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고양이한테 최종수 이름붙인 주찬양 (1)

1.

찬 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이불 끄트머리를 더듬어 쥔다. 얇은 잠옷을 파고드는 한기에 진저리가 쳐졌다. 겨드랑이 아래 깔려있던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자 이불 밖으로 발목이 드러났다. 식어가는 발끝을 꿈지럭거리다 무릎을 접는다. 착화 신장 2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몸뚱이가 어찌어찌 이불 아래 수납된다. 감은 눈꺼풀을 찌르던 나절의 볕이 힘을 잃는다. 그런 후에야 몸에 온기가 돌았다. 잠에 취해 늘어진 몸을 웅크리며 웅얼웅얼 불평을 토해냈다. 추워. 불쾌의 사유를 발음하는 것과 동시에 어떠한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럴 리 없는데.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떠오른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이불을 박차고 침대 아래로 뛰어내린다.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몸이 휘청였다. 무릎이 꺾이고 상체가 기울어 얼굴과 땅이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손을 뻗어 바닥을 짚고 주저앉은 다리를 축 삼아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통하는 방문이 반쯤 열린 채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광경에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제가 기는지 달리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빠끔히 열려 있던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반투명한 커튼이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 뼘가량 열린 통창으로부터 흘러든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희뿌옜다. 차갑고 우울한 빛이 창가에 놓인 해먹을 느리게 훑었다. 얇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 비슷한 것이 샜다. 지난밤 행적을 떠올리고자 애쓰며 잠옷 차림인 채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쿵, 쿵, 뛰는 심장은 요란한데 체온은 점차 낮아져, 이윽고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현관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무언가가 다리에 닿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종수. 이름을 인지한 것일까. 길고 풍성한 꼬리가 느릿느릿 흔들린다. 신었던 운동화를 벗고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작은 동물 특유의 높은 체온에 곧장 안정이 찾아왔다. 저녁 내도록 창이 열려 있었던 거실이 싸늘했다. 열려 있던 창을 닫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 채도가 낮아 얼핏 회색으로도 보이는 파란 눈이 깜빡인다. 밀려드는 탈력감에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내동 얌전할 것 같던 고양이가 잽싸게 품을 벗어났다. 소리도 없이 소파 아래로 뛰어내린 ‘종수’가 동그란 해먹에 몸을 말고 누웠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 구름 낀 하늘을 응시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정확한 일시까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2월 며칠이라는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갑작스레 내리는 비에 부랴부랴 우산을 꺼냈다. 입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을 세는 것이 빠른 체육복 대신 연에 한 번이나 입을까 말까 한 교복을 입던 날이었다. 하얀 와이셔츠, 연노랑 조끼, 검은 마이. 신축성이라곤 없는 옷가지에 몇 번이고 매무새를 가다듬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을 여는 순간 찬 기운이 밀려들었다. 방으로 돌아가 패딩을 찾아 걸쳤다. 그런 다음에야 집을 나섰다. 밤새 내린 비에 길이 축축했다. 걸을 적마다 얕게 고여있던 빗물이 튀어 운동화를 적셨다. 눅눅해진 발을 허공에 흔들어 털었다. 길가에 멈춘 채 서 있으려니 택시 한 대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우산을 접었다. 장도 고등학교 농구부의 유일한 2학년 주전. 잠은 숙소에서, 운동은 체육관에서. 대한민국 대부분 고등학생보다 좁은 행동반경을 가진 주제가 학교로 가는 버스의 노선이며 시간표 따위를 알 리 없었다.

교문 앞으로는 꽃 판매 노점이 즐비했다. 생화를 여럿 엮어 만든 일반적인 꽃다발부터 장미 한 송이를 포장한 것, 싸구려 조화를 화려하게 포장한 꽃다발에 솜인형으로 만든 꽃다발까지. 채도가 낮은 풍경 속 형형색색 꽃의 행렬에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다. 가까이에서 본 꽃다발은 대부분이 실망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열여덟 평생을 농구에 바친 남고생의 미감이 대단한 수준일 리 없는데도 그랬다. 물론 그런 것이라도 사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지만. 빈손으로 교문을 통과한 이들이 부랴부랴 못생긴 꽃다발을 구매했다. 본래 몸값보다 세 배는 비싼 가격에 팔린 꽃다발이 오늘 주인공들의 품에 무사히 안착했다. 못생긴 꽃다발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웃는 얼굴이었다. 찬양은 사람과 꽃, 카메라와 우산 사이를 요령껏 헤치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고만고만한 인파를 비집을 적 시원하게 트여있던 시야가 삽시간에 빽빽해졌다. 일반인보다 머리가 하나에서 둘은 큰 학생들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 날인데도 그랬다. 없는 건 아직 입학식조차 치르지 않은 1학년, 올해 3학년이 되어서도 주전이 될 가망이 없는 벤치 멤버 정도. 무엇이든 그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최종수를 주축으로 했던 3학년들이 떠난 뒤 장도 고등학교의 차기 에이스는 주찬양이 될 테니까.

익숙한 얼굴을 차례로 찾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인사에는 한 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중간한 진학고라면 모를까, 체육계 입시명문 장도 농구부의 주전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리도 없고. 축하드려요, 하는 인사에 꽃다발을 네 개나 안은 이규가 활짝 웃으며 곁을 가리켰다. 눈치껏 그의 옆에 서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네 개의 꽃다발을 용케 한 팔에 옮겨 안은 그가 찬양의 어깨를 두드렸다. 장도의 후지기수는 네게 맡길게. 시답잖은 농담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두서없는 잡담 몇 마디가 오갔다. 근데 찬양, 교복 잘 어울리는데 바지가 좀 짧다. 나중에 내 거 가져갈래? 나 이거 몇 번 안 입었어. 길쭉한 손가락이 툭 튀어나온 찬양의 복숭아뼈를 가리켰다. 앞으로 교복을 입을 날이 며칠이나 있겠나 싶어 고개를 저었다. 가장 위에 있던 꽃다발 하나가 흘러내렸다. 비었던 손으로 잽싸게 꽃다발을 낚아챈 규가 운동장 구석 어딘가를 턱짓했다. 종수랑은 인사했어? 밖에 있더라. 방향을 확인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운동장 구석을 가로지르다 얕은 물웅덩이를 밟았다. 신발 한쪽이 흠뻑 젖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목표한 인물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대도 그랬다. 당장 익숙한 높이에 불쑥한 우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낯익은 형체에 발을 재촉했다. 빨강 우산을 든 최종수의 옆에 섰던 이가 다가오는 찬양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착화 신장 196의 최종수보다도 커다란 남자, 대왕센터 최세종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와중에도 앞을 향하는 걸음이 부지런했다. 꾸벅 아래를 향했던 머리를 들자 코앞에 종수의 얼굴이 보였다. 꽃다발을 적게 받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종수가 안은 건 교문 앞에 늘어선 것들과는 비교선상에 두는 것이 민망한 수준의 고급품 하나뿐이었다. 값싸고 잎이 상한 장미와 안개꽃 두 종류로만 이루어진 예의 꽃다발들과 달리 연한 보라색과 분홍색, 흰색 꽃들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 모양이 무척 아름다웠다. 한 다발만으로 건장한 운동계 청소년의 품을 가득 채우는 꽃 무더기를 단단히 얽은 리본은 심지어 레이스였다. 어딘가에서 수상을 해도 저보다는 소박한 꽃다발을 받을 것 같다. 단단한 팔을 타고 내려오는 리본의 꼬리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려니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찬양이 맞지?”

그녀는 찬양보다 약간 눈높이가 낮았다. 운동화를 신은 그의 키가 190에 가까운데도 그랬다. 곁에 있던 것이 2미터에 육박하는 최종수와 2미터를 넘는 최세종이었기 때문인가. 먼 거리에서 봤을 땐 그다지 키가 큰 것 같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본 종수의 어머니는 확실한 장신이었다. 구두의 높이를 감안해도 그랬다. 안녕하세요, 하고 허리를 숙이자 커다란 눈이 사르르 접혔다. 갸름한 얼굴, 커다란 눈, 길고 촘촘한 속눈썹, 짙은 쌍꺼풀, 날렵하고 오뚝한 코. 최종수를 거푸집에 찍어놓은 듯한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고 했던가. 당사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주목을 받는 데 희열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어딘가에서 기사로 접한 내용이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 최종수의 어머니가 아닌 최세종의 배우자에 관한 내용이 실린 기사였을 것이다.

종수가 여자였으면 저런 얼굴이었을까. 그녀는 그려놓았다는 것보다 빚어놓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만약을 전제로 하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찬양이 한순간 멍청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을 정도의, 대단한 미인. 깜빡깜빡 그를 바라보다 오늘의 주인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의 얼굴을 빤히 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곧장 눈이 마주쳤다. 쭉 찬양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비 오는 하늘을 비춰 어지럽게 일렁이는 눈동자와 반대로 빚은 듯 아름다운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온 세상이 소란한 가운데 그 하나만이 고요했다. 태풍의 눈같이. 문득 그의 별명을 떠올렸다. 손톱만큼 벌어졌던 입술은 소리도 없이 닫혔다. 어쩐지 목이 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눅눅하게 젖은 공기가 흘러드는데도 그랬다. 괜히 손을 꿈지럭거렸다. 뒤늦게 교문 앞으로 늘어섰던 꽃다발들이 떠올랐다. 예쁘지 않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던 것들이 지금에서야 아쉬웠다. 빈 손바닥으로 흠뻑 젖은 바람 몇 줄기가 스쳤다. 잡을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였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흔한 인사 한마디가 없었다. 길쭉하게 빠진 눈꼬리가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인데 곁에 있는 부모님 탓인지 입을 열지는 않는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가족을 앞에 두고 후배를 겁박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겠지. 종수가 본래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평소 구사하는 그의 어투는 다정하다 이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제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을 눈치는 있었다. 마음먹은 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말주변이 없는 편은 아닌데. 그럴싸한 인사 한마디 꺼내지 못한 주제에 변명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던가. 그는 체육 특기생 진학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 고등학교인 장도고의 주전 선수였고 최종수는 그의 선배였다. 종수는 별스럽지 않은 구실을 붙여가며 후배의 군기를 잡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또 누구처럼 후배에게 살가운 인사도 아니었다. 그래서 최종수가 어려웠느냐면… 그렇지는 않았지만.

종수에게는 늘 소문이 따라다녔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었다. 좋은 것은 대개 그의 실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후자는 성격에 대한 것이었고. 지구상에 인간만큼 남 말 좋아하는 생물이 또 있을까. 누군가가 그랬지, 인간은 같은 것을 좋아할 때보다 같은 것을 싫어할 때 더 빠른 친목을 다질 수 있다고. 타고난 재능으로 부푼 (예를 들어, 그가 농구에서 진 상대를 반신불수로 만든다는 부류의) 소문에 그가 가진 배경과 호전적인 성격이 기름을 들이부었다. 찬양은 오가는 모든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거창한 이유가 있었겠나. 그는 그냥, 종수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편이 어려웠다. 그가 본 종수는 누군가를 반신불수로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착해서라기보다, 타인에게 그만한 관심이 없었다. 폭력의 도구로 농구를 이용하기엔 농구를 너무 사랑했다. 당연히 최세종의 위광을 등에 업어서야만 코트에 설 수 있는 반편이도 아니었다. 그는 누구든 부러워할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재능을 질시하여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리는 치들이 게으른 범재라면 정작 소문의 당사자는 부지런한 천재였다.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코트 위의 최종수는 빛이 났다. 반짝반짝. 눈이 시리도록.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무섭다고 말하나? 보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나?

장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반년. 3학년이 학교를 떠난 뒤 주전으로써 경기를 뛰게 될 2학년과 1학년의 합동 연습의 빈도가 늘어날 즘이었다. 종수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붙박이 주전이었으니 찬양이 그와 같은 팀으로 경기를 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팀의 구성을 바꿔가며 몇 번이고 연습 경기를 했다. 대부분의 연습 경기는 거의 최종수가 섞인 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연한 결과였다. 드리블이면 드리블, 블록이면 블록, 3점이면 3점. 생일도 지나지 않은 열여덟이 그만한 완성도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잘한다, 잘한다, 말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길이 28m, 너비 15m의 공간에 상륙한 태풍은 보이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반년 전까지 고등부에서 활약할 인재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듣던 놈들도 여지없었다. 그렇게 열 몇 번째 연습 경기. 특별하지 않은 경기였다. 졌다. 몇 대 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얗게 탈색된 머리에 경기내용 같은 건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기억하는 건 종수가 상대 팀이었다는 정도.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야.

한쪽 허리춤에 농구공을 끼운 종수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학하고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딱히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냥, 이름을 못 외웠나보다 했다. 네? 하고 대답하자 최종수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에 매달린 땀방울이 떨어져 그가 입은 유니폼을 짙은 색으로 물들였다. 그런 것이 보일만치 가까운 거리였다.

너, 겁이 없네.

장기는 3점 외곽슛이지만 조금만 컨테스트가 있어도 성공률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제게 어울리는 평가는 아니었다. 마주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애당초 종수가 그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평가는 마냥 칭찬처럼 들리지도 않았으므로 찬양은 얌전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종수는 말없이 시선을 맞춰오는 후배를 빤히 내려다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해가 지나고 주찬양은 2학년인 채 주전이 되었다. 같은 코트에서 함께 경기를 뛰는 횟수가 많아져도 종수는 그를 야, 하고 불렀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주찬양.”

“아, 네.”

“뭐해? 이리 오라니까.”

“그래, 찬양아. 같이 서봐. 사진 찍어줄게.”

우산의 끝이 부딪쳤다. 종수가 든 우산 반, 제가 든 우산 반. 딱 우산 한 개 분의 애매한 거리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최종수가 든 빨간 우산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주찬양의 노란 우산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종수의 얼굴로 엷은 붉은색의 물그림자가 일렁인다. 답지도 않게 발랄한 색이 제법 잘 어울렸다.

종수의 어머니가 핸드폰을 들었다. 촬영음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수초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녀가 최세종의 팔에 걸려있던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꺼냈다. 순식간에 사진 한 장을 뽑아낸 그녀는 결과물을 확인한 후 핸드백(최세종의 우산을 든 팔에 걸려있었다)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장. 뽑은 사진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그녀가 손짓했다.

“좀 가까이, 우산 때문에 안 되겠다. 어디 비 안 오는 데로 갈까?”

“사람 많아서 싫어…. 야, 그거 접고 옆으로 붙어.”

“그럼 우산 제가 들게요.”

종수는 뜻밖에 선선한 태도로 우산의 손잡이를 넘겼다. 딱딱한 나무 손잡이에는 희미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그 위로 손을 겹친 찬양이 팔꿈치를 조금 들었다. 어깨가 닿도록 가까워진 거리에 꽃향기가 훅 끼쳤다. 핸드폰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에는 다시 사진 두 장을 찍었다. 찬양은 종수의 어머니로부터 먼젓번의 것을 포함한 두 장의 사진을 건네받았다. 빨간 우산을 든 종수와 노란 우산을 든 찬양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사진에서 찬양은 종수가 들고 있던 빨간색 우산을 들고 있었다. 종수는 찬양이 든 우산 아래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채였다.

사진을 받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기자들을 발견한 건 직후였다. 최세종 본인의 일정도 아니고 그 아들의 졸업식일 뿐인데, 이런 곳에도 기자가 붙는구나. 비슷하게 기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최세종 부부가 사진기를 정리했다. 후배랑 얘기하다 와, 아들. 종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냥, 착한 아들의 반사적 응답에 가까웠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갑작스레 해야 할 말이 생겼을 리 없으니까.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종수를 오래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안다. 찬양도 그걸 알았다. 알면서도, 괜찮으니 가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모르는 척 입을 다문 채 종수의 장단에 어울리는 쪽을 고른다. 그러다 문득 나쁜 건 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최세종 부부가 함께 쓴 골프 우산이 찬찬히 멀어지다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종수도 찬양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가족과의 사진 촬영을 마친 졸업생들은 바삐 친했던 이들을 찾아 마지막 추억을 남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도 저보다는 다른 졸업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지 않을까. 체육관이 있는 방향을 곁눈질했지만 굳이 규의 이름을 꺼내지는 않았다. 침묵의 간극을 채우는 빗소리가 평온했다. 가만 종수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가늠하다 입을 열었다. 미국 가신다면서요. 인사도 뭣도 아닌 문장에 종수가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프로와 대학 진학을 두고 고민하던 종수는 끝내 미국행을 선택했다. 그의 어머니가 같은 사진을 몇 장이나 남기던 이유였을 것이다. 찬양은 나눠 받은 사진을 만지작댔다. 그리고 팀 메이트와의 추억이 가득한 앨범을 캐리어에 넣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커다란 손이 빨갛고 노란 우산을 쓴 채 앞을 바라보는 과거의 그와 찬양을 조심히 문지르는 상상을 했다.

“귀국할 때 연락해 주실 수 있나요?”

충동적인 요구에 종수가 곧장 입을 열었다. 왜.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채로도 용케 서로를 향하지 않던 시선이 마주쳤다.

“그냥…….”

사고의 과정을 건너뛴 문장이었다. 그냥, 받고 싶어서. 이유랍시고 떠오른 것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생각한 것을 곧이곧대로 입 밖에 냈다간 즉각 다른 질문이 이어졌겠지. 왜 받고 싶냐고.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짚이는 바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반듯하던 이맛살이 살짝 구겨졌다. 한숨을 내쉰 종수가 탐탁잖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헛소리 말고 할 말이나 빨리 해.”

“네?”

“할 말 있잖아.”

그런 게 있었나? 재빨리 머리를 굴렸지만 특별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꽂히는 시선이 집요했다. 그러다 손에 든 사진 두 장에 신경이 미쳤다. 사진 감사해요. 잘 간직할게요. 하지만 최종수가 들어야 할 말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감사일 것 같지는 않았다. 찬양은 가만히 종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그가 있었다. 교복 위에 패딩을 걸치고 빨간 우산을 든 주찬양이. 종수가 보는 찬양의 눈에도 그가 있었을 것이다. 교복을 입고 꽃다발을 든 최종수가.

“교복 잘 어울리시네요.”

종수는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썼다. 졸업생에게 건네기 적절한 말은 아니었나. 그것이 기다린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한쪽 팔로 꽃을 바꿔 안은 종수가 손을 내밀었다. 우산을 돌려받으려 내민 손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찬양은 우산을 넘기는 대신 펼친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이번에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빨간 우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해야 할 말…. 펼친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익숙한 운동화 위로 단정한 바지가 보였다. 빗물이 튄 밑단이 젖어있었다. 불현듯 규의 물음이 떠올랐다. 내 교복 가져갈래? 반쯤 농담이었을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입겠다고…….

“교복, 저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싫어.”

찬양은 입을 다물었다. 이젠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짜증나게…. 중얼거린 종수가 그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의 손잡이를 빼앗아 쥐었다. 창졸간 비어버린 손이 멍청한 모양으로 허공에 머물렀다. 그런데, 머리 위 드리운 빨간 그늘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슬그머니 종수의 낯을 살핀들 달라질 건 없었다. 시선을 느낀 종수가 발을 움직여 찬양의 우산을 툭 쳤다. 펴. 낮은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우산을 펼쳤다. 노란 우산 아래 선 그를 확인한 종수는 인사 한마디 없이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새 굵어진 빗줄기가 요란하게 우산을 두드렸다. 찬양은 플라스틱 손잡이를 꽉 쥐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손이 얼얼하게 아팠다. 종수가 듣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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