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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된 메구미 (2)

그런 말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서 고함이 터졌다. 고죠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형태였다. 문으로부터 가까운 자리가 말석, 먼 곳이 상석. 소리친 남자는 벽을 따라 앉은 이들의 중간에 위치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창백한 낯빛에 날카로운 인상. 노여움 탓인지 불그스름하게 변한 남자의 얼굴에 여러 쌍의 시선이 꽂혔다. 고죠를 노려보던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상석에 앉아있던 노인이 그를 제지하듯 한 손을 들었다. 남자는 몇 차례 입을 달싹이다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렸다. 실내에는 다시 정적이 들어찼다. 고죠는 여유를 가지고 그를 에워싼 풍경을 훑기 시작했다.

모인 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인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채도가 낮은 기모노를 입은 채 꼿꼿하게 앉아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성은 모두가 자리에 앉아있고 여성은 벽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래봐야 여성은 열 명도 되지 않았지만. 고죠는 양쪽으로 갈라져 선 여인들을 빤히 응시했다. 좌측은 벽이었고 우측은 창이었다. 전통 가옥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창을 통해 정오의 빛이 쏟아졌다. 왼쪽 벽에 붙어 선 여자는 넷, 창가에 선 여자는 하나. 좌우의 숫자는 물론 간격까지 맞춰 앉은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배치였다. 가문 내 서열에 따른 것인가 하자니 그녀들이 입은 의복에는 별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벽면에 선 여자들에게서 시선을 물린 고죠가 눈을 굴렸다. 창가에 홀로 선 여자는 우울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소매가 긴 기모노는 검정에 가까운 암청색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린 여자의 뺨으로 빛이 쏟아졌다. 어두운 비단 위에 핏기 없는 얼굴이 도드라졌다. 등진 창의 역광으로 얼굴을 반쯤 감춘 여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용납할 수 없다. 그 아이는 젠인의 핏줄이야.”

“용납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애당초 그 애는 젠인도 아닌데.”

시선을 거둔 고죠가 짜증이 담뿍 밴 말투로 대꾸했다. 젠인 토우지가 젠인의 성을 버리고 후시구로 토우지가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젠인 토우지는 젠인의 직계 출신임에도 주력을 타고나지 못한 돌연변이였다. 주력을 가지지 못한 그는 하급 주령 하나 쓰러트리지 못하는, 이른바 ‘가문의 수치’. 젠인의 주술사들은 일반인만큼의 주력도 타고나지 못한 그를 가문의 오점으로 여겨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그래야 했다. 5급 주령 하나 퇴치하지 못하는 남자가 차기 당주 후보래서야 3대 가문으로서의 면이 서지 않았으니까.

하급 주령 하나 퇴치하지 못하는 반푼이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차세대 당주 후보. 주력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가지지 못한 그가 가장 유력한 당주 후보일 수 있었던 까닭은 단순했다. 젠인 토우지는 유례없는 천재였다. 그는 타고난 주력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 정기적으로 열리는 가문 내 경연에서 매회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물론 그가 당주위(位)에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를 지지하는 가문 내 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성인이 되기도 전 가문을 떠났다. 이후 행보는 알려진 바와 같다. 그는 주술사가 아니었지만 주저사도 아니었다. 젠인을 등진 그는 주술을 가진 모든 이들의 대척점에 선 존재가 되었다. 젠인은 토우지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며 그를 철저히 부외자 취급하면서도 그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젠인 메구미의 존재 역시 인지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부친은 일반인보다 못한 주력을 가진 천여주박에 모친은 주술과 연이 없는 비술사. 주술사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제대로 된 재능을 가지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비술사만 못한 남자의 아들이래서야.

그 무렵 토우지가 부인과 아이의 곁을 떠나 있는 시간은 몹시 드물었다. 부인이 살아있을 때 그의 생활은 비술사에 비견될 만큼 온건했다. 가문은 자연히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의 활동이 늘어난 건 부인의 사망 이후였다. 주술계와 연이 없는 여자와 재혼한 그는 자의로 젠인에 접촉해 아들에게 주술사의 재능이 있음을 알렸다. 비술사와 비술사보다 못한 남자의 사이에서 태어났다지만 엄연히 주술사의 재능을 가진 아이였다. 타고난 주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대도 좋았다. 주술계는 늘 손이 귀했다. 당시 토우지의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젠인’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재능은 있되 주력이 없는 아이, 재능이 있되 주술이 없는 아이, 마지막으로 주술과 주력 모두를 가지고 있으나 재능이 없는 아이. 가문은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아들이 가진 술식이 십종영법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건 젠인 토우지의 사망 직후였다.

아이를 회수하고자 했던 젠인은 의외의 복병에 부딪혔다. 고죠 가문의 차세대 당주이자 현존하는 주술사 가운데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고죠 사토루가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후시구로’ 토우지가 아들의 처우를 제게 맡겼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타고난 술식이 변변찮은 것이었더라면 일이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문제는 아이가 가진 것이 젠인의 상전술식인 십종영법술이라는 데에서 불거졌다. 변변한 후계자가 없는 젠인은 강력하게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거기에는 물론 ‘젠인’ 토우지와 나눈 계약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후시구로’ 메구미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고죠는 코웃음을 쳤다.

‘십억? 원한다면 배도 주겠다고 해.’

합의금쯤이야 얼마든 내어주겠다는 투였다. 일은 젠인의 공분을 샀다. 젠인 메구미와 후시구로 메구미를 사이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행동을 취한 건 고죠였다. 그는 돌연히 ‘이번 주말에 젠인가에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젠인가의 동의는 구하지도 않았다.

오는 낮, 그는 말한 대로 젠인을 찾았다. 수행인 하나 대동하지 않은 그는 고전의 교복을 입은 채였다.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던 젠인 가문의 여동이 그를 안채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당주를 필두로 한 젠인의 주술사들이 모여있었다. 오지 말라고 대문이라도 걸어 잠글 줄 알았더니. 준비된 자리에 앉은 고죠는 바늘 같은 시선의 가운데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후시구로 메구미 본인도 후견인으로 나를 선택했습니다.”

구두로만 나눈 계약. 문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유언. 어느 쪽 주장이든 빈약하긴 매한가지였다. 고죠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젠인의 주술사들을 둘러본 후 무릎을 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사자의 의견을 우선해야죠. 그럼, 이야기 끝난 걸로 알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뭘 알겠나.”

“뭐?”

반쯤 몸을 일으켰던 고죠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흘러내린 선글라스 너머 반쯤 드러난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말을 한 건 넓은 소매에 양손을 감춘 초로의 사내였다. 그는 고죠의 시선을 홀로 받아 감내하면서도 한 치 감정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 후시구로 메구미를 칭하는 듯한 문장은 기실 고죠 사토루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고죠는 인상을 구겼다. 사내는 고죠를 비웃고 있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고전의 재학생이 후견인이라니. 기막힐 노릇이 아닌가. 가늘게 뜨인 눈에서 멸시를 읽어낸 고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본래가 안하무인에 성미가 불같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피가 섞인 친지도, 그가 인정한 친구도, 그를 가르친 교사조차 그의 기질을 바꾸지 못했는데 하물며 살며 얼굴 마주칠 일도 별로 없는 남이라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고죠는 여태 깔고 앉아있던 방석을 걷어찼다. 방석은 그의 나이를 걸고넘어진 사내의 머리 위로 날아가 벽에 맞은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방자한 태도에 젠인의 원로 격 주술사들이 거북한 기색을 드러냈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교복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고죠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난 걔가 젠인 메구미인가 후시구로 메구미인가를 따지자고 여기 온 게 아니야. 걔 후견인은 나니까 오늘 이후 근처에 얼씬도 말라는 말을 하러 온 거지.”

모인 주술사들이 웅성거렸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젠인의 당주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앉아 정면을 주시했다. 말석의 몇몇은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거나 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최강이라며 떠받들어주니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지. 살이 에일 듯 차가운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말을 이었다.

“불만이 있다면 나를 설득해.”

타협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설득 어쩌고 하는 단어를 꺼낸 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실제로 그의 발화에는 설득 대신 굴복이라는 단어를 넣어도 위화감이 없었다.

“내가 지면 깔끔하게 포기할게. 어린애 하나 보호할 힘이 없는 보호자라니. 웃기잖아?”

그가 한껏 이죽댔다. 어린애가 어린애의 후견인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누군가를 보호할 힘도 없는 보호자로 받아치자 이야기를 꺼냈던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죠는 십종영법술이 젠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천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젠인을 찾은 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였다. 젠인의 주술사를 한자리에 모을 필요가 있던 그는 부러 갑작스러운 기별을 넣고, 단신으로 이곳을 찾았다. 젠인은 기꺼이 그를 맞이했다. 뻔한 함정이었다. 알면서도 발을 들였다. 함정째 저들을 찍어 눌러 압도적인 우위를 과시함으로써 후시구로 메구미가 제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 셈이었다.

전조도 없이 공기가 일변했다. 잔뼈 굵은 주술사들은 곧장 그들이 처한 상황과 해야 할 일을 인지했다. 점잖게 합의점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예견된 일이었다. 젠인은 가문의 상전술식을 이어받은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죠가 아이를 포기할 의사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고죠가 기별을 넣은 날, 젠인은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준비를 끝마쳤다. 그가 가진 주술은 최강이라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승산은 충분했다.

그 순간, 고죠 사토루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창가에 홀로 서 있던 여자의 목을 움켜쥔 고죠가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백자 같던 얼굴이 유리에 찢겨 엉망이었다. 늘어진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직, 고죠 사토루만을 제외하고.

“이 여자, 환술사지?”

희고 가지런한 손등에 핏물이 묻어났다. 핀으로 고정된 나비처럼 고통스럽게 몸을 파득대던 주술사의 입술 사이로 한 움큼 핏물이 쏟아졌다. 그녀가 정신을 잃는 것과 동시에 창 너머 펼쳐졌던 풍경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주물과 흉기로 무장한 주술사 집단이 정원에 모인 채였다. 고죠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점잔 빼는 체하더니. 그는 의식을 잃은 주술사의 몸을 놓고 곧장 창문을 걷어찼다. 특별한 처리를 거치지 않은 유리창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고죠는 깨트린 창문을 통해 실내를 빠져나갔다. 정원에 대기하고 있던 주술사들이 쇄도했다. 실내에 도열하고 있던 주술사들과 다른,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고죠는 빠르게 그들을 훑었다. 주물을 가진 자들이 여럿. 그를 쫓는 몸놀림이 가볍고 기민했다. 육체를 강화하는 술식을 구사하거나 육탄전에 도움을 주는 술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죠는 감각을 곤두세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시구로 토우지같은 특이케이스가 아닌 이상 저들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을 필요도 없을 만큼 훤했다. 아무리 기척을 죽여도 타고난 주력을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신체를 강화하건, 전투 도중 술식의 도움을 받건. 주력을 사용하는 인간의 주변에는 반드시 그 잔예가 남는다.

시야 우측에서 날붙이가 쇄도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움직임을 읽어낸 고죠는 즉각 상체를 뒤로 빼냈다. 잘 단련된 팔이 눈앞을 스쳤다. 오른손으로 뻗어지는 손목을 붙든 고죠는 왼 팔꿈치로 상대의 팔을 내리찍었다. 무하한으로 감싼 몸이 간단하게 인간의 피륙을 찢어발겼다.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잔뼈 굵은 주술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몸을 물렸다.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고죠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에서 검고 끈적이는 액체가 솟아올랐다. 그의 몸에 다다르지 못한 액체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액체가 닿은 잔디가 타들어 갔다. 군데군데 깔린 돌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무하한으로 몸을 보호하는 그에게는 별반 위협이 되지 않는 주술이었다.

건물 안쪽의 원로 주술사들이 깨진 창 너머에 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죠는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며 경내에 일어나는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안쪽에 있던 주술사는 당주를 제외하고 남녀를 모두 더해 스물일곱. 바깥의 풍경을 가리던 환술사는 의식을 잃었으니 남은 건 스물여섯. 개중 여덟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채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었다. 남은 주술사들은 전위와 후위로 나뉘어 중앙의 여덟을 보호했다. 다수의 인원과 시간이 필요한 주술. 모든 가문은 저마다의 비술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니 정확한 통찰은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예측은 가능했다. 아마 그의 술식을 강제로 해제시키거나, 움직임을 봉하는 종류의 주술일 테지. 근접전을 구사하는 외부의 주술사들은 시간을 끌기 위한 소모품일 뿐이다.

잔챙이 여럿이 구성하는 주술 따위에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순순히 주술을 완성할 시간을 주는 것도 내키지는 않는다. 허리를 젖혀 날아드는 칼날을 피한 고죠는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눈앞을 스치는 손목을 차올렸다. 고죠는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을 완벽하게 통제해 불안정한 자세로 원하는 지점을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을 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펼쳐졌다. 고죠는 상대의 손목을 차올린 자세 그대로 발목을 안으로 당겨 칼손잡이에 걸었다. 텀블링하듯 몸을 회전하자 발목에 걸렸던 칼이 발목이 당겨진 방향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중심을 잡고 몸을 일으킨 고죠는 날아가는 검을 낚아챘다. 검올에 구름 문양이 음각된 칼은 그럭저럭 괜찮은 주물이었다. 고죠는 즉각 주물의 능력을 파악했다. 손잡이를 쥔 고죠는 칼에 주력을 담아 횡으로 휘둘렀다. 그가 흩뿌린 주력이 보이지 않는 칼날이 되어 전방으로 쇄도했다. 주물의 능력을 알고 있는 주술사들은 보이지 않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숙였다. 날아가는 주력의 궤적을 눈으로 확인한 고죠가 땅을 박찼다.

검게 탄 땅이 늪처럼 변해 그의 발을 붙잡았다. 고죠는 고개를 들어 주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응시했다. 실내였다. 풍채가 좋고 후덕한 인상의 남자였다. 지형지물의 경도를 바꾸는 술식인가 하자니 위력이 형편없다. 고죠는 물 위에 서는 것과 같은 요령으로 늪을 떨쳐냈다. 짧은 새 다수의 주술사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뭐, 한순간 의식을 빼앗는 용도라면 과하게 힘을 들일 필요가 없기는 하지. 고죠는 원래대로 돌아온 땅을 보며 수긍했다. 그를 둘러싼 것은 척 보기에도 근접전에 능한 주술사들이었다. 체격이 좋고, 근접전을 구사하는 대부분의 주술사와 마찬가지로 주력이 전신을 고르게 감싸고 있다.

주술사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가 있다면 첫째로는 눈이고, 둘째로는 손이었다. 그중에서도 손은 주력의 형태를 가다듬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주력을 특정한 형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주술사가 인을 맺거나 주술에 이름을 붙이는 건 그 상상력을 일정케 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였다. 머리가 맡아야 할 일을 입과 손이 분담하는 것이다. 주술의 난도가 올라가고 필요한 주력의 양이 많아지면 자연히 손과 입도 바빠졌다. 계약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현실로 끌어내는 식신술사나 타인의 오감에 간섭하는 환술사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하나 고죠를 둘러싼 것은 그들과 거리가 먼 근접 계열의 주술사들이었다. 손과 입을 빌 필요가 없거나, 그 동작이 지극히 간결한 이들, 이들은 주력을 조작해 형태를 바꾸는 여타 정통 주술사들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였다. 적어도 고죠는 그랬다. 주술을 주 무기로 삼는 주술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주술 자체를 주술로 상쇄하거나, 주술을 무시하고 주술사 본인을 때려눕히던가. 하나 근접 계통 술사는 그처럼 간단한 방법으로 패퇴시킬 수가 없다.

나이프 한 자루가 그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뒤. 상대의 주력을 읽어낸 고죠는 돌아보지도 않고서 칼을 뒤로 돌려 나이프를 쳐냈다. 주력으로 강화한 나이프가 유리처럼 부서졌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몸을 돌린 고죠는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술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술사는 당황하지 않고 허리춤에 걸려있던 총을 빼 들었지만 그보다 고죠가 빨랐다. 그는 몸을 반 회전해 상대의 관자놀이를 걷어찼다. 머리를 차인 주술사는 몸을 휘청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를 잡기가 무섭게 양옆에서 새 선수가 나타났다. 기껏해야 30센티 내외. 도신이 긴 무기로는 대응이 어려운 거리다. 고죠는 즉시 들고 있던 칼을 위로 던졌다. 두 주술사는 던져 올려진 칼을 흘끗 바라보았다. 고죠에게 빼앗긴 칼은 잡은 이의 주력을 바탕으로 무형의 칼날을 쏘아내는 주물이었다. 만에 하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확인은 필요했다. 시간은 극히 짧았으나 고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내의 명치에 팔꿈치를 꽂아 넣는 한편 비어있는 왼손바닥에 주력을 집중에 남은 주술사의 팔을 제 쪽으로 당겨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주력이 주술사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왈칵 피를 토해낸 주술사가 바닥으로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딱딱한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누운 주술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가까스로 고죠의 팔꿈치를 막아낸 주술사는 짧은 새 주력이 담긴 무기를 꺼내 고죠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어깨를 도려낼 심산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고죠가 던졌던 칼이 떨어졌다. 왼손으로 떨어지는 칼을 낚아챈 고죠는 칼자루를 손등으로 돌려 거꾸로 쥐고 쇄도하는 나이프를 쳐내는 것과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고죠의 주력을 머금은 주물이 무형의 칼날을 마구잡이로 쏘아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을 피하기 위해 주술사는 바짝 몸을 낮췄다. 빈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주력은 정원 구석의 벚나무 두 그루를 쓰러뜨렸다. 그는 이어 장난치듯 허공에 대고 주물을 그어댔다. 움직임은 몹시 빠르고 불규칙했다. 주력이 담긴 것, 그렇지 않은 것, 주력을 많이 담은 것, 적게 담은 것. 주력이 정체했던 바람을 헤집었다. 날아드는 주력을 하나하나 쫓아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애당초, 보려고 하는 순간 대응이 늦어진다. 주술사들은 칼날을 피하는 일을 포기했다. 방어계통의 주술을 가진 주술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고죠는 저들이 태세를 정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주력의 궤적을 알지 못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이들의 틈바구니를 어렵지 않게 비집은 그는 가장 앞에 있던 주술사의 멱살을 잡아 우측으로 내던졌다. 날아간 주술사는 어림잡아도 100kg 이상이 나갈 것 같은 거한이었다. 혀를 내두를 만한 완력이다. 감탄할 틈도 없이 날아간 주술사 뒤쪽으로 정장 차림에 권총을 든 여자가 나타났다. 느껴지는 주력이 미미한데다 반응이 느렸다. 주술사가 아니었다. 손목을 잘라낼까? 고민하던 고죠는 오른손의 엄지로 검지 손톱을 눌러 둥근 모양을 만든 후 손가락을 튕겼다. 고죠의 주력이 비술사의 손목을 후려갈겼다. 그녀는 짧은 비명과 함께 총을 놓았다. 동시에 우측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술사 셋이 달려들었다. 고죠는 들고 있던 칼을 그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포탄처럼 날아간 주물이 가운데 있던 주술사의 왼쪽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주술사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이 터졌다. 손잡이만 남기고 완전히 어깨를 관통한 칼날은 흠뻑 피를 머금은 채 꼬리를 떨었다. 쓰러지는 동료를 밟고 튀어나오는 주술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고죠는 날아드는 암기를 피하고 구둣발로 상대의 턱을 걷어찼다. 턱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주술사가 나무둥치에 몸을 부딪쳤다. 잘 가꾼 화단 위로 쓰러진 몸이 크게 떨리고, 이내 잠잠해졌다.

큰 어려움도 없이 비술사에게서 총을 빼앗은 고죠는 남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어마어마한 힘에 비술사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그대로 비술사의 등을 밟고 올라선 고죠는 권총으로 깨진 창문을 조준하고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무언가가 창문을 가렸다. 거대한 손이었다. 반투명하게 허공을 떠다니던 손이 천천히 펴지며 탄알이 떨어졌다. 전에 본 적 없는 형태의 주술을 주시하던 고죠가 밟고 있던 것을 걷어차 지면에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긴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고죠는 제 시선을 내려 다리를 붙든 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머리가 셋에 자주색 비늘을 가진 요사스러운 뱀이었다. 고죠는 총탄에 주력을 담아 뱀의 몸뚱이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주물도 뭣도 아니었던 총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던 뱀 식신 역시 얄팍한 종이 한 장만을 남긴 채 형태를 잃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주술사들의 존재를 인식했다. 고죠는 눈을 깜빡였다. 새파란 날붙이가 종이 한 장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그는 무하한을 발동했다. 온 힘을 다해 달려들던 주술사들이 실 끊긴 인형처럼 나가떨어졌다. 하나만 빼고. 고죠는 그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남자만을 선별했다. 중력을 따라 내리꽂히는 남자의 팔을 허공에서 움켜쥔 고죠가 그를 앞으로 던졌다. 건물을 향해 날아가던 남자의 몸을 막은 건 예의 반투명하고 거대한 손이었다. 주술사의 몸을 붙들었던 손가락이 천천히 펼쳐지는 순간 거대한 손을 향해 달려든 고죠는 남자의 몸뚱이째 제 몸을 창문 안쪽으로 구겨 넣었다. 거대한 손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고죠는 허공에 멈춰 버티는 거대한 손에 자신의 주력을 흘려 넣었다. 순간 거대한 손의 압력이 약해졌다. 고죠는 그대로 주술을 찢어발기고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주술사들을 무시한 그는 가장 뒤쪽, 짙은 녹색 유카타를 입은 남자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식신술사는 거리를 주면 보통 이렇게 되지. 학교 다닐 때 안 배웠어?”

그의 손을 낚아채 깍지를 끼운 고죠가 가엾다는 듯 지껄였다. 식신술사는 기가 막혀 뭐라고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식신을 파괴하지만 않았어도 거리를 주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식신술사는 겹쳐 잡은 손을 떨쳐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고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강력한 주술이나 주력을 타고난 주술사는 체술이 약하다. 그들은 주술에 의지해 몸을 단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핏 정론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 실상은 주력과 주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팔푼이나 할 수 있는 소리였지만. 좋은 주술을 타고난 주술사가 체술을 단련하지 않는 건 단순한 효율의 문제였다. 주술사의 실력은 재능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같은 시간, 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 주술의 성장세를 7, 체술의 성장세를 3이라고 가정한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명백하다.

식신술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식신이 아닌 주술사 본인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예를 봐도 그랬다. 식신술사가 순순히 거리를 내어줄 리 있겠는가. 상대에게 근접할 틈을 주지 마라, 상대가 접근할 기미가 보이면 주술사 자신은 전투를 중단하고 자리를 회피하라. 이는 식신술사의 기본 전투 소양이었다. 수많은 주술사를 배출해온 고전은 심신의 조화 어쩌고 하는 교육방침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고전을 졸업하고 활동하는 주술사 중 그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지키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체술은 발목이 붙잡히지 않을 정도로. 수련은 타고난 재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그런 의미에서 고죠 사토루는 명백한 이단이었다. 그처럼 강한 주술을 타고난 인간이 이만한 완성도의 체술을 구사하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심드렁한 눈으로 식신술사를 바라보던 고죠는 검지로 그의 이마를 밀었다. 식신술사의 몸이 바닥에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식신술사를 내려다보던 고죠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술사들의 가까이 다가갔다. 경계심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였다. 교복도 벗지 못한 어린 주술사는 장성한 주술사 여덟이 만든 술식의 옆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기분 더러운데.”

그는 바닥에 그려진 술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소리를 했다. 대상이 되는 인물의 주술을 강제로 해제시키는 술식이었다. 대상의 주술과 주력이 강력할수록 난도가 올라가는 주술은 우선 대상자 위치를 지정하고, 움직임을 제한하고, 그의 술식의 범위를 한정시킨 후, 술식을 봉인, 강제로 해제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구성 중이던 술식은 천역모를 닮아 있었다. 가슴을 꿰뚫었던 통증이 천천히 되살아났다. 고죠는 인상을 썼다. 후시구로 토우지를 만나기 전의 그였더라면 무하한을 해제당해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을 것이다.

긴장한 채 선 젠인의 여덟 주술사를 바라보던 고죠가 성큼 그들의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주술의 중심이었다. 당황하는 주술사들을 바라보며 고죠가 입을 열었다.

“해봐.”

주술은 막바지였다. 고죠가 주술의 가운데로 들어온 이상 대상의 위치를 지정할 필요도,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여 술식의 범위를 한정할 필요도 없었다. 제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 같은 행위에 모두가 눈을 홉떴다. 말을 꺼낸 당사자만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복잡한 주술이 그려진 바닥을 툭툭 차며 젠인의 주술사들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눈치를 살피던 주술사들이 술식을 발동했다. 고죠는 눈썹을 찡그렸다. 천역모에 몸을 관통당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강제로 술식이 흐트러졌다. 해도 천역모만큼 명확한 위협은 아니었다. 저항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저항하고, 부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주술이 완성되어가며 시시각각 그를 둘러싼 주술사들의 안색이 나빠졌다. 바닷물을 막으려 제방을 쌓는 느낌이었다. 고죠는 건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고, 결국 균열이 일어났다. 고죠의 정면에 서 있던 주술사가 왈칵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술식이 크게 흔들리고 속박이 약해졌다. 고죠가 손을 뻗었다. 그는 내내 몸을 보호하는 정도에 그쳤던 주력을 한 점에 모아 단숨에 발산했다. -술식반전, 혁.

굉음과 함께 광대한 주력이 주변을 휩쓸었다. 주술사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형태의 주술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데 사력을 기울였다. 잘 다듬어진 정원은 태풍이라도 지나간 듯한 모양이 되었다. 오래된 양식의 건물은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져 앙상한 뼈대가 드러났다. 이곳은 젠인의 본가였으며, 선조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술식의 보호를 받는 곳이었다. 이렇게나 간단하게 부서질 장소가 아니었다. 분명, 그럴 텐데.

발끝에 걸리는 건물의 파편을 걷어차 치운 고죠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주술사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은 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람이 불어 희고 얇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제 손으로 만든 폐허의 가운데 홀로 선 이의 얼굴에 광기가 들어찼다. 의식이 있는 자들은 감히 그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인간이라기보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에 가까웠다.

“이제 걔는 내 거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열아홉 번째 여름의 끝에서, 고죠 사토루는 그렇게 피 한 방울 통하지 않은 가족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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