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록

[나기레오] 충동

이대로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캐붕모음 by 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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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인가?"

"뭐가?"

"바다."

해변가에 물결이 밀려왔다. 그들은 아직 모래사장에 서 있었고, 레오는 두꺼운 외투 뒤로 멘 가방을 모래 위에 그냥 내려둘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나기는 이미 아무렇게나 던져 둘 생각으로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게."

오늘, 그들을 데리러 온 미카게 가의 차량은 아무도 태우지 못한 채 돌아갔다. 하교길에 갑작스레 저지른 일탈이었다. 정해진 것도, 준비된 것도 없다. 지금 그들이 가진 것은 어딘지 허전한 마음 뿐. 

"바다, 들어가고 싶어?"

"아니."

"그럼... 구경이나 할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들은 비슷하게 생각한다. 계획도 없이 무작정 여기까지 온 주제에, 어떤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딱히 나누고 싶은 대화도 없다. 텅 빈 바닷가에는 갈매기 우는 소리와 파도소리만이 울려퍼진다. 

*

레오는 회의감을 느꼈다. 왜 이곳에 왔는지, 자신도 모른다. 그러고 싶었고, 그래서 그렇게 해버렸다. 할 일을 모두 내팽겨치고... 옆에 있던 나기까지 끌고. 가라앉은 기분 탓에 이곳에 왔는지, 아니면 해야할 것을 모르는 척 하고 이곳에 왔기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은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선택을 그르치면 아주 귀찮아지는군,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따름이다.

어쩐지 머리가 멍했다. 지끈지끈 아픈 것도 같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보려고 했으나 바다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크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나? 어렴풋이 나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는 생각하는 것을 곧 관두었다. 노력하는 모든 일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서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시간이나 조금 때운 뒤 돌아가자. 어렵지 않아... 잡생각은 관두고 파도치는 소리에나 귀를 기울이면 그만이다. 

*

나기는 모래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꿈이구나. 이어 시선을 올리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이거... 그냥 자각몽이 아니고, 뭐라고들 하던데. 뭐였지? 인터넷에서 본 잡다한 지식이 어정쩡하게 떠올랐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 대충 넘겼다.

자신의 꿈일까? 레오의 꿈일까? 시야에는 하늘과 맞닿은 수면만이 비치고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줄곧 느껴지던 위화감은 태양을 맨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다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는 레오가 서 있다. 나기가 이 꿈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그것이 전부였다. 

*

"왜 그래, 레오? 오늘 이상해."

"뭐가 이상해? 똑같잖아."

"이상해... 애초에 왜 바다에 왔어? 바쁘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그런 일 없으니까... 괜찮으니까 왔지."

"축구는?"

"축구..."

레오가 중얼거렸다. 축구 말이지.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요즘은 별로 재미 없으니까.

"연습은 매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런데 왜 바다에 왔어? 봐, 이상하잖아."

레오는 고개를 숙였다.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에,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에, 애써 외면하던 본심을 하필이면 나기에게 들킨 것에, 이 모든 상황에 이유 모를 깊은 수치를 느꼈다. 힘주어 세게 쥔 주먹이 바르르 떨린다. 아니, 실은 온몸이 떨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

"난... 네 기억에 남고 싶어."

"레오?"

"네 평생이 되고 싶어. 잠깐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

무슨 소리야, 레오. 나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오에게 한 발짝 다가갔으나, 레오는 그에 맞춰 한 발짝 물러났다. 노려보듯 눈을 치켜떴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너는 더 높은 곳으로 가겠지. 정말로 최강의 스트라이커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아니, 너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려. 역시 난 그렇게 생각해."

"레오, 잠깐."

"네 축구에서 나를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나와 함께한 시간보다, 내가 너를 이끌어주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너는 축구로 보내게 될 거잖아. 그렇게 되면 나는 과거의 친구로 남을 뿐이야, 나기. 이해 돼?"

나기는 고개를 저었다. 하려는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레오는 이제 나기를 완전히 노려보고 있었다.

"고작 이걸론 만족 못 해.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그의 바람ㅡ이제 상대에게 직접 고백함으로써 욕심보다도 부탁이나 호소에 가까워진 그것ㅡ은, 명백하게 사랑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나기는 그것을 차마 사랑고백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 이는 그가 평소 생각해오던 레오의 모습이 모두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면 널..."

포기해야 할 때가 올 지도 몰라. 레오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러나 전해지지 못한 생각은 마음 속에 맴돌며 두려움을 먹고, 동시에 공포의 부피를 늘려가면서, 레오를 장악해나갔다.

*

레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기는 그가 예쁘장한 여학생에게 러브레터를 받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딘가의 순정만화처럼, 미연시 게임 속의 흔한 전개처럼, 방과후의 학교 건물 뒤에서.

거리가 있어 잘 들리진 않았지만ㅡ 여학생이 레오에게 정말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그러면서 편지를 내밀었겠지. 소리를 줄이지도 않은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게임을 플레이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레오는 인기가 많다. 하쿠호에 다니면서 미카게를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알았고,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학교에서의 레오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함께 지내는 시간에 비해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게다가 나기는 타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근 몇 주 붙어다녔다고 다른 '레오의 친구들'과 별반 다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기는 어느 날, 문득 느낀 바 있다. 자신이 레오라는 사람을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고.

*

미카게 레오. 친화력이 좋고,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이며, 인생에 큰 굴곡을 겪을 일이 그다지 없었던, 그래서 성격에 구김이 없는, 부잣집 외동아들. 남이 바라보는 미카게 레오는 타고난 것에 온갖 노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훌륭한 작품이었다. 물론 그것은 레오의 본모습과 한없이 닮아있었으므로ㅡ그것이 어릴 때부터 학습된 탓인지, 정말로 본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ㅡ 레오는 여태껏 알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심연에 무엇이 있는지를.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레오는 자신이 스스로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걸 왜 신경쓰는가? 지금 당장 주위에 사람이 없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미카게 레오이고, 자신을 이루는 것들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데. 단단한 기반과 끝없는 노력과, 그리고 확고한 자신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블루록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친하게 지내던 누군가가 자신의 의지로 레오를 떠나는 일은 잦지 않다. 파트너가 떠나니 빈 자리가 느껴졌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미카게 레오는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성격이 아니다. 그가 그동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럴 틈이 없을 만큼 주위에 사람이 많았던 덕이다. 레오는 당연하게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고, 의외로 끔찍하게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었다. 그의 심연에는 아주 많은 욕심과 그동안 눌러담아 외면해온 두려움이 있다.

*

가만히 서서 정돈되지 않은 말을 뱉어내던 레오는 갑작스레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기보다 키가 작다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블루록에 오기 전에도 꾸준히 단련해왔던 몸은 귀찮음 많은 히키코모리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레오의 손은 곧바로 나기의 목을 향해 뻗어졌다. 놀라 물러서려다 무게중심을 잃은 나기가 뒤로 넘어간다. 레오는 이제 나기의 위에 올라타듯이 내려앉아 무릎으로 땅을 지탱하고 있었고, 나기의 목에서는 눌린 숨소리가 괴롭게 새어나왔다. 차갑고 얕은 물이 그의 뒤통수를 적시고 다시 물러갔다.

"나를 떠나는 나기는 싫어..."

나기는 레오의 손과 팔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것이 레오의 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레오의 근력이 나기보다 센 탓인지, 나기는 그를 이겨낼 수 없었다. 바둥거려봤자 나기의 목은 레오에게 잡혀 있다. 벗어날 수 없구나, 생각한 순간, 힘껏 저항하던 몸에서 갑작스레 힘이 빠져나간다. 시체처럼 누운 나기는 레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멈출 레오가 아니다. 그는 거의 패닉에 빠져 있었고, 나기의 반응을 살피거나 그에 맞춰 행동을 조절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발 밑 그림자에 아가리를 벌린, 까만 허무와 공포 뿐. 

*

타인은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나기는 이 난제에 대해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나기와 난제와 생각이라니,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ㅡ 몇 번이고 다른 사람을 헤아려 보라는 말을 들으면, 제아무리 나기라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일이 딱히 태도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레오가 자신을 믿지 않았을 때ㅡ뭐야, 결국은 레오도 자기자신이 먼저잖아ㅡ, 그는 깨달았다. 타인은 어느 정도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고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일지언정,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누구나 표면 아래에 더 깊은 마음을 숨기고 있으므로. 

작정하고 숨긴 것을 알아채는 일은 쉽지 않다. 서로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아주 친밀한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평생 불가능한 일이리라.

*

레오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래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줄곧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나기였고, 급작스러운 상황의 전개가 주마등처럼 뇌의 어딘가를 스쳐지나갔다. 

짧은 기억을 거슬러올라 현재를 따라잡고 나서야 그는 나기의 목에서 손을 뗐다. 잠깐 잊었던 호흡을 기침과 함께 터뜨리고, 계속해서 숨을 몰아쉬면서 얼굴을 온통 적신 눈물을 닦아낸다. 나기, 하고 부를 생각이었으나, 세게 눌린 것이 자신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나기가 입을 연다. "레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자동응답기처럼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레오, 나 열심히 할게."

*

레오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슨 이딴 꿈이 있는가...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식은땀에 젖은 몸이 금방 추위를 호소했다.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자신은 무의식으로나마 바라고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고백하기를. 그리고... 그리고, 모든 두려움을...

아니. 그럴 리 없다. 불안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꿈 같은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괜찮다. 레오는 애써 머리를 비우려 노력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

나기는 꿈에서 깨어났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면서 목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당연하게도 목이 졸린 기색은 없다. 괜히 뒷통수를 만져보았다. 바닷물에 젖어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레오의 본심이었던 걸까? 이기지 못한다고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축구가 중요하다니. 나기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 어려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열심히 해야지. 레오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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