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록

[나기레오] 대화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캐붕모음 by 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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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르겠어, 이제."

레오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기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이게 맞는 걸까? 전부 잘못된 것 같아."

"그러니까 뭐가?"

"...전부."

"전부...?"

어려워, 레오. 좀 더 알기 쉽게 말해줘. 나기는 아이가 칭얼거리듯 레오를 보챘다. 그래... 이런 점들이. 레오는 한숨과 함께 올라오는 말들을 겨우 삼켜낸다. 

"난 이만큼 내 감정이 소모되는 일을 겪은 적이 없었고, 이제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이야."

"축구, 그만두는 거야?"

"뭐... 자진하차라던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진 않을 거지만. 역시 이런 마음으로는 블루록에 더 있을 수 없겠지."

블루록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그라운드니까. 그렇잖아. 레오는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기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동시에 한 귀로 흘리고, 말뜻을 절반 정도만 이해하면서, 레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쉽게 질리는 성격이잖아..."

질질 늘어지는 말의 끄트머리에 미련이 잔뜩 묻어있었다. 모든 일에 둔감한 나기도 알 수 있을 만큼이나. 말을 마친 레오는 툭, 나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나기는 당연하게 그 위로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슬쩍 허벅지 위로 왼손을 올리자 레오의 오른손이 반사적으로 맞잡아왔다. 이러면서 그만하자니, 거짓말이지, 레오. 나기는 답지않게 할 말과 못 할 말을 구분지었다.

어쩐 일인지 레오가 나기를 먼저 찾아온 날이었다. 잠깐 따라오라는 말에 나기는 얌전히 그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구석진 곳의 조용한 벤치를 골라 앉았고, 덕분에 블루록에서는 드물게 고요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그들 사이에 난입하지 않았다. 자연히 분위기가 축축 쳐졌다. 하지만 한 쪽은 도저히 그것을 수습할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애초에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다른 쪽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분위기 따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침묵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포기하고 싶어진 적은 처음이야."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늘 그렇듯 레오다. 다만 지금은 상대와 분위기를 고려하며 행동하던 평소와 달리, 한 번 진심을 꺼내 뚫린 입으로 누르고 쌓아두던 마음들을 줄줄 뱉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나기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더 쌓아둘 수 없어진 자신을 위한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자존심 상하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죽을 만큼 자존심 상해... 이런 마음이 든다는 것부터, 그걸 이기지 못해서 진짜로 그렇게 하고 싶어지는 점까지."

나기는 맞잡은 손을 조금 꼼지락거렸다. 듣고있다는 나름의 표시다. 레오는 또 한참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나기. 내 인생에 자신이 있었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들이 있었고, 빼앗기기보다 쟁취하는 일에 익숙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노력이 언제나 보답받는... 정해진 레일 위에서."

그리고 나기는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의욕없이,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결코 패배를 겪진 않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어떤 열정들이 결핍되어 있었지만, 나기는 그 결핍에 만족하며 살았다. 미래야 조금 막막했지만ㅡ 그런 것은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나태하고 낙천적이었던 그의 인생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블루록에 들어오기 전까지.

"레일을 벗어나고 싶은 적은 없었는데. 부모님이 나를 막은 건 처음이었어. 말했었나? 뭐든 해보라고, 뭘 궁금해하든 늘 지원해주셨었거든. 근데 축구는 안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축구를 시작했어. 난 나한테 확신이 있었던 데다가, 너를 찾아버려서. 너랑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 축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하쿠호에서는ㅡ 진짜 재밌었어. 기억나? 우리, 시작한지 몇 달도 안 됐었는데, 온갖 축구부들을 다 이겼잖아. 너랑 나는 최강이었지. 정말 즐거웠어... 강화훈련도 오고 말이야."

분명 그랬지. 나기는 재차 생각한다. 레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어. 하지만...

"이제 아니야."

맞아. 이젠 아니야. 무언가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난..."

주마등처럼, 몇 달간의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즐거웠지. 지고싶지 않았고, 간절했고. 그는 늘 이기고 싶었다... 레오와 같이. 

그렇게 나기는 자신의 모든 전제에 레오가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했다.

"난, 모르겠어, 이제... 나도, 너도. 전부..."

"레오."

"...응?"

"나... 열심히 할게."

레오는 당장에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들었다. 뭔 소리야? 지금 엄청 우울한 얘기 했는데. 나기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생기가 넘쳤다. 이 녀석... 내 말 안 듣고 있었나?

"레오, 축구가 재미없어?"

"..."

정곡을 찔렸다. 그렇게 물어보는 게 어딨어... 레오는 입술을 짓씹으며 나기의 시선을 피했다. 

"난 엄청 재미있어. 절대 지고싶지 않아. 그러니까 지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열심히 할 거야."

"그래..."

"레오가 있는 팀에서 월드컵을 우승할 때까지."

월드컵. 레오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단번에 눈이 마주친다. 나기가 변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알고만 있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달랐다. 놀라움과 질투가 동시에 느껴졌다.

"하?"

"열심히 하자, 레오. 난 트레이닝 하러 갈래."

"뭐..."

나기는 정말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레오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뭐 저런 이기적인 녀석이 다 있어... 얌전히 있다가도 문득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가는 것이, 짜증날 만큼 나기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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