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을 밝혀주는 이야기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더워..."
"그러게."
"학교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제 거의 다 왔어."
저기 봐. 손가락 끝으로 건물 사이 드러난 시계탑을 가리키자 키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뺨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항상 긴 후드티를 입고 다니길래 더위를 잘 안 타나 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하긴 더위를 안 탄다 해도 요즘 날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긴 하다. 이 지구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다는 듯이 기온은 매일 신기록을 기록하고 있다. 그 더위가 인간이 초래한 거라고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손을 이마에 갖다대서 작은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침에도 쌩쌩한 태양과 눈이 마주쳤다. 눈을 감으니 빛의 잔상이 눈꺼풀에 어른거린다.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르는 여름날은 끝났지만, 무더운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 빛도, 우리의 방학도, 그리고 모모의 여름방학 보충도. 당장 눈앞에 닥쳤던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남은 것은 의외로 싱거운 일상이었다. 모모는 오봉 휴가가 끝나 재개된 보충 수업을 들어야만 했고, 나는 갑작스러운 담임선생님의 사망으로 생긴 공백을 반장으로서 메꾸기 위해 학교에 가는 중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대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따라와 준 키도는 덤이었다. 며칠 동안 비현실적인 일만 경험했다 보니 오히려 이렇게 평화롭게 걷는 게 그리 실감나지 않았다. 그건 모모도 마찬가지였는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쾌적한 등굣길은 처음이에요! 오늘은 처음으로 1교시부터 제대로 수업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단장님 감사합니다!"
"천만에. 단원을 돕는 건 단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구나, 모모."
잠깐의 외출로도 그 난리가 났던 모모다. 등굣길이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쉽사리 그려졌다. 조금 측은한 마음을 담아 말을 건네니 모모는 쑥스러워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면서도 평화로운 등굣길이 낯선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도의 능력은 누군가와 접촉하면 풀리기에 만약을 위해 일부러 사람이 적은 길을 골라 걷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인적 드문 골목에 방학, 이른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 한 명 없이 한산했다. 담벼락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정도가 나른하게 우는 정도였다.
골목에서 빠져나오니 우리 학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계탑이 보였다. 작년 개축되어 완전히 서양식 건물로 탈바꿈한 학교는 우리가 지나쳐온 빌딩들과 대비되어 더 위용 있어 보였다. 이런 마을 중심부에 있지 않았다면 조금 거짓말을 보태 순정만화의 배경이 되어도 그럴싸했을 것 같다. 메카쿠시단과 만난 백화점도 그렇고, 아무래도 요즘 신축 건물은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덕분에 여학생들 사이에선 인기가 많아 신입생이 늘긴 했지만. 본 교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한 정문은 방학이지만 보충이나 동아리로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 반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나나 모모와 다른 디자인, 즉 남학생용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서 있었다. 모모와 키도도 그를 발견했는지 잠깐 걸음이 멈추었다.
"누구지?"
"우리 반 부반장인 이토야. 나랑 같이 호출받았거든."
"부, 부반장이구나."
"오늘 서로 인사해두고, 얼굴 알아두면 좋을 거야. 가자."
모모는 반드시 기억하고 말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이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긴 모모는 출석 일수도 모자랐고, 학교에 와도 모모한테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였기 때문에 몰라도 어쩔 수 없다 싶었다. 반장인 나도 몰랐고. 그래도 이토는 부반장이고 남자니까 아이돌에게 한 번쯤 모모에게 말을 걸어봤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남자 애들은 다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할 거라는 내 편견이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서로 모르는 사이라면 아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거는 게 낫겠지 싶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얼굴에는 평소와 같이 예의 바른 미소를 걸친 채였다.
"안녕, 이토."
"시라키! 안녕, 오랜만이야!"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이토가 환한 얼굴로 답해주었다. 방학하고 처음 만나는 그는 어디 바다라도 놀러 갔다 온 것인지 피부가 제법 까무잡잡해져 있었다. 슬쩍 시선을 내 뒤로 던지자 그의 눈동자도 날 따라 움직였다. 내 신호에 키도가 능력을 살짝 거두었는지 손을 든 모모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저기, 안녕!"
"키, 키사라기 모모?"
뒤늦게 모모를 발견한 이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는 같이 와서 알고 있었지만, 그가 봤을 땐 갑자기 내 뒤에서 모모가 뿅 하고 생겨난 것처럼 보였겠지. 아직 모모 능력의 여파가 있는지, 그냥 놀라서 그런 건지 이토가 모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가볍게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환기했다. 너무 빤히 본 게 부끄러웠는지 그는 볼을 살짝 붉게 물들이고 목덜미를 긁적였다.
"모모는 오늘 보충 수업이 있다고 해서 같이 왔어."
"아, 그렇구나. 하긴 아이돌이라 학교에 자주 못 왔지."
"아, 하하... 그게..."
보충의 이유가 출석 일수 때문만은 아니지만. 히비야가 말했던 1점짜리 시험지 이야기는 삼켜두었다. 그럼 수업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자며 이토가 먼저 우리를 이끌었고, 모모와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정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몰래 키도에게 인사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키도는 힘내라며 응원해주고는 말 그대로 사라졌다.
"음, 일단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둘 다 방학에 학교 오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선생님. 저희 반 일이잖아요."
"맞아요! 당연히 해야죠, 네."
"하하, 둘이 반장, 부반장이라서 정말 듬직하네. 갑자기 담임이, 음. 바뀌어서 혼란스러울텐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 고맙다. 다음 학기에 잘 부탁할게."
새로 담임을 맡게 된 와타나베 선생님이 안경을 올리며 웃으셨다. 눈 밑에 살짝 다크서클이 어린 것을 보니 방학 중에 갑자기 닥친 일들을 처리하느라 많이 고생하신 모양이셨다.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담임을 맡게 된 것은 그러려니 했겠지만, 그 타테야마 선생님이시니 자료가 엉망진창이었을 거다. 거의 퍼즐 수준으로. 와타나베 선생님은 타테야마 선생님과 달리 건실하신 분인데, 방학 중에 우릴 부를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나마 우리 둘이 자료 정리를 몇 번 도운 적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원래라면 이런 일 자체가 없는 게 좋았겠지만. 특히 나는 반장인데다가 따로 하는 동아리도 없다며 더 자주 부르셨다. 덩달아 밥도 여러 번 얻어먹고. 혼자 지내는 날 신경 써주시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중 일부는 눈이 맑아지는 뱀의 속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일로 너희도 심란하고 학급도 어수선하겠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 이젠 내가 너희 담임이니까. 그러니 다음 학기 잘 부탁한다."
생각에 잠긴 내가 우울해 있다고 생각하신 건지 와타나베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어 번 치며 격려해주셨다. 확실히 그 타테야마 선생님이라고 해도 장례식 때 반 애들이 많이 울었다. 조금 불성실했을 뿐 애들과는 참 잘 놀아주신 분이셨으니까. 나는 조금 슬프긴 해도 지금 선생님이 소원을 이루고 행복해지신 걸 아니까 울진 않았지만, 그게 어른들 눈에는 다르게 보인 거겠지. 맴도는 생각은 늘 그렇듯 집어넣고 걱정하지 말란 의미로 그저 살짝 웃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저랑 시라키가 있으니까요! 그치, 시라키?"
"응. 저희도 최선을 다할게요."
"하하, 덕분에 걱정이 안 되네. 아, 걱정이라고 하니..."
으음.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선생님은 턱을 매만지며 우리 눈치를 살피셨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걸까. 뭔가 아는 게 있는지 슬쩍 이토를 바라보니 이토는 잠시 움찔하다 고개를 저었다.
"저기, 둘이 키사라기와 같이 왔다고 들었는데 서로 친하니?"
"저는 우연히 교문 앞에서 만난 거 뿐이에요. 키사라기랑 같이 등교한 건 제가 아니라 시라키 쪽이죠."
"저는 방학 동안에 기회가 있어서 꽤 친해졌어요. 그래서 오늘 같이 오기도 한 거고요. 모모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게 말이지..."
와타나베 선생님은 말끝을 흐리며 이토를 바라보았다. 눈빛을 읽지 못하고 멀뚱거리는 이토에게 팔꿈치로 톡 치고 문 쪽으로 눈짓하니 그제야 허둥거리면서 나갔다. 열정적인 건 좋은데 눈치가 조금 부족하단 말이지, 이토는. 둘만 남은 교무실에서 와타나베 선생님이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치는 소리만 났다. 다른 것도 아닌 모모의 일인데 뜸 들이는 선생님이 답답해서 답지 않게 말을 채근했다.
"큰일인 건가요?"
"큰일이라면 큰일이라고 할까. 가능하다면 시라키가 키사라기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머뭇거리며 와타나베 선생님이 전해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와타나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복도로 나오니 에어컨 하나 없다고 여름의 습기가 훅 느껴졌다. 어느덧 이제 2교시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모모 보충은 4교시까지였지. 그때까지 도서관에 있을까 고민할 무렵, 옆에서 불쑥 내가 자주 마시는이온 음료 캔이 나타났다. 옆을 보니 이토가 입꼬리를 씩 올린 채 웃고 있었다. 더운데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걸까.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목마르지? 이거 마셔!"
"고마워. 그보다 이토. 아직 안 갔어?"
"아, 응. 그... 신경이 쓰여서. 아! 그렇다고 훔쳐 들었다거나 하진 않았어!"
"그렇구나. 괜찮아. 네가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었어."
더 묻지는 말란 의미였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무게를 잡았는데 별 거 아니라는듯이 말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 혹시 몰라 나랑 모모는 동성이니까 선생님이 나에게만 말한 것 같다고 덧붙이자 이토는 그대로 이해해주었다. 크게 궁금해했던 것 같지도 않았지만, 더 묻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둘이서만 복도를 걷고 있으니 지금이 방학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학교는 어딜 가든 사람이 없었고, 가끔 동아리 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살가운 성격도 아니고 모모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차서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적막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이토가 내 눈치를 보다 발랄하게 말을 꺼냈다.
"있지, 시라키. 이제 뭐 해? 혹시 시간이 있으면 나랑 카페라도 가지 않을래? 예전에 같이 갔던 카페 기프티콘을 받았는데 2인 세트더라고. 예전에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답례를 하고 싶어서."
"아, 미안. 오늘 모모랑 같이 돌아가기로 약속해서."
"아, 으응. 그렇구나! 그렇네, 둘이 같이 학교 왔고, 응. 그러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잠깐만, 이거 유효기간이..."
"미안해."
환기를 시키기 위해 열린 복도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 넣고, 난 평소처럼 예의 바른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당분간은 내가 일이 있어서 많이 바쁠 것 같아."
분명한 거절의 말에 이토는 잠시 넋 놓다가 알겠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해 보이는 게 모모만큼은 아니지만 참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었기에 너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니 언제 우울했다는 듯 웃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그를 조금이라도 달래주길 바랄 뿐이다.
"비상상황이에요."
아지트에 오자마자 꺼낸 말에 아지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무슨 일인지 이미 알고 있는 모모와 키도만이 내 뒤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다들 웬만하면 먼저 이런 말을 꺼내지 않는 내 성격을 알기에 눈동자 하나하나에 의문이 어렸다.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표정들이 똑같길래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조금 놀려주고 싶단 생각이 피어오를 무렵, 슈우야가 언제나처럼 미소지으며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이치카쨩?"
"그게 모모가..."
아. 미소 뒤에 어린 걱정을 보자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결국 억누르지 못했다. 시선을 잠시 내리깔고 말끝을 흐리자 슈우야가 짐짓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동작이 무언가의 시선이 된 것처럼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음, 이렇게까지 집중을 끌 생각은 아니었는데. 슬쩍 모모를 훔쳐보니 모모는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흡사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져 기자회견장에 선 아이돌 같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런지, 본인의 일이라서 직접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별안간 모모가 고개를 들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이대로라면 저, 유급할 것 같아요!"
말투만 들어보면 아이돌 은퇴 선언이라도 하는듯 비장했다. 하긴 유급이니 학생 입장에서는 은퇴 비슷한 무언가이긴 하다. 모모를 한 번 보고,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데 하나 같이 그저 눈만 껌벅이기만 한다. 딱히 충격받은 반응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아, 그러고 보니 메카쿠시단 대부분은... 제멋대로 사고가 흘러가려던 와중 신타로씨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거였냐."
"오빠! 뭐야, 그 태연한 반응은! 조금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
"저 녀석 출석 일수에다가 지능 생각하면 유급은 정해진 수순이잖아. 그야 뭐, 이치카 같은 모범생한테는 충격일지도 모르지만 저 녀석한테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으윽..."
모모, 조금은 반박하는 척이라도 해주지 않을래? 하긴 나도 어떻게 쉴드를 해주고 싶어도 학교에서 보고 온 점수와 출석 일수를 보면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그런 숫자를 그런 곳에서 볼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당사자인 모모도, 제일 친한 나도 별말 하지 못하고 있자 나보다 연상인 사람들이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맞아. 너무 우울해하진 마. 여기 이렇게 학교 중퇴한 사람도 이렇게 뻔뻔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말이지."
"윽... 그건 타카네 네가 말할 만한 건 아니잖아!"
"너랑 내가 같아? 넌 자발적 히키코모리고, 나는!"
"자, 자. 둘 다 진정하는 게 좋겠슴다. 그리고 키사라기씨라면 일단 아이돌이란 직업도 있으니 유급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학력이 전부인 것도 아니니까!"
"이 사람들, 정말 괜찮은 거야?"
"모모씨, 저는 모모씨가 어떠하다 해도 응원해요!"
"히요리쨩, 고마워!"
다가와서 하는 말들은 하나 같이 모모의 절망스러운 수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들이긴 하다. 그야 내가 잠시 잊었을 뿐,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자의든 타의든 학교를 중퇴한 사람들이니까. 그 틈에서 내가 유급 이야기를 꺼냈으니 반응이 이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써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별거 아니라고 느껴서. 사실 저 말들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회적 풍토가 초등, 중, 고등학교까지 쭉 졸업하고 그 뒤 저마다 사회로 나아가는 상을 그린다. 거기서 벗어나면 무언가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낙인을 찍고 불합리한 일을 더 겪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예외는 있고 이 세상에 길은 많다. 당장 여기 있는 메카쿠시도 그렇고. 그렇지만...
"싫어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튀어나온 내 목소리는 이질감이 들 정도로 차가웠다.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것도, 이 분위기에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는 자각은 있다. 그래도 이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싫다, 모모가 유급하는 게. 모모에게 손을 내밀자 모모는 어리둥절 하면서도 냉큼 내 손을 잡아주었다. 모모의 손은 방금까지 밖에 있어서인지 평소 체온보다 뜨거웠고, 땀에 젖어 축축했다. 그래도 난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맞잡고 고개를 올려 모모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모모랑 같이 졸업하고 싶어."
"이... 이치카쨩!"
검은 눈동자에 감동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모모는 나를 와락 안아버렸다. 모모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스킨십의 강도도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나도 거기에 익숙해지고 있으니 큰 불만은 없어도 다들 따뜻한 눈빛으로 우릴 보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자주 잊어버리지만 생각해보면 히비야와 히요리를 제외하면 나랑 모모가 제일 어리다. 그러니 저런 언니, 오빠 같은 눈빛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은 한다. 다만, 혼자가 익숙했던 나에겐 아직은 너무 간질거리는 느낌이라 견디기 어려울 뿐. 눈을 감고 애써 그 느낌에서 벗어나고는 모모 등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말을 꺼냈다. 분위기도, 서론도 모두 내 계획대로 흘러왔다.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모모, 유급 당하지 않게 내가 도와줄테니 힘내자."
"응!"
"그러니까 재시험까지 앞으로 매일 같이 공부하는 거야."
"응?"
당황해서 굳은 모모를 살짝 떼어내고, 눈앞에서 싱긋 웃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인 건 안다. 그렇지만 모모의 현 점수에 비해 재시험까지의 시간은 너무나 촉박하기만 하다. 남은 시간을 다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스스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모모에게 약한 면이 있으니까 초반부터 확 잡아놔야만 한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모모가 정신 차리기 전에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보충 수업은 1교시부터 4교시로 오전 중에만 진행하니까 나머지 오후 시간은 나랑 같이 공부하는 거야. 그렇지만 이번에 시간 조정을 했다고 해도 나는 가끔 알바하러 가기도 하니까, 그런 공부 외에 소모할 시간을 최대한 아낄 겸 아예 합숙 형태로 하면 어떨까 싶어. 내가 혼자 사니까 우리 집에서 해도 괜찮지만, 어차피 키도와 함께 등교해야 해서 매번 아지트 와야 하니 아예 아지트에서 지내는 게 어떨까? 아, 그럼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지? 우리 둘이 며칠 동안 아지트에서 지내는 거 괜찮을까, 단장?"
"어, 어어? 그건 괜찮다만..."
"좋아. 그럼 남은 건 보호자이신 모모네 어머니의 허락이네. 이번 주 금요일이 재시험이니까 시간이 많이 촉박해서 모모만 괜찮다면 오늘이나 내일 중에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 물론 내가 제안한 거니까 나도 말씀드릴게. 전화도 있지만, 합숙이기도 하고 예의상 역시 직접 만나서 하는 게 나으려나..."
"저, 저기 잠깐만 이치카쨩!"
역시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니까 반응이 나오는구나. 잠시 말을 끊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척 고개를 기울이니 모모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갑자기 합숙이라든가 그런 거 나,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까..."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하는 모모의 모습은 예전 매니저분께 전화하던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직 내가 모모를 친구라고 칭하는 걸 어색해했던 그때를. 불과 며칠 전인데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밀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도 스스로 말하기엔 부끄럽지만 내가 모모에게 약한 만큼, 모모도 나한테 약한 면이 있다. 메카쿠시단 모두가 친구로 지내긴 해도 저마다 가족, 고향 친구, 소꿉친구, 선후배 등 긴밀한 연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와 모모도 그렇다. 또래 친구와 평범하게 놀고 싶다는 게 오랜 꿈이었던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첫 번째 동갑 친구니까. 가장 숨기고 있던 눈의 비밀도 터놓고, 서로서로 생각하며 맞춰주는.
그러니까 이번은 나에게 져줘, 모모.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썹을 축 처지게 해서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것만으로도 모모는 이미 하던 말을 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확실하게 수락을 받아내야 한다. 모모가 안절부절 해하며 내 표정을 살피려던 그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모모를 올려다보았다. 이때만큼은 내가 모모보다 작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고개도 살짝 기울여 주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꺼냈다.
"모모, 안돼?"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겼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모를 보고 회심의, 아니 정말 기쁘다는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한테도 애교 한 번 부린 적 없는데, 역시 사람은 하고자 하면 되는 것 같다. 공부는 자신 없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모모를 토닥이며 힘내자고 말하자 옆에 있던 슈우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이치카쨩만큼은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을지도."
그럼 그렇게 되지 않게 나한테 잘해야겠네. 슈우야한테 싱긋 미소를 지어준 건 덤이었다.
모모와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아지트에서 지내는 거야 단장인 키도의 허락도 받았고, 다른 사람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나도 아지트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해줄 정도였으니까. 눈이 맑아지는 뱀이 남긴 돈 덕분에 아지트 건물을 메카쿠시단이 통째로 매매하여 지낼 방도 넘친 만큼 있었다. 방 하나에 손님용 이불을 갖다 놓고,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내 자취방에서 가져와 쓰기로 했다. 이러다 이 방이 이치카의 방이 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에는 반박도 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보호자들의 허락도 생각보다 쉽게 얻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부모님께 비밀로 하고, 모모만 받은 거지만. 혼자 지낸다는 건 이런 점이 좋다. 하나하나 허락받지 않아도 되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들킬 일도 딱히 없다는 거. 조금 일탈하는 기분이기도 했지만 나쁜 짓은 아니니 눈감기로 했다. 아무튼 모모의 어머니께서는 전화했더니 왜인지 허둥거리며 언제든 와도 좋다고 말씀하셔서 말 나온 김에 바로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다가 서둘러 가느라 선물도 변변치 못한 것을 가져갔지만 모모 어머니께선 하나하나 기뻐하셨다. 리액션을 보고 역시 모모와 신타로씨의 어머니시구나 싶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키사라기가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방문객은 내가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환대를 받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반장이라는 내 입장과 모모, 신타로씨의 지원사격이 더해지니 합숙 수락은 금방 떨어졌다. 즐거운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웃으시는 모습은 아무래도 딸이 유급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신 듯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겼다. 실제로 나도 나름 즐기고 있었으니까.
멀리서 매미 소리가 들려온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고 있어서 그 소리만 아니었으면 여름이라는 걸 깜박 잊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메카쿠시단이 마련해준 방 안에서 각종 책과 모모의 시험지를 보며 가르칠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모모는 1교시 수업에 들어갔고, 키도는 한창 아지트로 돌아오는 중일 거다. 키도도 만만치 않게 고생하고 있는데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마실 거라도 준비해둘까. 일어나자마자 책만 본 탓에 뻑뻑해진 눈을 문지르며 1층에 내려오자 오늘도 또 메카쿠시단의 시끌벅적한 하루가 시작하고 있었다.
"자, 그럼 키사라기쨩이 학교에서 돌아올 동안~ 메카쿠시단의 능력 제어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나도 열심히 알려줄게!"
"잘 부탁해!"
"의욕 넘치는 게 어쩐지 기분 나빠."
"히, 히요리..."
쇼파 한쪽에는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히비야와 히요리가 앉아있고, 반대쪽에는 싱글거리며 웃는 슈우야와 마리가 앉아있었다. 과연. 저렇게 선생과 제자를 정한 거구나. 하루카씨와 아야노 선배도 달력상 날짜로 따지자면 나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두 분은 좀 특수한 케이스이니... 아직 돌아오는 중인 키도와 학교에 있는 모모, 알바 간 세토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근처에서 수업 참관을 하고 있었다. 다들 나보다 연상이라서 그런가 표정이 부모님 같아 보인다. 뭐랄까, 진짜 가족 같은...
"아, 이치카쨩 나이스 타이밍! 마침 부르러 갈까 싶었는데."
"어? 나도?"
"이치카쨩도 능력 제어 잘하잖아. 무의식적으로 쓸 때가 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는 된다는 거지? 그런데 슈우야, 그 전에 잠깐만."
"응?"
이리오라고 손짓하자 슈우야는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순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뭔가 길들여진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다.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고정시키고 슈우야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히비야 옆에 앉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슈우야는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붉은 눈을 휘어 보이며 응해주었다.
"음... 저기 이치카쨩 나 왜 여기 앉아있는 걸까나?"
"아직 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슈우야 학생은 여기에서 수업받도록 하세요."
"에에?!"
"뭐야, 아저씨 기고만장하더니 능력 잘 못 써?"
"풉. 아, 미안."
타카네씨는 입을 가린 것치고는 웃은 걸 숨길 생각은 없는지 계속 실실 웃고 있었다. 저런 걸 보면 새삼 에네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실감 난다. 처음에는 신타로씨 한정이었던 것 같은 장난도 서서히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 같고.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슈우야를 앉히고서 냉큼 반대쪽 소파에 앉았다. 나이나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면 미팅 자리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마리는 괜찮아? 그 여왕 뱀 말이야."
"아, 응! 아야노 언니가 전해준 기억 덕분에 어떤 아이인지도 알고, 평소에는 얌전하니까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하긴 그날 보았던 여왕 뱀은 조금이라도 힘이 누그러졌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에 응해줄 정도로 차분했다. 사용자인 마리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는 이상 폭주할 위험은 적겠지. 모든 뱀과 아지랑이 데이즈를 통솔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 활용성은 내 뱀보다 높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각각 분리된 우리 능력들을 보다 동시에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거나. 그건 그거대로 시도해보면 좋겠지만 지금 하기에는 너무 수준이 높다. 취미반에 전문가 지망생이 끼어든 정도로. 나중에 다시 말을 꺼내 보기로 하고 주변으로 시선을 환기했다.
"3 대 2라... 혹시 더 도와주실 분 있나요?"
"아, 그러면 나도 함께해도 될까?"
"물론이죠. 어서 오세요. 아야노 선배."
내 옆자리를 통통 두드리니 아야노 선배는 기뻐하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반동으로 메고 있던 빨간 머플러도 크게 흔들렸다. 분명 여름용 머플러라고 했었지. 8월 그 나날이 끝난 이후로도 가끔 고집스럽게 메는 모습이 참 아야노 선배답다. 아야노 선배는 전대물 시청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자, 그러면 오늘의 능력 제어 교실은 메카쿠시단 단원 NO. 0 타테야마 아야노와~"
"다, 단원 NO. 4 코자쿠라 마리와..."
갑자기 시작한 자기소개에 이번엔 내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마리 생각보다 이런 거 받아치는 거 잘하는구나. 그보다 나도 해야 하나? 그런 의미로 검지로 나 자신을 가리키니 아야노 선배와 마리가 반짝이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하란 거지. 이거 해야만 하는 거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 보지만 이대로 못 본 척했다간 분위기만 다운될 뿐이다. 아, 그렇지만 역시 부끄러워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반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음... 단원 NO. 11 시라키 이치카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와~"
구경하던 하루카씨는 방청객처럼 태평하게 손뼉을 치고 그걸 반주 삼아서 슈우야와 타카네씨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능력 쓰지 않아도 안다. 슈우야 쟤 진짜 웃겨서 웃고 있다.
"그런 건 됐으니까 얼른 시작해!"
상황극이나 마찬가지인 이 수업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히비야가 버럭 짜증을 냈다. 그것마저도 즐거운 요소인지 다들 웃어넘기고 있었다. 응, 역시 메카쿠시단한테는 몇몇 상황을 제외하곤 진지한 걸 바라선 안 되겠다. 이런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나도 나이지만.
"응,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 전체적으로 능력 제어하는 느낌을 설명하고 1 대 1로 봐주는 건 어떨까요?"
"1 대 1... 다 같이 하는 게 아냐?"
"괜찮아, 마리.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히, 힘낼게..."
능력의 종류는 다양한 만큼 발동 조건도 제각각인 듯 하지만, 일단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거나 눈의 온도가 오른다는 것은 공통된 사안이었다. 아야노 선배에 따르면 능력을 사용할 때 '자기 자신을 자각하면' 능력이 해제되는 모양이다. 키도가 누군가와 부딪히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었던 거다. 생각해보면 나도 내가 만지고 있는 것들은 제대로 투시하기 어려웠는데 그런 원리였던 모양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아는 게 이렇게 한정적인데 괜찮은 걸까. 부정적인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것과 상관없이 뱀까지 투시할 수 있는 내 능력은 능력 제어 시 상당히 도움이 될 테니까.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슈우야를 제외한 두 사람이 자신의 눈에 집중하고 있을 때, 교사진 3명은 각자 담당할 사람을 논의했다. 결과적으로는 히비야는 마리, 히요리는 아야노 선배, 슈우야는 내가 맡기로 했다. 능력을 고려했다기보다는 다분히 관계 형성을 위한 느낌이었다. 마리와 히비야는 서로 어색한 게 너무 강했고, 아야노 선배와 히요리는 친척 관계라 더 친해질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괜찮을까 싶었지만 애초에 장난처럼 시작한 수업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싶긴 했다.
"히요리는 특수한 경우니까 너무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시도해보고 상태를 확인해보는 것에 의의를 두자. 처음에는 나도 지켜보고 있을게."
"알겠어요."
히요리가 집중하고 있는 동안 능력을 써서 그 상태를 살폈다. 히요리 안에 있는 뱀은 그 어떤 미동도 없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검은 뱀인 데다가 두 눈을 굳게 닫고 있어 언뜻 보면 눈 조각을 하지 않은 뱀 모형처럼 보였다. 그래도 당한 게 커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구멍이 뚫리고 그 형형한 금안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히요리가 되살아난 것은 다행이지만 우리를 셀 수 없을 만큼 죽이고 루프 시킨 장본인이 겨우 이런 꼴이 되다니 봐도 봐도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능력을 거두고 소름이 올라올 것 같은 팔을 살살 문지르고 있자 누군가가 내 팔을 콕콕 찔렀다.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니 어느새 곁에 온 슈우야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저기, 이치카쨩 담당은 나거든? 잊으면 섭섭해~"
"히요리, 집중하는 중에 미안하지만, 상태는 평소와 똑같은 것 같아. 어떤 미동도 안 보이네."
"네, 알겠어요. 고맙습니다."
"잊으면 섭섭하다고 하자마자 무시?!"
슈우야는 과장되게 팔을 하늘로 올리고는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누가 속이는 능력 아니랄까 봐 저런 액션 하나도 참 잘 살린다.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동작에 작게 웃고 말았다. 사실은 내 표정이 안 좋아지자 걱정되어서 말 건 거면서 장난으로 덮어버리는 게 슈우야 답다면 슈우야 답다.
"딱히 잊지 않았어. 히요리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내 담당 선생님이 바빠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건가아~ 조금 슬프네."
"지금의 우선순위는 너니까 기분 풀고."
몸을 완전히 틀어 슈우야와 마주 보자 기분 좋은 듯 씩 웃었다. 저건 능력을 쓴 것일까, 진심일까. 상시 능력 사용 중이니 만들어낸 미소이긴 할 테지만, 그래도 저 미소의 의미는 진심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뭘 하면 될까요, 선생님?"
"슈우야는 능력 풀리지 않는 게 문제인 거니까... 일단 능력 해제 조건은 「통증을 느낀다」 였지?"
"응, 그랬었지. 지금은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한 번 확인해봐도 될까. 슈우야, 누가 봐도 속이고 있다는 걸 알게끔 능력 써줄 수 있어?"
"응? 알겠어. 누가 봐도 속이고 있단 걸 알 만한 모습이라... 그러면..."
짐짓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을 하던 슈우야는 날 보고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수상한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 같은 특유의 미소. 또 시작이네 싶을 때 그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바뀌기 시작했다. 짧았던 머리는 날개뼈 아래까지 길어져 있었다. 곱슬기 어린 머리카락이 쭉 펴진다 싶더니 이내 검푸른 색을 머금기 시작했다. 머리와 반대색인 붉은 리본이 그 중간에서 나풀거렸다. 키도 나보다 조금 컸는데 나와 눈높이가 맞아떨어졌고, 체격도 조금 작아졌다. 집중하느라 감은 눈이 떠지기도 전에 누구로 변한 것인지 알아채고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나로 변할 줄은."
"그렇지만 누가 봐도 속이고 있는 게 확실하잖아? 당사자도 앞에 있고~"
"옷은 왜 네 옷 그대로인 거고?"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는 구분해야 하잖아. 그렇지?"
말 그대로 나답지 않게 찡긋 윙크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옷이 아니어도 누가 누구인지 알아챘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부분만 속일 수 있다는 걸 보면 오래, 많이 써서 그런지 능력 활용력만큼은 메카쿠시단에서 손꼽히지 않을까 싶다. 평가와 내 기분은 별개이긴 하지만. 나와 전혀 다른 나와 마주치고 있으니, 마치 클론이라도 만난 것 같아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모양인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슈우야를 보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습이 변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나고, 슈유야는 슈우야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다. 등 뒤로 남몰래 주먹을 쥐고는 언제 표정이 안 좋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눈을 속이는 능력은 없어도 표정을 꾸며내는 것은 내 특기 중 하나. 내 미소에서 슈우야도 뭔갈 본 것일까. 동작을 멈추던 그의 배에 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크헉!"
슈우야의 신음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음. 사람 때린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때리는 순간 손목이 꺾여버렸다. 생각보다 어렵구나, 이거. 은은하게 아파져 오는 손목을 돌리며 슈우야를 보니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내 모습이 보였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아지트 바닥에 화려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아, 진짜다. 안 풀리네."
"이, 이... 치카쨩... 꼭... 이래야 했어...? 지금 난... 네 모습인데도 가차 없네..."
"보기엔 그래도 내가 아니라 너란 걸 아니까."
"그거 나여서 그렇게 세게 때릴 수 있단 소리?!"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리며 카노는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배는 꼭 부여잡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박혀있어서 언뜻 보면 아파서 떨리는 건지, 웃느라 그러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내가 힘이 그렇게 세진 않은데. 조금 신경이 쓰여 살짝 몸을 숙였다.
"많이 아파? 어디 봐봐."
말을 걸어도 슈우야는 별다른 말이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가만히 그를 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눈의 온도를 올렸다. 붉어진 내 눈에는 나비 다리를 하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는 슈우야가 보였다. 마치 엄살을 부리고 부모님이 자신을 챙겨주는 걸 신나는 어린애 같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을 보이면서 굳어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번에는 내가 씩 웃을 차례였고, 반대로 슈우야의 입꼬리는 파르르 떨렸다.
"거짓말쟁이."
"아, 그, 그게..."
"그럼 잠깐만 실례할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나는 슈우야를 와락 안았다. 그날 밤 그랬던 것처럼. 그때와 지금의 슈우야 반응은 전혀 달랐다.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차라리 그때처럼 날 끌어안고 울기라도 했으면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슈우야는 전혀 반대로 그저 헛숨 한 번 들이마시고는 조용히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이고선. 그걸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슈우야의 감정까지 봐버렸다간 제대로 태연한 척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슬그머니 능력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슈우야의 모습이 바뀌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는 서둘러 슈우야에게서 떨어졌다. 분명 에어컨은 여전히 정상 작동 중인데 어쩐지 더웠다.
"추측이었는데 이러니까 정말 풀리네."
"이, 이, 이치카쨩?! 에?! 아니, 방금 그건 뭐야? 갑자기?"
"키도는 다른 사람과 부딪혔을 때 능력이 풀리고, 나도 내가 만지고 있는 물건은 투시하기 힘들어. 그리고 네 예전 해제 조건인 통증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자각하기 제일 쉬운 방법은 촉각, 즉 접촉인가 해서. 내가 네 진짜 모습을 보고 나서 접촉한다면 자신의 현 모습을 자각하고 풀리지 않을까 싶었어."
그리고 잠깐이었지만 능력이 풀렸던 그 날 밤을 재현하면 통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날 밤 일은 세토까지 우리 세 명의 비밀이었기에 말로 꺼내진 않았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지금 상태도 아주 부끄럽긴 했지만. 각자 능력 제어 연습하라고 했더니 우리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구는 경악하고, 누구는 입을 막고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보고 있고... 기분 탓일까. 아야노 선배 눈이 가장 반짝거리는 것 같다.
"저기, 이치카 그렇다고 끌어안을 필요까지 있었어?"
"접촉이 클수록 확실할 거라고 생각해서요. 이번엔 당황해서 풀린 걸지도 모르고, 맞다고 해도 어느 정도 접촉해야 통하는 건지 모르니 몇 번 더 시험해봐야겠지만."
가벼운 터치로도 풀린다면 좋을 텐데. 능력 하나 풀자고 매번 끌어안은 건 나도 조금 그렇다. 지금처럼 주변 반응들도 그렇고, 나도 기분이 그... 아냐,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느새 후드를 뒤집어쓴 카노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붉어진 뺨이 엿보였다.
"이치카쨩,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않을래?"
"그래. 나도 모모 공부 준비 해야 하니까."
먼저 가보겠다며 다른 사람들을 두고 위로 향했다. 쿵쿵 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발 쪽에서가 아니라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점점 머리로 열이 몰리는 것 같아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후드를 뒤집어썼다.
"더워..."
이 더위는 여름이라 그렇다. 분명 그럴 거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방마다 시스템 에어컨도 놓을 수 있고. 돈의 출처가 그 눈이 맑아지는 뱀이라 좀 찝찝하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했던 짓에 대한 보상금이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있던 양심의 가책도 사라진다. 뭐, 아직까진 괜찮지만 앞으로 이 건물을 유지하려면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은 세토의 알바비랑 그 외 활동으로 4명의 생활을 이어왔다지만 인원이 늘어난 만큼 지출할 것과 비상 상황이 많아질 것이다. 당장 돈이 많다고 해도 계획적인 지출을 해야 할 텐데 당장 이 아지트에만 쓴 돈이 얼마일까. 물론 나는 아지트에서 지내고 있지 않아서 별개지만... 딴생각에 집중이 안 되어 모모에게 보여줄 노트를 작성하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한 번 모모의 유급 걱정을 시작하니 이젠 메카쿠시단 전체로 내 오지랖이 펼쳐지려나 보다. 원래는 남들에게 이렇게나 신경 쓰지 않았는데, 메카쿠시단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새삼 실감이 난다. 부모님에게 다시 한번 아지트에서 지낼 순 없는지 말씀드려볼까. 응, 그러자.
"...가..."
"안..."
"응?"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려온다. 여기는 3층이라 임시로 방을 빌린 나를 제외하면 아직 방을 쓰는 사람이 없는데. 능력을 쓴 채 바닥까지 투시하지 않게 주의하며 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신타로씨와 하루카씨가 문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은 채 무언가를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능력이 소리가 들리는 범위도 넓혀주는 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신타로씨를 하루카씨가 열심히 설득하는 모양이었다. 뭐지. 누가 보면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고 자수하자, 그만두자 하는 거로 싸우는 사람들 같다.
"신타로씨, 하루카씨. 용건이 있으시면 들어오셔도 돼요."
문밖에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자 두 사람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얼마나 당황한 건지 신타로씨는 하루카씨를 버리고 헐레벌떡 계단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가 겁준 것도 아니고 그렇게 혼비백산하게 달아나면 역시 조금 상처다. 그렇지만 역시 신타로씨라고 해야 할까. 버벅거리느라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먼저 선수를 쳤다.
"다 보이니까 도망가지 마세요. 아니면 제가 거기로 갈까요?"
다른 사람들 있는 1층이나 2층에서 얘기하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릴 수 있는데. 살짝 놀리듯이 덧붙이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끼익 열렸다.
"모모 공부를 도와주고 싶다고요?"
무슨 대단한 말을 하는 줄 알았더니.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신타로씨 태도만 보면 일생일대의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에 어제 유급을 밝히던 모모의 모습이 겹쳐 보여 조금 웃겼다. 하여간 둘이 전혀 안 닮은 것 같으면서도 똑 닮았다. 반면, 하루카씨는 그 옆에서 오늘도 해맑게 웃고 계시고. 따님을 주십시오 라는 말을 한 예비 사위와 마냥 밝은 딸을 앞에 둔 어머니의 기분을 느끼며 보리차나 홀짝였다. 밖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속에는 얼음 가득한 액체가 맴도니 여름임에도 소름이 돋았다.
"응! 아무래도 동생이라 그런지 신타로가 모모를 많이 신경 쓰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치카랑 같이 모모 공부 도와주면 어떠냐고 제안했어."
"아하, 그래서 모모가 아지트 올 때마다 같이 오셨던 거군요. 어제오늘도 그렇고."
"아, 아니... 그건 모모가 좀 나가라고 하니까..."
"그게 매일 아침 모모랑 같이 나갈 이유가 되진 않죠. 그것도 히키니트라는 신타로씨가."
"윽..."
그렇게 아닌 척하려고 해도 둘이 사이좋은 건 다 아는데. 동의를 구하듯 하루카씨를 보니 하루카씨도 미소로 응해주었다. 하루카씨는 심지어 신타로씨와 선후배였으니 이런 식으로 서툴게 여동생을 챙기려는 모습을 많이 봤겠지. 이번에 신타로씨를 데려온 것을 보니 도와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닐 것 같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고 짐짓 정색하고 샤프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아쉽게도 나는 신타로씨 후배보다는 모모 친구에 더 가까운지라, 솔직하지 못해 평소 도와주지 못하는 저 서툰 오빠를 조금 놀려주고 싶었다.
"뭔가 안절부절못한다 싶긴 했지만, 어제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신 신타로씨가 갑자기 공부를 돕겠다니. 모모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요? 동생 유급을 놀리다니 오빠 자격도 없다던가?"
"...너 사실 그 눈으로 독심술이나 과거 같은 것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아쉽게도 제가 가진 능력은 눈을 훔치는 게 아니라 눈을 꿰뚫어 보는 거라서요. 뭐, 평소 공부 돕거나 했으면 그런 말 안 들었을 텐데 말이죠."
"으윽..."
"아무튼 다 같이 공부하면 좋은 거니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나도 도울게!"
"하루카씨도요?"
하루카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신타로씨만큼은 아니지만 하루카씨도 성적이 좋았다고 했던 것 같다. 도와주시면 좋죠.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자 하루카씨는 칭찬이 익숙하진 않은지 헤헤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코노하씨처럼 사람 좋은 분이다. 어찌 보면 이젠 같은 사람이니까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코노하씨가 있었어도 나름대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무튼 두 분이 붙으니 공부 준비가 한층 속도가 붙었다. 모모 오기 전에 다 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면 여유로울 것 같다. 오히려 여러 조언도 받아서 내용 면에서도 풍족해지는 중이다. 음... 나 시험 기간 때 도와달라고 해볼까. 전 전국 모의고사 톱과 전 성적 상위권이 가르쳐주는 공부라니 호화스럽다. 그때에도 모모는 공부해야 하니 거절하진 않겠지. 지우개로 잘못 쓴 부분을 지우면서 시험 기간 때 다 같이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멈추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신타로씨나 하루카씨도 교복을 입은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자연스러워서 여러 기분을 들게 했다. 실제로 타카네씨나 아야노 선배와 같이 넷이서 공부한 적도 있지 않을까. 그런 추억들이 불합리하게 중간에 잘려버렸는데 다들 억울한 기분은 들지 않는 걸까. 잠시 모모와 나에게 대입해보니 입맛이 영 썼다. 지우개 가루를 탈탈 털며 잠시 두 사람을 살폈다. 잠시 눈치를 보다가 한창 집중한 두 사람을 향해 슬쩍 말을 던졌다.
"저기,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응?"
"뭔데."
"두 분은 학업을 이어갈 생각은 없는 건가요? 재입이나 편입 같은 것도 있잖아요. 아예 대입으로 가는 방법도 있고."
나름 가벼운 말투로 툭 건넸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심각한 질문으로 느껴질까 봐 걱정되었다. 시선이 노트 쪽에서 배회하다가 느리게 눈동자를 올렸다. 하루카씨는 고민하는지 어디 먼 곳을 보고 있었고, 신타로씨는 들고 있던 펜을 탁 놓고 손을 내저었다.
"인제 와서 무슨. 고등학교 수업도 지루하기 짝이 없고. 이번에는 다시 이어갈 생각 별로 없지만..."
이번에는? 스쳐 지나가는 단어 한 개가 걸려 신타로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신타로씨는 조금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자신의 눈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신타로씨의 눈, 눈에 새기는 능력... 아, 하고 탄식이 나올 뻔한 것을 급히 주워 삼켰다. 우리는 무수한 여름을 경험했고, 신타로씨는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 일련의 기억 속에 한 번쯤은 학교로 돌아갈 마음 먹거나 어쩌면 진짜로 학교에 다녔을 때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신타로씨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했을까. 고민해보아도 지금은 그럴 맘이 없다고 하시니 별수 없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하루카씨가 볼을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음... 나는 잘 모르겠네."
"왜요? 하루카 선배 학교 생활하는 거 제법 즐거워했잖아요. 문화제라던가."
이제는 그때보다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신타로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아쉽게도 여긴 작은 방 안이었다. 거기다 같이 공부 준비한다고 붙어있는 상태. 하루카씨는 그 말을 듣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안에서 샤프가 빙글빙글 돌았다.
"응, 무척 즐겁긴 했지만 역시 그건 타카네나 신타로, 아야노가 있었기 때문인걸. 지금은 학교가 아니어도 같이 있을 곳이 있어서 그런가. 학교생활도 좋지만, 꼭 가야겠단 마음은 별로 안 들어."
"그런가요."
"그러는 너는?"
"네?"
순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눈만 깜박거렸다.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에게 학업을 이어갈 거냐고 물은 건 아닐 텐데. 신타로씨 성격에 내 학교생활이 어떠냐고 물은 것 같지도 않고. 내 반응에 자신의 질문이 많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걸 알아챘는지 신타로씨가 뒷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어... 대학이라든가, 취업이라든가 뭐 여러 가지 있잖아?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있냐고."
"신타로도 참. 이치카는 아직 1학년이잖아."
"저야 뭐, 뻔하죠. 성적도, 집안 경제 사정도 나쁘지 않으니 대학 진학을 할 거예요. 집안에서 사업하는 게 있으니 그 일을 도우려면 경영학과가 좋겠죠. 얼마 전에 본가에 갔을 때, 저희 오빠도 집안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더라고요. 아마 저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정확히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고민이랄 것도 없어서 담담히 말하는 사이 노트 마지막 줄까지 필기가 끝나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새로 나타난 순백의 노트에는 반듯한 선이 쭉 늘어서 있었다. 순간 그것이 기차 레일처럼 보였다.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져 있는. 교과서도 마저 넘기고 새 페이지에 새로운 글자를 적어 내려갈 참이었다.
"그런 건 좋지 않아, 이치카."
낮고 묵직하게 날아온 말에 샤프가 미끄러졌다. 글자가 되려고 했던 흑색 선은 반듯한 줄들을 가로지르는 사선이 되었다. 그 끝에는 부러진 샤프심이 굴러가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고서 하루카씨를 바라보니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꽤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라, 뭔가 잘못했나.
"좋지 않다니 뭐가요?"
"그렇게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 말이야. 좀 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지 않아? 길은 분명 어디에나 있고, 네가 원한다면 새로 만들 수도 있을 거야.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 더 고민해봐. 너는 아직 어리잖아."
하루카씨는 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혼나는 거라고 생각해버려서 잠시 움찔거리고 말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그저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어리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누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루카씨 키가 커서 그런지 손도 꽤 컸다. 몇 번 쓱쓱 움직였을 뿐인데 단정히 묶은 머리가 하루카씨처럼 점점 뻗쳐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날 보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하루카씨를 보고 있으려니 그 어떤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진짜 천연이구나. 이렇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여자애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타카네씨가 왜 그렇게 하루카씨에게 휘둘리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런데 학교 같은 건 갑자기 왜 물어봤어?"
다시금 날아든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괜히 지우개만 만지작거렸다. 솔직하게 모두와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하면 역시 곤란하겠지. 신타로씨나 하루카씨 뿐만 아니라 메카쿠시단 모두가.
현재 내 학교생활은 좋게 말하면 잔잔하고, 나쁘게 말하면 밋밋하다. 소외되지 않을 정도로 반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어디에도 깊은 관계는 없다. 만나면 인사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지만 1년이 지나 반이 떨어진다면 더 연락하고 지내지 않을 것 같은 딱 편리한 관계. 알고 있다. 그건 다 사람들과 선을 긋던 내 잘못이라는 걸. 당장 오늘만 해도 부반장인 이토한테 냉정하게 대했다. 이번에는 모모의 유급 문제라는 중대한 사안이 있던 탓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을 거다, 나는.
그래도 나도 가끔은 즐거운 학창 생활을 상상해본다. 어릴 때 바깥에서 뛰어놀던 내 또래 애들을 부러워하던 것처럼. 공부하다 막히면 신타로씨와 하루카씨가 도와주고, 아야노 선배와 타카네씨가 그 옆에서 응원해준다. 모모와 함께 점심이라도 먹으러 가면 키도나 슈우야, 세토와 마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히비야나 히요리한테 연락이 와서 중학교 입시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해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의지가 되는 선배, 함께 이야기 나눌 친구, 귀여운 후배가 생긴다면 회색빛 같은 내 학교생활도 조금은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와 상상을. 그렇지만 그건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풍경인 거겠지. 결국 그저 어깨를 으쓱이면서 잡념을 털어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문득 메카쿠시단의 미래가 걱정되어서요. 두 분 학업 생각이 없으셔도 검정고시는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검정고시라."
"모모의 오빠로서 부끄럽지 않게 고등학교 학력도 채우고, 히키니트도 졸업해주세요. 신타로 선배."
"너 말이야. 모모 거들먹거린다고 내가 다 하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히키니트는 내 아이덴티티라고 할까..."
"하핫."
탁구처럼 주고받는 말 사이에 끼어든 웃음소리는 무척이나 튀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소리의 주인공인 하루카씨 자신도 모르게 웃었는지 입을 손으로 가렸다. 동그랗게 뜬 눈이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우리 두 사람과 시선이 교차했다. 잠시간의 침묵 속에서 신타로씨는 그 해맑은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겠죠. 히키니트가 정체성이라니 웃길 만하죠..."
"아, 미안해. 그런 게 아니라."
하루카씨는 허둥거리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두 손을 겹친 채로. 손과 손을 맞잡고 있는 것처럼.
"그냥 미래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에어컨이 가을 공기처럼 서늘한 바람을 내보낸다. 덕분에 나와 신타로씨의 숨은 가볍게 날아갔다. 그랬다. 우리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는 여름을 반복했다. 여름 너머의 미래를 바라왔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서도 하루카씨가 말하는 미래라는 말의 무게는 남달랐다.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반복되는 여름을 계속 지켜본 사람, 동시에 일찍이 자신의 수명에 제한선이 그어져 있던 사람. 아마 나보다도 더 간절하게 무수한 미래를 그리고, 또 지워왔을 거다. 그런 사람에게 지우지 않아도 되는 미래 이야기란 어떤 느낌일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내 눈으로 본다고 해도 아마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학업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미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헤헤, 응. 그렇네."
그가 가지고 있을 새하얀 스케치북에 슬쩍 나의 색을 더하는 것. 한 사람씩, 한 가지 색씩 더해가면 그 어떤 그림보다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예를 들어 두 분의 연애 사업이라든가..."
"아아아아아!!! 곧 모모 올 시간 아니야? 얼른 해치우자고!"
"아, 어, 응!"
아, 분홍색은 아직 이른가? 입을 가리고 작게 웃다가 샤프를 들었다.
가끔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셋이나 있었다. 거기다 다들 머리도 좋은. 결론적으로는 내가 3일에 나눠서 하려고 했던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이걸로 실제 공부뿐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 아지트에 막 도착했을 때는 더위 때문인지, 수업 때문인지 반쯤 죽어있었는데, 키도의 점심밥 덕분일까. 완전 쌩쌩해진 모모가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의욕만 따지자면 100점이다. 이게 실제 시험 점수까지 이어지면 좋겠지만, 과한 욕심은 자제해야겠지. 지금 필요한 건 냉철한 분석이다. 나는 선생님처럼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신타로씨와 하루카씨는 그렇게 돕고도 부끄러운지 1층에 있었다.
"자, 그러면 모모."
"응! 이치카쨩, 뭐부터 할까?"
"처음이기도 하고 이따 알바도 가야 하니까 간단히 전략과 전체적인 개요 설명만 하도록 할게. 본격적인 공부는 저녁부터."
"전략?"
"응. 지금 우리 목표는 단순히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당장 있을 재시험에서 통과하는 거니까."
보드마카의 뚜껑을 열고 화이트보드에 시험을 봐야 할 과목들을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역사. 총 6개. 각 과목에서 모두 60점 이상을 달성해야 재시험 통과다. 더 정확히 따지자면 6과목 중 2/3 이상인 4과목 이상을 통과해야 아슬아슬하게 유급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통과 못 한 과목은 추가 과제를 내면 인정. 여기까지 기준을 낮춰서 잡아둔 걸 보면 학교도 이래저래 모모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 모모는 우리 학교의 간판이다. 소속사로서는 아이돌이라서 스케줄로 수업일수가 모자랐다 등으로 유급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은 충분히 댈 수 있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선 유명한 학생의 유급을 최대한 막고, 무사히 졸업시키는 게 더 명예로울 거다. 모모의 부탁으로 연예 활동을 쉬고 있는 이 시기에 보충 수업까지 진행했는데 유급까지 하면 학교 이미지 타격도 상당할 거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어른들의 뒷사정을 혼자서만 곱씹으며 각 기준치까지 적고 모모를 돌아보았다.
"담임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번 재시험은 저번 보충시험과 거의 똑같이 낸다고 해. 숫자나 단어가 조금 바뀔 수는 있지만, 문제 유형 자체는 똑같대."
"아, 정말?"
"응, 모모가 솔직하게 지난 시험지를 공유해줘서 미리 전략을 짜고 대비할 수 있었어."
동시에 알게 된 모모의 점수는 전략을 짜도 될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지만. 슬쩍 모모 앞에 놓아둔 시험지들을 봤다. 히비야가 능력으로 발견했던 1점짜리 수학 시험지, 타테야마 선생님이 담당이었던 2점짜리 과학 시험지를 포함해 대부분의 과목이 한 자릿수에서 맴돌고 있었다. 앞자리 숫자를 바꾸는 게 문제가 아니다. 앞자리 숫자부터 만들어줘야 하는 수준이다. 또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얼른 뒤돌아 현재의 점수를 냉정히 적었다. 숫자가 하나씩 적을 때마다 모모가 윽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 냉혹한 현실을.
"모모도 잘 알고 있겠지만 어떤 문제가 나올지 미리 알기는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기한은 짧고, 올려야 하는 점수는 높아."
"으응... 그렇지..."
"그래서 오히려 단순무식하게 가려고 해."
"응?"
모모의 앞에 아까까지 신타로씨, 하루카씨와 적었던 노트들을 펼쳤다. 각 문제의 정답만 적어놓은 암기용, 해설과 혹시 모를 응용문제 대비까지 되어있는 학습용. 각 과목당 2개씩 총 12개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오늘 다 끝내지도 못했다.
"일단 보충 수업에서 기본적인 수업은 들으니까 돌아와서 여기서 복습을 조금 하고, 그 외 시간은 계속 반복해서 정답이 될 것들을 외울 거야. 응용문제는 되도록 보지 않고 나올 것들만. 어려운 건 과감하게 버리고 맞출 수 있는 것들만 확실히 챙겨갈 거야. 노트 필기할 시간도 아쉬워서 신타로씨, 하루카씨 도움을 받아서 다 적어놨어."
"오빠가 도와줬어?!"
"응, 나중에 고맙다고 하자."
"아, 응. 오빠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그 모습은 아까 모모 공부를 돕고 싶다던 신타로씨가 겹쳐 보였다. 하여간 누가 둘이 남매 아니랄까 봐... 이 생각 너무 많이 했으니 이하 생략하자.
"그럼 시작하자, 모모."
"응!"
오빠가 도와줘서 그런지 의욕 넘치는 모모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사, 살려주세요..."
"키사라기?"
1층으로 내려온 모모가 풀썩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무게에 눌려 소파가 꺼진 것보다 모모의 어깨가 더 아래로 내려간 느낌이었다. 키도는 모모의 어깨를 토닥이며 탄산 단팥죽을 건넸다. 탄산음료라고 하기엔 미지근하고, 단팥죽이라고 하기엔 차가운 그것을 모모는 생명수라도 본 것처럼 쭉 들이켰다. 따끔따끔하게 올라오는 단팥의 단맛에 모모의 얼굴에 다소 생기가 돌았다. 눈 아래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로 공부 3일 차. 오전엔 보충, 오후엔 몇 시간씩 이치카와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리 의욕 넘치던 모모라도 지칠 만했다. 거기다 원래 공부를 하던 편도 아니라고 하니. 학교나 공부와는 거리를 둔 지 꽤 된 키도로서는 얼마나 힘든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토닥였다. 열심히 하는 단원을 응원하는 것도, 지친 단원을 북돋우는 것도 단장의 일이니까. 그런 키도 뒤로 이치카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모모와 달리 겉으로는 힘든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모, 쉬는 시간 끝났어."
"벌써?!"
"응, 10분."
겨우 밝아진 얼굴이 흐물흐물하게 변해갔다. 다시금 소파에 얼굴을 푹 묻은 모모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이치카쨩, 나 더는 무리인 것 같아. 우리 그만하면 안 될까...?"
"음, 알겠어. 그럼 아까 하다만 그것까지만 하고 그만하자."
"아까 하던 거까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되잖아, 응?"
이치카가 손을 꼭 잡고 잡아당기자 모모는 잔뜩 울상을 지으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도망갈까, 이치카는 모모의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야무지게 먹다 남은 탄산 단팥죽도 챙긴 채.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키도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라도 먹을 걸 만들어서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머리를 쓸 땐 칼로리 소모가 크다고 하니까. 장 볼 때가 된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어서 뭘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 쉬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저 녀석 완전 귀신이야..."
"신타로랑 코코노세? 공부 도와주던 게 아니었나."
"우리가 할 부분은 끝나서. 앗, 만두 하게?"
딱 한 봉지 남은 만두를 그 짧은 틈으로 봤는지 하루카가 웃으며 달려왔다. 하루카에게 한 봉지는 그냥 간단한 간식 수준이다. 아니, 그냥 맛 보기 수준일지도 모른다. 걸리면 바로 사라지니까. 키도는 품에 차가운 냉동 만두를 꼭 품고서는 모모와 이치카의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하루카는 만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맛을 다졌다.
신타로는 그런 둘의 공방 아닌 공방을 볼 기력도 없는지 아까 모모가 누웠던 소파에 똑같이 드러누웠다. 저지 복장과 평소 행실이 더해져 완벽한 백수의 모습을 자아냈다. 잠시 뒹굴거리던 신타로는 파이프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구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3층으로 올라가면 딱 저 위치에 모모와 이치카가 공부하고 있을 터였다.
"저렇게 조금만 더 하자고 달래서 한 게 벌써 2시간이야. 저 '조금만 더' 하고 나면 이젠 마지막으로 테스트만 하고 끝내자고 할걸?"
"이치카 정말 대단해! 노트 필기에 단어 카드, 거기다 노래로도 외울 수 있도록 하더라. 지칠 만도 한데 정말 끈기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저렇게까지 하는데 가망은 있어 보여?"
휴대용 게임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타카네가 물었다. 작은 화면 속에선 붉은 피가 튀며 착실하게 점수를 쌓아가고 있었다. 살벌한 총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신타로와 하루카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쌍의 검은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싶더니 둘은 동시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솔직히 점수 자체는 많이 오르겠지만..."
"목표 점수랑 현재 점수 차이가..."
말끝이 흐려지면서 침묵이 깔리자 게임 오버 효과음이 울렸다. 타카네는 혀를 한 번 차고 소파에 게임기를 던졌다. 게임기는 한 번 튀어 올랐다가 그대로 뒤집어졌다. 누가 깔고 앉지 않도록 그걸 챙긴 아야노는 게임기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모모 유급도 유급이지만 만약 잘 안 되더라도 이치카쨩이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검다! 아직 시간이 남기도 했고, 둘 다 열심히 하고 있잖슴까."
"맞아. 매일 열심히 공부하는걸."
"글쎄. 그 아줌마 머리가 어지간히 나빠야지."
"그 이상 모모씨를 욕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히비야."
"미, 미안. 히요리..."
다시금 시끌벅적하게 변해가는 아지트 안에서 카노 혼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이치카쨩~"
"왔어?"
문이 열리고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상쾌한 미소가 들어왔다. 오늘도 날이 꽤 더웠을 텐데 땀 몇 방울 외에는 그다지 더워 보이지 않았다. 방안이 시원해서 그런가.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퐁퐁 올라오는 의문들은 한쪽에 두고 오늘도 교과서와 노트를 펼쳤다. 설명할 때 쓸 화이트보드도 지지대로 세워둔 상태였다. 수첩에 나와 있는 체크 리스트를 바라보다 책상 아래에 밀어 넣고 보드마카를 들었다.
"어디 보자. 오늘은 국어랑 역사를 보자. 일단 내가 요약해서 쭉 설명한 후에 노트에 써보면서 암기, 그다음에 테스트 한 번. 어때?"
"응, 알겠어!"
"그럼 국어부터 시작할게."
이미 첫날에 했던 설명을 입에 담으면서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시에서 쓰이는 여러 표현법과 예시로 넣은 시 한 편이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채워졌다. 꽃이라는 상징에 사람의 삶, 인생을 빗대어 쓴 시. 여름에 읽기엔 봄 느낌이 물씬 풍기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라 오늘은 이걸로 하고 싶었다. 너도 이 시가 맘에 들었을까. 너를 보니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시를 몇 번이나 읽고 있다. 그 속에 열기가 살짝 어린 것처럼 보였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조금 더 깊은 설명을 시작했다. 암기할 때 쓰려고 미리 준비해놓은 새하얀 종이에 중간중간 필기도 하면서 열심이다. 이렇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그래서 선생을 하는 걸까. 문득 며칠 전 다른 길도 생각해보라는 하루카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쪽도 고민은 해보자.
설명이 끝나면 이젠 상대방의 차례다. 흰 종이에 내가 화이트보드에 썼던 것을 그대로 따라 적는 모습을 구경했다. 많이 적을수록 더 잘 외워지겠지만 여기에 너무 시간을 잡아먹히면 안 되니까 3번만. 그래도 시험 분량이 제법 있어서인지 하얀 종이가 슈우야가 입고 다니는 후드처럼 검게 변해간다. 그러고보니 글씨체가 제법 날카롭구나.
완전히 검어진 종이는 잠시 치우고 대신 미리 준비한 시험지를 내밀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학교에서 만든 것보단 조잡한 티가 났다. 그래도 문제 수준 만큼은 실제 시험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자부한다. 그야 실제 시험 문제를 보고 만든 거니까 당연한 거지만. 타이머를 준비하고 시작을 외치자 너는 바로 시험지에 들러붙었다. 설명으로 들었던 시와 시험지에 있는 시가 달라서 당황했는지 샤프가 잠시 허공에서 헤맸다. 그래도 나름대로 풀리긴 풀리는지 답을 적어간다.
"여기! 다 했어!"
"고생했어. 그럼 채점해볼게."
정 모르겠는지 빈칸이 몇 개 있었지만 그래도 답을 많이 적어 생각 보다 놀랐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늘어날수록 내 눈동자는 더 커졌다. 63점.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러 상황을 감안하고 보면 이 정도는 기대 이상이다. 실제 시험이었어도 통과점이고. 미소를 감추지 않고 채점을 끝난 시험지를 건네자 너는 밝게 웃으며 그걸 받았다. 점수를 확인하자 예상과는 다른지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 보고 나는 냉큼 말을 건넸다.
"점수가 생각보다 높게 나왔어. 이 정도면 낙제는 피하겠는걸."
"정말? 다행이다!"
"실제 수업 듣는 모모보다 결과가 더 좋다니 이 사실은 또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야겠다."
"어?"
이젠 입꼬리뿐만 아니라 눈동자도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더욱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들켰다는 걸 아주 얼굴에 써놓은 슈우야가 시험지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치? 슈우야."
확신을 담아 말하며 두 손으로 슈우야의 뺨을 감쌌다. 모모의 공부와 마찬가지로 계속 진행되었던 능력 제어 교실에서 슈우야의 능력 해지 조건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내가 먼저 능력을 써서 슈우야의 진짜 모습을 확인하고, 그 상태에서 최소 얼굴을 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속이고 있던 모습이 허물처럼 벗겨지고 나서야 슈우야는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항복이라는 의미로 두 손도 번쩍 든 채로.
"정말 이치카쨩은 속일 수 없다니까. 어떻게 알았어?"
"모모는 생각보다 더위에 약해. 거기다 며칠째 이 방에서 계속 공부만 하니까 이제는 그렇게까지 밝게 들어오진 않아. 그리고 오늘 쓴 시는 우리가 공부해야 할 시가 아니야.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원래 외워야 할 시는 둘째 날에 질릴 정도로 써서 모모라면 알아차렸을 거야. 아, 둘이 글씨체도 다른 것도 있었고."
"간파당하다 못해 오히려 속았다는 거네. 완전히 당해버렸어."
"내가 추천한 시는 어땠어?"
"맘에 들었어, 무척. 시험 볼 때는 당황했지만."
"모르는 시로 본 건데도 잘 봤던걸."
"63점이?"
"그거면 지금 모모보다 10점 정도는 높아. 참고로 그게 현재 전과목 최고점."
"...그거 괜찮은 거야?"
"그러게나 말이야."
태연히 대답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에어컨 덕분인지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슈우야는 그저 입만 떡 벌린 채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만 보면 내가 아니라 슈우야가 모모 가르치는 줄 알겠다. 작게 키득키득 웃으며 책상을 정리했다.
"모모는 지금 뭐 하고 있어?"
"아, 키도랑 장 보는 중. 아마 좀 있으면 돌아올 거야. 식료품도 식료품인데 학용품도 사고 싶다 그랬거든. 이치카쨩한테는 내가 전해준다 했었고."
"그래서 따로 연락이 안 왔구나. 그럼 이렇게 속인 이유는 뭐야? 모모가 힘들어하는 게 안타까워서 숨 쉴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아니면 갑자기 공부에 관심이라도 생겼어?"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가벼운 거짓말~"
"그것도 아니면 내가 걱정되었어?"
슈우야가 들고 있는 시험지가 와작 구겨진 걸 보고 작게 웃었다. 최근에 깨달은 건데 슈우야는 능력은 잘 사용하지만, 그걸 제하고 나면 거짓말이 은근 티가 난다.
"맞구나."
"...이치카쨩은 정말 못 이기겠어."
"슈우야, 아무리 그래도 모모 대신 네가 시험 본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이치카쨩, 나는..."
"알아. 나쁜 의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슈우야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장난도 많이 치고 뭐든 거짓말이라며 얼버무리지만, 그 뒤에는 깊은 생각이 깔려있다. 백화점 사건 때도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가장 위험한 인질역을 했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눈이 맑아지는 뱀에게 협력하기도 했다.
"네가 대신 시험을 본다면 결과적으로 유급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건 정당하지 않아. 거기다 이렇게까지 모모가 노력했는데 네가 대신 통과하는 건 기만이잖아. 전혀 기쁘지 않아."
모두를 구하려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향했고 본인 자신을 깎아 먹기만 했지만. 내 말에 슈우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혼자서만 생각하다 보면 잘못된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래도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여름을 끝낸 때처럼. 잠시 고민하다가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슈우야 손 위에 내 손을 살포시 덮었다. 내 손이 더 작아서 그냥 올리기만 한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갈색 고양이 눈이 놀라서 동그랗게 떠지더니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담았다.
"나도 최악의 상황은 염두에 두고 있어. 그야 뭐, 실망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치카쨩이 그랬잖아. 키사라기쨩이랑 같이 졸업하고 싶다고. 이번에 키사라기쨩이 유급하면 이치카쨩 혼자 남을텐데."
"모모랑 학교를 아예 못 다니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너랑 다른 사람들도 있고."
"어?"
"결과가 안 좋게 나와서 나 우울해하면 위로해 줄 거지? 졸업할 땐 축하도 해주고."
"그거야... 당연하지!"
"그거면 됐어."
망설임 하나 없는 대답에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모모와 졸업하고 싶다는 마음도, 메카쿠시단원들과 학교에 다녀보고 싶다는 마음도 진심이다.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곁에만 있다면 충분할 것 같다. 하루카씨가 했던 말처럼.
"다녀왔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모모 목소리에 어디 데인 것처럼 슈우야의 손을 화들짝 놓았다. 처음에만 해도 그냥 올려두기만 한 정도였는데 나도 모르게 그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머쓱해진 손으로 괜히 흐트러진 노트들을 정리했다. 어째선지 손바닥 안쪽이 간질거렸다.
"키사라기쨩, 왔네."
"아, 응. 난 공부 준비해야겠다."
"그럼 나 먼저 내려가 볼게."
조금 다급한 발걸음으로 슈우야가 방문으로 걸어갔다. 검은 후드 자락이 발걸음에 따라 팔랑거렸다. 그 뒷모습이 뭔가 덧없어서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기, 슈우야."
"응?"
눈과 눈이 마주쳤다. 카노는 갈색 눈인 채로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묻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나는 능력을 쓰고 있지 않지만, 그냥 직감적으로 슈우야가 또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뜨거워질 듯이 눈이 따끔거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푸른 눈으로 그를 보며 입안에 구르는 여러 단어를 천천히 늘어뜨렸다.
"나라고 항상 네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내 눈은 만능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계속 널 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네가 거짓말 속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그러니까 너도 나에게든, 다른 사람에게든 네 진심을 말하도록 노력해줘.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 내가 꼭 알아볼게."
"이치..."
"카노, 어디 있지? 와서 좀 도와."
"키도가 부르네, 어서 가봐."
"...고마워, 이치카쨩."
슈우야는 웃었다.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지만 평소 웃음과는 많이 달랐다. 호선을 그리던 눈썹은 축 처졌고 입꼬리는 어색한지 한 쪽만 살짝 올라가 있었다. 부끄러운지 양뺨은 불그스름했다. 평소보다 힘이 빠지고 부드러운 느낌. 스스로 드러낸 그 미소에 나도 마주 웃어줬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 당장 내 표정도 알 수가 없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작게 웃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닫힌 소리가 났다. 아무도 없어진 사이를 틈타 잠시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떠오른 김에 그냥 말해버리긴 했지만 부끄러운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괜히 말했나. 왜 그랬을까. 후드를 꾹 뒤집어쓰고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졌다. 눈을 꾹 감고 있으니 웃고 있는 슈우야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 장난스러운 웃음과 아까의 그 미소 두 가지가. 내가 한 말은 역시 곱씹어봐도 낯간지럽지만 후회는 없다. 안 그래도 항상 말해주고 싶었다. 늘 그렇게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고, 예전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 마음이 잘 전해졌을까. 내 눈으로 확인한다면 알 수 있겠지만 차마 지금 이 상태로 슈우야를 다시 볼 자신은 없었다.
이게 뭐야. 무슨 고백하냐고. 떠오른 생각은 내 뺨을 가볍게 때려서 날려버리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슈우야가 열심히 썼던 필기는 급하게 내 가방에 구겨 넣으면서.
"포유류로 분류되는 동물의 예시를 하나 서술하자면?"
"사슴!"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섬 이름은?"
"홋카이도, 혼슈... 구, 규슈... 어, 그리고... 오키나와?"
"오키나와가 아니고 시고쿠."
"아, 맞다. 히비야군 똑똑하구나!"
"똑같은 문제를 몇 번이나 내는데 계속 틀리는 모모가 문제인 거야."
"둘 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밥부터 먹고 하도록 해."
"미안, 내일이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그만."
"으으, 너무 떨려요!"
들고 있던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젓가락을 들었다. 오늘 저녁은 무려 가츠동. 이긴다는 뜻의 카츠(勝つ)랑 발음이 비슷해서 시험 앞두고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실제 먹는 건 처음이다.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해도 튀기는 거고, 인원수가 인원수인지라 손이 많이 갔을 텐데. 키도도 침착한 척하면서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역시 단장이란 걸까. 아니, 키도 작전이나 승부, 시험 이런 거에 묘하게 열을 올리는 타입이니까 그런 걸 수도. 기합이라고 하면 내 옆에 있는 모모도 지지 않는다. 입안 가득 밥을 밀어넣고 우적우적 씹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투를 펼치는 것처럼 보인다.
"모모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응! 그렇지만 내일 시험 꼭 통과해야 하니까 밤새워서 공부하려면 든든하게 먹어둬야지 싶어서."
"아, 밤은 안 샐 거야."
"어? 마지막 날이니까 늦게까지 공부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야. 괜히 밤새웠다가 시험 때 졸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컨디션 조절도 중요한 요소야."
시험 보다가 선생님 앞에서 잠들고 싶은 건 아니지? 내 말에 모모의 안색의 창백해지더니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모는 한 번 자면 잘 깨지도 않는 데다가 잠버릇이 나쁘다. 신타로씨 덕분에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뭐, 나랑 키도, 에네가 모모가 자는 모습을 봤다는 걸 안 날에는 메카쿠시단에서 나가겠다고 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렇다 쳐도 학교에서, 선생님 앞에서, 거기다 시험 시간에 그러면 모모의 이미지가... 차라리 일찍 자자며 모모가 천천히 먹기 시작하자 히요리가 가볍게 자기 밥그릇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기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면 이후에는 학교 갈 일이 없나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무래도 그렇지?"
"그럼 저 내일 모모 씨네 학교에 가보고 싶은데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학교를?"
요 며칠 나와 모모가 아지트와 학교만 전전하며 공부에 매진할 때, 히요리와 히비야는 뒤늦은 도시 관광을 만끽하고 있었다. 히비야가 소원하던 핸드폰 개통도 하고, 잘은 몰라도 여러 가게나 각종 관광지를 돌아다닌 모양이다. 방학이 한참 남은 것도 아니고 다닐 곳도 남았을 텐데 생뚱맞게 학교라니. 며칠 사이에 질린 걸까. 하긴 히비야는 둘째 쳐도 히요리는 도시에 온 게 처음은 아니라 했지. 거기다 히요리는 모모의 팬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학교가 거기서 거기일 텐데 좋아하는 연예인이 다닌다고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누군가의 팬이 아니어서 공감은 잘 안 된다. 슬쩍 모모를 바라보니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히요리쨩 우리 학교 궁금해?"
"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요."
"그럼 나도 같이 갈래!"
"하? 너는 왜."
"그, 그야..."
순간 히비야에게 있지도 않은 귀와 꼬리가 축 처지는 게 보였다. 모모한테는 그렇게 틱틱 잘 말하면서 히요리한테는 지나칠 정도로 약하다. 이게 바로 그거인가. 좋아하는 쪽이 진다는 거? 그런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단 한 번도 망설임이나 주춤거리는 일 하나 없던 히요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화가 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인상을 쓴 히요리는 고개를 매몰차게 돌려버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따라오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바보!"
"그럼 같이 가도 된다는 거지?!"
대사와 고개를 돌리는 각도까지 말로만 듣던 츤데레의 정석이란 저런 게 아닐까. 말투 자체는 날카로운데 내포된 의미가 의미다 보니 히비야의 표정이 바로 밝게 개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 앞에선 참 솔직하구나. 그리고 모모도.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옆집 아이 연애 소식에 흐뭇해하는 아주머니 같다. 모모 진정해. 이래선 히비야가 아줌마라고 했을 때 할 말이 없어.
"좋아! 둘에게 우리 학교 여기저기 안내해줄게!"
"모모는 시험에 집중해. 안내는 내가 할 테니까."
"맞아요, 모모씨. 시험을 잘 보는 것만 생각해주세요."
나와 히요리의 협공에 모모의 어깨가 수그러들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모모의 시험 통과다. 히요리와 히비야와의 학교 투어가 기대된다고 해도 주객전도가 되어선 안 된다. 모모와의 학교 투어를 기대했을 히요리에게는 조금 미안했었지만 이렇게 먼저 나서주니 사양할 것도 없다. 히요리와 눈빛을 교환하고 서로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무언의 연맹이 형성되었다. 스타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 이게 진정한 팬일지도.
"대신 시험 끝나면 놀러 가자. 잘 보면 기분 좋게, 못 보면 기분 전환할 겸 말이야. 어때?"
"좋아요! 학교도 궁금하지만, 저 모모씨랑 가고 싶은 곳이 많아요!"
이렇게 된 김에 이 점을 이용해서 목표를 좀 더 명확하게 하는 건 괜찮겠지. 모모는 아까 히비야처럼 밝은 표정으로 꼭 시험을 잘 보고 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응, 좋은 자세다. 그 기세가 암기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면 좋을 텐데.
"학교, 나도 가보고 싶어!"
"마리?"
"안 될까?"
솜사탕 같은 목소리는 딱 한 사람밖에 없지만, 내용이 너무 의외여서 되묻고 말았다. 마리 손에 비해 큰 가츠동 그릇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은 유원지 지도를 들고 어디 갈까 고민하던 그때와 비슷하다. 잠깐의 외출도 힘들어 하는 마리가 먼저 낯선 곳에 가자고 할 줄이야. 심지어 재미있는 곳도 아닌데.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못 갈까 봐 조마조마해 하는 마리의 모습에 이유는 괜히 묻지 말까 고민하는 틈을 슈우야가 치고 나왔다.
"마리 학교에 가려면 교복 입어야 하는데 교복 있어?"
"교복?"
"키사라기가 매일 입는 옷 말하는 거다. 셔츠에 넥타이나 리본을 매고 단정한 바지나 치마를 입어야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어. 세라복인 곳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해진 복장이 있다는 거야."
"그런 절차가 있는 거야?"
"그런 프릴이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갔다간 낯선 사람이라고 쫓겨날걸?"
"쫓겨나다니..."
슈우야와 키도가 마리의 양옆에서 핑퐁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태연자약하게 순진한 마리를 놀리고 있는 솜씨는 하루 이틀 해본 게 아닌 것 같다. 하긴 둘이 같이 지낸 세월도 몇 년이고, 덕분에 호흡도 아주 척척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둘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해서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마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와 모모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슬슬 구해주자. 이러다간 울 것 같다.
"외부인이어도 나나 모모 같은 학생이랑 같이 들어가는 정도는 괜찮을 거야."
"맞아, 친구네 학교에 놀러 가는 거니까. 좋아하는 옷도 입어도 돼!"
"응! 그래도 단정한 옷이 좋겠지?"
"있지, 그럼 도시락도 싸갈까?"
"무슨 소풍도 아니고..."
"원래 학교에선 도시락 먹는 거잖아."
"와~ 도시락 맛있겠다!"
"하루카 너는 오랜만에 학교 가는데 기대되는 게 도시락뿐이야?"
"자, 잠시만! 왜 자꾸 늘어나는 건데?! 나랑 히요리만 가는 게 아니냐고!"
언제나와 똑같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하게 변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이하게 그 학교 학생인 모모와 내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있지, 이치카쨩. 이렇게 우르르 가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아마..."
키도 능력도 있고, 여차해도 나랑 모모가 얘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둘 다 이미지 나쁘지 않으니 잘하면 넘어가 주시겠지. 모모가 쉬는 이 시기에 괜히 이상한 소문만 생기지 않을지 그건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방학이라 사람도 적으니 큰일은 없을 거다. 금세 도시락에 교복에 몇 시 출발할 것인지까지 정해버리는 메카쿠시단을 보니 유원지 때가 생각나 작게 웃었다. 그땐 슬그머니 도망쳤지만 지금은 계획부터 함께다. 줄줄 이어지는 이야기에 나도 툭툭 의견을 던져가며 젓가락을 들었다. 음, 오늘 저녁도 즐겁고 맛있다.
"모모."
"이치카쨩."
우리는 서로 비장한 표정을 한 채 기도하는 것처럼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주변의 시선도 느껴지고, 더운 날씨에 땀도 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진지했다. 내가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중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볼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다. 모모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떨어질 때나 보았던 주마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신타로씨, 하루카씨와 손 아프게 공부 노트를 만들었던 일, 지친 모모를 억지로 끌고 앉혔던 일, 그런 우릴 응원하기 위해 키도와 아야노 선배가 만들어준 간식, 하도 반복해서 히비야와 히요리까지 정답을 외워버려서 모모가 좌절했던 일... 음, 이렇게 보니 마냥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네. 아무튼.
"모모, 시험 보기 직전까지 꼭 노트 보면서 복습해야 해. 알겠지?"
"응!"
"문제를 봤을 때 답을 모르겠다 싶으면 넘기고 아는 문제부터 풀고."
"알겠어!"
"그리고..."
"그만해. 그러다 모모 녀석 겨우 외운 것도 잊어버리겠다."
"오빠!"
이런 날에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는 남매싸움에 긴장이 풀려 푸흐흐 웃고 말았다. 나에게는 웬만한 개그 코너보다 이 둘의 다툼이 더 재밌다고 하면 분명 화내겠지. 신타로씨말대로 모모가 겨우 외운 것도 잊어버리면 곤란하기에 조심스레 모모의 이름을 불러 흐름을 끊었다. 모모는 언제 화를 냈다는 듯 구겼던 표정을 활짝 폈다. 어제 일찍 자서 모모 컨디션도 좋고, 며칠 동안 계속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래, 말 그대로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한 것이다. 사람이라서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다. 그래도 모모를 믿을 거지만. 나는 마치 우리 아이의 첫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님이 된 기분을 느끼며 모모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럼 모모 힘내.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모모는 손을 붕붕 흔들며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시험 보기 30분 전. 늦지도 않았고, 이 정도면 한 과목 요약본 1회독은 할 여유도 있을 것이다. 모모 파이팅. 들리지 않을 응원의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고 뒤를 돌았다. 그제야 응원 겸 학교 구경을 위해 따라온 메카쿠시단이 보였다.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을 정도로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쭉 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말이에요. 학교에 온다고 진짜 단체로 교복을 입을 필요 있었나요?"
"에헤헤, 옷장을 정리하다 보니 나와서. 이런 것도 좋지 않아?"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긴 하네요."
"왜 우리들까지..."
"이런 거에 괜히 빼지 말라고!"
"다들 잘 어울려!"
"우와~ 신타로군한테서 옷장 냄새나~"
"어쩔 수 없잖아! 오랜만이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신경 쓰이는지 신타로씨는 교복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확실히 좀 꿉꿉한 냄새가 약간 나긴 하는데 그보다 탈취제 냄새가 더 셌다. 대체 얼마나 뿌린 걸까. 교복이 없는 히비야나 히요리, 마리는 예외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교복 느낌을 내고자 했는지 셔츠 등으로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입은 옷도 나이도, 학교 다녔던 시기도 뒤죽박죽이지만 이렇게 모여있으니 입학식 때 학생들 같다. 이 풍경이 언젠가 했던 상상과 상당히 비슷해서 기분이 묘했다. 특히 키도, 세토, 슈우야 이 세 사람의 모습은 더. 학교 다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중학교는 잠시라도 다녔던 모양인지 세 명 다 나에게는 친숙한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내가 입었고, 언젠가 신타로씨와 아야노 선배도 입었던 검은 색 교복을. 실례인 건 알지만, 숨길 생각도 없이 세 사람의 모습을 위아래로 보고 있으니 영 쑥스러운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상한가?"
"아하하, 저 스스로도 어색하긴 하네요."
"중학교 교복 오랜만인 데다가 너희가 입은 걸 보니 신선해서. 불과 몇 달 전까지는 나도 이거 입었는데."
"헤에~ 세라복 입은 이치카쨩이라."
그리운 기분에 괜히 키도가 입은 교복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리본은 작아서 메기 편한데 이때는 예쁘게 메기가 참 어려웠지. 나도 모르게 웃다가 교복에서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이곳 입학하려는 미래의 후배들 같네. 실제로는 내가 너희보다 어린데."
그런 루트도 있었을까? 내가 이 세 사람의 후배이기도 한 그런 세상이. 내 표정이 이상했던 것일까. 문득 슈우야가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그를 보니 싱긋 웃고는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이치카 선배! 어디부터 갈까요?"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자세만 보면 오히려 에스코트할 것 같은 사람은 슈우야인데. 그래, 괜히 지금은 있지도 않은 과거에 매달려 우울해하지 말자. 이처럼 청명한 오늘이 곁에 있으니까. 나는 총총 걸으면서 모두의 앞에 섰다.
"선배 놓치지 않게 다들 잘 따라오도록 하세요."
학교 투어 시작이다.
그래봤자 학교라 자칫하면 지루할 것 같다는 내 걱정과 같이 학교 투어는 모두의 웃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히비야와 마리는 고등학교라는 곳 자체가 처음이라 그런지 자판기 등 작은 요소 하나에도 큰 리액션을 보이며 신기해했다. 히요리는 상대적으로 무덤덤한 반응이긴 했지만 그 큰 눈동자가 어린 열기까진 감출 수는 없었다. 아야노 선배와 신타로씨, 하루키씨, 타카네씨는 아무래도 이 학교를 직접 다녔던 사람들이다 보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탈바꿈한 학교를 보며 놀라기도 하고, 추억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기도 했다. 키도, 세토, 슈우야는 그때 집에서의 아야노 선배를 추억하면서 들은 이야기를 본인들이 보는 풍경에 맞춰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이제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이 풍경이 각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눈에 띄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고 생각한 시계탑 아래에서 눈을 빛내며 웃음을 키우는 이들에게 가이드 아닌 가이드를 덧붙였다.
"몇 년간 평가가 많이 좋아져서 신축 건물들이 많아요. 대표적인 게 이 시계탑이죠. 평소에는 출입 금지이긴 하지만, 문화제 같은 행사에는 열어두기도 해요."
"문화제라~ 그립네! 그렇지, 타카네?"
"그때 이야기는 됐어..."
"나중에 문화제 하면 저희 반에도 놀러 오세요."
"응, 물론이지! 기대된다~"
문득 아야노 선배가 다닌다는 이 학교가 궁금해서 문화제 때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 부스와 사람들 틈을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야노 선배를 찾아다녔다. 그래도 온 김에 먹을 것도 먹고 가끔은 부스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문화제의 수준은 내 생각보다 좋았다. 어린 나는 역시 중학교보단 고등학교가 더 낫구나 같은 걸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어느 곳을 가도, 발이 부을 정도로 걸어도 아야노 선배는 찾지 못했다. 연락이 끊긴 지 두 달도 넘은 시점이었으니 반쯤 포기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실망하게 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과학실 안에서 차갑게 식은 야키소바나 찔러대다가 아야노 선배 대신 타테야마 선생님을 만났다. 혼자 있는 내가 걱정되신 거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면서도 그 당시 아야노 선배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쏙 빼신 건 선생님도 나름대로 날 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이 학교에 올 마음이 굳기는 했지만. 이젠 타테야마 선생님이 없고 아야노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한창 옛 생각에 빠져있을 때, 날 건져 올리듯 누군가가 옷깃을 쭉 잡아당겼다. 그 손짓에 순순히 끌려가니 히요리가 아야노 선배를 닮은 검은 눈동자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기 이치카씨."
"왜 그래, 히요리?"
"이치카씨는 타지에 있다가 중학교 때부터 이곳에 왔다고 했죠?"
"응, 이곳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으니까."
"이곳 중학교 입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응?"
갑작스레 날아온 진지한 질문에 그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자 한심한 것을 본 것처럼 히요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아이, 고고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눈이 높다.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할까. 나야 모모의 친구라는 포지션 덕분에 그래도 좀 나은 것 같지만, 제대로 답하지 않는다면 내 위치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어린아이에게 그런 취급 받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입시 정보를 알아보는 게 어려웠지 시험 자체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 그렇지만 내 개인 경험이고, 그때가 대략 3년 전이라 얼마나 참고가 될진 모르겠네. 한 번 알아봐 줄까?"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잠시만, 히요리! 중학교 여기서 다니게? 우리 지역이 아니라?"
한 마리의 날다람쥐처럼 나와 히요리 사이에 끼어들며 히비야가 외쳤다. 아직 손을 대지만 않았을 뿐, 눈빛만 보면 히요리의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애원하는 것 같다. 음, 방금은 좋지 않은 상상이었네. 넣어두자. 아무튼 히비야는 히요리가 이렇게 먼 도시 중학교로 가버리는 게 죽어도 싫은지 필사적이었다. 하긴 보통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진학하니까. 장래를 위해 명문 학교로 가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대학교도 아니고 중학교인데 기차를 타고 몇 시간 와야 할 정도의 지역까지 오는 경우는... 바로 내가 그런 경우이긴 하지만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히비야도 그럴 거고. 거기다 집이 상당히 엄하다고 했으니... 히비야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나도 간단히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을 히요리는 생각하지 않는지, 아니 정확하게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콧방귀를 끼고 말했다.
"넌 안 올 거야?"
"어?"
"내가 가면 너도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들으면 중학교 입시가 아니라 어디 놀러 가는 줄 알 만큼 가벼운 말이었다. 그 안의 메시지는 묵직했지만. 그래도 히비야한테는 그게 무슨 구원이라도 되는지 신의 계시를 받은 신도처럼 황홀한 표정을 짓다가 돌연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 정도는 어떻게 해봐!"
"어, 어떻게라니. 말은 쉽지..."
"여차하면 나도 도울 테니까. 벌써 징징거리지 마, 히비야."
"으응!"
응, 이건 글렀다. 서로서로 북돋우는, 훈훈해야 할 대화를 듣고 난 그런 것을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히비야의 표정은 이제 신의 계시를 받은 신도를 넘어서 신에게 불려간 수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히요리를 향한 히비야의 감정이 상당히 무겁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 이거 위험한 건 아닐까. 히비야니까 설마하니 범죄 수준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내 눈에 보이는 게 조금... 어쨌든 당사자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초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연장자로서 그저 조용히 지켜보자.
어디 먼 세계라도 떠난 것 같던 히비야가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는지 점차 얼굴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중얼거리던 히비야가 돌연 내 쪽으로 고개를 홱 꺾었다. 순간 유령의 집에서 봤던 인형이 떠올랐지만, 연장자의 여유를 담아 싱긋 웃었다. 질문이 올 줄 알았다.
"있지, 이치카는 어떻게 허락받은 거야? 그, 도시 학교로 진학하는 거."
"나는 말이지..."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시간을 끌었다. 이건 조금 곤란하다. 솔직히 말하기에는 내가 쓴 방법이 너무 극단적이라 참고가 될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언제나처럼 적당히 변명을 둘러대기에는 양심에 찔린다. 웬만하면 메카쿠시단에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슈우야와 둘이 울었던 날에 약속했던 것이다. 결국 내 저울은 양심 쪽으로 기울어졌다.
"혼자 입시 치르고 나서 합격했다고 통보했어."
"뭐?!"
"괜찮네요, 그거. 멋있다고 생각해요."
"진심이니?"
"아니, 그렇지만 그게 가능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려나. 이제 학교 한 바퀴도 돌았겠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그룹을 이루어 잘 놀고 있는 것 같아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내 뒤를 따라 쪼르르 히요리와 히비야가 내 옆에 앉았다. 이 와중에도 히요리 옆자리는 놓치지 않는구나, 히비야.
"뭐, 부모님이 워낙 바쁘셔서 웬만한 학교 일은 내 선에서 그냥 넘겼거든. 수학여행 동의서 같이 부모님 사인받아오는 그런 것도. 학교에선 나름대로 모범생이라 선생님들 신뢰도 받고 있었고, 여러 일 때문에 다들 나를 크게 건드리려 하지 않았으니 뒤에서 이런 일을 벌여도 가능했어."
"그렇지만 통보잖아? 이런 건 절대 있을 수 없다면서 쫓겨나거나 하진 않았어? 밤새 들개들의 위협을 받는다거나..."
"그게 뭐야."
히비야는 그랬다간 쫓겨나는구나... 집이 엄하다더니 내 상상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용케 이 도시까지 왔네.
"아까도 말했듯이 여러 일 때문에 나를 크게 건드리려 하지 않았거든. 아빠 돌아가시고 내 상태는 이상해졌지, 겨우 학교에 갔나 싶더니 자잘한 사건들은 터지지... 나도 심리적으로 제법 몰려있어서 말이야. 두 분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갈 거라고 못을 박았지.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고집부렸던 적도 없는 것 같아."
착한 아이로 살던 내게 그것은 첫 반항이었다. 그동안 눌려있던 만큼, 또 절박했던 만큼 그 처음이 비대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거기다 생각이 어리긴 해도 나름대로 실현 가능했다. 친구와 놀러 갈 일이 없어서 세뱃돈이나 용돈이 고스란히 쌓여서 돈이 꽤 나갔으니까 당장 몇 달 살 곳은 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상태는 보장할 수 없지만. 놀란 부모님으로서는 들어준다는 것 외의 선택지를 떠올리기도 힘들었을 거다. 어린 애 혼자 이상한 곳에 가버리게 두는 것보다 차라리 부모님이 믿을 수 있는 집을 마련해주는 게 더 나았겠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부모님이 나를 많이 봐주신 거란 생각이 든다. 언제 한 번 감사 인사 제대로 드려야지 안 되겠다.
"아무튼 내 경우는 정말 극단적인 케이스니까 그냥 듣고 넘겨줬으면 해. 나처럼 했다간 후폭풍이 더 클 거야."
"그건 그렇겠네. 정말 그랬다간 정말 호적에서 파일지도 몰라..."
"너흰 아직 시간이 있잖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서서히 설득해봐.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문간에 발 들여 놓기 기법이라고 해서 작은 부탁을 들어준 후에는 더 큰 부탁을 더 쉽게 들어주는 경향이 있대. 이번에 도시에 온 건 어떻게든 통과가 되었으니까 이것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키워나가면 어떨까?"
"오, 오오... 그렇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괜찮네. 참고할게."
"그래, 언제든 상담해줄 테니까 필요하면 연락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것을 참고 핸드폰만 가볍게 흔들었다. 히비야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놓칠세라 꼭 쥐었다. 내가 본가에 가 있는 사이, 히비야도 무사히 본인의 휴대폰을 갖게 되었고 메카쿠시단 전원 언제든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떨어져 있다고 해도 말이다. 히요리와 히비야가 돌아갈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중학생이 될 무렵엔 다시 이곳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대감이 부풀고 만다.
정말 곤란하다. 그 어떤 것도 크게 바라지 않고 체념한 채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던 나인데, 이번 여름을 계기로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마치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들고 있는 기분이다. 그 자체로 즐겁긴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몰라 두려운 그런 상태. 그리고 지금 가장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이 바로 내 눈앞에 걸어오고 있었다.
"어서 와, 모모."
딱딱하게 보이지 않도록 애를 쓰며 나는 반가이 모모를 맞았다. 거짓말이 서툰 모모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모모가 오자마자 능력 탓인지 상황 때문인지 모두의 시선이 바로 모모에게 꽂혔다. 결과가 어땠냐고 물어도 컴퓨터로 보는 시험도 아니고 마치자마자 바로 점수가 뜨는 게 아니니 모모는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다행히 이번 재시험을 보는 건 모모 한 명이라 바로 채점하고 바로 결과를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결과를 빨리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모모 한 명만 봐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재시험이었단 사실에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시험 볼 때 어땠냐고 물으니 모모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그래도 역대급으로 정답을 많이 쓴 것 같다는 나름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문제는 내가 그동안 모모와 많은 테스트를 거쳤기에 안심할 답변은 아니란 걸 알고 있다는 거였다.
어쨌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긴 시간 시험에 지쳤을 모모를 위로할 겸 우리는 키도 특제 도시락을 먹기로 했다. 교복에 도시락까지. 이런 데에는 정말 치밀한 메카쿠시단이다. 어디서 먹을까 여러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중 옥상은 나와 아야노 선배가 있었기에 바로 기각되었다. 당사자인 우리보다 슈우야나 신타로씨가 더 격렬히 반대한 게 조금 웃겼지만. 결국은 학교 본관 뒤에 있는 벤치에 모여 먹기로 했다. 학기 중에는 점심이나 수다 떨러 나온 학생들로 자리가 없는 곳인데, 방학이라 그런지 자리가 비어있었다. 우리 인원수가 인원수라서 금방 꽉 차긴 했지만. 한 사람이 한마디씩만 해도 12마디가 되어버리니 식사 시간은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하다. 특히 모모의 기분이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다들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다. 그래도 모모의 젓가락질은 평소보다 느렸지만. 우울한 모습을 보다 못한 나는 아예 직구를 날렸다.
"모모, 그렇게 많이 걱정돼?"
"응... 좀 많이. 나 정말 이렇게까지 공부한 거 처음이거든. 오빠가 공부 알려준 것도 오랜만이고."
"...미안하게 됐네, 그거."
"신타로."
아야노 선배가 신타로씨의 팔을 툭툭 치며 말릴 사이 모모가 계란말이를 들지 않고 데굴데굴 굴렸다. 모모의 머리카락보다 노란 그것은 젓가락에 따라 힘없이 좌우로 움직였다.
"그동안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항상 시험 점수는 낮았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 정말 잘 봤다는 느낌이거든! 그래서 낮게 나오면 뭐랄까 쿠궁! 같은 기분이 될 것 같아."
"기대보다 점수가 덜 나올까 봐 떨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어디서 들은 건데 긴장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증거래. 결과가 어쨌든 난 모모가 만족했으면 좋겠어. 정말 최선을 다했잖아. 같이 졸업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모모의 친구니까."
"응! 고마워, 이치카쨩!"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모모가 맑게 웃었다. 최악의 상황은 염두에 두고 있다고 슈우야에게 당당히 말했지만,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기대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이게 우리의 최선책이니까. 모모가 마지막 계란말이를 입에 쏙 넣자마자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시험지 채점이 끝났다는 담임 선생님의 문자였다. 그걸 신호 삼아서 우리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번 결말을 맞이하러 가자.
드르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에어컨과 함께 펼쳐진 교무실에는 각 과목 선생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이번 재시험 응시자는 모모가 유일했던 만큼 선생님들도 나름의 애착이 있는지 남은 모양이었다. 빠르게 선생님들의 표정을 훑어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과가 쉬이 예측되지 않는다. 능력은... 역시 쓰지 말자. 인기척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담임인 와타나베 선생님이었다. 고작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임에도 선생님은 이리 오라고 크게 손짓했다.
"키사라기, 어서 와. 시라키도 같이 왔구나."
"네, 실례만 아니라면 같이 있어도 될까요?"
"그야 물론이지."
"갑자기 키사라기 성적이 좋아졌다 싶더니 다 시라키가 도와준 덕분인가 보구만?"
"네! 이치카쨩이 공부 알려줬거든요."
"너에게 부탁했던 건 역시 정답이었나 봐."
"아뇨, 별말씀을요."
모모가 두 눈을 빛내는 데다가 선생님들께 따뜻한 시선을 받고 있으니 낯간지러웠다. 그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재촉하자 선생님들은 언제 그랬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각자 품 안에서 시험지를 꺼냈다. 새하얀 시험지 너머 언뜻 붉은 동그라미와 빗금이 비쳐 보였다. 실수로라도 내가 먼저 점수를 보게 될까 봐 스리슬쩍 시선을 내릴 때, 모모가 내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활활 불타오르는 듯 했다.
"오래 기다렸지? 학생들을 더 괴롭히는 취미도 없으니 전체 점수를 한꺼번에 공개하도록 할게."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야말로 아이돌 같은 모모의 대사와 함께 하얗기만 하던 시험지가 빙글 돌아가며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으니 옆에서 헛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이건 긍정? 부정? 느리게 눈을 뜨니 먼저 보이는 건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타나베 선생님이었다. 이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과는...
"해냈어, 이치카쨩!!!"
내가 시험 점수를 다 보기도 전에 모모가 날 와락 껴안았다. 아까까지 밖에서 밥을 먹은 탓에 둘 다 땀이 나서 팔이 끈적하다. 게다가 바로 앞에는 6명의 선생님, 문밖에는 메카쿠시단 전원이 있다. 큰 소란을 내면 무려 16명의 사람들이 지켜본다는 거다. 그렇지만 그런 보는 눈을 신경도 못 쓸 정도로 큰 기쁨이 물밀듯 몰려왔다. 누가 보면 어때. 이렇게나 모모가 기뻐하고 있는데. 나는 숨김없이, 가감 없이 지금 내 감정을 미소로 피워내며 모모를 꽉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모모!"
언젠가 보았던 하이틴 드라마에 나온 여고생들처럼 우리 둘은 서로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꺄꺄 소리를 질렀다. 보면서도 저럴 정도로 좋은가, 너무 과한 리액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정해야겠다.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구나. 그때, 찬물을 끼얹듯 헛기침 소리가 날아들었다. 황급히 현 상황을 깨닫고 모모에게서 떨어지니 낮은 점수가 명백하게 그려져 있는 시험지를 팔랑거리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영어 43점, 수학은 무려 27점이다. 6과목 중 2과목 낙제... 거기다 이제 보니 과학은 딱 60점이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유급을 피했다는 실감이 났다.
"저기 방해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모든 과목 통과는 아니니까 말이야."
"이건 우리가 내는 숙제니까 개학 때까지 잘 해와야 한다."
"아, 넵!"
프린트물과 노트를 받으면서 모모는 차렷 경례를 했다. 상대는 메카쿠시단도 아니고 그거 임무도 아니야, 모모. 선생님들 앞이라 뭐라 못했지만, 선생님들은 그런 모습도 그저 귀여운지 언젠가의 키도처럼 건실하다며 웃으셨다. 중간에 이제 진짜 한시름 덜었다는 혼잣말도 똑똑히 들었다. 하긴 우리도 우리지만, 선생님들도 방학 반납하고 수업과 시험을 진행하신 거지. 감사함을 담아 모모와 함께 꾸벅 허리를 숙이니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이게 우리 일이라며 너무 체면 차리지 말라고 덧붙였다.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럴까, 선생님들이 이렇게 자상하고 멋진 분으로만 보인다.
후련한 마음, 그리고 약간의 과제를 품고 나란히 교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요란스러운 축하가 바로 날아들 줄 알았는데 복도는 조용하기만 했다. 아니, 조용한 정도가 아니다.
"어라?"
"다들 어디 갔지?"
아무도 없다. 능력을 써서 봐도 복도는 그저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먼저 가겠다는 연락도 없었는데. 조금 더 눈에 힘을 줘 여러 교실 너머도 꿰뚫어 보다가 피식 웃음이 흘렀다. 구석진 과학실에 열 명 정도의 인원이 몰려 숨도 죽이고 투덕거리는 모습이 무성 개그 영화 같아서. 초 하나 꽂은 케이크까지 아주 완벽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일언반구없이 자기들끼리 이런 작전을 짜는 건 좀 너무한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제대로 모모를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모모, 이쪽."
"응? 아지트는?"
섭섭하지 않은 척, 비밀 작전을 알아도 모른 척 모모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 두 사람의 발걸음에 캐스터네츠 같은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소리가 커질 때마다 과학실 안에 있던 세토와 히비야의 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과연. 내가 눈치채서 데려오고, 저 둘을 통해 위치를 파악한다는 작전이었구나. 덕분에 따로 노크할 필요도 없어서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푸르게 돌아온 눈동자로 형형색색의 종이 가루가 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 종이가 장식하는 것처럼 깜짝 놀란 모모에게 달라붙고, 그 뒤를 바짝 케이크 든 히요리가 쫓았다. 고압적인 태도는 잠시 치운 듯 방긋 웃는 히요리와 몽실몽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는 잘 어울렸지만, 토핑으로 올라간 말린 망고와 오징어 다리는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그런 괴식을 보고 모모는 두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해서가 아니라 감동하여서. 으음, 저거 모모 말곤 아무도 안 먹겠네. 나는 입꼬리는 올리면서도 속으로 한탄을 흘렸다.
"모모씨, 이치카씨 정말 축하드려요!!!"
"우, 우와아! 다들 정말 고마워요!"
"축하한다니, 나도?"
"그야 이치카쨩도 이 작전의 주역인걸."
"이야~ 한때는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검다!"
"이 녀석 머리 생각하면 기적이야, 기적. 그래도 뭐, 고생했다."
"신타로씨랑 하루카씨도요."
"이치카야말로!"
"자, 이만 돌아가지. 본격적인 파티는 아지트에서 하도록 하자."
아마 모모 외에는 먹을 사람도 없을 케이크를 재빨리 상자에 집어넣고, 우리는 학교 왔던 것과 똑같이 아지트를 향한 행렬을 시작했다. 시험도 보고 도시락도 먹었으니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태양은 그런 건 모른다는 듯이 하늘에 떠서 더위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이 기온도 기꺼웠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흘려보내고 있을 때 불협화음으로 진동 소리가 깔렸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보니 액정에는 큰어머니라는 네 글자가 나타나 있었다. 신기하게 예전과 같이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그나저나 불과 며칠 전에 본가를 다녀왔는데 이렇게 일찍 연락하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슨 일이지. 큰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내가 요 며칠 자취방에 안 들어간 걸 알았다거나..."
아니, 그럴 리는 없지. 이런 터무니 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락도 안 받고 아지트에서 지낸 게 참 양심에 찔렸나 보다. 스리슬쩍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후 스마트폰을 귀에 갖다 댔다. 다행히 안 좋은 소식은 아닌지 큰어머니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하셨다.
"여보세요? 어머니? ...아, 지금 밖이라서요. 많이 시끄러운가요? ...네. 친구들이랑 있어요. ...네. 저번에 말씀드린. ...네?"
순간적으로 크게 튀어 나간 내 목소리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황급히 이따 다시 연락하겠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예의가 아닌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조차도 당황했으니. 작전 타임인 거다, 작전 타임. 이젠 까맣게 변한 액정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 음... 아무래도 메카쿠시단 다음 임무가 바로 생긴 것 같아."
슈우야처럼 가볍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겐 그런 재능은 없나 보다. 모두의 표정이 심각한 걸 보니. 잠시 말을 끊고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나에게 있어 이번 임무는 지난 모모 시험보다 더 떨리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내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좀 보고 싶으시대."
그야 이번에는 내가 아지트에서 정식으로 지낼 수 있으냐가 달려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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