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창작 단편

[1차]실 전화

오후 9시. 한참 바라보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잠시 기다리면 창문에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느리게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면 일언반구도 없이 날아드는 건 새하얀 종이컵 하나. 컵에 연결된 붉은 실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네가 들뜬 표정으로 똑같은 종이컵을 꼬옥 쥐고 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보네. 찌그러진 종이컵을 귀에 갖다대면 오늘도 종달새마냥 종알종알 떠드는 네 목소리가 내게 닿는다.


집에 가는 길에 고양이를 본 일, 밥만 얻어먹던 고양이가 드믈게 내게 애교를 부렸던 일,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돈까스였던 일 기분 좋게 떠들고 있으면 너는 가끔씩 고개를 끄덕인다. 종이컵을 당겨 실을 팽팽히 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까 네 시선은 내게 닿지 않더라도 이 순간이 좋았다.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낸 채 너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이. 옆에서 바라보는 네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검고 깊어서 무척이나 예쁘다. 심장 대신 종이컵을 움켜쥐자 컵이 와작 구겨진다. 이것도 이제 슬슬 교체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렇게 너와 실 전화로 대화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기가 정말 단순했던 건 알고 있다. TV였나, 책에서였나 실 전화로 조용조용 비밀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반해버린 나는 옆집에 사는 너를 졸라 같이 실 전화를 만들었었다. 어린 애면서 나보고 어린 애냐며 투덜거리면서도 길고 긴 붉은 실을 자르던 네 모습은 똑똑히 기억난다. 처음에는 길이를 어느 정도로 해야할 지 몰라 무작정 길게 한 탓에 서로의 방과 방 끝에서 대화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실을 자르고, 종이컵을 바꾸는 걸 반복하는 사이 이제는 창문에 꼭 붙어있지 않으면 너에게 닿지 않을 지경까지 왔다.

언제까지 할 거야?

이 전화기 못 쓰게 될 때까지!

철 없던 어린 아이가 정한 유효기간까지 이제 얼마 안 남은 셈이다. 이 시간이 끝나는 것이 싫어서 실 전화를 조심스럽게 다루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구겨버리니 참 큰일이다. 네가 보지 않는 틈에 쓰게 웃으며 나는 종이컵에 귀를 대었다.

"그래, 좋았겠네."

이 무뚝뚝한 녀석. 궁시렁거리자 네가 뭐라 꿍얼거리냐며 투덜거렸다. 흘끔 훔쳐보자 너는 한결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콕콕 찔려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내일 늦잠이나 자지 말고 오늘은 일찍 자."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지각하는 줄 알겠다."

"나 아니였으면 넌 매일 지각이야."

"네네,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종이컵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인다. 가슴도 덜달아 간질거린다. 잘 자. 나지막히 들리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붉은 실이 늘어진다. 나는 실을 살짝 붙잡은 채 컵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좋아해."

실을 타고 전해지지 않을 마음을 오늘도 허공으로 날린다.


종이컵에서 손을 떼면 실 전화가 벽을 둔탁하게 두드리다가 이내 스르륵 올라간다. 실 전화를 회수한 너는 나를 향해 잘 자라며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꼭꼭 닫아버린다. 닫힌 창문에 걸린 네 실루엣을 잠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군청색 밤하늘에 걸린 달은 오늘도 참 밝기도 하다.


"이제 슬슬 종이컵 바꿔야하지 않아?"

네 말에 표정 관리도 할 사이없이 얼굴이 싹 굳어버린다. 내 표정 봤을까? 봤겠지? 뒤늦게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컵에 대고 말을 한다.

"바꾸기는. 이제 더 못 쓸 것 같은데."

"더 안 해?"

"응. 이 정도면 오래 했지!"'

이젠 보내줄 때도 되었잖아. 덧붙인 말에 부디 섭섭한 감정이 섞여들어가지 않았기를 빈다. 내 말에 너는 잠시 침묵하더니 알겠다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게 마지막이네."

"...응, 그렇네."

안녕, 나의 추억. 안녕, 나의 마음. 속으로 쓸데없는 작별 인사를 하고 나면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실이 힘없이 늘어진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너는 아쉽지도 않은가보다. 알고 있었지만 탄산을 머금은 것처럼 따끔따끔 아프다. 오늘도 내 마음을 속삭일까 하다가 너무나도 부질없는 짓인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붉은 실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으며 네가 컵을 떨어뜨릴 순간만을 기다렸다.

"오늘은 안 말해?"

"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너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뭐야. 왜 저래? 당황해서 애꿎은 종이컵만 꼬옥 쥐고 있는데 너는 종이컵을 아예 와작 구겨버렸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니 네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바라본다. 오늘도 한결같이 깊은 네 눈동자는 밤하늘같다.

"좋아해."

"...어?"

"좋아한다고."

역시 실 전화보다는 이 쪽이 빨라. 네 말에 뒤늦게 상황판단이 되며 온 몸에 열이 뻗쳤다. 지금 거울을 본다면 분명 볼, 목, 귀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붉은 것이 분명했다.

"너, 너...! 다 듣고 있었...!!"

"그야 들리지. 굳이 실 전화 안 써도 공기 타고 다 들리는데."

"그, 근데 왜 말을 안 했어!!"

"네가 제대로 말해주는 거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끝까지 말도 안 해주고."

"바보!"

"바보는 너지. 엇, 야!"

종이컵을 홱 던져버리고 서둘러 창문 닫고 커튼을 닫았다.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네 실루엣이 보인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침대 안으로 파고 들어가 발로 이불을 마구 찼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아, 좀 울고 싶어졌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삼키는데 별안간 핸드폰이 잘게 울었다. 확인해봤더니 너다. 핸드폰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남은 약정을 생각하며 겨우 겨우 억누르고서는 메세지창을 띄웠다.

「야, 대답은 하고 자야지.」

이 무뚝뚝한 녀석! 내일도 학교 가니까 늦게 자면 안 되는데 이래가지고는 잠을 한숨도 못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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