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My youth
* 선후배 AU
(미완 전시)
“음, 어색한가?”
거울 앞에선 이타도리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제 귀에 박힌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피어싱을 뚫어보면 어떻겠냐는 전 애인의 권유로 제 몸에 새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비록 귀를 뚫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헤어지긴 했지만, 이타도리는 이 피어싱이 썩 마음에 들었다.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빛이 반사되어 반짝 빛나는 피어싱을 바라보는 얼굴이 흐뭇하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리 골라둔 여러 벌의 옷가지들을 몸에 대어보기를 몇 번. 전날 밤 고심 끝에 고른 의상이 영 성에 차지 않는지, 이윽고 옷장에서 새로운 옷들을 꺼낸다.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방바닥을 빽빽하게 채운 옷가지들을 보니, 오늘 외출은 깨나 험난해보였다.
결국 이타도리가 고른 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난한 차림새였다. 여기서 평소라 함은, 학창시절 그가 즐겨 입던 것 따위를 뜻한다. 결코 화려하지 않되, 실용성 좋은 편안한 차림새. 화려하게 겉멋을 부리는 지금과는 상반된 차림이긴 했으나, 고등학생 때부터 줄곧 붙어다니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한껏 꾸미는 것도 어색했다.
다리에 착 감기는 블랙 진은 남색 빛깔이 돌던 교복 바지를 연상케 했고, 빨간 후드티는 당시 마이 속에 갖춰 입던 것과 유사한 디자인의 제품이었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것들. 그런데 다시금 거울 앞에 선 제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엔 늘상 입고 다니던 것들이었는데, 어느 하나 튀지 않는 무난한 차림새가 너무 낯설었다.
***
“어이, 감자.”
“쿠기사키! 후시구로!”
“여어.”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시구로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이타도리를 샅샅이 훑었다. 이윽고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챈 후시구로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꼴이 왜 저래.’
후시구로는 졸업 후에도 이따금씩 이타도리를 만났다. 해봐야 서너 달에 한 번이었지만, 한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말 해, 이타도리가 베레모를 쓰고 라이더 자켓을 걸친 모습이나, 언밸런스한 셔츠와 5부 바지를 입은 모습이나, 루즈한 니트로 레이어드를 만들어 목걸이와 반지 등 갖은 악세사리로 꾸민 모습 등등. 스타일의 변화를 전부 봐 왔다는 것이다.
결코 현재 이타도리의 스타일링이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타도리는 사뭇 이상했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떠돌이처럼, 이도저도 아닌 느낌.
“어이, 감자. 또 스타일이 바뀌었네? 이번엔 뭐야. 멍청한 양아치 코스프레?”
“하하, 그런 거 아니야.”
이내 후시구로는 쿠기사키의 말을 발판 삼아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저런 멍청이. 차마 혀를 굴려 모진 말을 뱉지 못하고, 한심한 눈초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 선배들도 온다고 했던가?”
이타도리가 천연덕스럽게 묻자, 돌연 후시구로의 표정이 바뀌었다. 본인이 그러고 싶다는데, 거기에 제가 끼어들어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었다. 후시구로는 한숨을 삼키며 쿠기사키의 물음에 성실히 답변을 주었다.
“어. 고죠 선배랑 게토 선배. 이에이리 선배는 일 때문에 새벽에나 올 것 같대.”
“그래? 아쉽네. 이에이리 선배 보고 싶었는데.”
“…그러게.”
한 사람의 불분명한 참석 소식에 쿠기사키가 부러 입술을 비죽이며 아쉬운 소리를 냈다. 평소 같았으면 ‘밤새 놀면 되지!’같은 소리로 쿠기사키를 달랬을 이타도리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방금 막 상념에서 깨어난 어색한 얼굴로 한 박자 늦게 맞장구 치며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들이 낯선 감각에 익숙해지려는 듯 꼼질거렸다.
‘고죠 선배. 오랜만이네.’
짤막한 감상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만난 셋은 저녁을 먹으며 느긋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패션 디자인과 선배의 부탁으로 밤새 옷을 갈아 입었다는 쿠기사키의 이야기. 반대로 밤 새워 디자인을 했지만, 눈에 차는 모델을 구하지 못해 머리 아프다는 후시구로의 이야기. 그리고 둘의 이야기에 적당히 호응하며, 이번에 새로 구한 알바에서 사고를 쳤다는 이타도리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들이 한 데 모여 북적북적 소란이 가시지 않는다. 둘둘 따로 만난 적은 있어도, 셋이 한 자리에 뭉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기 때문이었다. 졸업한 이후 각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이 일정을 맞추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셋은 아닌 척 서로를 반기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역시, 뺀질이. 사람이 한결 같네. 돈지랄을 참 잘해. 아주 마음에 들어.”
번화가의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떼 묻지 않은 하얀 건물. 신축으로 보이는 번지르르한 건물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며, 쿠기사키가 말했다. 이타도리와 후시구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특히 ‘돈지랄’이라는 부분에서.
대리석으로 된 계단은 꽤 폭이 넓어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비좁지 않았고, 난간조차 여러 줄기가 얼기설기 엮인 모양으로 디자인에 신경 쓴 티가 물씬 났다. 그 증거로, 셋 중에 가장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후시구로가 무심한 얼굴을 하면서도 은근히 손으로 난간을 훑었다.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든다는 표현이었다.
“뭐… 나이 좀 먹는다고 있던 돈이 사라지진 않으니까.”
“그래.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예전처럼 뺀질거리진 않겠지. 그것까지 한결 같지는 않았으면 싶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리며, 후시구로가 쿠기사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이타도리가 걸음을 멈추고, 앞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봤다.
“음…….”
“야, 너는 그냥 입 다물어. 알고 보면 멋있다느니, 다정하다느니, 또 그딴 소리로 사람 복장 뒤집어 놓을 생각 말고.”
“하하….”
“저건 지가 제일 당해 놓고, 매번 뭐 좋다고 비행기를 태워. 태우길.”
살벌한 쿠기사키의 타박에 이타도리가 볼을 긁적이며 입을 닫았다. 까칠하게 굴긴 했어도 나름 잘 챙겨줬는데. 이타도리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멈춰 서 있던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와서 무의미한 짓이었다.
이윽고 계단의 끝에 다다르고. 당연하게 자리해야 할 문 대신, 거대한 책장이 그들을 반겼다. 책장에는 전문 서적부터, 소설, 거기에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책까지 고루고루 꽂혀있었고 역시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게 있어야 할 문 고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책?”
“뭐야. 문 어딨어.”
다소 당황한 듯한 쿠기사키와 달리 꽤 흥미로운 광경에 이타도리가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신기하다. 이거 막 영화처럼 숨겨진 버튼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너 뭐 들은 거 없어?”
이타도리가 책장 곳곳을 더듬거린다. 후시구로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고, 쿠기사키가 인상을 팍 구겼다. 어린 애도 언제까지 이딴 장난질을 할 요령인지, 이런 곳을 잘도 찾았다 싶었다. 열 받은 쿠기사키가 앞머리를 쓸어올릴 무렵.
“어라, 이거 스위치 아니야?”
그저 신난 이타도리의 천진난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을 눌러주세요.]
두꺼운 책인 줄 알았던 것은 속이 텅 빈 허물 뿐인 커버가 전부였고, 커버가 꼽힌 자리에는 자동문의 버튼으로 추정되는 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쿠기사키는 숨 쉬듯 험한 말을 흘렸다.
“평소에 어떤 가게길래 이딴 게 있어.”
“그게 궁금해? 난 별로.”
“그래. 나도 동감.”
둘은 험상궂은 얼굴로 버튼을 누르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이타도리는 둘을 따라 걸음을 뒤로 물리며, 저 대화에 끼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알 것 같은데. 그때. 덜컹, 드르륵. 거대한 책장이 옆으로 움직이며, 내부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통 차가운 벽으로 둘러 쌓여 고상한 분위기를 물씬 풍길 줄 알았던 내부는 의외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놓여진 초록색 화분들부터, 모든 테이블에는 캔들 하나와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져 있었고, 그 테이블 마저 목재로 만들어진 원형 테이블이었다. 물론 바 테이블은 까만 대리석이었지만, 그 위에 주황색의 온화한 조명을 두면서 차가운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왔어? 어떻게 잘 찾았네.”
둥근 회전 의자가 돌아가며 백발의 머리칼이 흐트러진다. 손가락에 걸치듯이 쥔 납작한 술잔에서 노란 빛깔의 술이 출렁인다. 사실 술이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논 알코올(Non-alcohol) 칵테일, 신데렐라. 술을 못하는 그가 즐겨 마시는 칵테일이었다.
“거기, 당신. 나이가 몇 인데 이런 장난을 쳐?”
“미안한데, 이번에는 스구루 아이디어야.”
그는 유려한 입술을 살짝 휘며, 한 자 한 자 나긋하게 내뱉었다. 휘어진 입술과는 정반대로 생기 없는 메마른 눈동자가 한 명 한 명 훑고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듯 곳곳을 훑던 시선은 한 곳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다 거둬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중, 가장 오랜 시간 그의 시선을 독차지한 사람. 이타도리는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숨 쉬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한참동안이나 들이마신 숨을 뱉지 못했다. 시린 시선이 떠난 지금까지도. 마치 사냥터에서 곰을 마주한 사람처럼 질린 안색으로 숨을 죽였다. 이유라 함은, 역시 그것일까.
사람은 무릇 첫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법이다. 고죠 사토루는 이타도리 유우지의 첫사랑이었다. 끝끝내 제 마음조차 전하지 못한. 그런 그의 앞에 서는 순간 유지는 다시금 열 일곱, 첫사랑을 열병처럼 앓았던 그때로 돌아갔다. 부끄럽고, 긴장되고, …떨렸다. 그래서 수치스러웠다. 이전보다 더 멋있게 장성한 제 청춘의 첫 장을 장식한 사람에게 보이기에, 지금의 제 모습은 너무 하잘 것 없었다.
“맞아. 게임 같고, 재밌지 않아? 사토루는 격하게 좋아하던데. 다들 오랜만이야.”
순간 바 테이블 아래에서 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그랗게 말아 올린 까만 장발 머리. 치켜 올라간 얄쌍한 눈매. 게토 스구루였다. 이타도리는 그제서야 몸에 긴장을 풀고, 목청을 압박하던 숨을 뱉어냈다.
게토 역시 오랜만에 재회한 후배들을 관찰하는 눈초리로 훑었지만, 이타도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그냥 ‘그렇구나.’정도. 적어도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흐음, 유우지. 뭔가 많이 달라졌네."
후시구로와 쿠기사키를 따라 자리를 옮기던 이타도리의 몸이 굳었다. 역린이었다.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것과, 남이 알아채는 것은 짊어지고 있는 그 의미가 다르다. 심지어 저런 평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제 모습까지 끄집어낸 이타도리로써는 큰 충격이었다. 평소처럼 의연하게 웃어 넘길 수가 없었다. 게토의 뉘앙스가 너무나 묘했기에.
이타도리는 늘상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그게 저와 친한 사람이건,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건, 똑같았다. 제가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 좋을 수 있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눈 앞에 평화를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남의 마음을 꺾고 취하는 이득이 무슨 소용일까. 이타도리 유우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제가 조금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남의 손에는 제 몫을 쥐여주는. 그리고 그건 연애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상대에게 배려하고 맞춰주는. 속된 말로, 지극히 호구 같은 연애.
타인에게 맞춰주더라도 제 자신만 잃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을 바꾸려 드는 상대에게 그 흔한 짜증 한 번 낸 적 없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어렵지 않은 부탁들이었을 뿐더러, 지켜야 할 지조도, 신조도 없었기에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애인끼리 부탁할 법한 범위 내였고, 제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으니. 제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 거울로 들여다 본 제 모습은 제 믿음을 산산조각 내고야 말았다. 그저 타인. 뭐라 적당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거울 속 제 모습은 모니터를 장악한 error 딱지마냥 남의 흔적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고, 어느덧 완벽한 타인이 되어있었다.
수 차례 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던 이타도리는 결국 검은색 캡 모자와, 등짝에 화려한 벚꽃과 용이 수놓아진 스카쟌을 걸치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과거와 현재의 오묘한 콜라보. 예전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결국 제 자신이라는 발악이었다.
그런데, 들켰다. 들키고 말았다. 이타도리가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그래? 난 똑같은 것 같은데.”
고죠가 천천히 칵테일을 음미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타도리의 시선이 서서히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이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고죠는 여전히 칵테일을 내려놓지 않은 채였고, 태연한 얼굴, 손짓, 말투.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 이타도리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하나도 안 변했어.”
“…….”
흔들리지 않는 선명한 눈동자가 이타도리를 응시했다.
***
이타도리 유우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상대. 하지만 꿈에서조차 나와주지 않던, 냉정하기 짝이 없는 소년. 고죠 사토루는 소년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여전히 그대로구나, 넌.’
비단 외향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알기나 알까. 네가 제 첫사랑이란 사실을. 아마 상상치도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짝사랑했단 것은.
당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내 감정을 추스르기 바빴고, 자각하는 것만으로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끝끝내 좋아한다는 고백은 말문조차 떼 보지 못했다. 졸업식 당일, 더 이상 너를 보지 못했을 때가 되어서야 자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타도리는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낯선 환경을 파악하는 버릇도, 어색할 때면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것도, 설렘이 가득할 때면 묘하게 달아오르는 볼도. 걸친 옷가지와는 상관 없이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또한. 아무리 스타일이 변했다한들 고죠의 눈에 이타도리는 여전히 별다를 거 없는 소년이었고, 유일무이한 첫사랑이었다.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이타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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