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천문대
[OC] 관측자 도어
나는 눈을 떴다. 아주 넓은 도서관에서.
책이 빼곡히 꽂힌 도서관의 한 쪽 벽에 조형물이 하나 있었다. 그 조형물의 주위에는 창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너머의 세계는 우주처럼 빛났다. 우주처럼 빛나는 그 풍경을 보고 있다보면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보다 체구가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 눈동자 색, 옷까지. 피부색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새까만 색으로 이루어진 소녀였다.
나는 잠시 그 소녀와 눈을 마주하다가 물었다. 여긴 어디냐고. 그러면 소녀는 고개를 돌려 우주가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곧 답했다. 이곳은 천문대에요. 도서관이 아니었구나. 단지 천문대라기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고, 책들이 많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도어. 이 천문대의 관측자에요.”
그리 자신을 소개한 소녀는 나에게 물었다. 기억나는 것이 있냐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보니 분명 교통사고가 났었다. 과속하는 트럭에 치여서 나는. 죽은 걸까? 그러면 이곳인 사후 세계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도어가 입을 열었다. 해주실 일이 있어요. 해줄 일? 그게 뭐지? 나는 도어를 바라보았고 도어는 내게 책갈피 하나를 건넸다.
“이제부터 당신은 ‘조연’ 으로서, 이야기의 ‘주연’ 들과 함께 책을 완성시켜야 해요.”
어떤 소재가 생각났다. 동화책 속으로 들어가 악역들을 물리치는 소재의 작품들은 왠지 많았다. 이것도 그런 거려나? 도어는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향할 책은 단 한 권이에요. 그 한 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이끌어서 완성시켜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도어는 이야기했다. 그런 설명들을 듣다 보니,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왜 내가 그걸 해야 하지? 내가 그리 물으면 도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히 이야기했다. 그것이 당신의 역할이니까요. 원하지 않는다면, 죽음 너머의 세계로 가셔야죠. 협박 같았다. 도어는 이게 협박이라는 자각이 없는 듯했다.
“방법은 천천히 설명해드릴거예요. 별로 어렵지는 않아요. 하라는 것만 잘 하시면 되거든요. 가능성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관측하는 건 행운이니까. 기왕이면 즐기세요.”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죽음 너머의 세계.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조연을 뽑는다는 것, 그리고 나는 죽는다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좀 오래 살고 싶었다. 도어는 나에게 이야기했다. 책의 한 챕터를 완성시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 보상은 순수히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한 챕터? 한 권에 몇 챕터가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고 해서 손해볼만한 제안은 아니었다. 책을 완성하면 살려서 돌려보내주려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의미였다. 도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이제부터 특정 ‘조연’ 이 될 거예요. 조건을 만족하면 당신이 맡을 역은 달라질 거고, 역할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니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니까, 직업이나 나이. 이름 같은거요.”
말 그대로 책으로 들어가면 책의 ‘등장인물’ 이 된다는 뜻이었다. 연기할 배역은 매번 달라진다는 뜻이었고. 연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도어는 마주할 주연들에 대한 정보도 맡을 배역이 아는 만큼은 알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가능성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관측하는 건 행운’ 이라고 도어가 그랬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물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책으로 가야 하냐고. 도어는 조형물에 가까이 걸어갔다. 그러고는 조형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꺼운 책 하나가 나타났다.
“천문대에서 제일 완벽한 책인 ‘레인시티’ 라는 책이에요.”
그 책의 세계로 나는 떠날 것이었다. 도어는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 번 체험해보는 게 나을 거라면서 내 손에 한 수첩을 쥐여주었다. 이 수첩을 통해 해야 할 일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전해줄 거라고 도어는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도어를 바라보았다. 레인시티라는 책은 무슨 책이냐고 물으며. 도어는 평범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판타지라고 보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세한 건 직접 판단하라는 매정한 말과 함께 도어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부디 잘 부탁드려요. 위험할 때는 자신이 개입할거라고도, 이야기가 잘못 흘러가면 제지도 할 거라고 도어는 이야기했다. 그러면 직접 하지 왜 나를? 그런 의문도 잠시, 주위가 새하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때가 되면, 직접 선택하고 개입하실 필요가 있을 거예요.”
언제 끝날지도 모를 여정이 그리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마치 신의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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