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썰 백업 9
# 1
뭔진 모르겠는데 유지가 커플링 집어던지는 게 보고 싶다...
너 지금 뭐 해? 매서운 얼굴로 커플링 주섬주섬 주워와서 손가락에 끼워주는 고죠도 보고 싶어...
이건 진짜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커플이어야 맛있음. 고죠가 아무리 철이 없다 하더라도 절대 생각 없는 편이 아님. 꼴리는대로 살아서 그렇지, 오히려 생각머리는 제대로 박혀 있음. 그리고 그건 연애를 할 때 여실히 드러났어.
아무리 모럴이 없어도 13살의 연하 애인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어. 말 그대로 어리잖아. 세 네살만 차이 나도 나이 차이가 느껴지는데 13살은 오죽하겠어. 유지가 아무리 성격이 좋고 마인드가 좋아도, 애는 애. 벌어진 나이 차이는 쉽게 좁혀 않았어.
하물며 둘은 고죠가 잠시 교사로 활동할 때 만난 사제 관계였어. 그 때문에 유지의 호칭은 여즉 고죠 선생님이었지. 하필 선생과 학생...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라는 대사가 필요할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였어.
선생질이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사직서를 제출한 고죠가 진지하게 유지를 붙잡고 고백했어. 연애하자고. 유지는 멀리서 봐도 정말 올곧은 아이였고, 고죠는 그런 유지에게 첫눈에 반했던 거야. 근데 그때 돌아온 대답이,
- 에, 난 학생이고 고죠 선생님은 선생님이잖아.
였어. 물론 차이진 않았으니 지금 만나고 있는 거지만, 그때의 고죠는 그런 당연한 문제를 생각하지 못해서 나름 새로운 충격을 받았었지. 그리고 그럼 안 돼? 라는 자신의 질문에 아니, 나도 선생님 좋아. 라고 대답한 유지도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 유지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 응? 선생님 학교 그만뒀잖아.
- 그냥~ 갑자기 생각 나서.
아마 이 연애도 정상은 아니겠지. 처음 사귀게 되었을 때를 회상하던 고죠가 턱을 괴고 앉아 유지를 빤히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어. 유지는 영문도 모르고 고죠를 따라 웃었지.
- 귀엽긴.
- 항상 말하지만 고죠 선생님 눈에만 그런 거라니까?
- 응. 그것도 귀여워.
귀엽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지 못하고 부정하는 게 딱 애라니까.
- 고죠 선생님도 꽤 귀엽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반발하는 것도.
- 오, 어떤 점이?
- 으음... 나만 보면 유지~ 하면서 달려오는 게?
유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죠가 이때다 싶어, 유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들었어. 둘이 같은 쇼파에 앉아있었던지라 유지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면서, 고죠가 유지의 위로 엎어진 꼴이 됐어.
- 선생님... 무거운데.
- 그것 뿐?
- 응?
- 아깐 귀엽다며.
이거야 원... 대체 누가 애인 거야. 대충 유지가 귀엽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서야 상황이 종결 됐어. 어른이고 나발이고; 보다시피 철없는 고죠는 한참 어린 애인과 연애를 나름 잘 이어가던 중이었어. 맞춰주는 부분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안 맞추면 어쩔 거야. 헤어질 것도 아니고. 고죠는 성격이 좋지 못할 뿐, 인내심은 좋았어.
사소한 걸로 다툴 때면 먼저 사과하면서 넘어가줄 줄 알았지. 하지만 사소한 다툼은 잦았어. 둘 다 까다롭지 않은 성격이지만 유지는 아직 친구가 우선일 나이였고, 고죠는 둘이 만날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했어. 나보다 친구가 우선이냐고. 그게 바로 싸움의 원인이었어.
- 유지 안 된다고 했잖아.
-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안 돼.
유지가 생각이 깊으면 얼마나 깊겠어. 평소 안 된다고 하면 알겠다며 넘어갔지만, 연애하면서 행동 제약이 많아지다보니 속에선 억울한 감정이 쌓이고 있었지.
- 지금 뭐하는 거야?
일이 벌어지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어. 유지가 욱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커플링을 내던져버렸어. 어라, 이게 아닌데. 고죠의 얼굴이 확 굳어졌어. 화난 걸 별개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어. 아무리 그래도 커플링을... 그렇다고 해서 이번 문제를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어. 그럼 버릇만 더 나빠질테니까.
고죠는 한숨을 푹 내쉬고 떨어진 커플링을 주워들었어. 분명 제 마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 유지 아무리 답답해도 이런 짓은 하지 마.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잖아.
고죠가 힘없이 쥐고 있던 유지의 주먹을 들어올려 제자리에 반지를 끼웠어.
- 다신 이러지 마.
# 2
고유 연반으로 30살 아저씨 쫓아다니는 18살 고딩 보고 싶음. 교실에서 어쩌다 동성애 얘기가 나왔는데 같은 남자라도 할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온 거지. ㅡ옆자리라 들린 거임ㅡ 남자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그땐 그러고 넘겼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문득 궁금한 거임. 진짜 남자랑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행동파 고죠 사토루, 바로 게이 채팅 어플 깔아서 만남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을 듯. 상대는 32살이었는데 고죠 24살이라고 속이고 만남. 나이는 많았지만 얼굴이 꽤 동안이라 괜찮겠다 싶었음.
어차피 한 번 만나서 하는 건데 그런 거 무슨 상관이야. 남자가 가능하다고 해서 이 사람하고 또 만날 것도 아니고. 상대쪽에서 차 끌고 해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카페에서 초코라떼나 주문해서 마시고 있었음. 사진을 마냥 믿을 순 없잖아? 먼저 보고 아니면 파토 내려고 한 거지.
근데 웬걸 카페 앞에 도착했다고 연락와서 스캔 시작했는데 사진보다 훨 나은 거임. 날렵한 것 같으면서도 귀여운 인상이 진짜 한눈에 파밧 하고 꽂힌 거지. 와 저 얼굴이면 진짜 열 번도 더 잘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는데 어디냐는 채팅이 날아옴. 답장할 시간이 어딨어, 바로 모시러 가야지.
"채팅 맞죠?"
"아 고죠 씨?"
이타도리가 위로 올라간 눈매를 접어가며 웃는 얼굴로 반기는데, 와 진짜 야하게 생겼다 싶었음. 거기다 분명 자신이 어린 걸 알고 있으면서도 존칭을 붙이는 게 묘하게 어른의 냄새가 나면서 섹시하게 느껴지는 거. 이래서 다들 연상 연상하는 구나 싶었음.
"어디로 갈래요?"
조수석에 앉아 이타도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데 이타도리의 음성이 들려왔음. 아 목소리까지 좋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죠의 고막을 간질였음. 근데 어디, 라는 건 모텔 묻는 건가.
"아무데나 가요."
"음 그럼 저녁부터 먹을래요?"
뭐야. 바로 모텔 가는 게 아니었어? 떨떠름하지만 자긴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이 사람이 하는 게 맞겠지 싶어서 일단 하자는대로 다 해줬는데 다시 그 카페 앞에 내려주려는 거임.
"? 우리 안 해요?"
"저 학생이랑 그런 짓하면 잡혀가요. 고죠 씨 학생이잖아."
걸렸다. 근데 학생인 걸 알았으면 속였다고 화낼만도 한데 이타도리는 웃으면서 자기랑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커피까지 손에 쥐어줌. 착한 거야, 아님 화도 못낼 정도로 멍청한 거야.
"왜 화 안 냈는데요?"
"굳이 화를 내야 되나, 즐겁게 놀면 됐지."
아, 진짜 마음에 드네.
"그럼 나도 즐거워야 되는 거 아닌가."
"재미 없었어요?"
"이제부터 재미보려고 했는데 누가 흐름을 끊어버려서요."
핸들에 기대 대화를 나누던 이타도리가 눈을 잠시 굴리더니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자세를 잡았음.
"그런 얘기라면 거절할게요."
"거절은 예상 못했는데. 그럼 번호라도 알려줘요."
이타도리가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고죠가 말을 가로챘음.
"만약 이것도 거절하면 저 차에서 안 내릴 건데."
"하아, 왜 그래요?"
"어떡할래요?"
잘 어르고 달래서 보내는 게 목표였는데 막무가내로 나오는 고죠 덕에 머리가 어질했음. 차라리 아무 번호나 찍어주고 보내자 싶어 손을 내미니 친절하게 다이얼까지 틀어줌.
"참, 전화 걸어볼 거예요."
잘못 걸렸다. 막무가내인 것도 곤란한데 이 어린 학생은 영악하기까지 했음. 결국 자신의 번호를 찍어주고 전화까지 걸어서 확인 시켜준 후에야 집에 갈 수 있었음.
그때부터 고죠 시도때도 없이 연락하기 시작함. 아침에 잘 잤냐는 문자로 시작해서 출근 잘했냐, 점심은 먹었냐, 일 많이 바쁘냐, 퇴근하고 뭐 하냐 등등 이타도리 폰을 쉴새없이 울려대는데, 대체 나이 많은 아저씨 뭐가 좋다고 이러는 건지. 골이 다 지끈거렸음. 그냥 차단할까. 멍하니 문자 보고 있는데 귀신 같이 '차단하지 마세요' 요런 문자 보내옴. 뭐야, 소름 돋아. 이타도리 안 그래도 마음 약한데 소름까지 돋아서 차마 차단은 못하고 조용히 핸드폰 내려놓음.
그 와중에 고죠는 다리 달달 떨면서 학교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음. 만나줄지 안 만나줄지도 모르는데 일단 전화해서 만나자고 졸라보기라도 할 생각이었음. 딱 한 번 만나봤지만 단호하면서도 은근 순한 게 계속 밀어붙이면 받아줄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평소엔 별 생각도 없던 하교 시간만 기다리는 거임.
"사토루 오늘 뭐 해?"
"나 바빠. 먼저 간다."
종 치자마자 후다닥 달려나간 고죠가 그대로 집까지 뛰었음. 교복차림으로 만날 순 없으니까. 안 그래도 나이차이가 얼만데 교복까지 입고 있으면 남자로 보기나 하겠냐고. 집에 도착해서 빠르게 교복부터 탈피하듯 벗어던지고 이타도리한테 전화하는 거지.
"...왜?"
"너무하네 친절하게 받아주면 안 돼요?"
"일 하는 중이에요 왜 전화했는데?"
"은근슬쩍 말도 놓네 그건 됐고 오늘 만나주면 안 돼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는 핸드폰을 붙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숨 쉬는 소리 들리더니 "제가 갈게요" 이러고 끊음. 이렇게 쉽게 만나줄 줄 몰랐는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타도리가 온다는 말에 우당탕탕 준비를 하기 시작함. 최대한 학생으로 안 보이게 <이게 포인트임.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어린 앤 별로일 거 아냐 ㅠ 글서 왁스로 머리도 넘기고 막 프렌치 코트 이런 거 꺼내는 거지.
태어나서 자기가 누군갈 위해 이렇게 신경 쓰게 될 줄이야. 전혀 몰랐음. 몇 번 연애해보고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먼저 호기심을 가질 줄은 상상도 못했음. 그렇게 한껏 멋을 내고 침대에 누우면 옷 구겨질까 쇼파에 앉아서 경건하게 이타도리 연락만 기다렸음. 진짜 임자 만났다.
저번에 그 카페 앞이라는 연락 받고 열심히 뛰어놓고는 이타도리 보이기 시작하니까 숨 가다듬고 천천히 걸어온 척 하겠지? ㅋㅋ 근데 이미 겪을만큼 겪어본 이타도리가 그거 하나 모르겠냐고. 딱 봐도 뛰어온 폼임.
"뛰어왔어요?"
"모르는 척 좀 해주지."
"제가 거짓말엔 소질이 없어서."
휙 뒤돌아서 그대로 차에 타버리는데 행여나 두고 갈까 빠르게 조수석에 승차하는 고죠.
"그래서 왜 불렀어요?"
"보고 싶어서 불렀는데 안 돼요?"
"저 학생한테 관심 없는데."
티키타카 개오짐. 서로 굽힐 생각을 안 하는데, 이게 바로 창과 방패의 싸움인가...
"그래도 불러서 온 거 보면 영 관심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제대로 거절하러 왔어요. 이왕 얘기 나온 거 솔직히 말할게요,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요."
첫 만남 때와는 달리 굳어있는 표정이 진심이구나,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었지. 나 지금 차인 건가. 고죠가 황급히 말을 돌렸음.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애써 말을 돌리니 다시 말하기도 그렇고... 이타도리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음. 바다요. 바다? 이렇게 갑자기? 못 갈 것도 없지만 것보다는.
"1박?"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밤에 와야죠."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네요."
어린 애가 왜 이렇게 말을 잘 하는 거야. 무슨 언변 학원이라도 다니나... 이번엔 이타도리가 입을 꾹 다물다 말을 돌렸음.
"마지막 데이트라도 생각해요."
"선 긋는 거 봐. 어떻게 이것마저 내 스타일이지."
"아 좀,"
"근데 보통 마지막엔 차이는 사람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나? 안 그래요?"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다 생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냥 이대로 차를 돌려버리고 싶었음. 제 딴엔 순수하게 추억이라도 심어주자는 의도였는데, 이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혹시 언변 학원이라도 다녀요?"
"그래보여요?"
"네."
"학원 같은 거 안 다녀요. 원래 뭐든 잘하는 타입이라."
재수 없어. 그 후로 조용하게 쭈욱 나아가던 차량이 갓길에 한 번 멈춰서고 이타도리가 차에서 내림.
"조금만 쉬다 가요."
"많이 피곤해요?"
"일 하고 왔으니까요."
이타도리가 차 문에 등을 기대고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 안으로 쑤욱 고죠의 얼굴이 디밀어짐.
"깜짝아 뭐하는 거예요?"
"음... 지금이 딱 이러기 좋게 무방비한 것 같아서."
이타도리가 미간을 좁히고 고죠의 어깨를 밀어내는데 떡하니 버티면서 허리 위에 손을 올리는 거.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받아줄 때까지? 아니면 제가 원하는 걸 해주는 방법도 있고 어떤 게 좋아요?"
영악하다 영악하다 했지만 너무 영악한 거 아니냐고. 이타도리 지금 심정으론 고죠를 길바닥에다 버리고 가고 싶을 듯. 그래도 최대한 침착하게 얘기하겠지.
"슬슬 허리 아픈데 이제 좀 비켜줄래요?"
"그럼 제가 여기서 얌전히 비켜주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거절할게요."
"아니 뭔지라도 물어보지? 진짜 쉬운 건데."
"뭔데요?"
"우리 말 까."
"역시 거절할게요."
이타도리가 다시 한 번 고죠의 어깨를 밀어내자 이번엔 쉽게 밀려났음. 먼저 차에 올라타니까 칭얼대면서 나란히 조수석에 올라타는데 진짜 애긴 애구나 싶었음.
"말 놓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런 게 아니라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서요. 저한텐 무리한 부탁이네요."
이타도리가 스무스하게 차를 출발 시키니까 고죠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그럼 1박 해주시든가요. 이러는데 그걸 들어주겠냐고...
"1박 해주면 진짜 연락 안 할 자신은 있어요?"
거기서 고죠가 다시 한 번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음. 한 번 자보고 싶은 건 맞지만 그저 한 번 자려고 쫓아다니는 건 아니었거든. 그럴 거면 굳이 이타도리가 아니어도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잤다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수작 부리지 마요."
"그거 알아요?"
또 뭐. 이런 눈으로 고죠를 흘겨봤더니 고죠가 이타도리 쪽으로 몸을 돌리곤 씨익 웃음.
"그쪽 그렇게 거절할 때마다 더 꼴리는 거."
순간 사고 낼 뻔했다. 무슨 저런 말을 막 뱉어?;; 물론 이타도리 본인도 그런 말을 듣는다고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저런 말을 잘도 뱉는다 싶었음.
어느덧 도착한 바다 앞에서 커피랑 초코라떼 한 잔씩 손에 쥐고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걷는데 이타도리가 먼저 입을 열었음.
"내가 왜 좋아?"
"말 안 놓는다더니."
"마지막이잖아."
전 그 말에 동의한 적 없거든요. 고죠가 틱틱대며 초코라떼를 한 입 머금더니 모래 바닥에 주저앉았음.
"저 싫은 이유가 나이 때문이에요?"
"그거 말고도 너 재수없어."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고죠의 말에 이타도리가 빵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죠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음. 뭐야, 이렇게 웃으니까 더 어려보이잖아. 심지어 귀여워. 그렇게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이타도리가 고죠랑 눈을 맞춤.
"나 연상 좋아해."
"여지를 안 주네 진짜."
"그리고 다정한 사람이 좋아."
"그냥 얘기하지 마요."
크하핫. 이타도리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죠의 머리를 쓰다듬음. 생각보다 부드러운 머릿결에 계속 만지작 거리니까 심통난 고죠가 이타도리의 손목을 낚아챘음.
"저 머리가 성감대예요."
"거짓말."
"진짠데요. 그러니까 책임져요."
사뭇 진지한 눈동자에 이타도리가 당황했음. 뭐, 진짜 성감대는 아니지만 자극되긴 했으니까 아예 거짓말은 아니지. 그런 고죠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는 이타도리의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음.
"어... 진짜?"
이걸 믿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나. 쭈뻣쭈뻣 모텔에 들어선 이타도리가 지금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음. 이거 맞는 거냐고. 쟤 고등학생인데? 진짜?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벗어날 방법을 찾는데 고죠는 이미 옷을 훌렁훌렁 벗고 있었음. 몸은 또 왜 저렇게 좋아. 미치겠네...
방금 막 바지버클을 풀어낸 고죠가 이타도리의 작은 중얼거림에 반응했음. 침 흘릴 기세로 자기가 못 벗고 있는 걸 아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시작적인 거에 약하구나. 씩 웃으면서 그대로 이타도리한테 직진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미치겠는데? 제 몸이 아저씨 취향이에요?"
"아니야!"
눈치가 귀신이야... 정곡이 찔려서 심장이 벌렁벌렁 했음. 근데 다급하게 외면한 것과는 달리 시선은 고죠 벗은 상체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음.
"거짓말 할 거면 그 눈부터 어떻게 하지 그래요? 당장이라도 만지고 싶다는 눈인데."
"!"
스르륵. 이제서야 눈 돌리면 뭐하냐고 진짜 ㅋㅋ
"건드릴 생각 없으니까 긴장 풀지 그래요."
아니아니 일단 좀 떨어지고 그런 말 해줄래. 신빙성 전혀 없거든? 분명 말로 내뱉지도 않았는데 고죠가 이타도리한테서 떨어지더니 텔에 구비되어있는 가운을 꺼내들었음.
"건들면 진짜 끝낼 거잖아. 난 닭 쫓던 뭐 될 생각 없어요."
그럼서 가운 들고 무심하게 이타도리를 지나쳐 감. 그렇게 고죠는 가운 차림으로 갈아입었는데 이타도리는 머쓱해서 겉옷만 벗은 상태에서 존나 내외할 듯... 근데 그렇게 내외해봤자 여기 침대 하나임.
"옷 안 불편해요? 그냥 갈아입지."
"불편하긴 한데, 가운을 입어도 불편할 것 같아."
마음이...
"보는 내가 불편해요. 아님 직접 벗겨줄까요?"
"미쳤나 봐 진짜."
"학생을 상대하진 않아도 학생 상대로 흥분하긴 하나봐요?"
"네가 어딜 봐서 학생이야."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었겠지?
"그럼 내가 학생으로 안 보이면 뭘로 보이는데? 뭘로 보여요? 응? 말해봐."
수습... 수습해야 되는데... 고죠가 슬그머니 이타도리를 눕히고 와이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툭툭 풀어내는데 시각적인 자극 장난 아닐 듯; 그리고 고죠가 단추를 다 풀어냈을 즈음에,
"그만해...!"
"뭘 그만해요. 바지도 손수 벗겨주기 전에 가운으로 갈아입고 와요."
"..."
이타도리가 가운으로 갈아입고 온 후에도 소란스러울 것 같던 밤은 조용히 지나갔음.
"어제 안 건드렸으니까 연락 받아요."
"그건 네 의견이고, 나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모텔 가던가."
난 왜 이 고딩한테 못 이기는 걸까...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이타도리였다.
뭔가 이때부터 이타도리한테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 생각보다 막돼먹은 애는 아니구나, 싶어서 마음을 여는 정도?
"여보세요?"
- 사토루 오늘 시간 돼?
처음으로 이타도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서 신나는 마음에 덥석 받았는데 목소리가 아래로 낮게 깔려 있었음.
"당연히 되죠."
다급하게 나갈 준비를 마친 고죠가 빠르게 항상 만나던 카페 앞으로 뛰어갔더니 이타도리가 있는 거. 사실 이미 도착해서 전화한 거지.
"왔어?"
이타도리가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이는데 얼굴이 영 푸석푸석 해보이는 거임.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오늘은 입 닥치고 있어야겠다.
"혹시 술 마실 줄 알아요?"
학생인 거 뻔히 알면서 술이라니. 왠지 고죠라면 그럴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애가 인상을 확 찡그리니까 이타도리가 머쓱하게 웃었어.
"아님 나 술 마시는 거 구경할래요?"
그 물음에 고죠가 걷던 걸음을 멈칫했음. 어? 이건 좀 나이슨데...? 그렇게 편의점에서 이타도리가 마실 술을 고르는데 바구니에 꽤 많은 양의 술이 들어있는 거임.
"그거 다 마실 수 있어요?"
"뭐, 불가능하진 않을 걸?"
여유롭게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더니 그 많던 술을 전부 챙겨들고서 같이 모텔로 들어갔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나 좀 씻고 나올게."
그러고 이타도리가 욕실로 쏙 들어가고 나서 고죠가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렸음. 그동안 철벽이란 철벽은 다 쳐놓고 대뜸 모텔이라니. 술, 모텔, 샤워... 솔직히 이 세개만 두고 보면 이상하잖아; 아냐, 여기서 착각하고 덤벼들면 안 돼. 그러다 진짜 차인다.
"...뭐 해?"
그때 이타도리가 촉촉하게 젖은 머리로 가운만 입고 등장하는데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짐.
"사토루 그러다 침 흘리겠다."
"...야하지를 말던가."
"내가 뭘 해도 야하다고 할 거잖아. 아니야?"
맞아서 할말없음.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아무 일도 없는데?"
???
"? 아무 일도 없다고?"
그런데 갑자기 먼저 연락하고 그렇게 푸석한 얼굴을 하고서 술을 마시자고 해?
"내가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
"지금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으음, 그런가."
이타도리가 맥주 캔을 하나 고르더니 침대에 앉아 캬-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를 들이켰음.
"요즘 야근이 많아서 좀 쉬고 싶었거든."
그래서 얼굴이 푸석푸석했구나.
"게다가 전 남친한테 연락이 오질 않나. 술이 안 땡길 수가 없네."
그렇구나 전 남ㅊ,
"뭐? 전 남친?"
지금 자신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는 태연하게 맥주나 들이키고 앉아있는 거. 누구는 지금 한 번 만나보겠다고 난리치는 마당에 다른 쪽은 굴러들어온 복을 지 발로 찬 거 아니야.
"뭐라고 연락왔어."
"똑같지 잘 지내냐는 둥, 보고 싶다는 둥, 뭐 그런 이야기?"
"그래서 아저, 아니 유지 너는 뭐라고 했는데."
지금껏 예의 차려보겠다고 멋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전 남친 얘기하면서 절대 학생으로 보이기 싫어. 이타도리가 그런 고죠를 빤히 바라봤고, 고죠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음.
"흐음,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뭐? 그 자식이랑 다시 만날 생각은 아니지?"
평소엔 그렇게 눈치가 빠르더니 감정이 앞서니 꽤 어설프고 귀여웠음.
"사토루 네가 이름 부르는 거."
고죠 동작 정지-! 이타도리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술이나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무슨 티비보듯이 고죠의 반응을 구경했음.
"...그럼 나 앞으로 계속 이름 불러도 돼?"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해."
"유지 나랑 연애는?"
"그건 안 돼."
자연스러웠는데 아깝다... 그리고 이타도리는 정말로 술을 꽤 잘 마셨지만 역시 그걸 다 마시기엔 무리였는지 조금씩 취기가 돌기 시작했지. 어눌해진 말투하며, 볼이 달아오른 것만 봐도 취했구나, 싶었음.
"유지 취했어?"
"조금...?"
"이제 잘까?"
고죠는 나름 챙긴다고 말한 건데 이타도리가 거기서 가운을 더 단단히 여미는 거 아니겠어?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취한 사람이나 건드릴 사람으로 보여?"
"응."
"...나 유지한테 대체 어떤 이미지야?"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자기 성장에도 도움되고."
취한 와중에도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네. 보통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귀를 막았을텐데, 얼굴도 예쁘면서 목소리까지 좋은 건 반칙 아니냐고. 고죠가 막고 싶어도 막지 못하는 귀를 매만졌음.
"음, 나랑 잘래?"
"...ㅇ,"
"라고 말하면 응이라고 대답할 것 같은 사람?"
이거 조금만 더 빨리 대답했어도 그대로 아웃 아니야; 왠지 모르게 술 취한 이타도리는 평소보다 좀 위험했음. 잘래? 라고 묻는 표정부터가 헤실헤실 풀어져가지고 너무나 무방비 상태였음. 이타도리가 취했다는 사실만 알지 않았어도 대답을 말이 아니라 몸으로 했겠지. 게다가 몸에다 힘이 쫙 빠져서 가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는데 처음 샤워하고 나왔을 때처럼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음.
"진짜로 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유지 말대로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아서."
"..."
"..."
잠시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취기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거든. 그러다 이타도리가 말을 끄집어냈지.
"우리 진짜로 잘까?"
"어떤 의미야."
"그걸 생각 안 해봤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어.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냉큼 받아먹었겠지만 유지라면 말이 다르지. 그렇다고 참을 자신이 있는 건 또 아니라서 이타도리를 침대에 곱게 눕혀주고 집으로 돌아갔어. 대신 얻은 거라면,
- 사토루 오늘 시간 되면 같이 밥 먹을래?
이타도리의 신뢰랄까. 근데 오히려 이게 더 고역이었어. 매번 밥 먹자는 핑계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다가 마지막엔 꼭, 사방이 막히고 침대가 있는 장소로 데려가는 거야; 고죠만 아주 죽어나는 상황이었지.
"혹시 이거 신종 괴롭힘인가."
용케 고죠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지가 살풋 웃었어.
"하핫. 그렇게 보였어?"
그게 아니면 이런 상황, 설명이 안 되잖아. 어떻게든 한 번 자보려고 하는 사람처럼 왜 이러는 건데. 어...? 고죠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절레절레 내저었어. 이건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잖아.
"혼자 뭐해?"
"나한테 대체 왜 이러나 고민하는 중이야."
"그래서, 좀 알겠어?"
찾았을리가. 다른 것들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모르겠는 게 바로 너였다.
"그냥 말해주면 안 돼?"
"그건 사토루가 생각해봐야지. 대신 정답인지 아닌지는 얘기해줄게."
그건 당연한 거잖아. 고죠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자 이타도리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을 피했어. 모른체 하겠다 이거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기가 생긴 고죠는 그때부터 자신이 품은 의구심을 전부 숨겨버렸음. 아예 의구심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적어도, 이타도리 앞에서 티 내지 않는 방향으로 간 거지.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굳게 마음을 먹었음. 근데 여기서 고죠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음. 고죠 사토루는 말싸움 말고 이타도리한테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거임.
"할말 끝났으면 이만 잘까?"
시간 끌어봤자 누가 더 손해겠어~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한 고죠는 이타도리가 등 돌리고 눕는 거 보고 자기도 홱 등 돌리고 누워버림. 여느 흔한 남고생의 자존심이랄까.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눈앞에 뭐가 보임. ??? 이게 뭐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고죠의 몸이 빳빳하게 굳음. 아무리 봐도 이거, 가슴... 같은데. 설마 밤새 안고 잔 거야??? 상황파악을 끝낸 고죠가 몸을 벌떡 일으켰음. 누가 먼저 안고 잔 건진 몰라도 지금까진 이타도리가 먼저 일어나서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음. 그래서 그런가,
"씨발..."
아래를 내려다 본 고죠의 욕설이 이어짐. 지금까진 잘 참고 있었지만 일단 고죠는 몸에 아무 이상없는 건장한 고딩 남자였음.
혹여 이타도리가 깰까, 조금스럽게 침대를 벗어난 고죠가 화장실로 향했음. (ㅋㅋ) 옆에 원인이 있는데 그게 사그라들 것 같지도 않고 해결은 해야 될 거 아냐? 얼레벌레 혼자 급하게 해결하고 나오는데,
"...언제 일어났어?"
이타도리가 앉아서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거야.
"으음, 사토루가 씨발이라고 했을 때부터? 남고생이라 그런가 혈기왕성하네."
아무것도 모른단 얼굴로 욕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 말은 즉슨, 처음부터 일어나있었던 거잖아. 고죠가 기가 찬 얼굴로 이타도리를 내려다봤음.
"그걸 듣고만 있었어?"
"그럼 도와줬어야 했나?"
장난치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인 게 뻔했음. 하지만 이대로 당하기만 하는 건 짜증나지. 고죠가 성큼성큼 이타도리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꽉 잡았음.
"뭣 하면 지금 도와줘도 되는데."
"그럴까?"
??? 난감하게 만들려고 한 것 뿐인데 제 예상과 다른 답변이 나오자 되려 고죠가 당황했음. 진심인가?
"그런데 곧 있으면 우리 지각이야."
그럴리가 없지. 고죠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한 발 물러섰음. 자신을 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지만, 자긴 그렇다 치고 이타도리는 직장이라 놓아줄 수밖에 없었음. 설사 주말이었더라도 이타도리가 진짜 받아줬을 지는 의문이지만.
며칠이란 시간이 흐르고 유지의 구애 아닌 구애는 계속해서 이어졌음. 물론 그때처럼 끌려가기만 하지는 않았음. 나름대로 수를 써서 벗어나기를 몇 번, 유지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음. 만났을 땐 별반 다를 거 없는 태도였지만 눈치 빠른 고죠가 그걸 모를까... 나중엔 서서히 연락도 줄어드는 게 불안함도 느껴졌지.
"바빠?"
- 조금? 급한 일이야?
"그런 건 아닌데."
- 그럼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뚜뚜-. 끊어진 수화음이 고죠의 비상벨을 세차게 울렸음. 좆됐다. 그리고 문득 연락 왔다던 전 남친이 생각 났음. 아닐 거라고, 아닐 거라고, 애써 부정했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었지. 한때 사랑을 나누던 사이인데 또 사랑하지 못할 건 뭐야? 자기는 시작도 못해본 사이였으니 과거의 사람에게 질투가 날 수 밖에. 조급한 마음이 든 고죠가 겉옷을 챙겨들고 곧장 이타도리의 회사로 향했음. 미움을 받을 땐 받더라도, 확답이 듣고 싶었음.
회사 앞에 도착한 고죠가 다시금 이타도리에게 전화를 걸었음. 하지만 바쁘다는 게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이타도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느덧 부재중은 열 통 가까이 쌓였음. 빌어먹을 회사. 먹여살릴 능력 충분히 있는데 그냥 때려치면 안 되나? 손끝 한 번 스쳤다고 신혼 여행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거랑 뭐가 달라? 궁지에 몰려선 되도 않는 상상이나 하고 자빠짐. 만에 하나, 둘이 잘 된다하더라도 이타도리가 그걸 용납할리가 없었음.
"지금 어디야?"
- 어? 지금 외근 나왔다가 퇴근하는 중이야. 전화 많이 했던데. 무슨 일 있어?"
"없어."
무슨 일이라고 할 건 없지. 혼자 불안해서 달려온 것 뿐이니까.
"뭐야. 괜히 걱정했,"
"그냥,"
"응?"
"보고 싶어서."
지금 어디야? 이타도리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음.
"내가 퇴근하고 다시 회사로 오게 될 줄은 몰랐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곧바로 만나러 온다는 걸 보면 우리의 관계가 진전이 되긴 했구나.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음. 이타도리가 언제까지 맞춰줄 줄 알고? 지금도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데, 불안해서 이대로 어떻게 살아.
"아는 거라곤 회사 뿐이니까."
"그래서 싫어?"
"당연하잖아."
"왜?"
"그야,"
...어라, 내가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가? 이타도리가 골똘히 고민하는 고죠를 보며 살풋 웃었음. 그렇게 플러팅을 걸어대는데 이유를 모를리가. 다만 확신을 받고 싶은 건 고죠 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기껏 다가갔더니 도망이나 치고 말이야. 하지만 오늘 회사 앞까지 찾아온 것도 그렇고,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방금까지 회사 주변을 빙빙 돌던 이타도리가 핸들을 꺾으며 물었음.
"사토루 우리 집 갈래?"
물론 이타도리가 핸들을 꺾은 순간부터 고죠에게 선택권은 없었음. 이타도리의 집에 도착한 고죠가 쇼파에 털썩 앉았음. 대체 왜 집까지 데려왔을까. 여전히 오해와 착각 속에 살고 있던 고죠는 이 상황조차 불편하게 받아들였음. 이쯤되면 그냥 친한 동생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라면서.
이제 웃기지도 않는다... 그나마 오늘 모든 걸 털겠다고 다짐해서 다행임.
"여기."
음료수라도 가져다주겠다고 부엌에 갔던 이타도리가 오렌지 주스랑 초콜렛 여러 개를 들고 왔음. 근데, 내가 단 거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나 진짜 생각없이 내뱉고 살았구나.
대뜸 지난 날의 자신을 돌아보더니 눈을 데굴 굴림. 차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던 거지. 막무가내로 살아온 고죠의 인생에 염치라는 단어가 각인되는 순간이었음.
"이제 우리 집도 알게 됐네. 만족해?"
그리고 각인됐던 염치가 판박이마냥 떨어져나감. 만족? 고작 이런 걸로? 제가 원하는 건 이타도리 유지, 그 자체인데 이딴 걸로 만족될리가 없잖아.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
고죠는 속에 묵혀둔 수많은 말 대신 쉽고 빠른 길을 택했음. 이게 맞다고는 못하겠지만 반응이라도 살펴볼 심산이었음. 하지만 이타도리는 결코 만만찮은 사람이라고.
"그래."
"평소처럼 잠만 잔다고 안 했어."
"응. 알겠어."
...?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건드려도 상관 없다는 거야? 자기가 먼저 도발해놓고 지가 당황함. 맨날 놀려먹기 바쁘던 사람이 이렇게 순순히 나온다고?
"나 장난 아니야."
"으음, 그러네. 내가 장난을 좀 많이 치긴 했지. 근데 나도 장난 아니야."
씨발. 이게 꿈이면 신 조지고 나락 간다. 고죠가 자기 뺨을 철썩, 때렸음. 미친 존나 아파.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눈앞이 아찔했음. 그치만 이 정도로 때리지 않으면 현실을 믿기가 어려웠음.
"...너 뭐해?"
"현실 감별."
이게 뭔 X소리애... 이타도리가 당황한 얼굴로 고죠를 바라봤음. 안 믿기는 건 알겠는데 자기 뺨을 저렇게 무식하게 내려치는 새끼가 어딨어; 벌써부터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보고 이타도리가 걱정되는 맘에 뺨을 쓸어만지자 고죠가 손목을 탁, 낚아챘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
또 이런다, 또. 이제는 실증이 날 지경이었음.
"어어...! 뭐하는 거야!"
"제발 그 입 좀 다물면 안 돼?"
신경질 난 고죠가 이타도리를 들쳐매고 직접 방 하나하나 뒤져가면서 침실을 찾았음. 빙고. 마음이 조급했던만큼 실행력 하나는 끝내줌. 발견한 침실에다 냅다 이타도리를 던져버린 고죠가 그 위에 올라탐. 이젠 진짜 도망갈 곳도 없다. 궁지에 몰린 이타도리가 진땀을 삐질삐질 흘렸음. 이거 좀 위험한데...
"사토루 조금만 진정을,"
그런 거 몰라~ 또 무슨 말로 판을 깨려고; 이타도리의 말을 사뿐히 무시한 고죠가 일어나려는 이타도리의 어깨를 밀치고 제 상의를 끌어올렸음. 꿀꺽.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 알지."
*
짹짹. 아침이 밝아오고 출근을 알리는 알람이 신명나게 울려댔음. 먼저 잠에서 깬 이타도리가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알림을 껐음. 아이고... 삭신이야. 애써 몸을 일으키긴 했는데, 밤새 열혈 고딩에게 시달렸더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 이거 일 하다가 기절하는 거 아닌가 몰라. 게다가 목도 나가버림. 그냥 연차 낼까... 이타도리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진지하게 고민했음. 일단 어젯밤에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씻긴 해야 돼서 화장실로 갔는데. 세상에 이게 뭐야; 몸이 울긋불긋한 게, 눈에 보이는 곳이면 죄다 물어뜯어놓은 거임.
"내가 미친다 진짜..."
고죠가 했던 말처럼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차를 내긴 내야겠네. 이타도리가 한숨을 푹 내쉬고 착잡한 기분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음.
"일어났어?"
"일단 나도 학생이니까."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들지. 이타도리가 머리를 탈탈 털며 침대에 앉았음.
"학교 데려다 줘?"
...안 갈 생각이었는데. 고죠가 눈을 굴리면서 적당한 핑계를 찾았음.
"회사 늦지 않겠어?"
"오늘 쉴 건데? 이 상태로 회사를 어떻게 가."
몸을 훑어내린 고죠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이타도리의 허리에 엉겨붙었음.
"그럼 나도 땡땡이 치지 뭐."
어차피 안 갈 생각이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딱히 본인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제 애인이라면 말이 다르지. 일단 오늘은 자기도 회사를 빠질 예정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겠지만... 이참에 이래저래 확실히 얘기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
"사토루 앉아봐. 할 얘기 있어."
"무를 생각하지 마. 안 받아줘. 돌아가."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해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고죠가 의심의 눈초리로 이타도리를 쳐다보며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음.
"뭔데?"
"앞으로 이런 거 금지야."
"!?"
이런 게 뭔데. X스? 아님 스킨십? 혹시 애인처럼 굴지 말라는 건가? 이 중 어떤 거라도 고죠는 멘붕이었음.
"이렇게 난잡하게 만들어놓으면 일상에 지장이 가잖아. 앞으로 하지 마."
"난 또 뭐라고. 그럼 이제 안 보이는 데만 남길게."
안도의 한숨 뒤로 요상한 말이 이어졌음. 저기, 그게 중점이 아니지 않아?... 라고 말해봤자 소용 업겠지. 이건 일단 넘어가고.
"그리고 앞으로 특별한 일 아니면 학교는 갔으면 좋겠어. 빠진다고 해도 별말은 안 하겠지만, 나는 내 애인이 자기 본분을 다 했으면 좋겠거든."
이타도리의 말을 들은 고죠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음. 평소 행실 때문에 아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이래뵈도 고죠 전교 3등이시다. 게다가 출결도 좋음. 학교 안 가도 할 게 없거든. 그것보다 고죠의 표정이 이상해진 진짜 이유는 다른 거였음.
"애인?"
"무르지 말라며?"
그건 그렇긴 한데 이타도리가 확인 사살 시켜줄 줄은 몰랐음. 드디어 기나긴 외사랑에 결실이 맺어지는 건가? 심장이 두근두근하면서도 좀 얼떨떨했음.
"혹시 연애가 아니라 파트너를 원했어?"
"뭐?"
"그런 거라면,"
"아니야. 이거 맞으니까 딴 생각하지 마."
다급한 고죠의 변명에 이타도리가 푸흡,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 그래. 알겠어. 그러는데 직감적으로 알았음. 또 낚였구나.
"그런데 사토루 나한테 할말 없어?"
"...무슨 할 말."
고죠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음.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하도 놀려대서 삔또 나갔다 이거예요. 아예 얼굴도 안 쳐다보는데 이타도리가 고개를 슥 들이밈.
"있을텐데. 할 말."
"......"
진짜 생각 나는 게 아무것도 없음. 나 또 뭐 잘못했나? 고죠가 머리를 굴리다 슬쩍 눈을 마주침.
"없으면 말고."
이타도리가 얼굴을 홱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일단 붙잡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붙잡고 봄. 방금 뭔가 되게 서운해하는 것 같았는데.
"...아."
"생각 났어?"
"유지는?"
"응?"
"유지도 나한테 할말 있잖아."
"그런 게 있던가. 나는 모르겠는데."
와, 얌체. 고죠가 얼빠진 얼굴로 이타도리를 바라봤음. 여기까지 해야겠네.
"사토루, 좋아해. 생각보다 꽤 많이."
"......"
곧바로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애가 이번엔 혼이 빠져서 멍한 얼굴로 쳐다봄. 생각보다 중증일지도.
"사토루?"
"아, 어."
"대답 안 해줄 거야?"
"...좋아해."
좋아한단 말이 원래 이렇게 어려웠었나. 턱, 막히는 목을 뚫고 겨우겨우 꺼낸 고죠의 고백에 이타도리가 싱긋 웃으며 답했음.
"알고 있어."
# 3
갑자기 그런 거 보고 싶다 선후배au인데 둘이 대놓고 등교부터 하교 때까지 붙어다니면서 연애질 해가지고 전교생이 고유 사귀고 헤어진 거 다 앎
그래갖고 둘이 마주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긴장함 고죠야 성격 더러운 거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유지도 화나면 무서운 거 아는 사람은 알아서 눈치 오지게 보는데 정작 둘은 마주치면 모른체 지나감 학교를 핑크빛으로 물들일 땐 언제고 찬바람 쌩쌩이야... (죽어나가는 학생들
근데 그 많은 학생들 중 고유가 헤어진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 당연함 워낙 둘만의 세상에 빠져살아서 그런지 둘이랑 가까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음 그냥 헤어졌다니까 눈치 보는 거임 그러다 어떤 간 큰 애가 유지한테 들이대면서 사건 함 터졌음 좋겠다 펑
“하, 쳤냐?”
“그냥 지나가다 부딪힌 거잖아. 왜 갑자기 시비야 선배?”
그냥 복도를 지나가다 부딪혔을 뿐인데 과격하게 나오는 고죠,,, 유지도 이에 못지 않게 반격함 둘의 싸움에 주변이 술렁거림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너 말하는 본새가 삐딱하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분위기 살얼음 근처에 있던 애들 지나가지도 못하고 숨도 죽이고 지켜봄 우리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몰라 시발 저길 지나가는 게 더 오바야 (수근수근)
“요즘 살판 났다더니 아주 기어오른다? 이제 난 선배로 보이지도 않지?”
“선배니까 선배라고 부르잖아. 대체 내 소식은 누구한테 듣는 거야? 선배 혹시 나한테 미련있어?”
유지가 강수를 두자 고죠가 안 그래도 구겨진 인상을 더 팍 구겼음
“아주 소문이 자자해서 들렸다. 왜. 내가 미련 있으면 어쩔 건데.”
? 이거 대체 무슨 전갠데 둘이 살벌하게 싸우는 거 아니었어? 왜 우리 눈엔 사랑 싸움으로 보이지
“선배 나한테 미련 있어?”
“그럼 어쩔 거냐고.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있는 주제에. 아주 가볍다 못해 날아가겠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만난다고 누가 그래? 그래서 나한테 시비 건 거야?”
그래 우리 눈이 잘못된 게 아니구나 X발... 사랑 싸움 주제에 왜 이렇게 살벌한 건데 제발 화해해라. 우리 눈치보여 죽겠다
“내가 그딴 걸로 시비 걸 만큼 속 좁은 사람으로 보여?”
“응. 선배 속 좁잖아.”
X발... 결국 여기도 욕함 너무 정곡이라 할말을 잃어버림 다른 사람이랑 만난다는 말에 눈 돌아가서 시비 건 거 맞거든.
“쫌생이. 그냥 미련 있다고 말하면 되잖아. 선배는 왜 항상 이런 식이야?”
“찌질하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시비 건 거 아니라니까?”
“거짓말 하지 마. 헤어질 때도 그랬잖아!”
오 드디어 헤어진 이유가 나오는 건가 그래 제발 우리도 그 이유 좀 알자 전교생을 가지고 놀았으면 이유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나가서 얘기해.”
#저기요
학교를 한바탕 뒤집고 중요한 순간에 나가버리더니 웬걸 둘이 손잡고 등장함 그래서 헤어졌던 이유가 뭔데 다시 만날 거면서 학교를 왜 냉동실로 만들었냐고
“근데 유지한테 들이댔던 애 있지 않았어?”
“걔 3초컷으로 차였잖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
“...”
응 그래 우리가 멍청이였네. 그리고 학교를 다시 핑크빛으로 만들어버린 둘은 또 싸우고 헤어졌답니다 ^^
“저기 또 사랑 싸움 씨게 했나봄.”
“ㅇㅇ 걍 모르는 척 지나가자.”
다만 이제 다들 둘의 싸움을 연중 행사 쯤으로 여기고 아무도 눈치를 보지 않았음
끗
# 4
고죠가 붕대를 두를 당시 유지가 학생이었다는 전체 하에 우울할 때마다 유지를 찾아가는 고죠가 보고 싶다.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에 오점 같은 달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때 고죠는 유지를 찾아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졌기에.
- 아, 고죠 선생님.
그리고 유지는 고죠의 유일한 별이었다.
- 시간 괜찮지?
- 아무렴.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있을라고.
고죠가 익숙하게 유지의 기숙사에 발을 들였어. 오늘도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유지의 물음에 고죠가 고개를 끄덕였어.
- 어떻게 알았어?
- 선생님 그럴 때만 찾아오잖아. 근데 왜 하필 나야? 딱히 기분이 풀릴만한 걸 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유지일까. 고죠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 의문은 옛날옛적에 접었어. 아무리 곱씹어봐도 유지라서. 이 이상의 답을 찾지 못했거든.
- 궁금해?
- 으음, 아니. 평범한 이유는 아닐 것 같아.
- 의외로 되게 별 거 없어.
- 선생님이 별 거 없다고 하니까 더 궁금하다. 그치만 안 들을래.
- 왜? 궁금하다며.
그럼 여기로 온 바람이 없잖아. 굳이 그런 이유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걸. 선생님이 말하고 싶을 때 말해. 유지의 말에 고죠가 어설피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아래로 추락했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의 가슴을 후려파는 재주가 있네. 조용히 유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문득 제 얼굴에 두르고 있는 붕대가 답답하게 느껴졌어.
- 유지 부탁이 있는데.
- 이상한 거야?
이런 와중에도 넌 진짜.
- 이상한 거면 어쩌게? 들어줄 거야?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붕대를 푸르면 억누르던 감정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너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들어보고.
- 그래? 그럼 붕대 좀 풀어주라.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일에 유지가 고개를 기울였어. 붕대 정도는 혼자 푸를 수 있지 않나?
- 안 풀어줄 거야?
이유가 있겠지.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유지의 손이 고죠의 얼굴로 향하고 새하얀 붕대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어. 붕대 아래 갇혀있던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파란 눈동자를 드러낸 고죠가 유지를 보며 환하게 웃었어.
- 아, 이제 잘 보인다.
# 5
고유 진짜 달달한 거 너무 보고 싶어... 예를 들자면 처음 키스하게 되는 과정이라던가....
지하실에서 영화보다가 고죠가 분위기 잡고 슬쩍 입맞추려고 하는데 유지가 화들짝 놀라면서 고죠 입술을 턱 막아 버림
- 이게 뭐하는 걸까 유지?
- 어... 아직 마음의 준비가...
-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연인 사이에 입을 맞추는 것 뿐인데?
그럼서 눈 감고 유지 손바닥에 춉, 하고 입을 맞추는 거야 손바닥도 간질간질... 심장도 간질간질... 붉어진 얼굴로 고죠를 보고 있노라하면 요망한 얼굴과 눈이 맞았지
- 안 돼?
고죠가 막았던 손에다 슬금슬금 깍지를 끼고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어 말 그대로 연인 사이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긴장돼서 입만 살짝 벌어지다 말았지. 그 틈에 고죠가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어.
- ~!~!~!!!
고죠가 허리를 감싸고 한층 더 가까이 끌어당겼어.
- 진짜 안 돼?
빳빳하게 굳어버린 허리라던가, 상기된 볼이라던가, 유지가 잔뜩 긴장한 게 여실히 느껴졌어. 좀 더 밀어붙이고 싶다. 아예 머릿속을 나로 채우고 싶어. 그리고 유지의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입술을 덥치는 거야. 사실 무슨 허락이 필요하겠어. 둘은 연인 사이인 걸.
고죠가 혀로 입술을 툭툭 두드리면 입술이 열리고,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면 유지가 어색하게 고죠의 목에 팔을 두르는 거야. 아. 귀여워 죽겠다. 언제 키워서 언제 잡아먹지. 고죠가 검은 속내를 감추고 아주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갔어.
대충 이런 달달한 고유 첫키스가 보고 싶었읍니다.
# 6
스페이스에서 잠깐 풀었던 적폐와 날조가 가득한 썰...
고죠가 죽어야만 하는 그런 타이밍이 와서 급하게 결혼식 올리는 고유가 보고 싶다.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고죠 가 당주의 자리를 유지에게 물려주고 사라지는 고죠.
하지만 모든 건 고죠의 시나리오. 유지가 차차 당주로써 자리를 잡아갈 즈음,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고죠가 나타난 거야. 유지 앞에만 몰래.
- ...사토루?
- 잘 지냈어, 유지?
작별 인사 없이 사라질 땐 언제고 이렇게 나타나? 넓디 넓은 당주의 방에서 홀로 있던 유지가 고죠의 품에 안겼어. 고죠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을 때도 울지 않았던 유지가 애처럼 엉엉 눈물을 터뜨렸어. 고죠 없이 지내던 외롭고 쓸쓸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서.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죽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을 아무리 달래도 다들 죽었을 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겠어.
- 어디, 끅, 어디갔다왔어...!
-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 흐윽, 진짜 나빴어...
- 응. 내가 나빴네.
고죠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어내는 유지의 등을 토닥였어. 그럼에도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 이제 어디 안 갈 거지...?
- 응. 어디 안 가. 유지 옆에 있을게.
고죠가 싱긋 웃었어. 하지만 공식적으로 고죠는 죽은 사람. 다른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였어.
- 자리는 어떡해?
- 그건 유지가 계속 맡아야지. 이제 유지가 나 먹여살려야 돼.
- 어? 그럼 사토루는?
- 방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쯤 되려나.
고죠가 살포시 유지의 입술에 입을 맞췄어.
- 그래줄 거지?
- ...당연하잖아ㅡ.
유지가 고죠의 품에 쏙 안겼어. 아마 며칠 내리 떨어지지 않겠지.
그리고 얼마 안 가지 않아, 방안에 틀어 박혀버린 당주에 대해 고죠 가에 은밀하게 소문이 퍼져나갔어. 당주의 방에는 오로지 당주만이 드나들 수 있으며, 그 방에는 당주가 애지중지 하는 무언가가 숨겨져있다고.
# 7
나 그것도 보고 싶음. 일단 고죠랑 유지가 결혼을 했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주술사란 항상 죽음 앞에 놓여져있잖아. 그래서 고죠가 외출할 때마다 (여기서 당주의 증표 같은 게 있었음 좋겠음. 목걸이나 반지 같은) 당주의 증표를 유지한테 넘겨주고 유지가 대리 당주를 맡는 거...
그리고 고죠가 돌아오기 전까지 유지가 고죠가 걸치던 당주 옷 입고 지냈으면 좋겠음. 헐렁한 사이즈 그대로... 고죠가 매번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입지 말라고 자기 앞에서만 입으라고 타박하는데, 절대 말 안 들음.
- 그치만 이렇게라도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코피 팡.
나 무슨 복을 타고 났길래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섹시한 반려를 맞이한 거지? 일단 이번 생은 아닌 거 같고. 뭔진 몰라도 전생의 나 잘했다.
- 으악! 사토루!?!!
- 어어. 알겠어.
이미 아무 말도 안 들리. 그대로 유지를 들쳐 업고 침실로 향하는 고죠였다......
# 8
고유 연반으로 어린 고죠(그래봤자 고딩임)랑 결혼해서 고죠가 다 자라기 전까지 대신 당주 자리 맡아주는 유지도 보고 싶어...... 그리고 고죠가 다 크자마자 이혼 선언하는 유지.
- 사토루 우리 이제 이혼하자.
- ...어?
고죠 사토루. 당주 옷 입자 마자 이혼 당할 위기에 처하다.
- 이혼하자구.
- 내가 뭐 잘못했어? 갑자기 왜 그래.
- 응? 당주 자리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잖아. 목적 달성 했으니까 이제 이혼해야지.
이게 무슨 소리야. 너무 총체적으로 개소리라 어디서부터 고쳐줘야 될지 감이 안 오는데.
-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당주 자리 때문에 유지랑 결혼했다? 그런 얘기야?
- 응. 아니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너무 황당하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이런 건가.
- 내가 굳이 왜? 유지 아니어도 당주 자리 따위 나 혼자 차지할 수 있어.
- ...? 그럼 나랑 왜 결혼했어?
그러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 좋아하니까 결혼한 게 당연하잖아!
- 에, 거짓말.
고죠 혈압 폭발 직전.
- 유지한테 당주 자리 넘겨주면 믿을래?
- 그런 짓을 왜 해! 그럼 내가 그간 자리 맡아준 의미가 없잖아!
- 어차피 이딴 거 바라지도 않았어. 가지고 싶으면 가져도 돼.
고죠 가 당주 자리를 개껌 주듯 던져주는 고죠......
- 아니, 진짜 왜 그래???
- 유지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잖아!
- 당연하지! 나한텐 그런 말한 적 없잖아!
- ...내가 좋아서 결혼하자고 했으면 결혼 안 했을 것처럼 말하네.
- ...
아니...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유지가 머뭇거리면서 암말도 못하니까 고죠가 눈을 내리깔고 유지를 노려봤어. 진짜 너무한다.
- 알겠어. 당분간 당주 자리는 유지가 맡아. 나는 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 같으니까.
- 어?
- 내가 당주 맡을 때 대신 맡아주는 거라고 했지? 그럼 이혼은 못하겠네.
얘 봐라. 이혼하기 싫다고 당주 자리를 막 버려버리네......
- 그으...건 그렇지만......
-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고죠 가 당주님?
뭔가 거하게 낚여버린 유지... 근데 또 맞는 말이긴 해서 벗어날 방법도 없음.
- 으응...
그렇게 한동안 고죠에게 꼬심을 당한 유지는 이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야, 고죠 가 당주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답니다. 끗.
# 9
아 진짜 사회에 물든 30도리랑 정신 나간 18고죠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어 ㅠ
모르는 여자랑 나란히 서 있는 거 보고 고죠가 바람 피는 줄 알고 미련 없이 헤어지려고 하는 유지랑 백일 어쩌구 기념일 챙기려다 영문도 모르고 이별 당하게(?) 생긴 고딩 고죠,,,
유지 백일이니 뭐니 기념일 챙긴 게 백만년 전이라 그런 거 상상도 못함 근데 고죠는 풋풋한 고딩이잖어 주변에서 투투 어쩌구 백일 어쩌구 하는 거 주워듣다가 투투는 오바 같아서 백일 단디 챙길라고 준비하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이별 통보 받아버리기
- 헤어지자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 다른 사람 생긴 거 다 알아. XX 앞에서 여자랑 다정하게 있는 거 봤어.
어이가 없었다. 처음 맞이하는 기념일이라 만족스러운 선물을 쥐어주려고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보고 있는데 바람이라니... 하물며 유지가 말하는 그 여자는, 제 동급생인 쇼코였다. 물론 제 안목은 뛰어나지만 커플링 같은 거 맞춰 본 적이 있어야지. 그래서 쇼코와 동행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가당치도 않은 오해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이별 통보까지 받아?
- 누가 헤어져준대?
-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사람이 생겼으면 나랑 헤어지는 건 당연한 거지.
친구들이 헛소리할까봐 감춘 게 화근이었다. 진즉 소개를 시켜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소개해주기도 싫었음. 그 녀석들은... 해로워. 나한테.
- 우리 일주일 뒤에 무슨 날인지는 알아?
그러니까 우리 유지는 꽁냥꽁냥한 낭만이 없는 서른이라고. 알 턱이 없음.
- 무슨 날인데?
응.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 어떻게 된 게 나보다 더 삭막해? 그렇다고 내가 삭막하다는 건 아니지만.
- 아저씨 일주일 뒤가,
- (뒤가...?)
- ...아니다. 한 번 잘 생각해 봐. 헤어지자고 한 건 못 들은 걸로 할게.
아니 왜 말을 하다 말아??? 유지 답답해죽는다, 죽어. 고죠는 연애 시작하고 신나가지고 핸드폰에 핑꾸핑꾸한 디데이 어플까지 깔아서 날짜 세고 있는데, 우리 유지는 사귄 날짜만 기억하고 사귄 일수 같은 거 안 세요. 캘린더에도 안 적음. 이렇게 건조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억 안 나가지고 길거리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서 멍 때리는 유지,,, 기억에 없는 건데 기억 날 리가 있냐고...
그렇게 유지가 혼자 고군분투하는 사이 일주일이 지나가고 대망의 디데이가 다가옴. 심지어 일주일동안 연락도 안 하다가 이제야 연락 함. 고죠 사토루 이 독한 놈. 것도 문자로 시간이랑 장소만 띡 날아옴. 어린노무 새키가 4가지 없이...... 여튼 우리 착한 유지는 거길 또 갑니다. 갔는데,
- 이제 무슨 날인지 좀 알겠어?
미친놈이 전망 좋다는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림. 유지 입 떡 벌어져서 이 이게 뭐야... 이러고 있는데 태연하게 반지 케이스를 꺼내들고 어림잡아 본인이 족히 1년은 회사에 찌들어야 살 수 있는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워주는 거. 이게 무슨 돈지랄이야?
- ...사토루.
- 어, 왜?
- 환불해.
심장 쿵. 우리 고죠는 자기 나이 때문에 결혼은 못하지만, 성인 되면 바로 접수할라고 혼인신고서도 준비했다 이 말이에요. 근데 환불이라뇨?
- 진짜 미쳤어? 나 이거 못 받으니까 가서 환불해. 여기 예약도 취소하고.
- 왜??? 부담 돼서 그래? 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착잡... 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한텐 아니란 말이야! 이게 다 얼마야!? (사회에 찌들어서 머릿속으로 계산부터 때리고 보는 유지) 경제 관념이 다른 것도 정도껏이지. 이건 너무 과하잖어...
- 나 이런 거 끼고 다니지도 못해!
- 진짜 괜찮다니까? 기스 나면 새로 사줄게!
- ...나랑 진짜로 헤어질 생각 아니면 환불해.
머리가 띵~ 유지의 초강수에 고죠가 입술을 비죽이며 하나 남은 반지를 냅다 던져버림.
- 뭐 해?!
뭐 하긴. 환불 못하게 할라고 흠집내는 중이지.
- 실수로 떨어뜨렸네. 이거 환불 안 되겠다. 어쩌지?
미친놈. 진짜 미친놈. 반지가 바닥에 박힐 기세로 던져졌는데, 실수는 무슨.
- ......우리 헤어져.
- 싫어.
- 헤어지자니까? 나 이런 식으로는 진짜 못 만나.
- 싫다고 했잖아.
지가 잘못한 주제에 살기 띄우기는. 유지 막 서럽고 억울해서 주먹 꽉 쥐고 고죠 노려봄.
- 너 멋대로 할 거면 나도 내 멋대로 할 거야.
- ...환불할게.
- 예약도 취소해.
- ......알겠어.
결국 질 거면서 깝치길 왜 깝쳐.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지랑 헤어지긴 싫은 거지.
- 커플링은,
- ?
- 내일 새로 맞추러 가자.
- !
- 대신 비싼 건 안 돼. 내가 살 거야.
- 그럼 내가 사면,
- 안 돼.
쳇, 혀를 차면서 레스토랑 예약을 취소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뭔가 툭 얹어짐.
- 좀, 아니, 많이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도는 나쁘지 않았어.
# 10
고유 연반은 역시 그게 제일 좋음 자기가 남자 좋아하는 줄도 몰랐던 동정남 고죠 사토루랑 놀만큼 놀면서 산 뼈게이 이타도리 유지... 고다섯의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 전부 아저씨 유지라는 게 너무 설렘 ㅠㅠ
그리고 왜 유지한텐 내가 처음이 아니냐고 따지는 뻔뻔한 고딩 고죠
- 그럼 이 나이 먹고 가만히 있으리?!
- 당연하지. 난 가만히 있었잖아.
얼탱X 야 이 미친놈아... 너랑 나랑 나이가 몇 살 차인데......
- 억울하면 늦게 태어나지 그랬어.
빠직. 유지 화났다. 안 그래도 팔자에 없던 (띠)동갑 애인 만나느라 나이에 예민하단 말이야...
- 아니지. 그렇게 내 처음이 가지고 싶었으면 사토루가 빨리 태어났어야지. 사토루가 늦게 태어나서 내가 다른 놈들이랑 노닥거린 거잖아. 안 그래?
살벌. 분명 웃고 있는데 안 웃고 있음. 하지만 미친 고딩의 패기는 쉽게 꺾이지 않지
- 그게 무슨 논리야?
- 너는 무슨 논리야.
아.
- ...내가 잘못했네.
아무리 미쳤어도 납득이 되면 쉽게 꺾이긴 하나봄
- 반성의 의미로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각방 생활이야.
- !?
ps. 깜빡하고 안 적었는데, 각방 생활이랬지 안 한다고는 안 함. 뒷 이야기는 여러분들으 상상에 맡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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