고, 쓰다듬을 수 없는 투명한 육체는 힘없이 내게로 쓰러졌다. 이대로 너를 놓고 싶지 않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수평선 위로 커다란 달이 떠올랐다. 월광을 붓 삼아 검은 도화지에 그려낸 여름의 대삼각형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슬픔에 잠긴 까마귀는 은하수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가만히 손을 놓았다. 영원을 노래하는 네게 답가를 전하지 못했다. 달빛은 무너지고, 일렁이는 물결에 별 조각을 쏟았다. 너는 하얗게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서 나도 따라 웃었다. 내 눈동자에 비친 너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었다.

 언젠가 백사장에 홀로 선 내가 있었다. 등대 아래 빛나는 네가 있었다. 나아가기 위해, 더 넓은 바다를 만나기 위해, 부서지는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해 여름, 우리는 찬란한 이별을 맞았다.

***

 졸업 축하해, 저마다 품에 꼭 맞는 꽃다발을 껴안았다. 환한 미소와 함께 학창 시절을 매듭짓는 마지막 사진을 남겼다. 모처럼 특별한 날이니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아이들과 나이답지 않다며 짓궂게 장난치는 어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지나간다. 인파 속에서 멋쩍게 웃었다. 딱히 추억할 일도, 가슴 뛰는 설렘도 없던 지난날에 감흥을 느낄 리 만무하다. 학교를 썩 제대로 다닌 것 같지도 않았다. 출석 일수만 채우면 그만이었고, 유급하지 않을 정도의 성적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졸업이니 뭐니 하는 것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일종의 통과의례라든지 성대할 까닭이 없는 허례허식이라 생각해버리면, 이런 문화에 걸맞지 않은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방인도 분명 자유인일 것이다. 지나가는 이의 옷차림이나 행색 따위에 눈 흘길 틈은 없을 테니 그나마 숨통은 텄다. 아무도 나를 비웃지 않는다. 겉치레뿐인 위로나 지긋지긋한 조롱도 없다. 그 누구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또 괜한 기대를 했나 보다.

 커다란 울타리 너머로 잿빛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일방통행 도로에서 진격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자동차들이 크락션을 울리며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길고양이 한 마리가 유유자적이 걸어간다.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아스팔트 위를 우아하게 거닌다. 어지러운 속세를 비웃는 한량의 자태였다. 저처럼 한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학교 안팎으로 아주 난리 통이다. 교정에 울려 퍼지는 진부한 노랫말을 따라 읊는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찾지 않을 텐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며 불필요한 미련 따위를 남겨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대인의 생존 방식이란 역겹기 그지 없다. 홀로 설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는 무리를 지어 살아남고자 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본능에 이끌려 형성된 집단 속에서 어떻게든 이탈되지 않으려 애쓴다. 막연한 수고로움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약한 본능에 다시금 기대고 만다. 아주 같잖은 짓이다. 줏대 없는 인형들 사이에서 돌연변이가 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까. 비관론에 심취한 쓰레기 취급을 받더라도 상관없다. 간사한 말재주와 가식적인 미소는 더러운 혀와 탁한 눈동자를 감추기 위한 가면일 것이다.

흐린 하늘이 걷히고 밝은 빛이 스며든다. 따뜻한 햇살 아래로 봄비가 남긴 작은 웅덩이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희미하게 비친 나는 거짓말쟁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배, 졸업 축하해요."

 "아… 응, 고마워."

 이름 모를 후배에게 꽃 한 송이를 받았다. 시들해진 꽃잎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꾸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째, 향이라곤 없다. 너덜거리는 종잇장처럼 볼품 없는 꽃이었다. 괜찮아, 소중히 간직할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허한 마음을 뒤로한 채 교문을 나섰다. 

 보도블록 틈에 낀 이물질과 드문드문 피어난 잡초를 피해 지그재그로 걸었다. 우스꽝스럽지만 박자를 타다 보니 괜스레 마음이 들뜬다. 재미없는 상념은 묻어두고 신나게 발재간을 하다 보면 따분한 귀갓길도 커다란 무대가 된다. 신호등을 악보 삼아 건반을 두드린다. 짧게는 15초, 길게는 30초. 울퉁불퉁한 선율을 따라 조잡한 연주를 끝마친다. 모래알을 밟고 돌멩이를 굴려 마라카스를 흔든다. 서걱이는 소리에 신발 밑창은 금세 엉망이 된다. 비포장도로를 지나 깔끔하게 연마된 대리석 바닥에 굽이 닿자,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텅 빈 로비를 가득 채운다. 얼룩덜룩한 시멘트 복도를 따라가면 이제 엔딩이다. 발끝으로 철제 현관문을 툭툭 건드린다. 점잖지 못하게 빈집을 노크한다. 아무렴 어때,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배우는 무대를 떠나고 연극은 조용히 막을 내린다. 현관 타일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 놓고 벽면의 전신 거울을 향해 쓴 웃음을 짓는다. 박수도 야유도 없이 꿋꿋하게 커튼콜을 마친다.

 "미즈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막힘없이 돌아가던 필름이 뚝, 끊겨버렸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찰나에 귀여운 방해꾼을 만난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동생의 졸업식을 내팽개칠 위인은 아닐 텐데. 주객전도된 피사체를 자처하며, 오늘의 주인공을 카메라 셔틀로 기용할 찬스를 놓칠 리가 없는데. 역시 비비드 친구들 등쌀에 한 풀 꺾였으려나? 부루퉁하게 입꼬리를 들썩이는 새침한 얼굴을 상상하니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에나?"

 "바보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전화는 왜 안 받고…."

 "무음이었어. 미안해."

 “딱히 사과할 것까진 아니고… 어쨌든 만났잖아?"

 갈색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가쁜 숨을 헐떡이는 네가 있다. 여기, 잿빛 같은 풍경 속 햇살처럼 눈부신 네가 서 있다. 노랗게 물들인 꽃다발을 품고서, 어울리지 않게 투덜대는 입가엔 하얀 웃음이 잔뜩 묻어났다. 에나를 보고 있으면 괜한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있는 힘껏 얼굴을 찡그리며 맘껏 투정 부리고 싶었다. 그거, 내 거지? 일부러 질문 공세를 퍼붓거나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 그리곤 너를 따라 하얗게 웃고 싶었다. 그렇게 웃다 보면, 마른하늘에 소나기가 내릴 것 같았다.

 "왜 이렇게 풀 죽어 있어? 평소답지 않게."

 "아…."

 "하여튼 성가시게… 이거나 받아."

에나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프리지아 꽃다발을 건넸다. 고맙다는 말 대신 활짝 웃었다. 그것만이 네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졸업식이 한창인 이곳은 백화난만한 화원을 방불케 한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형형색색의 꽃뭉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시들어간다. 그중에서도 내 것은 없는 줄 알았다.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흐드러진 안개꽃 더미 속 샛노란 꽃잎들이 나를 반긴다. 맑고 순수한 당신의 앞날을 응원해요. 곱고 따스한 손으로 담아낸 마음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너, 얌전히 있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 너를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바람이 코끝에 스친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피부에 닿는다. 나도 몰래 더운 숨을 삼킨다. 향긋한 꽃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운다. 꽃다발이 망가지겠어, 슬며시 너를 밀어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가까이, 더 깊게, 내게로 다가온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하얀 솜털이 돋아 간질거린다. 달큰한 향에 취해버린 것처럼 아주 작은 틈새로 너와 내가 공명한다. 치사량의 당분이 심장을 꿰뚫는다. 심박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고 이따금 폭발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이대로 영영 사라져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에나는 나를 지그시 밀어냈다. 혀끝에 레몬 맛이 감돈다. 아랫입술도 살짝 아리다. 사랑하는 이의 입맞춤으로 파란만장한 십 대의 마침표를 찍었다. 처음이었다. 너와 했던 모든 일이 내겐 처음이었다. 너는 한껏 움츠러든 어리광쟁이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졸업 축하해, 미즈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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