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뱀파이어가 된 메구미 (1)

“불편한 곳은?”

“딱히….”

한참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이에이리가 허리를 폈다. 후시구로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이런 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닌데.”

열감 없이 싸늘한 음성이었다. 맞은편 소파에 늘어져 있던 고죠가 고개를 들었다. 후시구로의 상태를 보아 달라며 이에이리에게 그를 내던진 고죠는 내내 스마트폰을 쥐고 씨름을 하던 참이었다. 그는 먼저로 후시구로를 주물이 있던 장소까지 이동시킨 보조 감독을 철수시켰다. 이후로는 줄곧 문자를 주고받는 것 같았는데 그 내용까지는 후시구로도 알 수 없었다.

이에이리의 선고에도 고죠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이에이리가 후시구로의 저주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고죠를 빤히 바라보던 이에이리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장식품을 집었다. 고죠가 언젠가 해외로 출장을 갔을 적 선물이랍시고 사 들고 온 낙타 조각이었다. 후시구로 역시 비슷한 것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낙타는 아니었지만. 한 뼘 정도 높이의 조각은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 조각을 삼 주쯤 배운 사람이 만든 것이래도 믿을 만큼 조악했다. 낙타라는 것도 네 개의 다리와 엉성하게 솟은 등의 혹, 긴 목 같은 특징으로 예측을 한 결과일 뿐이었다. 저걸로 고죠 사토루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것은 아닐까. 후시구로는 조마조마하게 낙타 조각을 응시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각이 안착한 건 고죠의 머리는 아니었다. 후시구로는 저를 향한 이에이리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 영문도 모르는 채 조각을 받아들었다.

“꽉 쥐어.”

“네?”

“온 힘을 다해서 쥐어보라고. 맨손으로 사과 안 쪼개봤니?”

그는 드물게도 근접전이 가능한 식신술사였으나 완력이 특출난 편은 아니었다. 사과 하나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쪼갤 수도 있겠지만 그도 간단히 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사과를 가르는 건 이타도리나, 하다못해 2학년의 젠인 마키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라는 걸 이에이리가 모를 리 없고. 후시구로는 주절주절 입을 놀리는 대신 잠자코 이에이리의 말을 따르는 쪽을 택했다.

엄지손가락 마디 정도 크기의 낙타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제가 한 일에 놀란 후시구로는 완전히 으스러진 조각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타도리가 당연하단 듯 콘크리트 벽을 부수는 기행을 놀랍게 여길 필요가 없을 정도의 악력이다. 내내 소파에 누워있던 고죠가 몸을 일으켰다. 주먹을 쥔 그대로 굳어진 후시구로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치게 한 그는 돌 부스러기가 묻은 후시구로의 손바닥을 툴툴 털어냈다.

“카모 가문의 술식이야. 저주의 일종인데, 저주는 아니고. 스쿠나의 손가락을 이용해 육체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 같아. 피를 이용해 도핑 효과를 내는 건 그쪽 전문이니까.”

눈은 안대로 가린 채였고 목소리는 평이했으므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후시구로는 그의 얼굴을 읽어내는 일을 포기한 채 생각을 정리했다. 고죠의 말대로 이것이 인간에 의한 저주, 그것도 3대 가문에 의한 저주라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다. 받은 저주가 주령과 연관이 된 것이었다면 오히려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주령이 관여한 저주는 주령을 퇴치하는 것으로 해주하는 것이 기본 상식이었으니까. 우후죽순 생겨나는 주령 가운데 저주를 생성한 주령을 특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이었으면 츠미키가 지금껏 의식불명일 리가…. 후시구로는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시큰했다.

“자료가 필요한데.”

고죠가 툭 뱉었다. 건조한 어투였다. 그는 최강이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그 차이를 간과했지만 후시구로는 그 차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얼마든 존재했다. 많은 주술사와 마찬가지로 고죠가 가진 능력은 무언가를 없애고 부수는 데 특화된 것이었다. 그는 가진 힘을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길 바랐지만 고죠를 둘러싼 환경은 그 소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에 고죠 사토루는 절망했고, 굴종했고, 기어이는 자신을 버렸다. 후시구로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여는 순간, 반 박자 빠르게 이에이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자기네 가문의 비술이니 쉽게 공유하려 들지 않을걸.”

타당한 지적이었다. 말이 좋아 최강의 동료지, 고죠 사토루는 오랜 세월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해온 적대 가문의 차세대 수장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워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그 카모의 당주가 협조적으로 나올 리 없었다.

“맞은 다음 뺏기는 것보다야 얌전히 건네는 모양이 낫다는 건 그쪽도 알고 있을 테니까.”

카모 가문이 비서를 내놓는 일에 협조하지 않으면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이다. 카모 가문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발언이었다. 후시구로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매번 그랬다. 그가 어떤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 후시구로는 번번이 경악하고, 당혹해했다. 고죠 사토루에게는 별것 아닌 선의는 모두 그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이었다.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레스토랑, 한 장에 십만 엔을 훌쩍 뛰어넘는 티셔츠. 그는 사람을 부리는 일이 익숙한 부류였고, 연상에게 하대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문득 엉망이 된 단화에 의식이 미쳤다. 그 어두운 암자에서, 고죠는 후시구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지만 한순간도 신발에 의식을 두지는 않았었다. 그건 특별히 신경을 쓸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의식 구석을 차지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후시구로의 시선이 바닥을 헤맸다. 반듯하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고죠는 손을 들어 찌푸려진 후시구로의 미간을 꾹 눌렀다. 그 힘에 후시구로의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곧 중심을 잡은 후시구로가 의아하게 고죠를 올려다보았다. 고죠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행동을 이해한 후시구로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에이리는 만에 하나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하루 한 번은 그녀를 찾아 몸의 변화나 이상에 대해 기록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후시구로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이리의 이야기가 끝나자 고죠는 후시구로의 등을 문밖으로 떠밀었다. 이에이리에게는 변변한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이에이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달빛이 내린 교정은 드라마에나 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관목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후시구로가 몸을 돌려 제 뒤를 따라 나온 고죠를 바라보았다.

“안, 가세요?”

평소라면 일찍 경박한 인사를 하며 사라졌을 고죠가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다양하고 감정의 변화가 극심한 남자였다. 함께한 세월이 적지 않아 어지간하면 눈을 가린 채로도 기분을 파악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어렵다. 늘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일자로 닫힌 채였다. 안대로 가려진 눈도 크게 움직이는 기미가 없었다.

굳이 기숙사의 빈방이 아니더라도 고전에는 사용할만한 방이 많았다. 하지만 거기에 고죠의 방은 없었다. 그는 고전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야가 학장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가문과의 관계 역시 좋은 편이 아닌 남자의 거주지는 도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고급 아파트의 최상층이었다. 고전에 입학하기 전 후시구로는 츠미키와 다툰 날이면 종종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그러니 알고 있었다. 아파트는 도쿄 변두리에 위치한 고전으로부터 족히 30분 이상이 걸리는 곳이었다.

“내가 갔으면 좋겠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후시구로는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답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한편 제 의사를 완곡하게 전달할 만한 문장을 꺼내놓았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오늘은 메구미랑 잘래.”

후시구로의 말허리를 뚝 잘라낸 고죠가 멋대로 지껄였다. 후시구로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그 표정이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싫다. 물론 고죠는 후시구로의 표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후시구로는 이번에야말로 ‘싫어요’라고 말했지만 고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숙사 침대는 일인용이라고요!”

“그게 뭐?”

“좁잖아요!”

후시구로는 제 팔뚝에 엉긴 손가락을 떼어내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분명 한순간 조각품을 으스러뜨린 완력일 텐데. 어째 고죠는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듯한 반응이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돌려보내려 애쓰던 후시구로는 곧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 귀찮게. 투덜댄 고죠가 후시구로의 허리를 한쪽 팔로 안아 옆구리에 끼웠다. 후시구로는 고죠의 허리춤에 짐짝처럼 매달리게 된 후에야 그를 단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럽게도.

고죠는 어렵지 않게 후시구로의 방에 도착했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방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후시구로가 다시 바닥을 밟은 건 침실에 도착한 후였다. 고죠는 태연하게 재킷과 양말, 안대를 벗어 던졌다. 모든 것을 체념한 후시구로는 던져진 고죠의 옷가지를 주워 반듯하게 걸었다. 이어 이불과 베개를 꺼내자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고죠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왜 꺼내?”

“좁다니까요. 선생님이 거기서 주무세요. 전 바닥에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뻔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고죠가 후시구로의 팔을 잡아당겼다. 좁은 방이라 옷장과 침대 간 거리가 멀지 않았으므로 후시구로는 곧 고죠와 사이좋게 침대에 앉은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후시구로가 뭐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전 고죠가 그의 몸을 품으로 당겼다. 싸구려 침대가 장정 둘의 무게에 비명을 질러댔다. 살며 한 번도 고죠를 이겨본 적 없던 후시구로는 잠자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색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고죠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후시구로는 또래보다 작고 마른 어린애였다. 고죠는 그런 후시구로를 안고 낮잠을 자거나, 목말 태운 채 (후시구로는 격렬하게 거부했다.) 밖을 쏘다니는 일을 퍽 즐겁게 여겼었다.

좁아. 중얼거린 후시구로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었다. 벌써 잠들었을 리 없는데. 단정하게 두 눈을 감은 고죠는 그의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하기야, 고죠 사토루가 말을 한다고 듣는 부류의 인간이었더라면 후시구로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말수가 많은 소년으로 성장했을 터다. 후시구로는 편안한 자세를 찾기 위해 몸을 꿈지럭댔다. 한참의 부림 끝에 그나마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자세를 취하는 데 성공한 후시구로가 눈을 감았다. 물론 ‘그나마’ 눈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일 뿐, 좁아터진 침대에 남자 둘이 누운 상황이 편할 리는 없었다. 깊은 잠이 들지는 못할 게 분명했다. 차오르는 불만을 삼키는 찰나, 고죠가 돌연 상체를 일으켰다.

“불편해.”

먼저 불편함을 토로한 건 그였다. 의외다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고죠가 침대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 침대, 길이가 짧은데.”

190을 넘는 남자의 다리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간 채였다. 여기서는 못 자겠다며 일어난 고죠는 침대 옆 바닥에 어질러진 이불을 펼쳤다. 후시구로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팔자에도 없는 등산을 마친 몸이 노곤함을 호소했다. 정 불편하면 제 아파트로 돌아가겠거니. 쓰러지듯 침대에 누운 후시구로가 눈을 감았다. 그쯤 이부자리를 정리한 고죠가 침대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후시구로가 그를 응시했다. 왜요, 하고 묻기도 전 몸이 떠올랐다. 후시구로를 들어 이불 위에 눕힌 고죠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그만 자, 메구미.”

“…….”

기가 막혔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진작 잤을 텐데요. 혓바닥까지 올라온 대꾸를 가까스로 삼켜낸 후시구로는 신경질적으로 고죠의 팔에 머리를 댔다. 눈을 감자 커다란 손이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지척을 배회하던 수마가 제 자리를 찾았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했다. 의식이 빠르게 흐려졌다. 멀어지는 의식의 끝에서, 그는 고죠의 속삭임을 들었다. 사실 들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차라리 잠결에 무언가를 착각했다 말하는 편이 믿음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라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마땅히 실행에 옮겼을 테지만 잠에 취해 반쯤 형태를 잃은 이성은 멋대로 벌어지는 입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후시구로는 잠에 취해 뭉개진 발음으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고죠, 선생님의, 잘못이…, 아닌… 데, 요…….”

고죠는 놀란 표정으로 후시구로를 바라보았다. 후시구로는 그 말을 끝으로 완전히 잠이 들었다. 무언가를 제대로 듣고 판단해서 한 소리는 아니었을 테지. 고죠는 잠든 후시구로의 뺨 위에 어설프게 쏟아낸 단어를 혓바닥 아래에 감쳐물었다. 늦어서 미안해. 소리 없는 사죄가 형태를 잃은 채 흘러 후시구로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고죠는 후시구로의 등을 도닥이던 손으로 그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반쯤 열린 커튼 너머 흘러드는 어렴풋한 불빛이 후시구로의 얼굴을 비췄다. 드러난 이마에 입술을 누른 고죠가 눈을 감았다. 수런한 밤이었다.

***

이른 아침의 햇볕이 감은 눈꺼풀을 찔렀다. 잠에서 깨어난 고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들어 올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내내 딱딱한 바닥에 눌려있던 등허리가 고통을 호소했다. 끙끙대며 자세를 바꾼 고죠가 베개를 끌어 얼굴을 묻었다. 몇 년 새 매트리스에 익숙해진 탓인지, 단순히 나이가 들어선 지. 아니, 나이라니. 이제 겨우 스물여덟인데. 슬픈 가정을 털어낸 고죠가 베개를 내렸다. 낡았지만 말끔한 천장과 길고 촌스러운 형광등 따위가 차례로 시야에 잡혔다. 품이 허전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새어드는 볕을 가리고자 들었던 팔은 전날 후시구로에게 베개 대신으로 내어준 오른쪽이었다. 메구미. 고죠는 급하게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감각은 일반인의 상식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해 숙면은 취하지도 못했지만 설령 깊게 잠이 들었다 한들 후시구로가 품을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거기다, 후시구로는 기척을 지우는 데 능숙한 부류의 인간조차 아니었다. 전날 후시구로가 걸어둔 옷가지를 낚아채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고죠가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후시구로가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졸음기는 없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내 잠든 고죠의 머리맡에 앉아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무릎을 세우고 웅크려있던 후시구로가 굽어있던 등을 폈다. 잘 잤냐는 인사를 건네기가 미안할 만큼 파리한 낯이었다. 고죠는 그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왜 그러고 있었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 일어났으면 깨우지 않고. 딸려 올라오는 질문은 가까스로 목구멍 아래에 밀어 넣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후시구로가 고죠를 응시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얇은 입술이 열리고, 이내 소리도 없이 닫혔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한차례 미간을 좁힌 후시구로가 무릎을 감싼 팔을 풀었다. 그는 그대로 한 손을 뻗었다. 얼핏 고죠를 향하는가 싶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커튼 사이로 흘러드는 빛에 손끝이 닿는 순간이었다.

“메구미!!”

고죠는 질겁하며 후시구로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내민 손이 빛에 닿은 순간은 짧았지만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고 단정하던 손끝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언가 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손톱 아래 약한 피부는 피가 맺힌 듯 붉어졌고 보호받지 못하고 드러난 피부는 검게 그을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죠는 곧장 침대를 넘어 단단히 커튼을 쳤다. 후시구로는 전보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였던 손은 다른 손으로 감싼 채였다. 고죠는 말 한마디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후시구로의 손을 살폈다. 천만다행하게도 상처는 흔적 하나 없이 아물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후시구로가 머리를 뒤로 뺐다. 깨끗한 암녹색 눈동자가 어색하게 주변을 휘돌았다.

“안 믿으실 것 같아서.”

후시구로가 웅얼댔다. 고죠는 그제야 후시구로의 눈에 비춘 제 얼굴이 필요 이상 굳어져 있음을 알았다. 위험하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다그치려 했는데. 이래서야 할 말이 없다. 긴 한숨을 내쉰 고죠는 후시구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릎을 폈다. 하마터면 애먼 목숨 하나를 날릴 뻔했다. 햇볕 좀 쐰 정도로 자연발화라니. 이를 어쩌지. 고민하던 고죠가 얌전히 자리에 앉은 후시구로를 바라보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방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일 테지만 이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일이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귀한 인재를 무작정 감금해 둘 수는 없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다소 힘이 들어간 명령조의 문장에 후시구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정 방 안에 있으라는 것도 아니고, 곧 돌아오겠다니까.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암녹색 눈동자가 유순하게 깜빡였다. 고죠는 그가 또래보다 조심성 있고 사려 깊은 성격이라는 데에 감사하며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하긴, 복면을 쓰고 다닐 수는 없겠지.”

“요조숙녀 났네.”

이타도리와 쿠기사키의 반응은 그랬다. 쿠기사키의 지적에 후시구로는 눈가를 찡그렸지만 큰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춥지 않은 날 가죽장갑을 끼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하늘에 우산을 쓴 제 꼴이 우습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이른 아침,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고죠가 나타나기까지는 대략 두 시간이 걸렸다. 그 손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힌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내용물은 물론 후시구로가 사용할 장갑과 우산이었다. 만지는 일만도 송구스러울 만큼 고급스러운 상자에 든 가죽장갑과 양산의 역할을 겸하는 3단 우산을 하나씩 꺼내 쥔 그는 심신의 안녕을 위해 쇼핑백 구석에 잠들어있을 상품 태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고죠는 야가 학장에게 후시구로의 상태를 보고했고 몇 안 되는 재학생들에게도 이를 알렸다. 빛 아래 서면 피부가 타들어 가는 통에 날씨에 맞지도 않는 장갑이며 우산을 사용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숨기려 한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다. 숨길 수 있는 일이었더래도 달라지지는 않을 테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후시구로 상태는 재학생 전원이 인지하고 있는 편이 낫다는 것이 고죠의 의견이었다. 야가 학장 역시 이에 동의했다.

문을 열고 나온 고죠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보기 좋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열린 문 너머 그가 만들어낸 주해의 가운데 이마를 짚고 앉은 야가 학장이 보였다. 후시구로는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순간, 무언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고죠였다. 후시구로의 상태를 학생들에게 공유하느냐, 마느냐, 결정하기 위해 이만한 시간을 소비했을 리 없다. 후시구로는 미심쩍게 고죠를 바라보았다. 고죠는 저를 향하는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후시구로의 어깨를 떠밀었다.

후시구로는 그 길로 이에이리를 만나 일련의 변화를 기록했다. 검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세밀했다. 이에이리의 연구실을 빠져나올 즘에는 이미 점심때가 가까워 있었다. 맑은 하늘을 확인한 고죠가 우산을 펼쳤다. 함께 걷기 위해서는 그가 우산을 드는 게 맞았다. 후시구로는 둥근 그림자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빛 아래로 나서자 고죠가 우산을 기울였다. 아슬아슬 어깨의 중간에 걸쳤던 그림자가 완전히 어깨를 덮었다. 이런 것을 배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 봐야 고죠의 어깨가 축축해지는 일은 없을 텐데. 후시구로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를 따라 자리에 선 고죠가 물었다.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후시구로는 고개를 저어 생각했던 것을 털어냈다. 우산에 가려지지 않은 어깨와 얼굴, 머리칼, 단단한 턱과 곧은 목 따위가 평소보다 희게 보였다. 빛에 젖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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