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nging Towers of Darillium
2021.05.31
“다릴리움의 노래하는 탑들에 대한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이었다. 호연은 타디스 벽에 기댄 채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리미트로부터 독립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그는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여행자였다. 수많은 장소를 알게 되었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소문이 그의 귀를 거쳐 갔다. 다릴리움, 다릴리움이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호연은 조용히 양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처음 들어봐요.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문득 떠올라서요.
그거 알아요? 평소 그 탑엔 그저 바람 소리만이 울린대요. 그러다 한순간. 그러니까, 바람이 알맞게 부는 어느 완벽한 시간에. 기대감이 서서히 사라지는, 하지만 가장 그 음악이 필요한 때― 노래가 들리는 거예요.”
리미트는 종종 그랬다. 뜻 모를 독백을 하고는, 웃으며 호연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 호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호연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듣고 싶어요?”
“무엇을요?”
“그 탑들이 부르는 노래요.”
“글쎄요…. 언젠가 듣게 된다면 좋지 않을까요.”
리미트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꿈꾸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니면 머나먼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거나. 군청색 눈동자에 담긴 풍경은 지금 여기, 타디스 안이 아니었다. 호연은 그런 리미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같이 가요.”
툭 내던진 말. 상념에서 깨어난 리미트가 문득 호연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호연이 다짐하듯 한 번 더 말했다.
“같이 가자고요. 못 갈 것 없잖아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리미트의 입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가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차분하면서 고요한, 평소와 같은 미소였다.
그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는 시간 여행자였다.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처음 예약을 하러 갔을 때 직원은 앞으로 적어도 4년 동안은 일정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호연은 잠깐의 고민 끝에 예약을 잡고, 볼텍스 조종기의 버튼을 두드렸다. 눈앞에는 그를 환영하며 예약된 자석으로 안내하겠다 말하는 직원이 있었다.
탑이 노래하는 정확한 시간에 맞추는 것은 조금 더 까다로운 문제였다. 호연은 한동안 수많은 문헌을 뒤지고 또 뒤져야 했다. 온갖 키워드를 검색하고, 수많은 자료를 찾아본 끝에야 그는 겨우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했던가?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날짜를 재조정하기 위해 다시 레스토랑을 찾자 그 날짜에 그 좌석은 어렵다는 안내를 받았다. 선 예약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선 예약이 잡히다니. 하지만 이 날짜가 아니면 안 되었다. 호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직원과 다시 이야기했다. 차선책을 택하는 수밖엔 없었다.
시간 여행자의 시간 역시 흐른다. 그저 다른 속도로 흐를 뿐이다. 호연은 이 모든 것을 천천히, 여유를 들여 준비했다. 꼼꼼하게 일정을 확인했고, 다른 해야 할 것들을 다 끝마쳤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다.
호연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옷이 어쩐지 불편하게 느껴졌다. 꽉 끼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지나치게 헐렁한 느낌도 들었다. 간만에 입은 턱시도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빛을 띤 황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금이 간 것처럼 거대한 협곡이 자리했다. 시야의 가장자리에는 솟아오른 단층들도 보였다. 바람은 매캐한 모래를 실은 채 소리를 내며 협곡 사이사이를 떠돌았다. 때때로 크리스탈 층에 부딪힌 바람이 몇 마디의 화음을 내기도 했다.
레스토랑은 시끄러웠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우주를 향해 무한히 뻗어 나간 인류는 기어이 이 행성에도 지구의 명절을 가져왔다. 레스토랑의 곳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흠뻑 내는 장식들이 걸려 있었다. 벽에는 겨우살이 모형을 달고,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듯한 벽난로가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심지어 중앙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 있기도 했다.
연인이나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 축하하는 광경도 보였다. 누군가는 경관을 보며 감탄했고,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호연은 혼자였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그가 앉은 곳은 레스토랑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진 발코니였다. 이곳으로 오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을 뚫고 복도를 지나야만 했다. 호연이 아까부터 계속 흘끔거리던 통로가 바로 그 복도였다.
복도에는 여전히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맨 처음 좌석을 안내해준 웨이터가 물과 메뉴판을 들고 한번 다녀간 것이 전부였다.
톡톡. 호연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긴장하거나 무언가 불만이 있을 때 보이는 특유의 습관이었다.
리미트가 늦을 수도 있었다. 때로 시간 여행자에게는 엇갈림이 필연적이었다. 만났을 때의 서로의 시간대가 어긋나는 것은 일상이요, 심지어는 서로의 처음과 마지막이 이어져 있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이동 중 오차가 생길 수도 있었고, -이건 좋지 않은 경우에 속했지만- 시공간 소용돌이 사이에서 폭풍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리미트는 베테랑이니까.’
금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던 호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그 생각을 날려 보냈다. 이럴 때 가장 안 좋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리미트는 호연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우주를 누비며 살았던 사람이다. 호연은 가볍게 등을 의자에 기댔다. 푹신한 의자가 그의 몸을 사뿐하게 감싸 안았다.
때마침 복도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석 바닥에 단단한 무언가가 가볍게 부딪히는 듯한 소리. 누군가가 발코니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호연은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복도로 향했다.
레스토랑 방향에서 환하게 비치는 빛 덕분에 상대는 실루엣만 겨우 보였다. 키는 한 170 정도 될까,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머리는 짧게 자른 듯 두상에 따라 둥근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발코니의 빛을 받자 상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한복의 저고리를 살짝 서양식으로 바꾼 상의에, 겹겹이 쌓인 천이 항아리처럼 풍성하게 펼쳐진 치마를 입고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푸른빛을 띠는 머리가 걸음걸이에 맞추어 가볍게 흔들렸다. 한 눈에는 모노클, 다른 쪽에는 반가면. 이런 차림을 할 인물은 우주를 통틀어서도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짓궂은 농담은 덤이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그정도였나요? 타디스가 중간에 좀 말썽을 일으켜서….”
“농담이에요! 별로 안 늦었어요. 어서 앉아요.”
의자를 끈 다음 각자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호연은 의자를 끌어당긴 다음 식탁에 턱을 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유란이 요새 대학원 생활 때문에 힘들어하길래 같이 조금 돌아다녔죠. 조선이라든지, 고려라든지….”
“그 친구도 참 고생이 많다니까. 그래도 둘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뭐, 당신이 데려온 컴패니언이니 어련하겠냐마는.”
리미트가 작게 웃었다. 따스한 미소. 그걸 보자 호연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이 사람도, 한결같은 사람이라니까. 아무리 타임로드라지만, 이렇게 변함이 없다니.
“호연은 어떻게 지냈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크리스탈 행성에 가서 거기 수정 애들이랑 좀 놀고, 지구도 간만에 들려보고 그랬죠. 사라센 지방을 한 번 가봤어요. 개성에 살 때도 그쪽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또 그렇게 가보는 건 다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호연은 예전에 중국이나 사라센 쪽에 관심이 좀 있었었죠. 기억나요.”
“아무래도 몇 번 접한 쪽이다 보니 호기심이 생겼었죠. 그러는 리미트는…”
한참을 떠들고 있자니 직원들이 줄줄이 접시를 들고 복도를 걸어왔다. 먼저 애피타이저부터. 걸쭉한 크림 수프와 레몬즙에 재워진 문어를 채소와 함께 샐러드처럼 만든 세비체. 호연은 포크를 들어 세비체에 놓인 방울토마토를 건드렸다. 톡, 하고 토마토가 터지며 즙과 함께 레몬의 상큼한 향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크림 수프 한 입, 그리고 샐러드 한 입, 다시 크림 수프 한 입. 크림 수프의 느끼함과 세비체의 새콤함이 서로의 맛을 균형 있게 잡아주었다.
호연은 메인으로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를, 리미트는 콩으로 만든 라구 파스타를 주문했다. 알맞게 구워진 소고기 위로 짙은 갈색의 소스가 무겁게 얹어져 있었다. 소고기를 썰자 육즙이 풍성하게 쏟아져나왔고, 한 입을 가볍게 깨물자 눅진한 소스와 육즙이 어우러져 쫄깃하면서도 살짝 단맛을 뒤에 남겼다. 고개를 들어 힐끗 보니, 리미트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호연은 적포도주가 담긴 잔으로 가볍게 입가심을 했다. 과연, 단지 경치가 좋은 것만으로 성공한 레스토랑은 아닌 모양이었다.
접시들이 빠르게 오가고, 비워졌다. 어느새 둘은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배가 차자 분위기는 느긋해졌다. 둘은 말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의 바람은 이곳 역시 차가운 편이었다. 식사로 몸을 데우지 않았다면 살짝 추위에 떨었을 온도였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주황빛에 가깝던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저 멀리서 별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하늘에 새하얗게 빛나는 별들. 행성을 두른 거대한 링이 그 사이로 흐릿하게 보였다.
레스토랑 안에서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소리는 서서히 커지더니 화음을 이루었다.
그 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소프라노가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부르는 노래 같기도 했고,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낮아졌다가 서서히 올라갔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다가도 다시 가라앉았다. 흥겨운 음악 같기도, 슬픈 노래 같기도 했다. 호연은 어떻게 단순히 바람이 기둥들 사이를 통과하는 것만으로 이런 음악이 만들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수수께끼 같았다.
곁을 보자 리미트 역시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은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볼 때, 뛰어난 성악가의 노래를 들을 때 그러듯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탑의 노래를 들었다.
노래는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체감상으로 한 시간은 되었을까? 서서히 음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든 화음이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탑이 한 번 울리고 조용해졌을 때, 둘은 드디어 탑의 노래가 끝났음을 알았다.
호연은 바깥 풍경을 보던 시선을 돌려 리미트를 보았다. 마침 그 역시 호연을 보던 참이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호연이었다.
“드디어 듣게 되었네요. 소감이 어때요?”
리미트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탑을 향했다.
“… 마음에 들어요. 이런 느낌이었군요.”
호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대답 하나를 위해 그 모든 준비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푹 꺼지도록 기대며 호연이 말했다.
“사실 리미트라면 한 번쯤 이미 와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요?”
“그야 리미트는 타임로드잖아요?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호연.”
리미트는 가만히 호연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듯 호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리미트는 어쩐지 쓴 웃음을 지었다.
“나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호연은 괜히 입을 삐죽였다.
“나도 알아요.”
“정말이에요. 호연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나는…”
한참이나 부족한걸요. 리미트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마치 말하지 않은 그 속내도 다 안다는 듯 호연이 말을 받았다.
“안다니까요. 그래도 당신이 날 가르친 건 여전한 사실이에요.”
“이제는 호연도 졸업했잖아요.”
“내가 졸업했다고 스승이 스승이 아니게 되나요. 그대는 앞으로도 내 스승일 텐데.”
호연은 황금빛 액체가 일렁이는 잔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살짝 액체로 입을 적셨다.
“앞으로도 우리 관계가 이랬으면 좋겠어요.”
호연이 중얼거렸다.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속삭임이었다. 얼굴에 붉은 기가 도는 게 보였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른 것 같은 모습. 리미트는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호연은 그런 리미트를 보며 씩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가벼우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그럼 됐어요.”
호연은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포크로 떠 입에 넣었다. 접시는 어느새 깨끗이 비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서 살짝 기댄 채로 리미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갈까요?”
가볍게 의자가 끌리는 소리. 리미트는 호연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둘은 천천히 긴 복도를 걸어갔다. 다릴리움의 밤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24년 동안, 이곳에는 해가 비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에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표정은 그 기나긴 밤 동안 함께 무엇을 할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연은 이 레스토랑 옆에 있는 리조트가 가진 편의시설에 대해 신나게 떠들었고, 리미트 역시 같이할만한 것들을 하나씩 제안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이 날은 우주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다릴리움에 온 날이었다. 사람들은 다릴리움의 노래하는 탑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낸 그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하지만 같은 날, 그 24년의 밤을 보낸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우주에 이름을 날리지 않은, 어쩌면 평범하다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이 다릴리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곳에서 24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세상에서 단 둘만이 기억할 수수께끼 같은 24년. 이를 서술하기 위해선 다음 문장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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