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결말
2021.07.02
언젠가 리미트는 타임로드가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주었다. 중심을 잃고 무너지는 신체. 사지에서 피어오르는 금빛 연기. 사지를 둘러싼 연기는 폭발이 되고, 그렇게 타임로드는 새로운 정신과 신체를 만든다고 했었지.
그는 가까운 미래에 내가 자신을 그 꼴로 만드리란 사실을 알았을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힘을 주어 지탱했다. 고개를 들어 방금 전 내가 죽인 타임로드를 바라보았다. 재생성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볼텍스 조종기의 버튼을 두들겼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재생성하던 모습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힘이 풀리고,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는 하나의 문장만이 떠돌고 있었다.
해냈다.
내가 이겼다.
나는 오늘, 나의 오랜 친구를 죽였다.
늘 다니던 집 앞의 거리를 걷는다. 수많은 눈동자들이 나를 따라온다. 시선이 내게 무겁게 내리꽂힌다. 나를 추궁하는, 내 몸을 산산조각낼 듯이 바라보는 시선들.
누군가는 자식을 잃었고 누군가는 형제를 잃었다. 모두 내 친구가 죽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내게 소리라도 지른다면 나았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나도 마주 비명을 질렀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입을 열어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시선으로 나를 쫓을 뿐이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눈을 한 채.
나는 고개를 들고, 뻔뻔하게 느껴질만큼 당당한 걸음걸이로 그 사이를 헤쳐나간다. 사람들이 옆으로 물러선다. 바다가 갈라지듯 길이 만들어진다. 그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이 무겁다. 눈들이 나를 옭아매어 놓아주지 않는다.
시선은 내가 마을의 경계를 지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미리 불러두었던 차량이 마을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좌석에 몸을 묻는다. 덜컹, 하고 짐이 실리자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늘에 닿을 듯 치솟은 절벽 아래 세워진 주택들, 그들을 둘러싼 드넓은 바다가 나의 손을 떠나 사라진다. 내가 일구어낸 새로운 고향이 차창 너머로 밀려나간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몸을 엄습해온다. 머리는 어지럽고, 목이 타들어갈듯 따끔거린다. 리미트를 죽인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집을 내놓고, 신변을 정리하고, 차량을 부르고…. 단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지.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창에 고개를 기댄 채로 바깥을 바라본다. 차가 해안도로를 달리자 푸르른 바다가 수평선까지 펼쳐진다. 물살과 바람이 뒤얽혀 들리는 거칠고 깊은 소리, 파도가 도로의 절벽을 끊임없이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수면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인다. 새가 날아다닌다. 저 멀리서는 배들이 움직인다.
잔인하리만치 평온한 광경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처음 리미트가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이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리미트가 왜 갑자기 변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변화는 지진이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나를 덮쳤다.
시작은 사소했다.
어느 날, 리미트로부터의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원래 내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볼텍스를 타고 보냈기 때문에 받는 시간도 장소도 그때마다 달랐지만, 그럼에도 그가 편지를 보내는 데에는 일정한 간격이 있었다. 편지를 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으면 대신 전화를 해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안녕을 빌었다. 편지는 수천수만 광년 넘게 떨어진 우리를 여전히 이어지게 하는 하나의 끈 같은 것이었다. 그 끈이 나도 모르는 새 끊어져버렸다.
나는 그가 걱정되었다. 리미트는 평화로운 곳을 사랑하는 타임로드지만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은 생기는 법이니까. 유명한 휴양지가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되는 것도 이 우주에선 꽤 흔한 일이었다. 내가 알던 어떤 성계는 블랙홀의 트름 한 번에 모든 생명체가 증발해버렸다. 다른 행성은 갑작스럽게 침공한 달렉들에게 말살당한 후 식민지가 되었다. 우주는 질서있고 정교한 시계라기보단 끊임없는 재앙이 밀려드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에 가까운 공간이다. 그리고 리미트는 그런 혼란에 취약했다.
수많은 사람을 찾았다. 그의 현재 컴패니언이었던 유란부터 루치아, 위자드, 말도 걸기 싫던 인테그랄까지. 하지만 리미트의 근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얻을 수 있던 것은 파편화된 정보들 뿐이었다. 마치 그가 갑자기 증발이라도 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리미트의 흔적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사냥꾼들이 그러하듯 사소한 정보들로부터 단서를 얻고, 그 단서를 통해 한 걸음 나아갔다. 끊임없는 추격전. 꼭 암흑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 끝에 빛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미로를 나는 헤매고 또 헤매었다. 하루, 또 하루. 그렇게 시간과의 지지부진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 그 사이에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다. 안내를 받으며 차에서 내리자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행성의 물자와 사람을 올려보내는 궤도 엘리베이터. 저것이 하늘 높이 치솟아 점으로 수렴하는 모습은 몇번을 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엘레베이터는 순식간에 궤도에 떠 있는 정거장에 도착한다. 문이 열리자 장대한 우주가 눈 앞에 드러난다. 한켠에는 별들로 수놓여진 끝없는 밤이 있고, 다른 한켠에는 내가 살았던 행성이 창 하나를 차지한 채 우뚝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우주선을 기다리며 나의 행성이었던 것의 모습을 바라본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곳은 내가 직접 고르고 일군, 내 새로운 고향이었다. 저 땅과 얽힌 추억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행성이 가진 수많은 면모를 좋아했다. 그 드넓은 바다부터, 암석들이 주는 독특한 색과 지형, 그리고 사람들까지. 나는 저 행성에 나의 새 집을 만들었고, 이웃들을 사귀었고… 리미트를 초대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다.
기다리던 우주선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 역시 그들을 따라 여권을 제시하고, 긴 통로를 걷는다. 사람들이 각자의 객실을 찾아 들어간다. 침대에 앉아 트렁크를 내려놓는다. 뒤로 눕자 매트리스가 푹신하게 몸을 받친다.
긴 여행이 될 것이다. 여태까지 겪어본 여행 중에서도 가장 힘든 종류가 될지도 모르지.
나는 창 밖을 한번 힐끔 보고는, 눈을 감는다.
나는 행성에 발을 내딛었다. 모든 정보가 이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른 행성은 여기였다. 즉시 탐문에 나섰다. 이곳이 어디인지, 리미트와 접촉한 사람이 있는지, 이방인에 대한 소문은 없는지. 여기서도 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그를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사람들은 내 질문에 시선을 피하거나, 겁을 먹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아는 리미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 말하는 걸 두려워하게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다급해졌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두렵게 하는지 내막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리미트가 사라진 일과 이 반응들이 이어져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나는 그들의 석연치 않은 대답들로부터 단서를 이끌어냈다. 장소는 한 곳으로 좁혀졌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유령도시.
그곳은 내가 만난 행성민들 중 가장 용기있어 보이는 이들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곳이 재앙이 머무르는 곳이라고 말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모두 나를 말렸다. 최대한 그들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도시를 가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홀로 길을 떠났다.
무너진 건물을 지나치고, 너무 자라버린 풀들을 베었다. 안 좋은 예감이 가시질 않았다. 도시의 중심으로 가야했다. 그곳에는 해답이, 적어도 단서라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였기에 중심까지 가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시는 조용했고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나는 도시의 침묵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 조용함은 그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고요는 오히려 강한 맹수 앞에서 숨조차 죽여버리는 초식동물의 그것과 더 닮아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무언가 위험한 것이 이곳에 존재했다.
내가 이 생각을 한 것과 침묵이 끊긴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디선가 작게 소리다 들려왔다. 분명 내가 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소리의 방향을 따라 달려갔다. 이정도 두려움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리미트를 찾아야만 했다. 그의 행방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곳에 재앙이 있었다.
소리가 이끄는 방향을 향해 달려가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갓 흘린 피처럼 선명한 붉은 색 머리에 마귀라도 되는 양 머리 위를 향해 솟은 뿔, 번뜩이는 연두색 눈까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자였다. 그가 바로 재앙이었다.
재앙은 내 모습을 본 순간 광소를 터뜨렸다.
“아, 호연이네. 안녕, 호연. 오랜만이야.”
나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재앙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직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힌트라도 줄까?”
그는 나를 보며 히죽거렸다. 꼭 자신이 누구인지 유추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정답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을 기다리는 것이거나.
“그렇게 어려워? 그래도 힌트를 꽤 잘 심어놨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내가 알기를 원하는 거지? 그것이 나를 비웃는 모습을 보자 거북한 감정이 올라왔다. 무언가 찜찜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아마 일종의 부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을 믿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답이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결론이었기 때문에.
내 생각이 맞다면, 그의 정체는.
나는 혼란과 알수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대답했다.
“… 리미트.”
재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야.”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뜬다. 내가 누웠던 자리가 전부 축축하다. 난방이 꺼진 건지 객실 안이 춥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온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잠시 그대로 있는다. 등에 천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손이 덜덜 떨린다. 팔에 힘이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거린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욕조에 물을 받고, 기다리는 동안 따로 샤워를 한다. 욕조에서 김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손으로 한번 살짝 물 온도를 재어본다. 물이 더 차오르길 기다리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서서히 욕조에 몸을 담근다. 너무 물을 많이 담았던 걸까, 몸을 담그자 욕조 밖으로 물이 밀려난다. 철썩,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파도의 것과 닮아있는 소리. 나는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는다.
따뜻한 물이 긴장을 풀어준다. 어느덧 나를 잠에서 깨게 만든 공포와 불안은 저 멀리 달아나 있다. 물에 가볍게 손을 휘젓는다. 가볍게 물살이 출렁인다. 조명의 빛이 물결 사이에 내려앉아 반짝인다. 그 광경을 그저 가만히 바라본다.
지친다, 는 생각을 한다. 피곤하다. 이전이라면 내 입에서 나온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지쳐버렸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 자리로 무기력이 고개를 내민다. 설명할 수 없는 탈력감이 나의 몸을 가득 채운다. 밖을 스쳐가는 우주도, 목욕물에서 나는 그리운 향기도, 이제는 따뜻한 물의 온도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겨우 이 정도로 위로받기에 나는, 지나치게 멀리 와버린걸까.
나는 창 밖으로부터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멍하니 본다. 똑, 똑. 샤워 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려온다.
나는 재앙을 증오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미트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괴물. 리미트의 찌꺼기만도 못한 것. 나는 ‘그것’을 리미트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사실에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전의 리미트가 관심 가지고 사랑하던 것은 더 이상 그것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오로지 파괴적인 아름다움만을 추종했다. 그것은 리미트가 두려워했던, 그리고 리미트를 그렇게 만들었던 한 존재의 뒤꽁무니를 추하게 좇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아양을 떨고, 그녀의 애정에 목마른 강아지처럼 헥헥대며 꼬리나 흔드는 그 꼴이란.
하지만 그에게 이 정도로는 리미트를 모독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모양인걸까. 그것은 나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내 눈 앞에서. 내 귓가에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잡고, 그 피비린내를 내게 풍기면서. 그들은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압도적인 재앙을 욕하기보다는 곁에 있던 나를 탓하기를 택했다. 수많은 저주가 나의 귀에 쏟아지듯 밀려들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도 있었지만 요지는 명확했다. 그들에게 나는 저주받은 년이자 악마를 몰고 온 마녀였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였고 상자를 열어버린 판도라였다. 그 안에 담긴 재앙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내가 그것의 옆에 있었다는, 그것을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재앙은 당연하게도 내가 겪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겼다고 봐야겠지. 그는 내가 그 모든 저주를 홀로 받아내는 걸 보면서 크게 웃었다. 자신이 아닌 나를 저주하는 그들의 나약함을 비웃었고, 그들에게 돌을 맞는 내 모습을 즐거워했다. 그것은 내게 끊임없이 속살거렸다.
저걸 봐. 저게 너희들의 나약함이야.
나는 그런 너희가 싫어. 너도 내가 죽을 때 곁에 있지 않았지.
너랑 저들의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해?
‘리미트’는 삶의 끝자락에서 널 원망했어.
너도 결국은, 리미트를 죽인 방관자야.
짐을 정리한다. 옷을 개고, 소지품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빠뜨린 것이 없는지 확인한다. 트렁크를 닫은 다음, 찰칵 소리가 나도록 잠근다. 다시 한번 잘 잠긴건지 뒤집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천천히 우주선의 속도가 느려진다. 무언가에 부드럽게 부딪히는 충격. 그리고.
“행선지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객실해서 하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안내방송이 객실 곳곳에 울려퍼진다. 밖을 내다보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분홍빛이 도는 대기에 행성을 둘러싼 링까지, 내가 떠나온 행성과는 그 어떤 공통점도 보이지 않는다. 우주 안에서도 변방. 겨우 아슬아슬하게 제국의 지배가 닿는, 그럼에도 거의 잊혀진 성계. 은하계의 가장 유명한 소문조차 이곳에서는 모기소리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뿐이다. 기술 발전도, 인프라도 내가 떠나온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곳.
이전이라면 이런 행성을 결코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더 넓은 세상, 더 화려한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도 그러겠지. 결코 재가 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세상에 기억되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어린아이.
하지만 그 아이는 이제 사라졌다. 결코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불도 더 이상 타오르지 않는다. 남은 것은 하얀 잿더미 뿐이다.
너무나도 오래 살아버린 걸까.
천천히 터미널을 가로지른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원한 방관자이고, 겁쟁이며, 비겁자다. 나는 그가 처음 무너졌을 때 곁에 있지 않았다. 그때 그를 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과연 내가 리미트를 구해낸 것인지 의심스럽다. 내가 그를 일으켜세울 수나 있는 사람인지.
그러니 이것은 나약하고 힘없는, 겁쟁이의 선택이다.
In my heart of hearts
내 마음속 깊이
I know that I could never love again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I’ve lost everything
모든 것을 잃었어요
everything
모든 것을
everything that matters to me, matters in this world
나에게 중요한, 이 세상의 중요한 모든 것들을
과거의 연을 정리하고, 내가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을 버려가며 이곳에 왔다. 나는 나의 삶에서, 내가 일군 역사에서 이제 은퇴하고자 한다. 더 이상의 여행도, 모험도 없다. 나는 이 행성에서 서서히 늙고,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로 죽을 것이다.
I wish that I could turn back time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cause now the guilt is all mine
모든 게 내 잘못이잖아요
can’t live without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뢰 없이는
the trust from those you love
살아갈 수가 없어요
어떤 환상을 본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 내가 길에서 내리지 않은 모습을 본다. 그곳에는 나를 따르는 유란이 있고, 분명 이상하지만 다정한 루치아가 있으며, 친절한 위자드가, 짜증나기 그지없는 인테그랄이 있다. 내가 일구어놓은 모든 역사가 나의 뒤를 든든하게 붙든다. 그리고 옆을 보면, 그가 있다.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한때 무너졌지만 다시 돌아온 그. 영원한 나의 동반자가.
I know we can’t forget the past
알고 있어요, 우리는 과거를 잊을 수 없죠
you can’t forget love and pride
사랑과 긍지를 잊을 수 없어요
because of that, it’s kill’in me inside
그 때문에, 내 마음은 죽어가고 있네요
하지만 그 길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이다.
환상이 서서히 무너지고, 다시 협소한 터미널이 드러난다. 깜빡거리는 전등, 닫혀있는 매장들.
밖이 어두컴컴하다. 작은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
나는 그 어둠을 향해 걸어간다.
It all returns to nothing, it just keep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고, 그 모든 것이
tumbling down, tumbling down,
무너져요, 무너져 내려요,
tumbling down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It all returns to nothing, I just keep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고, 난 그저
letting me down, letting me down,
낙심해요, 실의에 빠져,
letting me down
낙심하고 있어요
어둠이 나를 반갑다는 듯 감싸안는다.
It all returns to nothing, I just keep
모든 것이 소용없게 되고, 난 그저
letting me down, letting me down,
낙심해요, 실의에 빠져,
letting me down…
낙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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