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뱀파이어가 된 메구미 (1)

주술고전의 수업은 일반 고등학교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놀랍게도) 국가의 인증을 받은 기관이니만큼 정규 교과과목을 채택하고는 있었지만, 여타 특성화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않는 식이었다. 고전의 수업은 일반고등학교와 다른 독자적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졌다. 수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주령을 상대하기 위한 이론과 실전훈련이었고. 수학 공식 좀 모르고 문학에 어두운 정도로 목숨이 오늘내일하지는 않겠지만 훈련에 소홀하면 내일이라도 목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령, 주술, 주해, 주술사와 주저사, 저주. 살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은 차고 넘쳤지만 그것이 정규 과정을 등한시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고죠는 성실한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건 대충 하면 돼.’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문제집 몇 장 푸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순진한 이타도리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시구로는 교과서를 앞에 두고 고죠의 말을 따라 읊는 이타도리의 눈앞에 현실을 들이밀었다.

‘고죠 선생님, 센터시험 만점이었을걸.’

그는 누군가의 지샌 밤과, 흘린 땀과, 기울인 열정을 허망케 할 만큼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주술사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모의시험이며 센터시험을 치른 이유부터 그랬다. 심심해서. 숫자 1이 찍힌 성적표가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 빳빳한 종이 쪼가리를 주운 후시구로가 물었다.

‘사토루, 이거 뭐야? 버려도 돼?’

‘응~ 버려도… 아, 메구미. 버리고 오는 길에 숟가락 세 개 들고 와! 아이스크림 사 왔으니까 이리 와서 먹자.’

어린 후시구로는 센터시험 만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몰랐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그 종이를 휴지통에 던져 넣을 수 있었다. 그 무렵의 고죠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에 와서야 후시구로는 그가 가진 재능의 크기를 실감했다.

한편 이타도리는 고전에도 엄연히 낙제점이 있다는 사실과, 코앞으로 다가온 나머지 공부라는 현실에 절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고전은 학년의 구성 인원이 극단적으로 적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교사가 낙오된 학생을 버려둔 채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그의 곁에는 후시구로가 있었다. 고전의 많은 교사와 2학년 모두가 인정할 만큼 머리가 좋은 후시구로는 이타도리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지 못했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제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이타도리를 바라보았다.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 이타도리의 애원에 쿠기사키는 눈도 깜짝 않고 그를 지르밟았다.) 그리고 이타도리가 그의 근접전 훈련 상대가 되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당최 익숙해지기 힘든 기호와 숫자의 나열에 머리를 쥐어뜯던 이타도리는 후시구로의 설명이 자그마치 열일곱 번 반복된 후에야 그것을 이해했다. 이타도리가 후시구로의 도움 없이 문제를 푸는 데 성공했을 즘, 임무가 들어왔다. 이타도리와 쿠기사키의 실전 훈련을 겸한 주령 퇴치 임무였다. 고작 반나절 전 후시구로가 겪은 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술사가 그들의 인솔자로 따라붙었다. 해가 뜬 시간이었으므로 후시구로는 임무에서 제외되었다. 후시구로의 임무는 해가 지고 이타도리와 쿠기사키가 돌아온 다음 주어졌다. 인솔자는 고죠였다. 과한 인선이다.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현명함은 있었다. 후시구로는 잠자코 임무에 집중했다. 나타난 주령은 준 2급 두 개체. 임무는 싱겁게 끝이 났다.

“저녁 먹고 들어가자. 메구미 먹고 싶은 거 있어?”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점심도 걸렀다며. 배 안 고파?”

느지막하게 수업에 참여했던 후시구로는 드물게 식사를 걸렀다. 일어나고 한 활동이라곤 양치질과 세수가 전부였으니 배가 고플 리 없었다. 이타도리는 의아한 듯 그를 보았지만 그 이상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까지 배 안 고프겠어? 이타도리의 염려는 그게 전부였다. 이타도리와 쿠기사키가 사이좋게 접시를 비우는 동안 후시구로가 입에 댄 건 물 한잔뿐이었다.

저녁 여덟 시. 지난 저녁은 제대로 끝내지 못한 데다 금일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걸렀으니 배가 고파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실제로 텅 빈 위장은 허기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통 입맛이 없었다. 너무 오래 굶어서 그런가. 후시구로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런 후시구로를 빤히 바라보던 고죠가 길가에 선 택시를 세웠다.

고죠가 선택한 건 후시구로가 호평한 적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고급스러운 조명, 흰 천이 깔린 테이블. CD가 아닌 실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이 흐르는 실내. 손님의 대부분은 정장 차림이었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과 편안한 차림을 한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다. 레스토랑에 드레스코드가 존재했다면 둘은 입구에서 저지당했을 것이다. 숙련된 지배인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고죠를 바라보았다. 언제 벗었는지, 맨얼굴을 드러낸 고죠가 똑바르게 지배인을 마주했다. 한 번 보면 쉬이 잊을 수 없는 미형의 얼굴. 지배인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레스토랑의 고객 명부를 넘겼고 오래지 않아 고죠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고죠 사토루님, 이쪽으로.

후시구로는 입도 뻥긋할 필요가 없었다. 고죠는 알아서 저와 후시구로가 먹을 음식을 주문했다. 그는 후시구로보다 정확하게 후시구로의 입맛을 꿰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후시구로는 턱을 괴고 도심의 야경을 감상했다. 저 아래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령을 상대할 때는 마냥 정신없는 동네라고만 여겼는데. 위에서 본 풍경은 제법 아름다웠다.

메구미.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고죠가 웃는 낯으로 농담을 건넸다. 시시하고, 다소 저열한 농담이었다. 웨이터가 식전음식을 세팅했다. 수프와 샐러드, 빵이었다. 고죠의 농담은 그때까지 이어졌다. 후시구로는 음식을 가지고 온 웨이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고죠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척 스푼을 집었다.

셰프가 밀가루를 직접 볶아 만드는 수프는 오래 비어있던 속을 달래주기에 충분할 만큼 부드러웠다. 맛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머리와 달리, 멈춘 손은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어제 겪은 일이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가. 입맛이 없다. 음식에 대한 호평을 내리는 혀와 달리 위장은 좀체 일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더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수프를 휘젓던 후시구로가 기어이 스푼을 놓았다. 고죠가 지적했다.

“메구미, 그렇게 깨작대면 복 나가.”

“선생님이랑 안 어울리는 충고네요.”

“그래?”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이. 퉁명스레 받아치자 고죠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고죠의 실없는 농담에 입을 비죽인 후시구로가 포크를 들어 파릇파릇한 어린잎 위에 놓여있던 방울토마토를 찔렀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토마토를 입에 넣고, 씹었다. 과육이 으깨지고 입안으로 새콤한 과즙이 퍼졌다. 던지듯 포크를 내려놓은 후시구로가 자리를 박찼다. 토할 것 같아. 메구미? 고죠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후시구로는 입을 틀어막고 곧장 화장실로 달렸다. 이전에도 온 적 있는 곳이라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후시구로는 가장 가까운 칸의 문을 열고 허리를 숙였다. 반쯤 으깨진 토마토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게 다였다. 먹은 게 없으니 올릴 게 있을 리 없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는 맑은 위액만이 쏟아졌다. 컥, 허윽. 한바탕 요란을 떨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건 저주의 일환일까, 단순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후시구로는 지난 새벽 내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의 누이를 떠올렸다. 츠미키. 지끈대는 머리를 문지른다. 간신히 변기의 뚜껑을 닫고 손잡이를 내린 후시구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문가에 어깨를 기대고 선 고죠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메구미.”

묘하게 냉랭한 음성이었다. 반쯤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문 후시구로가 눈을 깜빡였다. 고죠는 조용히 그 얼굴을 관조했다. 종일 먹은 것 하나 없이 속을 게운 얼굴색이 좋을 리 없었다. 희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제자의 얼굴을 살피던 고죠가 좁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후시구로는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종아리에 변기가 닿았다. 고죠는 한 손을 뒤로 돌려 열린 문을 닫아 잠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후시구로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허기는 지는데 입맛은 없어. 나랑 밥 먹는 게 싫어서?”

“그럴 리가,”

그답지 않은 비약이었다. 반박하려는 찰나, 고죠가 입었던 재킷을 풀었다. 목을 가리는 재킷 안쪽에 걸쳐 입은 셔츠는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는 흰 브이넥이었다. 루즈한 셔츠를 입고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몸. 반사적으로 고죠의 상체를 훑던 후시구로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통 행동의 당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후시구로가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순간, 고죠가 문고리를 건 반대편 손을 들었다. 고기를 써는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나이프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고죠는 손잡이와 가까운 날 부분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고 눌렀다. 막을 새도 없었다. 예리하지 않은 나이프는 그의 살갗을 가늘게 베고 지나가는 대신 종이를 찢은 단면처럼 거친 상처를 남겼다. 얄팍하게 갈라진 살갗으로 피가 맺혔다. 방울방울 피가 묻은 나이프를 내린 고죠가 허리를 숙였다. 후시구로는 더 물러날 곳 없는 화장실 구석에서 뒷걸음질을 치다 그대로 변기에 주저앉았다.

“그럼 이건?”

눈앞이 어지러웠다. 후시구로는 양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토마토를 입에 넣었을 때와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가 향기로웠다. 방울방울 흐르는 핏물에 군침이 고였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비어있던 위장이 갑작스레 활동하며 허기를 호소했다. 배가 고팠다. 목이 말랐다. 눈앞에 있는 것에 혀를 대고 양껏 들이키고 싶었다. 후시구로는 조심히 고죠의 얼굴을 확인했다. 후시구로를 향하는 시선은 전에 없이 서늘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후시구로는 꼴사납게 떨리는 손으로 고죠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고죠의 눈이 제 옷을 잡은 후시구로의 손에 닿았다. 손끝이 희게 바래도록 힘껏 옷자락을 쥔 후시구로가 반대 방향으로 그를 당겼다. 피가 흐르는 고죠의 상처를 가리려는 듯이.

“고죠, 선생님,”

“응.”

그의 상처를 마주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후시구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고죠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바로 전까지 저를 향하던 시선이 거짓말인 듯,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답은 평온하기만 했다. 숨이 찼다. 조금만, 한 모금만.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될 욕구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후시구로는 숨을 헐떡였다.

“제발! 그것 좀…!”

비명처럼 내뱉는 순간, 고죠는 들고 있던 나이프를 휴지 걸이에 올려두고 양손으로 후시구로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무릎을 굽힌 그가 후시구로와 시선을 맞췄다. 후시구로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눈앞에 그의 얼굴과, 피가 흐르는 목덜미가 있었다. 고죠는 한 손을 놓고 후시구로의 뒤통수를 당겼다. 괜찮아, 메구미. 일상적인 음성이었다. 이성이 끊겼다. 후시구로는 양팔을 들어 급하게 고죠의 등을 감쌌다. 피가 흐르는 목덜미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힘껏 그 상처를 헤집어 피를 빨아들였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액체가 세상 무엇보다 달콤했다. 전에 없는 충족감에 휩싸인 후시구로는 걸인처럼 고죠의 상처에 매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내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욕구가 충족되자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후시구로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와 피로 엉망이 된 셔츠를 마주하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고죠는 마른 손으로 후시구로의 입술을 닦아냈다. 크고 하얀 손에 흠뻑 피가 묻어났다. 젖은 입술에서 구역질이 날 만큼 단맛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후시구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완전히 무릎을 굽히고 앉은 고죠가 후시구로의 턱을 들게 했다. 피가 번져 엉망인 입가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제하면 얼굴 자체는 전보다 훨씬 나았다. 곧 죽을 사람처럼 파리하던 뺨에는 분홍빛으로 생기가 돌았고 뭍으로 밀려난 생선처럼 탁하고 흐리던 눈동자는 이제야 또렷한 빛을 띠었다. 후시구로는 피가 번진 고죠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흠뻑 묻어나는 핏물에 후시구로의 어깨가 떨렸다. 꺽꺽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후시구로의 모습에 고죠는 태연히 턱을 괴었다. 작위적인 반응이었다. 그만치 피를 마시고서도 흡혈 욕구가 다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더 달라면 못 줄 것도 없겠지만 이 이상 피를 마시게 했다간 후시구로가 자기혐오로 목을 맬 것 같았다. 메구미. 후시구로가 고개를 들었다. 생리적인 거부감 탓인가, 눈물이 맺힌 암녹색 눈이 흐리게 일렁였다. 이런 상처, 별것도 아닌데. 술식을 사용해 상처를 지혈한 고죠는 재킷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후시구로의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한숨 자고 맑은 정신으로 해.”

앞으로 기우는 후시구로의 몸을 받아 안은 고죠는 곧장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고죠를 대신해 식비를 계산하고 (물론 고죠의 카드를 썼다.) 일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지치가 눈을 크게 떴다. 만 하루 전 저주를 받았다는 후시구로가 입가에 잔뜩 피를 묻히고 고죠의 품에 안겨 나타났다. 이해하지 못할 반응도 아니었다. 고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니 번거롭고, 무시하자니 심약한 남자의 머릿속에서 비약될 상황이 신경 쓰였다.

“메구미 피 아니야.”

이지치의 눈이 전보다 크게 흔들렸다. 후시구로의 피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남의 피를 입에 묻히고……. 하고픈 질문은 산더미 같았지만 고죠는 딱 한 마디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도착하면 깨워.”

그가 선택한 건 고전의 기숙사가 아닌 도쿄구에 위치한 그의 자택이었다. 이지치는 후시구로의 안위를 생각해서라도 고전으로 가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물었지만 좁아터진 기숙사 바닥에서 다시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고죠는 생각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를 잘라냈다. 싫어.

그는 후시구로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탔고, 문을 열었고, 신발을 벗었다. 후시구로를 침대에 눕힌 후에는 곧장 화장실로 가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셨다. 젖은 수건을 쥐고 침실로 돌아온 고죠가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후시구로의 얼굴과 드러난 목은 고죠의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에 수건을 가져다 대려던 고죠가 돌연 손을 거뒀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그가 잠든 후시구로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 피에 젖은 모습이 썩 괜찮아 보였다.

‘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싸늘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한 선고였다. 고죠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도, 지금도.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

후시구로의 얼굴을 닦아낸 고죠가 허리를 숙였다. 잠든 이의 머리 위로 핀 그림자가 지고, 겹쳐, 어둠에 녹아 사라졌다. 커튼이 닫혔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