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무제

캐비닛을 열었다. 입소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교복이 가지런하게 걸려 있었다. 씌워져 있던 비닐을 벗겨내자 드라이를 마친 옷 특유의 탁한 석유 냄새가 났다. 빳빳한 소매를 한참 만지작대다 어색한 몸짓으로 팔을 꿰었다. 고작 수개월 입지 않았을 뿐인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이상할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캐비닛 안쪽,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거울에 맺힌 제 얼굴을 멀거니 들여보던 이사기는 소리 나게 캐비닛을 닫았다. 그런 후에는 곧장 칼주름이 잡힌 바지에 다리를 밀어 넣고 블레이저를 걸쳤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복을 입은 바치라가 보였다. 노란 눈동자가 물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휴가 때 뭐 하고 놀까? 블루록의 수감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기발랄한 목소리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사기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현실을 인지했다. 푸른 감옥은 승리했고, 수감자들에게는 포상이 주어졌다. 휴가였다.

일정표를 내려다보던 이사기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정해진 훈련을 소화해야만 했던 지난 몇 달이 꿈처럼 느껴졌다. 전달받은 일정은 달랑 하나였다. 오전 10시까지 퇴소 준비.

아침이 되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간에 바치라를 흔들어 깨운 이사기는 식당에 들어선 다음에야 오늘이 퇴소일임을 깨달았다. 막 잠에서 깬 이들로 복작대야 할 식당이 전에 없이 한산했던 탓이다. 생소한 풍경에 자리에 멈춘 채로 눈만 끔뻑였다. 모르긴 몰라도 적잖이 멍청한 꼴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드는 치기리의 입꼬리가 묘하게 실룩이고 있었다. 이사기는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고 선 채 졸고 있는 바치라를 잡아끌었다. 식사를 들고서는 치기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가라는 걸 깜빡해서. 인사를 대신해 건네어진 문장에 겸연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사기는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눈도 뜨지 못한 바치라를 곁눈질했다. 별반 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동그래진 눈으로 바치라를 바라보던 치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실에 들어갈 즈음엔 내동 비척대던 바치라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퇴소까지 두 시간가량이 남은 시점이었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콘솔도 없는 최첨단 시설에서 시간을 죽일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셋은 약속이나 한 듯 가까운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기장 구석에 비치된 축구공 하나를 꺼낸 바치라가 그것을 이사기에게 던졌다. 가볍게 뛰어 가슴으로 공을 받아낸 이사기가 치기리에게 공을 보냈다. 공을 넘겨받은 치기리가 말문을 열었다. 승리의 기쁨을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된 대화의 가운데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인 선수의 이름이 몇 오갔다. 대부분은 블루록 내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부류였다. 이토시 사에, 이토시 린, 나기 세이시로, 이사기 요이치, 그리고 시도 류세이. 바치라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치기리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돌리려던 이사기는 문득 대표팀과의 경기 전 치렀던 적성시험을 떠올렸다. 당시 시도 류세이는 골대의 방향을 확인도 하지 않고 슛을 쏴 득점을 냈다. 그런 게 가능한가? 이사기의 물음에 힘없이 굴러온 축구공을 발등에 얹은 치기리가 비죽 웃었다. 가능의 여부를 따지고 들면……. 린의 볼 컨트롤 능력이나 나기의 트래핑은 연습으로 가능한 영역에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이사기는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좁아터진 블루록 안에서도 천재는 차고 넘쳤다. 불편한 침묵이 깔렸다. 정적을 깬 건 바치라였다. 치기리의 발등에 놓인 축구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불쑥 제안했다. 해보자.

‘해볼’ 법한 기술은 크게 두 갈래였다. 나기가 선보인 기예에 가까운 트래핑과 린의 신들린 듯한 볼 컨트롤. 나기의 트래핑을 재현하는 일에 열을 올리던 셋은 약 20분이 지난 후 타깃을 변경했다. 그리고 난관에 봉착했다. 눈에 띄게 화려한 만큼 특징이 두드러지는 나기와 달리 린은 모든 능력이 고르게 발달한, 꽉 찬 육각형의 플레이어였다. 기본 능력치가 좋은 만큼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는 데다 운동지능까지 높아 특별한 기술 없이도 득점을 내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경기 외적으로 흉내 내 봄 직한 개인기를 떠올리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차낸 공 두 개를 공중에서 충돌시키던 묘기였는데, 그쪽은 따라 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같은 장면을 떠올린 것일까. 공 하나를 손에 쥔 채 멀리 있는 공을 노려보던 바치라가 공을 떨어뜨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축구공으로 감시카메라 맞추기 하자. 미간을 좁힌 치기리가 미친놈 보듯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 앞에 놓인 축구공을 건드려 치운 이사기가 부연했다. 에고가 전기충격으로 널 구워 버릴걸. 그 말에 무언가를 고민하듯 감시카메라를 응시하던 바치라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전기충격에 대한 공포가 감시카메라 맞추기 게임에 대한 욕구를 이긴 것 같았다.

아홉 시가 지나자 식당과 샤워실을 비롯한 편의 시설에도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남는 시간을 죽일 방법을 찾지 못한 무리가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레오도 그중 하나였다. 어쩐지 허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고민하던 이사기는 그 뒤에 금붕어 똥처럼 붙어있어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기는? 이사기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한 레오가 발치로 굴러온 축구공을 툭 차올렸다. 안 먹고 자겠대. 2:2 할래? 레오를 포함해 넷이 된 무리가 팀을 나누기 시작할 즘엔 복도 역시 소란스러워졌다. 와이셔츠 왜 이렇게 끼냐? 근육 좀 붙었나? 나 키 컸나 봐, 바지가 짧아. 드라이 잘못한 거 아니고? 바지 내놔! 소란의 가운데에는 팬티만 입고 복도를 질주하는 이가라시가 있었다. 바치라가 재미있단 듯 문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가까이에 있던 치기리가 그에게 다가가 목덜미를 당겼다. 경기장 안으로 빠끔하게 비추는 붉은 머리칼을 발견한 이가라시가 급히 뜀박질을 멈췄다. 그가 치기리를 붙들고 말했다. 교복 바지를 되찾는 데 그의 빠른 다리가 필요하다고. 팬티 위에 단추도 잠그지 않은 와이셔츠 하나만을 달랑 걸친 이가라시를 차가운 눈으로 훑어내린 치기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타 고등학교의 쉬는 시간과 유사한 풍경이었다. 일시적이나마 경쟁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 블루록의 수감자들은 보통의 고등학생과 다르지 않게 보였다. 물론,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치들은 있기 마련이었지만.

신장이 190cm에 가까운 이들도 적잖은 블루록에서도 그는 유난히 키가 크다는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 옆에 붙어있는 것이 195cm에 육박하는 아류인데도 그랬다. 처음에는 인상 탓인가 했다. 전국에서 날다 긴다고 하는 스트라이커 포지션의 고등학생을 박박 긁어모은 블루록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재능이나 차가운 분위기 같은 것이 그를 더 커 보이게 만드는 건 아닐까. 감상적인 추측에 레오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흘겼다. 무슨 헛소리야. 쟤, 그냥 비율이 좋잖아. 레오의 지적에 이사기는 약한 탄성을 흘렸다. 조막만 한 얼굴 하며 길쭉한 팔다리까지. 교복을 입은 이토시 린은 축구선수가 아닌 어딘가의 모델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성격 하나만 빼면 완벽한 놈이다. 시선을 느낀 린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블루록의 입구가 열렸다. 열 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의문보다도 먼저, 누군가의 외침이 귀에 와 박혔다. 눈이다!

세상이 온통 하얬다. 창문 하나 없는 밀폐 건물에 있다 보니 바깥의 날씨가 어떤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미 발이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는데 하늘에서는 그치지도 않고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거기에 감탄하기도 전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눈덩이를 피한 이사기가 주변을 살폈다. 이미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방이 막힌 건물에서 훈련을 거듭하던 혈기 왕성한 10대 남학생들은 이날을 기다린 것처럼 눈밭을 질주했다. 린은 가만히 문가에 선 채였다. 이사기는 흘낏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참 소맷자락을 만지작대던 린이 블레이저를 벗어 옆구리에 끼웠다.

“안 입어?”

“신경 꺼.”

영하의 바람이 포근하게 느껴질 만큼 싸늘한 대꾸였다. 어색하게 눈을 돌리던 이사기의 시선이 문득 그의 발치에 미쳤다. 교복 바지가 묘하게 짤막했다.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가 눈에 와 박혔다.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린 이사기는 제 교복 자락을 확인했다. 옷이 작아진 기미는 없었다. 입소 후 몇 달 사이 키가 큰 것이 분명했다. 부러운 놈. 혓바닥까지 올라온 질투심을 삼킨 이사기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눈덩이가 날아들었다. 눈덩이 중 하나는 간 크게도 린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고개를 비틀어 눈덩이를 피한 린이 눈을 부라렸다. 양 손끝을 발갛게 물들인 바치라가 헤죽 웃었다. 헤이, 아이 캔 플레이! 당최 의미를 알 수 없는 영 문장을 구사한 바치라가 한쪽 팔을 힘껏 휘둘렀다. 잘 뭉친 눈덩이가 재차 린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를 간 린이 들고 있던 겉옷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눈밭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린은 바치라의 장난질에 어울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움켜쥔 주먹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눈싸움이 아닌 주먹싸움임을 모를 리 없건만. 블루록 내에서 나사 빠진 개수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치라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버스를 엄폐물 삼은 바치라가 잽싸게 눈을 뭉쳐 던졌다. 바치라의 장난에 몇몇이 가담했다. 날아드는 눈덩이에 접근이 어려워졌다. 린은 혀를 차며 가까이 있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시작된 눈싸움을 막을 길은 요원했다.

눈싸움은 오래 이어졌고 귀가는 무산되었다. 버스 운행에 차질이 생겼다고 했다. 인적이 드문 산중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제설도 쉽지는 않겠지. 이사기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긴 숨을 뱉었다. 부연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밤새 눈이 그쳤다. 산에서 내려가는 도로의 눈 역시 버스를 운행할 정도로는 치워진 상태라고 했다. 캐비닛에는 전날 눈싸움으로 엉망이 되었던 교복과 운동화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몇 달 새 몸에 익은 습관대로 새벽같이 일어나 훈련을 준비하던 무리 역시 오늘만큼은 느지막한 시간에 눈을 떴다. 거기에 린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 훈련의 강도로 바로에 비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인 그가 늦잠을 잤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이사기는 식사 중인 린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막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음식에 손을 댄 흔적이 거의 없다. 식사도 훈련의 연장이라며 매끼 균형 잡힌 식단을 고수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백색광 아래 드러난 얼굴이 묘하게 창백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사기가 식당을 벗어나려는 린을 붙들었다. 마주한 눈동자는 싸늘하다 못해 살벌했다. 식판을 쥔 손에 파란 힘줄이 돋은 것이, 곧 이사기의 얼굴에 식판을 내리꽂을 기세였다. 이사기에게는 다행하게도, 린이 생각한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보다 그의 결단이 빨랐다. 뻗은 손이 하얀 이마에 닿았다. 손바닥 아래가 뜨끈했다. 그 길로 의무실을 찾았다. 손목이 붙들린 린은 이상하리만치 고분고분했다. 반항할 기운조차 남지 않은 것인지, 선수로써 응당 해야 할 자기관리에 생각이 미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의 목에는 스태프 카드가 걸려 있었다. 열을 재고 증상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단조로웠다. 의자에 앉은 린은 차분한 태도로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보호자라도 되는 양 그의 곁에 섰던 이사기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노상 올려다보았던 얼굴이 저만치 아래에 있었다. 생소한 기분이었다. 가늘고 결이 좋은 까만 머리칼, 섬세하고 수려한 얼굴, 길고 촘촘한 속눈썹, 눈을 깜빡일 적마다 느리게 물결치는 청록의 눈동자…. 열이 오르기 전 약을 먹고 며칠간은 푹 쉴 것. 때마침 약을 찾아 건네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린이 몸을 일으켰다. 들었던 손을 거둬들인 이사기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하얀 와이셔츠 위로 빠끔한 목덜미가 서늘해 보였다. 목도리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짧은 순간 손가락을 스친 감각이 선연했다.

방으로 돌아간 린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침대에 누웠다. 멀리서 소란이 일었다. 얇은 교복 대신 블루록에서 지급하는 트레이닝복과 롱패딩으로 단단하게 무장한 수감자들이 2차전을 벌이는 소리였다. 즐거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고민하던 이사기는 맞은편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린이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시선이 얽힌 건 짧은 순간이었다. 동요 없이 그를 마주하던 린은 무심히 눈을 감았다. 좁은 방에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어찼다. 거기에 전염이라도 된 양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건 꼭 신음 같았다. 깜빡 잠이 들었던 이사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 흰 가슴팍이 느리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가늘게 흐르는 호흡의 가운데 마른기침이 섞인 채였다. 혹시 약이나 물을 찾는 건 아닐까. 린, 뭐 필요해?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어렵지 않게 약 봉투를 찾아 쥔 이사기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가만 고요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잠든 이의 입술이 무언가를 토해냈다. 아스라한 겨울바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꿈을 꾸는 듯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이사기가 그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신음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한 속삭임이었다. 울고 있는 걸까. 이사기는 한 꺼풀 어둠에 감춰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린은 한쪽 팔로 눈가를 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오전 나절의 어느 충동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든 이의 얼굴을 들춰내려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열렸다. 그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애처럼 심장이 뛰었다. 문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기다란 패딩을 걸친 나기가 잠든 린과 그 침대 가에 선 이사기를 느리게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한 듯한 나기가 린을 가리키며 소리 없이 입을 달싹였다. 많이, 아프대? 커다랗게 움직이는 입 모양을 읽어낸 이사기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래. 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기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곤 얼마 전까지 그가 앉아있던 침대 끝에 궁둥이를 붙였다. 이사기는 조용히 그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한참 눈밭을 헤집다 온 이의 곁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어둠이 눈처럼 내린 실내에 얇은 숨소리만이 소복소복 쌓였다. 이사기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린을 응시했다. 찰나의 흐느낌이 거짓인 듯 굳게 다물린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자 블루록 전체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린은 투정 한번 없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를 깨우기 위해 뻗었던 손이 어색하게 허공을 헤매다 아래로 떨어졌다. 먼저 방을 빠져나갔던 나기가 롱패딩 두 벌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사기와 린의 몫이었다. 짧은 한숨을 내쉬며 패딩을 걸친 린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방을 나섰다. 몇 달 사이 그 쌀쌀맞은 태도가 익숙해진 것일까. 멀뚱히 시선을 마주한 이사기와 나기는 서운한 기색도 없이 린의 뒤를 따랐다.

방송이 시작된 뒤에야 교복을 갈아입기 시작한 무리로 복도가 어지러웠다. 린은 일찌감치 복도를 빠져나간 후였다. 그를 따라 혼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비집던 이사기는 새하얀 눈밭에서 유독 이질적인 얼굴을 발견했다. 세상이 온통 겨울인데 저 혼자 여름인 듯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시도 류세이. 이사기가 그 이름을 떠올린 것과 동시에, 샐쭉 미소를 지어 보인 시도가 린에게 다가갔다. 오전 내내 무표정하던 린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물론 좋은 쪽은 아니었다. 그는 린이 뭐라기도 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린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잘 가, 린린.”

“린린이라고 부르지 마.”

린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털었다. 감기 탓에 평소보다 힘이 부족했던 것인지, 시도가 생각보다 끈질겼던 것인지. 큰 소득은 없었다. 시도는 숫제 린을 끌어안다시피 한 채였다. 무슨 생각인지 린의 얼굴을 빤히 들여보던 그는 나름의 상냥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사에한테 안부 전해줘, 린린.”

내도록 가라앉아있던 눈에 불이 켜졌다. 린은 곧장 시도의 얼굴에 대고 주먹을 날렸다. 날렵하게 몸을 피한 시도가 곧게 뻗은 린의 팔을 붙잡아 던졌다. 린은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시도는 세 걸음 정도 멀어진 린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싸움을 말리기 위해 거리를 좁히던 이사기는 린이 씹어 뱉은 문장에 귀를 의심했다. 예쁘장한 열여섯 소년에게서 비롯되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욕설이었다. 그가 강렬한 괴리감에 멈춰 선 사이 시도에게 달려든 린이 늘씬한 다리를 휘둘렀다. 시도는 어렵지 않게 린의 발목을 붙들었고, 곧장 반대쪽 팔꿈치를 접어 올렸다.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렸다. 저놈은 진정 미친 새끼였다. 린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들 때부터 알았다. 내버려 두었다간 린의 다리가 부러질 판이었다. 이사기는 질겁하며 소리쳤다. 안돼! 무언가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용히 싸움을 관전하던 나기가 이사기를 제치고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 요령껏 시도의 팔꿈치를 붙잡은 나기가 그를 눈밭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신장 190을 넘는 운동계 청소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시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가까운 곳에 주저앉아있던 린이 몸을 일으켰다. 시도를 반쯤 끌어안은 채로 엎어져 있던 나기가 눈을 뱉으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손을 털며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다. 적연하던 비취색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튀고 있었다. 아…. 상황을 파악한 나기가 짧게 신음했다. 린은 나기에게 제압당해 눈바닥에 대자로 누운 시도의 얼굴에 대고 다짜고짜 발을 들었다. 블루록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질머리다웠다. 이사기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린의 허리를 뒤로 당겼다. 뒤늦게 난리 통을 알아차린 바치라와 아류가 달려와 그를 도왔다.

“이거 안 놔?”

“놓으면! 죽이게?!”

린은 다른 대꾸 없이 제 몸에 붙은 팔들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는 정말로 시도를 죽일 기세였다. 바닥에 누운 놈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시도의 반항이 격렬해지자 기어코 그 유순하다는 나기 세이시로의 입에서도 욕설이 터졌다. 어느새 나타난 레오와 카라스가 나기를 도와 시도를 끌어냈다. 세 명에게 붙들린 시도가 주차되어 있던 버스 안으로 사라졌다. 버스가 두 대인 것이 다행이었다. 린은 시도가 없는 버스에 탑승하게 될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 이사기는 린을 끌어안다시피 했던 팔에서 힘을 뺐다. 그와 동시에 린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사기는 반사적으로 린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밀어 넣었다. 그즈음 시도를 버스 안에 처박는 데 성공한 무리가 짜증을 내며 다가왔다. 시도에 대한 욕설을 퍼붓던 레오가 린을 가리켰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이사기가 큰 소리로 물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카라스는 대답 대신 린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평소라면 오만 짜증을 냈을 린은 이상할 만큼 잠잠했다. 카라스가 혀를 찼다.

“업어야겠는데. 기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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