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범을 지향하기에 평범을 사랑하기에 (1)
[OC] 유이, 오로라, 레벤, 시안
빛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어떤 마을의 길거리에 서 있었다. 주위에는 거대한 빌딩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제일 높아보이는 건물도 탑이었지 빌딩 수준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약간 아기자기한 마을 느낌인가? 나는 수첩부터 펼쳤다. Chapter 1이라고 쓰인 첫 페이지에 날짜가 적혀져 있었다.
30년 3월 4일
30년? 수첩 밑에 글이 적혀져 있었다. ‘본디 이 시간은 다른 년도이지만, 직관적으로 현재의 시간을 이해시키기 위해 평균적으로 자주 도착하게 될 시간대를 30년으로 칭한다’ 라고 적혀져 있었다. 왜 굳이 30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이대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30년대를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제일 무난할 것 같았으니까. 나는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조연’ 이라고 적힌 프로필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연기하는 역할의 정보겠지.
내가 연기할 역할은 델린 고교라는 고등학교의 3학년 학생인 것 같았다. 그걸 제외하면 눈에 띄는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아마도 중요한 건 내가 만나게 될 주연에 대한 정보가 아닐까? 한 페이지를 넘기자 주연 한 사람의 프로필이 있었다. ‘챕터 주연’ 이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35번 주연 유이. 알토 팀. 30년 기준 19세. 땋아 내린 흑색 머리카락에 새까만 흑색 눈을 가지고 안경을 쓴 소녀. 델린 고교 재학생. 번호의 의미는 뭐지? 알토 팀이라는 건 뭐고? 나중에 도어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어쨌든 유이는 내가 연기할 배역과는 같은 반인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느릿 깜빡였다가 수첩을 덮었다. 고개를 돌리면 나와 같은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델린 고교 재학생들이겠지. 나는 인파에 묻혀 그들을 따라갔다.
금세 정문에 도착하고, 나는 배역의 반에 도착했다. 반이 시끌벅적했다. 한쪽에 유이가 앉아있었는데 그것보다는 이 시끌벅적한 공기가 궁금했다.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이 무슨 대화를 하나 하고 엿들었다. 곧 반장선거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들의 입에서는 두 사람의 이름이 올랐다. 레벤과 시안. 그러나 이 둘이 반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의견이었다. 왜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수첩을 펼쳤다. 왠지 이 수첩 내에 의문의 답이 나와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수첩에는 답이 적혀져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학생회이다
그 문구를 보자 저절로 납득이 갔다. 그러면 반장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지금 이 반의 주 대화 소재는 ‘반장’ 인 것 같았다. 그리고 유이는 그 이야기에 끼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연으로서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고 어디까지 방관해야 하지? 아직 그 의문은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였다. 혹시 유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수첩에 그런 내용은 없었으니 괜찮을거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유이를 바라보았다.
“실례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나는 식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나 길을 막고 있었구나. 내 눈에 들어온 이는 차갑고 시린 인상의, 티끌 없이 맑은 하얀색 눈과 짧은 하얀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소녀의 귀에는 마치 미디어매체의 로봇들이 달 법한 헤드셋 같은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하얀 소녀는 날 보다 유이를 가리켰다. 용건이 있어서요.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유이 쪽으로 다가갔다. 한참 창 밖만을 바라보던 유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가 찾아. 그리 이야기하며 하얀 소녀를 가리키자 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소녀에게 다가갔다. 어쩌면 앞으로의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유이의 뒤를 따랐다. 얼떨결에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 되었다. 엿듣는 게 아니라고 부정은 못 하겠지만.
“유이. 입후보 안 합니까?”
“응. 안 하려고.”
“왜입니까? 유이라면 충분히 반장의 자질이.”
“나 말고도 충분히 많아. 오히려 이러는 게 평범해서 좋고.”
하얀 소녀가 유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혹시나 싶어 수첩을 펼쳤다. 역시나 하얀 소녀에 대한 것이 적혀져 있었다. 33번 주연 오로라. 알토 팀. 유이하고는 다른 반이었다. 그렇지만 유이하고 같은 팀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팀이 뭔진 모르겠지만 저 둘의 이해관계는 왠지 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번 챕터를 완성시키는데에 오로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보니. 나 지금 상황을 과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 상관은 없나?
둘의 이야기에 집중하다가 문득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반에 인기스타라도 들어온 건지 다들 활기차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두 명의 소년이 있었다. 묶은 금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분홍빛 눈동자의 소년. 자신만만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친구도 무지 많을 것 같은 인상. 그 뒤에는 청빛의 머리카락, 정확히는 안쪽이 탁한 적빛으로 되어있는 두 겹의 머리카락 색을 가진 주황빛 눈동자의 소년이었다. 아마도 저 둘이 ‘레벤’ 과 ‘시안’ 이 아닐까 싶었다. 청빛 소년은 금방 자리에 가서 앉았고 금빛 소년은 학생들의 사이에서 떠들었다. 유이는 그 풍경을 지켜보다가 오로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건 특별하잖아.”
오로라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유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 문득 오로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엿듣고 있었던 게 들켰나 싶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어쨌든 잘 고민해보십시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로라는 자리를 떠나갔다.
하교 시간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델린 고교라는 학교는 조금 특이하게 굴러갔다. 어쩌면 이 세계의 학교는 전부 그런 걸까? 학생회로 보이는 레벤과 시안—이 두 사람도 주연이었다. 차례대로 5번 주연이자 프레쥬 팀. 13번 주연이자 버드 팀이었다—은 수업 시간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수업보다 자유시간 즉 쉬는시간이 길었고 수업도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강했다. 내가 살던 세계의 수업이 교사들의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이 레인시티라는 세계의 수업은 학생들이 스스로 해낸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델린 고교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일단.
그리고 일은 하교 시간에 터졌다. 당신.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오로라가 있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오로라는 여전히 교실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이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유이와 관련된 부탁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연인 내가 주연과 이렇게 얽혀도 되나? 하지만 아직 도어가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제재가 아직 가해지지 않았다. 그러면 괜찮은 게 아닐까. 원래 이야기는 주연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도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 씨가 반장선거에 나갈 수 있게 해주십시요.”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임무는 너무나도 각박해보였다. 오로라는 대책이라던가 방법에 대해서는 내게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작전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오로라는 이야기했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유이를 설득해달라는게 오로라의 부탁이었다. 단지 내게는 궁금한 것이 따로 있었다.
“왜 유이가 반장선거에 나가게 하려는 거야?”
내 질문에 오로라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굳이 ‘팀’ 이라는 이름으로 엮인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강한 결속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닐까?
“유이의 ‘평범한’ 능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 배역은 자취를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편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추가로 생긴 내용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첩에는 없던 내용이 몇 개 생겼다. 먼저 델린 고교 주위의 간략한 지도. 그리고 사람들은 이 도시를 ‘시티’ 라고 부른다는 것과 시티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내용.
도어가 준 책갈피는 살짝 건드리면 펜으로 쓸 수도 있었다. 구조가 어떻게 되먹은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하고자 했다. 이 책갈피로 수첩에 무언가를 남기면 수첩이 그에 반응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방금 레벤과 시안의 이름을 적었을 때 그들의 간략한—너무나도— 프로필이 다음 페이지에 생겨나기도 했으니까. 다만 ‘유이를 반장선거에 내보내는 방법’ 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 같았다. 수첩의 기준이 뭔진 모르겠지만 수첩을 이용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루가 저물다보니 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 를 모른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수첩 페이지를 무심결에 넘기고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본디 작품이라는 건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법
그건 그렇지만. 뭔가 외로웠다. 오로라가 부탁을 맡긴 이는 내가 아니다. 내가 연기하는 배역이다. 앞으로 나는 수많은 챕터를 이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배역이 교체되겠지. 나를 알아봐주는 건 도어가 유일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괜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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