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고죠후시] 한 겨울 밤의 꿈

주막집 by 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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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고물

어두운 밤 골목 집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있다. 이 추운 겨울, 딱 봐도 겉옷 하나 없이 교복 바람으로 나온 것을 보아하니 근처에 사는 고등학생이 가출이랍시고 집을 튀쳐나온 모양이다. 근데 그게 왜 하필 우리 집 앞일까.

"저기 학생?"

고죠의 목소리에 검은 머리통이 고개를 들었다. 꽤 오랜 시간 추위에 떨고 있던 건지 얼굴이 창백했다. 푸르게 변해 파르르 떨고 있는 입술이 양심을 쿡쿡 찔렀다. 알게 모르게 사명감이 들자, 고죠는 괜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가출한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당신이 뭔데. 내가 널 뭘 믿고 따라가. 이거 참 똑부러진 학생이네. 대뜸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도 이렇게 신경쓰고 싶지 않다고.

"나 이상한 아저씨 아니야. 굳이 이유가 필요하다면 네가 지금 앉아있는 곳이 우리 집 앞이거든."

"아……."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키자 소년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툭툭 털고 제 옆을 지나쳐 갔다. 이렇게 빨리 사라져주면 좋기는 한데, 이미 엄청나게 신경 쓰여버렸단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던 고죠가 뒤를 돌아보며 아이를 붙잡았다.

"겉옷이라도 빌려줄게. 입고 가."

"네?"

"그 꼴로 보냈다간 하루도 못 버티고 동상 걸려 죽을 것 같은데."

결국 자신의 집까지 따라 들어온 학생을 두고 옷방에 들어가 최대한 따뜻해 보이는 옷을 찾았다. 낯선 곳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가 가만히 서서 집 안을 두리번 거렸다. 적당한 옷을 찾은 고죠가 어색하게 서 있던 아이에게 옷을 건네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고죠 사토루."

"……?"

"내 이름 말이야. 고죠 사토루라고."

"……후시구로 메구미입니다."

"메구미? 이름 예쁘네. 앉아있어. 우유라도 따뜻하게 데워줄 테니까."

아무리 봐도 곧 있으면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밖을 나간다니. 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저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집에 누군가를 들이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런 어린 아이를 집 밖으로 내쫓을 만큼 싫어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당사자의 의견인데……. 전자렌지로 돌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우유를 후시구로의 자리 앞에 두고 옆 쇼파에 앉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뭐를요."

"당장 집으로 들어갈 거 아니면 그냥 자고 가."

후시구로는 머뭇거리더니 한사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생판 처음보인 남인 내가 더 권하는 것도 이상하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고죠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우유는 천천히 마시고 가. 조금이라도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지금 고죠가 가출한 청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근데 왜 가출을 했대?"

"그냥 뭐… 일탈이죠."

대답을 피하는 후시구로의 답변에 고죠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흥미도 없었다. 원래 저 나이 땐 집 커튼 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가출할 때니까. 한 번쯤은 경험 해보는 거지. 낙천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손에 쥐고 있던 우유에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게 되었을 때 컵을 내려놓은 후시구로가 고죠가 건네준 롱패딩을 챙겨입었다. 고죠는 후시구로를 따라 일어나 손을 내밀었고, 후시구로가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뭐 이 정도면 다 녹은 것 같네. 조심히 가."

"아, 네. 감사합니다."

뭐가. 옷을 빌려준 것? 아니면 몸을 녹이게 도와준 것?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지만. 이제 진짜 신경 꺼야지. 점차 피곤함이 몰려오던 고죠는 마중조차 나가지 않고 그대로 손을 흔들어주며 침실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시구로가 빠르게 집에서 벗어났다. 그나저나 옷은 언제 돌려주려나. 복사 붙여넣기 같은 지루한 일상에 새로운 것이 더해진 하루가 나쁘지 않았다. 그 값으로 패딩 하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 겨울 밤의 꿈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니고 바로 다음 날, 어제와 같은 장면이 고죠를 반겼다. 이번엔 다행히 따뜻해 보이는 겉옷을 입은 채로.

"메구미? 오늘은 무슨 일이야? 패딩 돌려주려고?"

"저 좀 재워주세요."

장난스레 웃고 있던 고죠가 잠시 표정을 굳혔다. 딱히 어디 얻어맞은 흔적도 없고 긴장한 듯한 얼굴을 보아하니 잘 곳이 없어 이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생각을 끝마친 고죠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후시구로를 두고 집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 안 되려나. 고개를 푹 숙이고 난감한 얼굴을 하던 후시구로가 다시금 들리는 고죠의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뭐 해? 안 들어와?"

하루만에 찾아온 고죠의 집은 다시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혼자 사는 것 치고 너무 넓었다. 그렇게 나이가 있어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 살려면 대체 어떤 일을 하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괜한 궁금증인 것 같아 접어두었다. 자기가 옷을 갈아입고 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고 현관에서 어물쩡 거리고 있는 후시구로를 발견한 고죠가 뭐 하냐며 후시구로의 팔을 잡아끌었다. 신발 좀 벗고요...!

"이 방 쓰면 돼. 원래 손님용으로 쓰던 곳이니까 잘만 할 거야."

"아저씨 잘 살아요?"

"아니라고 하면 믿어?"

"안 믿기긴 할 것 같아요."

"있는 게 돈 밖에 없긴 해."

아! 얼굴도 있다. 키득거리며 웃는 고죠의 얼굴을 보며 후시구로가 인상을 팍 쓰자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고죠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너 그 얼굴 상당히 귀엽다.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모르는 고죠의 말에 모든 부끄러움은 후시구로의 몫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죠를 밀어 방에서 내보내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문 앞에다 옷 둘테니까 샤워하고 입어."

옷을 가져다주고 저녁을 준비하려고 하니 후시구로의 저녁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준비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겠지. 집에서 두 명분의 음식을 만드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평소의 양보다 두 배가 늘어난 재료들을 손질하며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산 지 오래되기도 했고, 누군가 집에 올 때면 사오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능숙하게 음식들을 하다 둘 준비하다보니 어느새 식탁을 다 채웠다.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메구미."

샤워실로 가 이름을 부르니 문을 살짝 열리더니 후시구로의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왜 안 나오고 저러고 있지. 문을 활짝 열려고 하는데 후시구로가 다급하게 문을 잡았다. 왜 그런가 하니 문틈 사이로 옷이 몸에 맞지 않아 흘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옷이 안 맞네. 지금 문 연 옷가게도 없을텐데."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흐음, 일단 밥 안 먹었지? 차려놨으니까 그것부터 먹고 다른 옷 찾아줄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시구로가 문을 열고 나오자 슬쩍 보는 것과 달리 더 심각했다. 반팔 티는 목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늘어져선 쇄골이 전부 보였고, 더 문제인 건 바지였다. 꽤 탄탄해 보이는 체격에 비해 살이 없는 탓에 후시구로가 손으로 바지춤을 잡고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바지는 바로 찾아줘야겠네.

"이건 고무줄 있는 거니까 줄여 입으면 될 거야. 뭐, 불편하면 그냥 벗고 다녀."

"그건 사양할게요.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태도에 반해 바지를 받아들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꽤 귀엽다 싶었다. 식탁 위에 식기를 셋팅하고 있으니 바지를 갈아입은 후시구로가 다가왔다. 이번엔 괜찮아 보이네. 아직 많이 낯선 건지 주춤거리며 의자에 앉은 후시구로가 젓가락을 들었다. 계속 보고 있는 게 부담스럽겠다 싶어 고죠가 먼저 밥을 뜨니, 이어서 후시구로가 밥을 먹기 시작한다. 남고생은 남고생인지, 아까 뛰어가는 것은 병아리 같다 싶었는데 밥은 또 모이쪼듯이 먹진 않았다. 밥 차리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다 먹은 식탁을 치우려고 하니 치우는 거라도 자기가 해야겠다며 고죠가 손에 들고 있는 것마저 뺏어들고 등을 밀어 거실로 내쫓았다. 기특한 면까지 있었네. 

나름 바르게 자란 것 같은데 이쯤 되니 왜 가출했는지 조금 궁금해졌으나 굳이 묻진 않았다. 뒷정리를 후시구로에게 맡긴 채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으니 정리를 마친 후 제 옆에 와서 앉았다.

"다 치웠어?"

"네 잘 먹었습니다."

"그래 잘 먹었으면 됐다."

시간이 좀 늦었다 싶은데도 방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옆에 앉아있는 것이 이상해, 후시구로를 쳐다보니 눈이 마주쳤다. 심히 당황한 건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다 보일 정도였다. 할 말 있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묻자, 또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꼼지락 댔다.

"그… 아저씨."

"잠시만. 그 전에 너 몇 살이야? 나 아직 아저씨 아니거든."

"고1이요."

"…삼촌으로 하자."

차마 형은 양심에 찔려 못하겠고 삼촌이라고 이야기하자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표정을 한껏 구겼다. 후시구로는 표정으로 정말 여과없이 다 드러내는 구나…. 고죠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한 발 물러섰다.

"…알겠어. 아저씨라고 불러."

"아저씨 혹시… 한동안만 여기서 재워주면 안 돼요?"

"안 돼."

고죠가 그 부탁을 거절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후시구로를 귀엽고 괜찮은 애라고 생각한 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가출한 학생을 하루 이틀 재워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한동안이라는 건 안 될 일이었다. 부모님 속을 얼마나 뒤집으려고 이러는 거야.

"집은 들어가야지."

"들어갈 거예요 들어갈 건데…, 당분간은 들어가기 좀 그래서."

"정확한 이유도 모르고 부모님 허락없이 여기서 지내게 할 순 없어."

아무리 애같이 행동하는 고죠라도 어른이었다.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고죠가 뭐라 더 말하려는 후시구로의 말을 가로챘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집에 들어가."

어딘가 축 쳐진 모습을 보니 안쓰럽긴 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후시구로를 거실에 둔 채 먼저 방에 들어간 고죠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방에 안 들어가고 계속 거실에 남아있는 건 아닌지, 거절 당했다고 이 밤 중에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닌지, 아주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가출하고 모르는 사람 집에서 잘 정도로 강단있는 아이인데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결국 이별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캄캄하게 다 꺼져있는 불을 켜 거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방문을 열고 확인하니 다행히 이불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모양이었다. 어리다고 뭐든 감정적으로 행동하진 않는 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야 조금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겠다.

"지금 나가려고?"

"학교 가야죠."

"가출했는데 학교는 가는 거야?"

"오늘 방학식이에요."

출근 준비를 하고 나오니 후시구로가 먼저 멀끔히 교복을 차려입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젯밤도 그렇고 자신의 생각보다 여느 학생들처럼 폼 잡는 것에 빠져 막나가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걸 알고 나니 단순한 가출이 아닐 거라는 추측까지 들었다. 아직 섯부른 판단이겠지만 고죠는 꽤 감이 좋은 남자였고 자신의 감을 믿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신세를 졌다며 문고리를 잡은 후시구로를 붙잡았다.

"알겠어. 얼마나 지낼 건데."

"왔어요 아저씨?"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켜져있는 불이 낯설었다. 적막한 공간에 들어와 한숨 돌리고 그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쉬는 것이 고죠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런데 보금자리에서 누군가 자신을 반겨주는 것이 참으로 어색했다.

"일찍 끝났나보네."

"방학식이었으니까요."

어제 내어준 방에서 고개만 쑥 내밀고 있던 후시구로가 저벅저벅 거실로 나와 고죠의 짐을 받아주었다. 익숙치 않은 상황에 얼떨떨하게 짐을 맡긴 고죠가 저녁은 먹었냐며 화제를 돌렸다.

"아뇨, 먼저 먹기 좀 그래서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일단 씻어요. 생각해볼게요."

지금의 대화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방금 위험한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한 건지 별다른 내색없는 후시구로의 태도에 뭐 아무렴 어때, 넘겨버렸다. 이 어린 아이와 자기가 뭘 어찌할 것도 아니고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봤어?"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청국장에 마요네즈 넣어서 끓여줘도?"

"그냥 편의점 도시락 사다먹을게요."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박따박 말을 받아치는데, 그때부터 날이 가면 갈수록 고죠의 장난기가 늘어났다. 후에 후시구로가 듣기론 그게 고죠의 취향을 저격했더랬다. 오목조목 따져보면 예쁜 얼굴을 한껏 구겨 싫은 티를 내는 게 퍽 귀여웠다고. 

"으아 배부르다"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세요."

다 먹은 그릇들을 당연스럽게 치우는 후시구로를 바라보던 고죠가 거실로 가 쇼파에 털썩 앉았다. 분명 쉬라고 말했는데 왜 거실에 앉아있는 거지, 커피라도 갖다달라는 건가. 후시구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죠를 쳐다보자 손을 휘휘 저으며 신경쓰지 말란다. 티비라도 보려는 모양이지. 관심을 접고 다시 식탁 정리에 몰두했다.

"뭘 저렇게 열심히 한데."

열심히 설거지를 하는 후시구로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후시구로는 딱 보면 건장한 체격의 남고생이었지만 조금만 관심 깊게 들여다보면 몸체가 꽤 가늘었다. 여리여리한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잘록한 허리나 한줌에 잡힐 것 같은 발목을 보면 꽤 마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뼈대가 얇은 건가, 보통 여자들도 저렇게까지 얇진 않았던 것 같은데. 후시구로의 뒷모습을 유심히 훑어보다 설거지가 끝난 그와 딱 눈이 마주쳤다.

"뭘 봐요"

"하하, 진짜 귀엽지 않네."

"보통 다른 남고생들도 귀엽진 않아요."

"넌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가출했는데 학교 가는 것부터 보통은 아니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고죠를 보며 후시구로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안지 이틀만에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 좋아해?"

"꽤 좋아하는 편이에요."

말 그대로 후시구로는 영화나 책을 꽤 즐기는 편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거나 공감 능력이 뛰어나 가상 인물에게 몰입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감정선이라던지 자기가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측면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장르?"

"딱히 가리진 않지만 굳이 꼽자면 로맨스, 일까요."

"역시 보통이 아니라니까."

"방금 제 말의 어떤 맥락에서 그런 감상이 나오는 거예요."

"로맨스라는 점?"

딱 봐도 감성이라곤 푸석푸석할 것 같이 뚱한 표정만 지어대면서 좋아하는 건 감성이 넘쳐흐르는 로맨스라니 웃길 노릇이었다. 그래서 뭘 제일 좋아하는데?

영화가 한창 하이라이트를 향해가면서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거의 3 시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는 고죠도 어릴 적 봤던 기억이 있는 영화였다. 배 안에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남녀라, 잘 만든 영화인 건 확실했지만 딱히 고죠의 취향은 아니었다. 슬슬 따분해지기 시작한 고죠가 고개를 살짝 돌려 영화에 집중한 후시구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몰입도가 장난 아닌데. 표정에 변화랄 건 없었지만 영화가 점점 하이라이트를 향해 갈수록 후시구로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긴장될 땐 양손을 꼭 붙잡고, 흥미진진 하면 손을 주물러댔다. 혹여나 아슬아슬하거나 불안한 장면이 나올 때면 손가락을 꾹꾹 눌러댔다. 그런 버릇들을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흥미로웠다. 얼굴은 저렇게나 잔잔하면서. 영화보다 영화를 보는 후시구로를 구경하는 쪽이 더 재미있었다.

"재밌어?"

아예 소파에 몸을 뉘이고 후시구로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려놓자 그는 못내 한숨을 내쉬고 자기 좋을대로 놓여진 다리를 끌어당겨 편한 자세로 만들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영 집중을 못하시네요. 남의 얼굴이나 훔쳐보고."

흥미없는 얼굴로 다시 영화에 시선을 고정하는 후시구로를 보며 고죠가 푸른 구슬 같은 눈을 반짝였다.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이지. 역시 이쪽이 더 재밌단 말이야.

"아저씨."

"무슨 일이야?"

둘의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된 지 10일 가량이 흘렀다. 각자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자며 웬만하면 고죠의 방 안으로 모습을 디밀지 않던 후시구로가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이 날은 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그 소리가 새어들어오진 않았지만 조용히 있으면 가끔 천둥 소리가 울려퍼지곤 했다.

"같이 자도 돼요?"

지내다보며 느낀 결과 후시구로는 제 나이에 맞게 행동하면서도 가끔 생각치도 못하게 어른스런 말을 뱉어 자신이 놀랄 정도로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또 그 반대인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을 놀래켰다. 무슨 일로 이리 자신의 방에 행차했을까, 천천히 훑어봤다. 얼굴은 봐도 소용없을 거고.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을 바라보자 자신의 손등에 손톱을 박고 있었다. 저건 처음보는 건데. 어떤 의미일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천둥이 내리치며 후시구로의 몸이 흠짓 반응했다. 이거네.

"안, 되나요?"

"아냐. 들어와."

무서워하는 동생같은 아이를 두고 모른체 할 이유는 없었다.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자 후시구로가 처음 집에 왔을 때마냥 쭈뻣거리며 침대로 다가섰다.

"뭐 해, 안 눕고. 부끄러워?"

"그런 거 아니에요. 어색해서 그렇지."

"아닌 게 아닌데?"

그의 말대로 후시구로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민망함에 괜히 짜증을 내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당기며 몸을 눕혔다. 틱틱대는 게 꼭 관심 주면 도망가는 고양이 같단 말이야. 귀엽긴. 고죠가 이불 위로 후시구로의 머리를 쓰다듬곤 비스듬히 누워있던 몸을 완전히 눕혔다. 이불 속에 숨어든 후시구로의 심장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항상 혼자만 자던지라 누군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게 영 적응이 안 됐는지 고죠가 뒤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답답했는지 후시구로가 이불을 걷어내고 자는 얼굴이 보였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이 평소 뚱한 얼굴이랑은 다르게 영락없이 순진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눈만 뜨면 왜 그렇게 할퀴어대는지. 장난 삼아 손가락으로 볼을 콕 찌르니 말랑거리는 게, 닿아오는 감촉이 좋았다. 이거 왠지 중독될 것 같다. 두어번 더 찔렀나 후시구로가 미간을 확 구기며 고죠의 손을 잡아왔다.

"아, 이건 좀 위험한데…."

매번 얼굴 대신 감정을 드러내는 손이 자신의 손을 꽉 놔주지 않았다. 또다. 그때의 위화감이 또다시 느껴졌다. 괜찮아. 내가 이 어린 아이한테 무슨 감정을 품겠어. 그렇게 본능이 알리는 두 번째 경고를 무시한 고죠가 후시구로의 손을 잡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났어요?"

부지런하게도 먼저 일어난 후시구로가 출근 시간에 맞춰 고죠를 깨웠다. 평소 절대 늦잠 잘 고죠가 아니었는데 알람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자는 것을 후시구로가 깨운 것이었다.

"미치겠네. 나 왜 못 들었지."

"많이 피곤했던 거 아니에요?"

고죠의 퇴근 때마다 짐을 받아주더니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고죠의 짐을 챙겼다. 정신없이 준비하느라 몰랐지만 집을 딱 나서려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메구미."

"왜 불러요."

"메구미."

다시 한 번 부르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속에서 의문이 피어났다. 너 왜 나랑 눈을 못 마주쳐. 결국 끝끝내 자신을 돌아보지도, 부름에 대답하지도 않는 후시구로를 두고 고죠는 출근길에 나섰다.

오늘은 어째선지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가지도 후시구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퇴근만 하면 미직지근한 얼굴을 하고서 반겨주던 얼굴이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어디 나간 건가. 휘적휘적 걸어가 방문을 열어재끼니 자신의 침대에 앉아있는 후시구로가 보였다.

"여기서 뭐 해?"

"언제 오셨어요?"

집중해서 책을 읽던 후시구로가 화들짝 놀라며 역으로 질문했다. 손에 들려있는 책을 살펴보니 자신이 요즘 읽던 한 소설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었던 걸 읽고 있던 모양이었다. 책이라면 읽겠다고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들이 책장에도 수없이 많이 꽂혀있었다. 굳이 저 책을 왜.

"다른 거 읽지."

"아저씨는 어떤 책을 읽나 싶어서요."

무심하게 책을 보는 내리깐 눈이 예뻤다. 길고 까만 속눈썹이 눈 위를 덮었고, 때마침 커튼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에 매끄럽게 빠진 턱선이 강조되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마치 청초한 미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 이거 뭐지.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엔진에 시동을 건 것처럼 심장이 덜컹거렸다.

"다른 책도 내가 읽었던 책일텐데."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그걸 네가 왜. 말하려다 말고 얇고 긴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기는 걸 보고 침이 꿀떡 넘어갔다. 이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대충 짐과 겉옷을 집어던진 고죠가 씻고 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어째선지 후시구로의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본능의 경고를 무시한 댓가는 꽤 컸다. 알아차리고 나니 평소 하던 모든 것들이 어렵게 다가왔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볼 때면 자주 하던 무릎 베개가 생각났지만 어쩐지 조심스러워졌다. 한 번은 후시구로가 고죠의 허벅지를 베고 눕자 자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오지도 않는 잠을 잔다며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그것뿐이겠는가. 밥을 먹을 때에도 괜히 눈치를 보게 됐다. 먹고 싶은 게 더 있지는 않는지 이게 입맛에 맞는지 고민하다, 아예 나중에는 집에서 먹는 밥보다 외식을 더 즐겨하게 됐다. 그에 반해 후시구로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사람이 달라지면 무언가 있나 의심해볼만도 한데 그는 아무런 의심도, 질문도, 반응도 안 했다. 눈치 못챈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몰라도 너무 모르니 심술이 나기도 했다.

"메구미."

"왜 불러요?"

"나 요즘 어때?"

"예?"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나란히 걷다 따라오지 않는 발걸음에 후시구로가 뒤를 돌아봤다. 외식하러 가자며 밖으로 불러내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거였다. 그저 혼자 땡깡 부리는 것에 불과한 행위였는데 후시구로는 태연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어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글쎄요? 밥 먹자면서요. 얼른 가요."

"…!"

무언가 알아챈 듯 눈이 땡그랗게 커지다 허탈한 듯 웃었다. 저 얌체. 내가 집에다 사람이 아니라 구미호를 들였구나. 이제야 왜 그렇게 태연했는지 어째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건지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대체 어디서부터가 기획된 건지 알 수도 없었다.

"너 배우해도 되겠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던 고죠가 후시구로의 허리 위로 팔을 얹었다. 필시 끌어안지 않고 얹은 것이었다. 꽤 무게가 나가는 팔에 숨쉬기가 불편해진 후시구로가 고죠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언제 봐도 참 마음에 드는 눈동자였다. 주인과 다르게 맑고 투명한 게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맞아, 그거야. 계속 그렇게 해. 나도 그럴 거니까."

고죠가 후시구로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비아냥 거림이 아니었다. 굳이 저 말이 아니라도 후시구로는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 분명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한데 둘 중 누구도 서로의 감정에 내색하지 않았다. 공중에 흩날릴 고백임을 알았다. 지금의 관계, 적당한 거리감, 간질거리는 설렘까지 이 모든 걸 괜한 환상으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래야만 우리가 더 붙어있을 수 있었다. 현실이 그랬다. 후시구로는 어디까지나 가출한 청소년이었고 고죠는 그에게 잠시 머물 곳을 내어준 사람이었다. 언제까지나 후시구로를 자신이 데리고 있을 수도 없는 법. 언제 어디사는 지도 모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와 더 이상의 선은 넘을 수 없었다.

"저 내일 모레 개학이에요."

"벌써?"

"네 그래서 내일 집에 들어가보고요."

예상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이별의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평소와 똑같이 밥을 먹고, 일상을 주고 받는 대화를 나누며, 거실 쇼파에 앉아 희희덕 거리며 티비를 보다 잠이 오면 같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지내온 날들과 별다를 바 없는 시간을 보냈다.

"메구미 자?"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흘렀다. 대답없는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자신이 좋아하던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볼이 손에 닿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응? 메구미."

대답없는 그의 얼굴 옆에 고이 놓여진 작은 손을 살짝 간질이다 손가락으로 훑다가 손바닥을 마주 대고 살며시 그러쥐었다. 마치 손을 잡는 것처럼. 얼굴 대신 열심히 감정표현을 해오던 손이 고생스러워, 손등에 입을 맞추기 위해 살짝 들어올렸다. 이게 뭐야.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소리를 낸 고죠가 후시구로의 눈치를 보다 깨지 않을 것을 확인하고 손등을 자세히 바라봤다. 손톱이 파고들어 살갗이 벗겨진 흔적이 선명했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나만 초조한 게…. 손등에 남겨진 상처에 살포시 입술을 맞댔다. 내일이면 네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 받는 느낌이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데리고 살고 싶은데."

이게 분명 우리의 마지막은 아닐 거야. 그렇지? 차마 뒷말을 입에 담지 못하고 애써 자신을 달래가며 품안에 있는 후시구로를 꽉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후시구로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단 한 달간의 추억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의 시곗바늘을 붙잡고 제발 좀 멈추라고 빌고 싶었지만 시간은 고죠의 간절함도 모르고 야속하게 흘러가기 바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원래 이리도 짧았던가, 후시구로가 반겨주지 않는 집 안은 너무나도 휑했고 이제부터 거기에 익숙해져야했다.

"왔어요 아저씨?"

퇴근을 하고 현관문을 열 때에도,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식탁에 앉아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같이 자도 돼요?"

넓은 침대에서 혼자 잠에 들 때에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억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러다 정말로 병이라도 걸려버릴 것 같았다. 고작 한 달을 같이 지냈을 뿐인데 네 흔적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남아버렸다. 나는 지금 이렇게 미칠 것만 같은데 너는 어떻게 신세졌다는 말만 딸랑 하나 남기고, 찾을 수 있는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지고 마는 건지. 너의 기억이 나와 함께하는 동안은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밤에는 긴 시간을 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 혹여나 이 밤에 네가 찾아오기라도 할까봐. 가끔은 집 앞에서 몇 시간을 서 있을 때도 있었다. 처음 너와 만났던 그 날처럼 네가 집 앞에 쪼그려 앉아있기라도 할까봐.

네가 떠난 후로 벌써 계절이 한 번 바뀌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너에 대한 기억들이 익숙해질 때 즈음 네가 처음 입고 왔던 교복을 생각해냈지만 찾아가는 것은 포기했다. 너를 찾아간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부디 너는 기억에 매달리지 않고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

2년 후.

또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작년 네가 없는 겨울을 겪고 난 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와 함께했던 겨울이 모두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 현실을 도피하고자 꿈으로 치부하고 싶었던 거지만 이제는 안다. 너는 확실히 내 옆에 존재했었다는 걸. 너와 함께한 날들이 꿈이 아니라, 네가 나의 꿈이라는 것을. 서른 셋에 꿈을 꾸다니. 답지 않은 자신의 순진함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번 겨울은 어떻게 보낼까…."

2년 전까지만 해도 문 앞에 서서 집 안에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망설이던 고죠가 이제는 별다른 망설임없이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고죠를 반겼다. 뭐지, 내가 보일러를 그대로 키고 나갔던가. 그 순간 부엌에서 익숙한 머리통이 튀어나오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왔어요 아저씨?"

그건 한 겨울 밤의 꿈.

아니, 꿈 같은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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