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범을 지향하기에 평범을 사랑하기에 (2)
[OC] 유이, 레벤, 시안 | 셰일
30년 3월 5일.
화요일이었다. 어제 달력을 좀 살펴봤는데 이 시티에서는 윤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편의상’ 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도 어김없이 등교했다. 오로라에게 받았던 부탁은 도대체 어떻게 해내야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제의 대화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평범해서 좋다. 평범해서 좋다. 아무래도 반장은 평범한 존재는 아니다. 모두의 앞에 나서야 하는 존재였으니까. 어제의 델린 고교를 떠올리면 절대 반장은 쉬운 직위가 아닐 것이다. 절대로. 그리 확신했기에 오로라의 말이 미심쩍었다. 평범한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반에 들어서자 레벤이 무언가를 나눠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벤은 내게도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학급반장 신청에 대한 안내사항‘ 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1학년에서 학급반장 때문에 문제가 좀 있었어서. 그리고 우리 반에 지원자가 한 명도 없길래 홍보 겸 돌리고 있었어.”
넌 추천할 후보 없어? 레벤이 태연히 내게 물었다. 수첩에 적혀있던 내용에 따르면 레벤은 이 델린 고교의 학생회장이었다. 시안은 부학생회장. 학생회의 두 머리가 한 반에 모여있는 꼴이었다. 배역의 집에 있던 노트북으로 검색한 결과에 따르면 서기도 있는 듯 하지만 우선 서기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자. 나는 생각해보겠다면서 레벤에게서 안내서를 받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위를 조금 살폈다. 대충 이 반에서 학급반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했다.
잠시간의 염탐 끝에 학생회의 대표 두 사람이 있는 반의 공기는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저렇게 대단한 애들이 있는데 학급반장 하면 비교당하는 거 아냐?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레벤과 시안. 두 사람도 괜히 학생회의 대표가 아닐 것이었다. 이 반은 학급반장이 없어도 잘 굴러갈 것 같았다. 레벤과 시안이 있으니까. 하지만 안내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필수적으로 반마다 학생회 소속이 아닌 학급반장을 한 사람 선출’ . 그래. 주요 키워드는 ‘필수적으로’ 와 ‘학생회 소속이 아닌’ 이다. 레벤과 시안은 학급반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둘이 아닌 다른 학생들—어쩌면 다른 이들 중에서도 학생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단역은 중요하지 않으니— 중에서 학급반장이 나와야 했다. 옆 반의 오로라는 유이가 그 일을 맡기를 바라는 것 같았고.
“정숙!”
레벤의 목소리가 반에 퍼졌다. 레벤이 교탁 앞에 나와 있었고 시안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반 학생들이 두 사람을 주목했다.
“우리 반에 학급반장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눠준 안내서대로 각 반마다 학급반장은 필수로 선출해야 해. 그래서 우리 반만 특별히! 시간을 써서 지원자를 추천받을 거야.”
레벤은 ‘특별히’ 를 강조했다. 그만큼 학급반장이 중요한 위치라는 건 알겠다. 안내서를 읽어본 결과 학급반장은 학생회와 비슷한 권력을 가지고 학생회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반의 모든 계획과 일정과 목표, 소망 등의. 그러니까, 사실상 반의 모든 것들을 관리해내는 것도 학급반장의 역할이다. 학생회장만큼의 권한이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반 내에서는 말이다. 그나저나 레벤은 이유를 모르고 있구나. 네 탓인데도. 아니, ‘탓’ 이라는 단어는 좀 과격해보이나.
어쨌든 레벤은 지원자! 라고 외치면서 손을 들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우선 나는 조연이다. 함부러 손을 들어선 안됐다. 그런데 그건 다른 단역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이도 손을 들고 있지 않았다. 제발 들어주면 안 될까. 하지만 쉽게 들어줄 것 같진 않았다.
레벤은 그러면 추천을 받겠다고 이야기했다. 추천을 받겠다는 말에도 딱히 손을 드는 학생은 없었다. 내가 여기서 유이를 추천하면 되나?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진 감히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내가 손을 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내 앞에 있는 애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래. 셰일?”
“유이를 추천할게, 회장!”
이어지는 한 마디에 솔직히 꽤 놀랐다. 당황한 건 유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셰일. 얘도 주연인가? 수첩을 펼치자 셰일은 ‘단역’ 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번호도 없었고 팀에 대한 내용도 없었다. 조연과 단역의 차이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유이는 후보에 올랐다. 시안이 유이의 이름을 칠판에 적으면 유이도 문득 손을 들었다. 셰일을 추천할게. 레벤은 눈을 깜빡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셰일의 이름도 칠판에 적혔다. 얼떨결에 셰일과 유이가 대립하는 형태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추천한 구조였지만. 시안이 앞에서 레벤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보통 주역과 단역의 대결이라면 주역이 이기는 구조가 많다. 혹은 단역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나중에 복수한다던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자의 결과가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쨌든 오로라가 부탁한대로 반장선거에 유이를 내보내는 것은 성공했다. 이번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오로라를 만나러 옆 반으로 가려고 뒷문을 열었다. 뒷문 옆에 오로라가 서 있었다. 순간 엄청나게 놀랐다. 그러니까,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유이는 입후보했습니까?”
오로라의 말에 나는 잠시 주저했다. 유이가 스스로 입후보한 건 아니긴 한데…. 오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칠판을 힐긋 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한 건 아니군요. 유이가 한 것도 아니고요. 그 말에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오로라는 목적을 이뤘으니 상관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내 착각일까? 오로라는 날 보다가 물었다. 혹시 레벤과 시안을 봤냐고. 그러고보니 입후보가 끝나고 나가는 걸 봤던 것 같긴 했다. 그 말을 오로라에게 전하면 오로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오로라는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도어가 주었던 책갈피를 힐긋 바라보았다. 반장선거를 내보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쉽게 끝나도 되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복도를 무신경하게 걸었다. 어차피 쉬는 시간이 기니까 이 참에 학교 지리나 알아둘까. 하는 마음으로 나는 건물 바깥으로 향했다. 그때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레벤이었다. 바로 코 앞에 있을 것 같은 거리에서 들려왔다. 어디서 들려왔나 싶었더니 건물 바로 옆인 것 같았다. 슬금슬금 그쪽으로 걸어가서 내용을 엿들었다. 나쁜 건 알지만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섞여 들려왔다.
“반장을 선출하는 권한은 학생회에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반의 학생들이 결정하는 거라고.”
“선거가 인기투표가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어?”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뽑는 것보다는 자기들이 직접 뽑는 편이 더 의미가 깊지 않을까.”
“그러다가 의미 같은 거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면?”
상대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번 반장선거에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레벤은 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 같았고 상대는 학생회에서 임의로 선출하자는 것 같았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어쩌면 여기에 ‘상대’ 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서. 페이지를 넘기던 순간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수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내 손에 들린 수첩이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자 긴 백발의 누군가가 내 수첩을 들고 도망가고 있었다. 잠깐만.
“야!”
내가 크게 외치면 레벤과 누군가의 대화도 끊겼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수첩을 돌려받아야 한다. 나는 재빠르게 달렸다. 다만 이 배역의 신체능력은 마냥 좋지 못했다. 그에 비해서 도둑 학생의 달리기는 굉장히 빨랐다. 결국 오래 쫓아가지도 못하고 나는 수첩을 도둑맞게 되었다. 저게 없으면 정보를 쉽게 얻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 내용을 생각하면 나를 스토커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내가 아니고 배역이긴 한데. 그런게 중요한가 지금!
어쨌든 그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도 보지 못하고 나는 멈춰섰다. 남은 건 도어가 주었던 책갈피 뿐이었다. 이건 도대체 어디에 부탁해야 하는 걸까. 도둑 학생이 누군지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먼저 긴 백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복을 리폼한 건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게 전부다.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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