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뱀파이어가 된 메구미 (1)

잠에서 깨자 깨끗하고 높은 천장이 보였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 좀체 가시지 않는 잠기운에 마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 내는 목소리는 끝이 갈라진 채였다.

양팔과 목덜미에 닿는 베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가슴을 덮은 이불은 도톰한 두께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푹신했다. 젖은 솜처럼 축축 늘어져 몸을 누르는 기숙사의 오래된 침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성급 호텔에서나 쓰이는 토퍼는 두께가 족히 15센티는 되는 것 같았다. 구름에 누운 듯 포근한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호흡을 한 후시구로가 단숨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통유리로 된 한쪽 벽을 모조리 가린 두꺼운 커튼과 모노 톤의 가구. 변변한 장식품 하나 없이 살풍경한 침실. 눈에 익은 곳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문질러 잠기운을 닦아낸 후시구로는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발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실내용 슬리퍼였다. 슬리퍼는 정확하게 그의 발이 닿을 자리에 놓여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정돈된 슬리퍼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열린 문틈으로 빛이 흘러들었다. 천장 모서리를 따라 설치된 간접조명이 은은하게 거실을 밝히고 있었다. 검정에 가까운 진한 회색 벽지와 시원하고 고급스러운 백색의 대리석 바닥재. 소파는 검은 가죽 소재로 가장자리에는 부드러운 담요와 쿠션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다. 소파의 앞에는 유리로 된 상판의 테이블이, 그 아래에는 흰 러그가. 침대로 쓰여도 무방할 만큼 커다란 소파 위를 곁눈질한 후시구로는 탁 트인 거실의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모든 집기가 검정으로 통일된 주방에서 흰 것이라곤 바 테이블 형식의 긴 식탁과 그곳에 선 남자뿐이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주방에는 메인 조명 대신 노란 포인트 조명 여덟 개만이 켜진 채였다. 조명 아래 고개를 숙인 남자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갓 구운 식빵에서 먹음직한 냄새가 풍겼다.

“아침은 간단하게 먹자. 토스트 괜찮지?”

“네.”

짧게 대답한 후시구로가 자리에 앉았다. 유난할 만큼 층고가 높은 아파트였다. 신장이 2미터에 가까운 남자가 집을 고를 때 유일하게 신중한 부분이라고 했다. 오래되고 천장이 낮은 건물에서는 심심찮게 머리를 부딪히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천장에 가까운 메인 조명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포인트 조명이 그의 머리칼을 엷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흰 머리칼이 밀색으로 물결쳤다.

돈이 썩어나도록 많은 남자는 대부분의 식사를 외식으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요리에 재주가 없어 그런 건 아니고. 단순한 효율의 문제였다. 그는 손재주가 좋은 만큼 음식솜씨도 괜찮았다. 지금보다 어릴 적, 그러니까 후시구로 남매가 낡고 천장이 낮은 아파트에서 살 무렵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앞치마를 걸치고 어린 남매에게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계기는 사소했다.

그가 후시구로 남매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봄이었다. 후시구로 남매가 체험학습 알림을 받은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그 무렵 아이들의 대화는 곧 있을 체험학습과 부모님이 준비해줄 도시락에 쏠려 있었다. 후시구로는 낄 수 없는 화제였다. 별반 관심도 없긴 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후시구로 남매는 비슷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아침 일찍 편의점에 들러 적당한 도시락을 준비하곤 했다. 그처럼 사소한 일에 마음이 상할 만큼 여유로운 형편도 아니었다. 연에 몇 차례나 있는 교내 행사를 겪은 지 수년. 서글픔은 빠르게 무뎌졌다.

그날의 일은 운명의 장난 어쩌고 할 만큼 엄청난 우연은 아니었다. 그해 고죠는 자주 남매를 마중하러 오곤 했으니까. 어린 후시구로는 초등학생의 하교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고죠의 기행에 손톱만 한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당시 고죠의 행적은 고전의 커리큘럼을 이수 중인 지금에 와서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다만, 야가 학장은 고죠 사토루의 수제자라 불리는 후시구로가 성실한 학생이라는 데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남자가 정문에 선 채였다. 후시구로는 걸음을 재촉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고죠의 손목에는 유명 제과점의 상호가 프린팅된 종이가방이 걸려 있었던 것 같다.

고죠는 후시구로가 가까워지자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후시구로가 뭐라기도 전 그의 뒤를 가리켰다. 후시구로가 그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남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덩치가 있는 아이는 후시구로보다 머리 반 개가 더 컸다. 그는 쪼그려 앉은 고죠를 보고 반걸음을 물렸다가, 후시구로의 얼굴을 보고 다시 가슴을 폈다.

‘후시구로는 엄마가 없으니까 도시락 같은 거 못 싸지?’

대답은 후시구로의 몫이 아니었다. 뭐?! 얼굴을 종잇장처럼 구긴 고죠가 벌컥 성을 냈다. 사나운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후시구로는, 엄마랑 아빠가…. 가까이에 있는 후시구로도 알아듣지 못할 입엣말을 웅얼대던 아이는 끝내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멀어지는 동급생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후시구로가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 너머 파란 눈을 잔뜩 일그러뜨린 고죠가 제 허리에나 미칠 만큼 작은 초등학생을 노려보며 물었다.

‘메구미,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후시구로는 당황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숨기려고 숨긴 것도 아니었다. 익숙한 날을, 익숙한 방법으로 보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후시구로는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러니까, 도시락은 내일 아침에 편의점에서…’

고죠는 후시구로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 그를 안아 올렸다. 잔뜩 굳은 얼굴을 한 고죠가 향한 곳은 가까운 대형마트였다. 카트를 꺼내고, 그 위에 후시구로를 앉힌 고죠는 가지고 있던 종이가방을 후시구로의 품에 안겨주었다. 직후, 온갖 식자재를 닥치는 대로 카트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고죠 사토루는 살면서 처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살면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재료로 보이는 것을 죄 카트에 쑤셔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트를 나서는 고죠의 양손에는 식자재가 가득한 대형 봉투 네 개가 들려있었다. 고죠는 스마트폰으로 부지런하게 도시락 관련 레시피를 탐독했다. 후시구로는 주방에서 멀찍이 떨어져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양의 식자재였다. 도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고죠는 비장한 표정으로 토끼가 그려진 노란색 앞치마를 둘렀다.

장장 여덟 시간. 체험학습보다는 야유회에나 어울릴 고급 3단 찬합이 완성되었다. 후시구로는 완성한 음식과 고죠의 뿌듯한 얼굴을 번갈아 보다 조심히 도시락통을 들었다. 고죠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린아이가 야유회 준비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도시락통을 짊어진 것 같았다. 작게 웃음을 터뜨린 츠미키는 선반에서 낡은 그릇과 도시락통 두 개를 꺼냈다. 고죠가 완성한 고급 나들이용 도시락의 일부가 남매의 작은 도시락통에 나누어 담겼다. 남은 음식은 그들의 저녁 겸 아침 식사가 되었다.

고죠 사토루표 호화 도시락을 가지고 체험학습에 참여한 남매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고죠는 도시락의 반응을 물었다. 츠미키는 아이들이 보인 반응을 성실하게 묘사했다. 고죠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후시구로를 응시했다. 관심을 받는 일을 즐기지 않는 후시구로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들 맛있다고 했어.’

고죠가 활짝 웃었다. 남매를 끌어안은 그는 앞으로도 종종 음식을 해주겠노라 선언했고, 꽤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감사합니다.”

접시가 테이블에 닿아 내는 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파란 접시에 삼각형으로 예쁘게 자른 토스트가 놓여 있었다. 빵과 빵 사이에는 무화과잼이 얇게 발려 있었고 위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크기의 버터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고죠는 제 몫의 유리컵에 각설탕을 와르르 쏟아 넣더니 그걸로도 모자라 바닐라 시럽을 네 펌프를 꾹꾹 눌러 넣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혓바닥이 아렸다. 후시구로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 진짜 당뇨 와요.”

“그런 게 올 거면 진작 왔겠지.”

최강이 당뇨로 쓰러지는 것도 재미있겠네.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그는 설탕 커피인지 커피 설탕인지 알 수 없는 음료를 깊게 음미하며 버터의 모서리를 작게 잘라 포크에 얹었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경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후시구로는 고개를 저으며 포크를 집었다. 정신건강에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후시구로는 작게 자른 토스트를 입으로 가져갔다. 달큰한 과육과 함께 단맛이 느껴졌다. 그는 잘린 토스트의 단면을 확인했다. 희미하게 연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잼과 연유를 바른 토스트는 무척 달았다. 그래도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럽 한 펌프도 넣지 않은 커피가 토스트의 단맛을 적절히 억제했다. 부드럽게 녹은 버터 조각과 함께 토스트를 삼킨 후시구로는 진하게 내린 커피를 머금었다. 산미가 약하고 쓴맛이 강한 원두는 후시구로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즈음, 식사를 마친 고죠가 포크를 내렸다. 턱을 괸 그가 후시구로를 빤히 응시했다. 후시구로는 어색하게 손을 멈췄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포크를 걸치고 까딱이던 고죠가 물었다.

“먹을만해?”

“네.”

“토할 것 같진 않고?”

“네?”

더디 침몰하던 기억이 단숨에 의식의 표층까지 부양했다. 온몸의 피가 증발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지난밤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뒤집혔다. 심한 구역감에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후시구로는 당장 속을 게울 것처럼 격렬하게 몸을 떨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머리 위로 고죠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의미 없는 질문을 몇 차례 던지던 고죠는 가지고 온 나이프를 제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하얀 살결에 피가 맺혔다. 바싹 말랐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식욕이 치밀었다. 그는 고죠의 상처에 입술을 대고, 갈라진 상처를 헤집고, 그의 피를 마셨다. 게걸스럽게.

후시구로는 머리가 좋았다. 감이 좋았고,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그는 물기가 맺혀 흐려진 눈으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고죠의 앞에 놓인 것과 똑같은 모양의 샌드위치, 그리고 커피. 손에서 힘이 빠졌다. 쥐고 있던 포크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피 섞었거든. 커피랑 잼에.”

담담하게 이른 고죠가 소매를 걷었다. 손목과 팔꿈치의 가운데에 길고 예리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후시구로의 눈이 싱크대 위, 물기가 마르지 않은 과도에 꽂혔다. 토스트를 자르는 데에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후시구로는 입을 가렸다. 혓바닥을 지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간 음식의 맛을 떠올렸다. 모래를 삼킨 듯 텁텁한 감각이 혀를 자극했다. 단출한 식사에서 그의 혀가 감지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끔찍하도록 달고 향기로웠던 것. 오래지 않은 기억에 남은, 고죠 사토루의 피.

갓 구운 식빵, 설탕에 절인 무화과의 과육, 달콤한 연유와 씁쓸한 커피까지. 모든 건 그의 기억이 만들어낸 가짜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어느 날엔가 고죠와 보았던 B급 좀비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의 피와 살을 뜯어 먹는 산 시체. 주령을 모르는 인간이 상상으로 빚어낸 저주.

의자를 밀고 일어난 고죠가 후시구로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손으로 후시구로의 얼굴을 움켜쥔 그가 후시구로의 턱을 들었다. 물기에 젖어 크게 흔들리는 눈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고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메구미. 조용조용 이어지는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갖은 감정이 엉긴 문장이 후시구로의 의식 깊은 곳에 잠겼다. 읽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치지 말고 똑바로 봐.”

“…….”

“내가 너를 이런 식으로 죽게 놔둘 것 같아?”

조명이 없는 곳에서도 빛나는 눈동자에 후시구로의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후시구로의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고죠는 그제야 후시구로의 얼굴을 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커다란 손이 후시구로의 머리를 헤집었다. 후시구로의 손을 쥐고, 손가락을 겹쳐 잡은 고죠가 그의 몸을 당겼다.

소파에 몸을 누인 고죠가 머리맡의 쿠션을 안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후시구로가 고개를 들었다. 죄라도 지은 양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아 앉은 모습에 고죠가 인상을 썼다.

“메구미, 나 이길 수 있어?”

“아니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답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답이 명확한 질문이었다. 그 짧은 질문에 다른 의미가 담길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고죠 사토루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이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누구도 그를 거꾸러뜨리지 못했다. 누군가는 고죠 사토루가 느닷없이 정신이 나가 자해하지 않는 이상 최강이 바뀔 일은 없으리라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럼 뭐가 그렇게 무서워? 내가 메구미한테 피를 전부 빨려 죽기라도 할까 봐?”

늘어졌던 상체를 일으키고 쿠션에 턱을 기댄 고죠가 짐짓 짜증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던 후시구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해주전까지는 꾸준히 마셔야 해. 겪어봤으니 알겠지만, 식욕이 충족되지 않으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거야.”

햇볕만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 후시구로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상태였다. 한눈에 알았다. 산 채 주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타도리와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후시구로에게는 그릇으로써의 적성이 없다는 정도. 한순간 저주에 침식된 건 그 결과다.

저주는 끊임없이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이타도리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고서야 저주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후시구로가 받은 저주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닌 술사를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는 비약적으로 상승한 후시구로의 신체 능력으로 저주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햇볕에 약해지거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건 주령화의 부작용이었다. 산 사람의 피를 원하는 건 부작용이라기보다 갑작스레 상승한 신체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에 가까웠다.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연료가 산 사람의 피라는 건 두려워할 일도 아니었다. 정말 위험한 건 피를 마시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때까지 기력이 떨어진 이후 벌어질 일이었다.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을 습격하게 되겠지. 말할 것도 없는 대형참사다. 고죠의 피를 마시는 일은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고죠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후시구로를 제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피를 마셔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 대상은 고죠인 것이 옳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시구로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정말? 고죠 사토루가 선뜻 피를 내어주는 건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인가? 그건 예견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고죠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후시구로는 그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고죠 또한 열세 살 어린 제자에게 속을 꿰뚫릴 만큼 녹록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저주인지 아세요?”

“해주법은 모르지만.”

해주법은 저주를 고안한 카모 가문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죠는 이미 후시구로가 저주받은 날에 카모 가문에 기별을 넣었다. 카모 가문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렇다 할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그들이 해주법을 쥐고 있다는 증거였다. 알지 못한다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부리나케 사실을 고했겠지.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고죠 사토루와, 그가 후견인을 자처한 ‘후시구로’ 메구미의 가치를 재고 있다는 뜻이다. 건방지게. 고죠는 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들의 머릿속을 빤히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은 건 단순히 그가 맡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그랬다. 제자가 저주를 받았다는데 제령 따위가 다 뭐라고. 오전, 야가 학장은 고죠의 요구를 승인했다. 그의 몫이었던 대부분의 임무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1급 이하의 술사들이 분담해 맡게 될 터다.

고죠가 눈을 깜빡였다. 반듯하게 허리를 펴 긴장한 채 앉은 후시구로의 모습에 턱 끝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쑥 하니 가라앉는다. 제게 화를 낸 것도 아닌데. 고죠는 팔을 뻗어 소파 옆의 넓은 유리 테이블에 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쥐었다. 나이프는 실제 고죠가 자주 사용하는 물건으로 이지치 편에 전달받은 각종 서류를 개봉할 때 즐겨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가 뜯어야 할 서류가 없다.

찰나, 의도를 이해한 후시구로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런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고죠의 행동이 더 빨랐다. 깔끔하게 손바닥을 긋고 지나간 나이프에 핏물이 맺혔다. 치미는 통증에 고죠가 눈을 찌푸렸다. 의도한 것 보다 상처가 깊었다. 떨어진 핏물이 하얀 러그를 적셨다. 공기 중으로 퍼지는 피비린내에 후시구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후시구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급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메구미, 이리 와.”

“됐어요.”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배고플 때는 늦다니까.”

소파를 움켜쥐고 있던 후시구로는 고죠의 말은 듣지 못한 척 그를 지나쳐 TV 수납장을 열고 구급상자를 꺼냈다. 구급상자를 뒤지는 손끝이 볼썽사납게 떨렸다. 피가 흐르는 손을 늘어뜨린 채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고죠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시구로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후시구로가 반항할 틈도 없이 소파에 주저앉은 고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후시구로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피가 흐르는 고죠의 손바닥을 한 번, 태연하게 저를 바라보는 고죠의 눈을 한번. 눈썹을 늘어뜨린 채 한참을 머뭇거리던 후시구로는 결국 고죠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혀가 갈라진 상처에 닿았다. 후시구로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손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는 입술, 젖은 숨. 혹여 상처를 헤집을까 필사적으로 욕구를 억누른 움직임이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은 손으로 후시구로의 머리를 쓸어내린 고죠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맑은 암녹색 홍채가 그를 향했다. 입술은 여전히 고죠의 손바닥에 닿은 채였다. 고죠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후시구로의 눈꺼풀을 가볍게 눌렀다.

“메구미가 조금 더 나를 의지했으면 좋겠어. 독립하기엔 이른 나이잖아.”

눈가를 쓰다듬던 손이 부드럽게 뺨을 감쌌다. 후시구로는 고죠의 손바닥에 닿아 있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새파란 홍채가 곱게 휘었다. 커다란 손이 후시구로의 턱을 지났다. 얇은 목을 감싸듯 쥔 고죠는 엄지를 들어 후시구로의 입술을 눌렀다. 핏물이 묻어났다.

“서운해.”

길고 섬세한 목을 타고 올라간 손이 귓바퀴를 지나 머리를 감쌌다. 까만 머리칼 끝을 만지작대던 고죠는 피에 젖은 손으로 후시구로의 등을 당겼다. 무릎을 굽힌 후시구로가 소파에 상체를 기대자 고죠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메구미가 응석 부리지 않으니까…, 속살대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지혈되지 않은 손이 닿은 등허리가 미지근하게 젖었다.

“내가 응석 부리게 되잖아.”

어이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본래가 안하무인인 남자였다. 애당초 아이가 응석을 부리지 않는다고 어른이 아이에게 응석을 부린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고죠의 행동은 응석보다 변덕에 가까웠다. 고민하던 후시구로는 손을 뻗어 고죠의 등을 토닥였다. 낮은 웃음을 터뜨린 고죠가 후시구로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메구미.”

“네.”

“가능한 만큼, 오래오래 응석 부려.”

“뭐하러요.”

“그야, 나는 얼마든 메구미의 응석을 받아줄 수 있지만…….”

고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반전술식으로 갈라진 상처를 치유한 그가 후시구로의 몸을 끌어올렸다. 얼결에 고죠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후시구로가 몸을 비틀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체념한 후시구로는 고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후시구로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아 안은 고죠는 알싸한 통증이 남은 오른손으로 후시구로의 머리칼을 쓸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오래된 기억이 맺혔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금줄과 갖은 주술을 박아 넣은 색색의 헝겊, 주술사의 술식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봉인. 오래된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물의 구석, 그림자에 잠긴 채 고요하게 그를 바라보던 한 쌍의 눈동자.

‘쇼코.’

온몸이 축축했다. 나고 드는 호흡에서 비린내가 났다. 이에이리는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메구미 좀 살려줘.’

고죠는 후시구로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후시구로의 손이 달래듯 그의 등을 쓸었다. 몸을 웅크린 고죠가 속삭였다. 오래 응석 부려줘. 후시구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로 날숨이 샜다. 언어가 되지 못한 바람들이 부질없게 흩어졌다. ─메구미.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줘. 네가 곁에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내가 네게 매달리게 두지 마. 너는

‘넌 미쳤어.’ 나를 감당하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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