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이사] 애가哀歌

린은 밤새 이사기의 머리맡에서 속삭였다.

Null by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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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을 이기고 싶어.'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실력을 이유로 들자면 린보다 뛰어난 선수는 많았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노엘노아도, 신세대월드베스트일레븐의 포워드인 카이저도 그 이유에 해당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린은 이사기와 다르다. 그에게는 이사기가 절대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과거가 있고, 목표가 같더라도 걸어가는 길은 갈라질 사이었음이 분명한데도 이사기는 린을 이기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왜? 그가 자신에게 평생의 옆자리를 약속해서? 첫눈에 반했다는 말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약속보다도 이사기의 본능이 먼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신영웅대전의 마지막 경기. 독일과 프랑스의 결전의 날. 1위의 앞에 299위가 선다. 오로지 그의 앞에 서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사기는 그가 서있는 가장 높은 곳의 경치를 원했다. 나머지 모두를 짓밟고 블루록이 만들어낸 유일이 되기 위해.

그리고 마주한 린의 눈빛은 어딘가 빛바랜 과거를 비추는 느낌이 들었다. 그립고도 멀고도 반가운 눈빛이었다.

답지 않은 린의 시선은 이 공간과 이질적이었다. 린의 분노, 충동, 무심함, 차가움 전부 예상했지만 이사기는 지금의 린의 시선을 받을만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린이 서서히 다가왔다.

"너... 왜 여기에 있어."

"......?"

"돌아가. 지금 당장."

놀랐다. 지금까지 린이 자신에게 축구를 포기하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너를 이기기위해 여기까지 올라온거야. 너를 이기고, 1위가 되기 위해."

"......"

"돌아가지 않아. 너를 뛰어넘겠다. 그 각오 하나만으로 난 여기 서있는거야."

이사기는 린에게 다가갔다.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 서서 린을 올려다봤다.

"그러니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이토시 린. 나는 오늘 너를 죽인다. 너도 날 죽일 각오로 와라."

린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날 죽인다고 말해주겠지. 하지만 린은 아무 말도 없었다. 시합개시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사기는 뒤에서 린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고싶지 않아."

.

독프전은 독일의 승리였다. 그것은 전부 이사기의 골이었다. 이사기는 이상하리만치 린의 움직임이 잘 읽혔다. 그의 시선과 의도와 행동이 전부 미래를 예측했다고 말할 수 있을정도로 정확하게 읽혔다.

경기가 끝나고 이사기에게 다가오는 팀원들, 울부짖는 동료들, 저 멀리서 분노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카이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 노아와 고막을 세게 때리는 경기 종료의 사이렌.

먹먹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 멍해진 느낌같은 비현실감이 자리잡는다. 시야는 흐릿하고 몸은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잘못됐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볼때 자신은 멀쩡히 서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는 이토시 린의 형체.

"이사기, 이걸로 만족했나?"

"......아냐."

"고작 이딴 걸로 날 이기니 기쁜가?"

"고작.... 이런 거...."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이사기가 바란 것은 예측 불가의 린. 자신보다 항상 한 발짝 그 너머에 가있는 그의 뒷모습. 그가 가는 길의 발자국마다 경이와 찬사를 보내며 오로지 원했던 No.1

그것은 유일이라는 가치였을까 이토시 린이라는 존재였을까.

그 생각에 다다르자 알수없는 답답함이 솟구쳤다.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이사기는 주저앉으며 린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날 죽일 각오가 고작 이딴 거라면 평생 내 옆에 있으라는 말따위 하지 않았을 거다."

아냐. 나는. 네 옆에서, 너를 넘어설때까지,

"내 옆에 있어라. 네가 죽인 환상따위는 전부 버리고, 너 따위에게 절대 지지 않는 세계 최고가 될, 이토시 린이 옆에."

그러니까 돌아와 이사기 요이치

.

어두운 방 안이었다. 몇 시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조금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가 병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와 부딪쳤다. 사람의 머리가 침대 머리맡에 함께 기대어있었다. 자고있는 그는 분명 린이었다.

어렴풋 상황파악이 된 이사기는 드디어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린을 이길 수 있을까. 너무나 뻔히 보이는 욕망에 부끄러움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그때의 경기가 아직도 미련에 남았나보지.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안타깝고 위대한 도전이었다. 이토시 린을 정면으로 꺾는 도전. 지금도 린이 곁에 있다는 것은 그 날의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는 의미였다.

이사기는 가만히 린의 자는 표정을 들여다봤다. 아직도 앳된 얼굴이었다. 이 나이에 벌써 pxg의 득점왕이라니. 따라잡았다 생각하면 훨씬 멀리 가버리고 겨우 쫓았다 생각하면 훨씬 너머의 것을 성취해가는 린에게 눈을 뗄 수 있는 날은 없었다.

만약 그날 꿈처럼 린을 꺾었다면 지금 내 곁 린은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의 존재가 자신의 패배와 부족함을 일깨운다. 인생의 라이벌이자 한때는 누구보다 마음이 통했던 파트너 이토시 린.

새삼 이런 인연도 있구나. 죽음을 앞두고 돌아온 이사기는 반가운 마음에 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이사기!!!"

"어 어? 응. 나 여기있어."

"이 미친 새끼가!!!"

린은 이사기의 멱살을 잡고 올리려다가 이사기가 고통에 표정을 찡그리자 바로 분노를 잠재웠다.

"하아............. 네놈은 정말이지..... 진짜...."

"나 도대체 며칠동안 이러고 있었던거야?"

"............"

심각한 린의 표정을 바라보고는 이사기는 말을 아꼈다. 아니 뭐.. 내가 죽을 뻔 한 건 내 의지가 아니니까.

"그렇구나. 나 오랫동안 못깨어난거구나."

약간의 침묵과 어색함 끝에 린이 허탈한 한숨을 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 꿈에서 린이 말을 걸어준 것 같아. 돌아오라고."

꿈에서 깨고 현실을 마주한 순간부터 서서히 희미해지는 꿈의 내용. 현실이 아니기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에 저항하지 않지만 이사기는 단 하나 확실하게 기억에 새겨진 린의 한 마디를 기억한다.

"돌아오라고 했어. 린이, 나한테, 돌아오라고."

이사기는 린을 올려다봤다. 거기엔 당장이라도 울것같은 린이 있었다.

"그치?"

"이사기..."

린은 이 순간만은 충동과 본능에 몸을 맡겨 이사기를 껴안았다. 다시는 놓치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의 옆에서 항상 속삭였던 그 소망의 말들이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의 노래가 되지 않기를

이토시 린은 이사기 요이치의 곁에서 매순간 빌었던 것이다.

"평생 네 옆에 있을게. 진심으로 맹세할게."

"....떠나지 마라. 절대 놓지 않을거다."

린이사 Lamen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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