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less

유란의 이야기 (1)

2021.10.14

두 세계가 있다. 한 세계는 내게 있어 질리도록 익숙하다. 여기서 나는 밤을 새서 과제를 해치우고, 친구를 만나거나 sns에 삶을 한탄한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예기치 못한 청첩장을 받는다거나, 소액 복권에 당첨되는 정도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상한 나라다. 하얀 토끼가 시계를 들고 뛰어간다. 모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는 이곳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몸이 커지면서 작아진다. 길은 그것을 잃어버려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유없이 내 목을 자르려드는 여왕에게 쫓긴다. 그러다 갑자기 위아래가 뒤바뀌며 나는 떨어진다. 끝없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깊이로.

모피어스의 대사가 떠오른다. 

 빨간 약을 먹으면, 이상한 나라에 남는다. 네게 토끼굴이 얼마나 깊게 뻗어나가는지 보여주지. 

 You take the red pill, you stay in wonderland and I show you how deep the rabbit hole goes.

저 약을 이미 먹어버렸다면,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쾅 하는 소리가 유란을 잠에서 깨운다. 시간은 아직 이른 새벽, 그가 있는 연구실 주변에는 공사 중인 건물이 없다. 차가 부딪힐만한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음. 그는 비몽사몽한 채 눈을 비비며 창가를 내다보았다. 

창문은 대학 뒤쪽에 있는 산이 보이는 방향에 위치했다. 그 너머로는 나무들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빽빽하게 우거졌고, 가끔씩 고라니 따위가 건물 가까이 내려와 크게 울기도 했다. 지금 그곳에는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은색 원기둥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땅에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이파리가 없어 휑한 가지 몇개가 부러지고, 밑에서는 흙과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나왔다. 무언가 타는 듯한 연기는 원기둥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공간을 뒤틀듯 불안정하게 계속 모습을 바꾸었다. 거대한 마차가 되었다가, 한옥 정자와 꼭 같은 모습을 취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수없이 많은 모습으로 뒤틀리던 그것은 꼭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여전히 흘러내리는 흙만이 그 물체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비록 눈 앞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그것은 아직 저기 있었다.

그리고 유란은 뛰기 시작했다. 조용한 복도에 그의 발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어디선가 투덜거리는 소리들도 같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그 방향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유란은 저 물체를 알고 있었다.

“TT캡슐, 시간선時間船, 수많은 이름이 있지만 역시 저는 타디스라는 이름이 좋더라고요.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인 차원Time And Relative Dimension In Space,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요.”

“잘났어, 정말.”

오래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기억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던 순간들. 그래, 유란은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누가 저 안에 있는지도.

뒷산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도착한 유란은 잠시 숨을 골랐다. 겨울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보여주듯 나무들이 이파리를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쯤 썩은 낙엽들 위로 눈이 녹아 질척한 웅덩이를 이루었다. 유란은 천천히 길을 따라 올라가다 방향을 홱 하고 꺾어 숲을 향했다. 거의 진흙이 다 된 낙엽을 밟고, 손을 휘둘러 낮은 관목의 가지들을 쳐낸다. 그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기이할만큼 평화로운 이곳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란은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았다.

뒷산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건 그가 산의 1/4쯤 올라왔을 때였다.

유란은 스스로의 걸음을 세며 걷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예전에 배운 방법이다.

“무언가를 시야에서 감추는 방법은 다양해요. 가장 쉬운 방법은 눈을 속이는 거죠.

카멜레온을 생각해봐요. 주변의 색과 비슷하게 자신을 바꾸어서 보이지 않게 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주변의 상을 그대로 비추면 모습을 감출 수 있어요.

아예 빛을 굴절시킨다면 더욱 좋겠죠.

하지만 좀 더 고차원적인 방법이 있어요.

우주적으로 더 자주 쓰이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뇌를 속이는 거예요.

인식의 사각지대를 이용하는 거죠.

당신은 그것을 보지만,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어요.

뇌가 그 정보를 쓸데없는 것으로 판단해 지워버리는 거죠.”

인식의 사각지대를 이용하는 경우, 그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감지해내기는 어렵다. 애초의 그 감각 자체를 교란해버리는 방식이니까. 그래서 숫자를 세는 것이다. 숫자를 세다가 빠뜨리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지점을 지날때마다 반복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지금 유란은 계속해서 걸음을 빠뜨리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유란은 천천히 앞뒤로 걸으며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공간의 범위를 좁혀나갔다. 이윽고 일종의 장場같은 것이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졌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손을 쭉 뻗은 채 주변 공간을 휘저었다.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막은 그 안의 물체를 시야에서 가리는 것 외에 특별한 기능은 없는 것 같았다. 유란은 보이지 않는 막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의 광경이 선명해졌다.

주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려다 실패한 듯 타디스는 원기둥 모양 그대로 산에 박혀 있었다. 사각형의 얇은 선으로 그려진 문 틈 사이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유란의 귀에 꽂혔다. 한걸음,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유란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것은 어쩌면 유란이 생각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친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유란의 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것을 뭐라 설명해야할지 몰랐다. 희망? 간절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마음의 소리를 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유란은 가느다란 선을 따라 손을 얹은 뒤, 익숙하게 타디스의 문을 열어젖혔다.

타디스의 모습은 그가 기억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것의 내부는 엉망이다. 한때는 벽을 화려하게 장식했을 붉은 빛의 태피스트리가 사그라드는 불에 천천히 먹혀갔다. 여러 개의 샹들리에는 깨지고 부러진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중심부에 위치한 조종간으로부터 사방으로 튀는 불똥과 불꽃들만이 내부의 유일한 광원이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위험한 상황을 나타내듯 울리는 특유의 기계음이 섬뜩한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이 공간은 무서우리만치 조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타디스의 자체 중력이 유란을 끌어당겼다. 기울어진 채 똑바로 서 있는 이상한 감각은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켰다. 유란은 두통이 이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휴대폰 손전등으로 내부를 훑었다. 그는 조용하게 행동했다. 섣부르게 소리를 내서 이 안에 있을 무언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타디스가 있다면, 여기에는 분명 조종사도 있어야 했다. 지금은 어떤 상태가 되었든 간에….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찬 곳에서 누군가를 찾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사방에 조각상이 깨진 채로 널부러졌고, 사람 크기만한 도자기가 바닥을 굴려다녔다. 타디스는 지나칠 정도로 확장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안은 온갖 이상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란은 옷으로 코와 입을 감싼 채 태피스트리에 붙은 불을 끄고, 산산조각난 유리들 따위를 피하며 그 안을 걸어다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기에 땀이 송글송글 맺었다가 식으면서 몸이 떨리고, 피부는 약하게 화상을 입었는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천을 코와 입에 둘렀음에도 매캐한 연기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현기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슬슬 체력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서서히 아무런 준비 없이 무모하게 뛰어든 자신과 여기에 과연 누군가 있긴 한걸까 하는 회의가 유란의 마음을 채워갔다.

그리고 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것은 반시마냥 섬뜩하게 울리는 타디스의 경고음과, 유란이 걷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공간에서 겨우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속닥거리는 작은 유령은 유란이 숨을 참아도 계속해서 들렸으며, 그의 것보다 박자가 빨랐다. 그것은 거칠게 뜀박질을 한 후 내뱉을 법한 헐떡임에 가까웠다. 무언가가 끙끙거리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유란이 있는 곳보다 중심에 더 가까웠다. 유란은 천천히, 발걸음을 최대한 죽인 채 그 진원지를 향해 걸어갔다.

중심은 가장 피해가 컸다. 깨진 샹들리에 조각들이 사방으로 널부러져 바스락거렸다. 온갖 물건들이 쓰러져 있었다. 유령처럼 작고 희미하던 소리는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선명해졌다. 소리는 피가 미끄러진 채 말라붙은 자국으로 그를 안내했다. 서서히 형체를 갖춘 유령이 한 사람의 모습으로 유란 앞에 나타났다.

유란은 조용히 속삭였다.

“…… 리미트?”


형체를 갖춘 소리는 조종간의 그늘 아래에 웅크리고 있었다. 손전등의 불빛이 닿자 그것은 빛을 피해 움츠러들었다. 마치 괴담 속의 존재들처럼,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는 괴물들처럼.

한때는 화려했을 검정색 드레스는 곳곳에 불똥이 튀었는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안의 살을 드러냈다. 진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같은 보석들이 피가 묻어 검붉게 변색된 채로 먼지마냥 바닥을 굴러다녔다. 몸 곳곳을 장식했을 장신구들은 깨지거나 끊어진 채 대롱대롱 그 자리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지금 이 공간의 어둠보다 더 짙은 빛의 머리카락이 몸 전체를 뒤덮었으며, 이 또한 불에 탔는지 군데군데가 상한 채로 끊어져 끝이 들쑥날쑥했다. 

그것이 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유란은 다급하게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것은 자신의 한 손으로 옆구리를 꾹 누른 채 밭은 신음을 뱉고 있었다. 손은 이미 피에 젖어 진한 갈색 빛을 띠었다.

“으악, 피! 그거 피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란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것은 유란을 경계하며 금방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거친 숨을 가쁘게 내뱉는 소리만이 귓가에서 울렸다.

“좀 볼게요.”

그것의 경계를 푸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지만, 한 번 경계를 풀자 그 다음은 쉬웠다. 그것은 유란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저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유란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상처를 살폈다. 거대한 유리 조각이 그것의 옆구리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충격에 파편이 흔들렸던 것인지 상처의 길이는 언뜻 보기에도 그 조각보다 훨씬 컸다. 상처가 난 부위로부터 노란 빛이 도는 안개가 일어나 피를 멈추고 피부를 아물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결코 완벽하게 낫지는 않았다. 조각이 문제였다. 파편이 박힌 곳에 이르자 노란 안개는 어쩔 줄을 몰라하듯 흔들리다 산산히 흩어졌고, 상처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상처에서는 또다시 출혈이 일고 갈색에 가까운 피가 왈칵 쏟아졌다.

유란의 손이 상처를 더듬자 그는 처량할만큼 훌쩍였다. 파편은 보기보다 깊히 박힌 것 같았다. 유란은 손바닥으로 조각을 가볍게 감싼 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말을 건넸다. 

“산토끼를 거꾸로 하면 뭔지 알아요?”

“그건, 갑자기 왜… 허윽!!”

조각이 뽑힌 건 순식간이었다. 급격하게 밀려오는 통증에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말았다. 다행히 조각은 무사히 뽑혔다. 유란이 상처 부위를 두 손으로 세게 눌러 지혈하자 기다렸다는 듯 노란 안개가 튀어나와 치유를 시작했다. 고통으로 헐떡이던 숨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유란은 크게 한숨을 쉬며 그 옆에 주저앉았다.

“정답은 나도 몰라요. 원채 종류가 많아서.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옅은 검정색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유란을 살폈다. 상처가 아물고 출혈이 멎자 드디어 자신의 주변을 둘러본 여유가 생긴 듯 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몇 번 입을 덜거덕거리더니 겨우 소리를 냈다. 목소리는 목에 거미줄이 잔뜩 낀 것마냥 거칠었다.

“……고마워, 유란… 아니, 고마워요. 유란….”

유란은 말없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지금 제 곁에 있는 ‘저것’은 자신이 기억하던 리미트의 모습과 단 한 구석도 닮은 부분이 없었다. 어둠이 그를 빚어냈다. 거미와 마녀, 밤의 온갖 불길한 것들이 그를 키웠다. 저것은 밤의 자손이었다. 사람보다는 유령에 가까운 존재였다. 인류의 모든 부정을 모아놓은, 그래서 모두가 역겨워하고 두려워할법한 그런 ‘것’. 유란은 그를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것은… 그는, 리미트였다. 유란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환상을 선물하던 사람.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하던 존재.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나의 친구. 

다시 그를 만나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모른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풀어야 할 것이 있다. 

유란은 제 친구의 안갯빛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유란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의 리미트는 잘게 빻아진 가루 같았다. 저 연약한 영혼은 아주 작고 사소한 말 하나로도 산산히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숨결 하나에도 날아가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유란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 말을 지금 꺼내도 되는 걸까? 그를 상처주는 게 되지 않을까? 유란은 두려웠다. 그는 가만히 리미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침묵 속에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유란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하면서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해줘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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